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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2일 수요일

나의 외삼촌 유암(流岩) 김여제(金輿濟)


                                                           도산 묘에서 김여제(왼쪽)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기념 촬영 사진. 두번째 줄 왼쪽부터 김구, 양헌, 도인권, 김여제, 이유필, 김병조, 손정도, 신규식,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김철, 김립, 장건상, 윤현진, 신익희, 이규홍, 이춘숙, 정인과.


1919년 6월 17일 설립한 임시 사료 편찬 위원회 위원들. 앞줄 왼쪽: ◯·우승규·이광수·김두봉·김병조/ 뒷줄 왼쪽: 이원익·장붕·◯·안창호·김여제·김홍서·박현환

1919년 6월 17일 설립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위원들
1줄 왼쪽: 미상, 우승규, 이광수, 김두봉, 김병조
2줄 왼쪽: 이원익, 장붕, 미상, 안창오, 김여제, 김홍서, 박현환

어머니의 큰 오빠인 외삼촌 김여제 박사는 어릴 적에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기억에 남는 추억은 고등학교 1한년 때인가 정월 초에 세배를 하러 부모님과 함께 돈암동 자택에 방문하였다가 외삼촌이 사상계를 나에게 보여 주며 기사를 읽어보라고 하였다. 내용은 상해임시정부 당시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담은 시들을 발굴하여 정리한 것이었는데 그 중 작자 미상인 시들이 몇 편 있었다. 사상계의 그 다음 호에는 작자 미상인 시 중 한 편이 김여제 박사라고 특별 취재한 내용을 게재한 것이었다. 어머니 가문의 거구의 몸에 자상한 외삼촌이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으며 정리한 글을 올린다.

근대시 여명기 밝힌 김여제 詩 2편 발굴

• 박돈규기자 coeur@chosun.com
입력 : 2003.06.24 04:38 / 수정 : 2003.06.24 04:38

o 주요한의 ‘불놀이’(1919)와 함께 초기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유암(流暗) 김여제(金輿濟)의 시 ‘세계의 처음’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전문이 발굴됐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호테이 토시히로 교수, 심원섭 와세다 대학 강사 등은 최근 입수한 김여제의 시 두 편을 ‘문학사상’ 7월호에 공개됐다. 한국 근대시의 여명기를 장식한 이들 시들은 1916~1917년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였던 ‘학지광(學之光)’ 8호와 11호에 각각 수록됐던 것으로, 와세다대 언어교육팀이 지난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이 동인지를 찾아냄으로써 87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1910년대 말 이 시편들을 읽은 문인들은 “자유시의 대담한 실험적 작품”으로 평가했지만 반일(反日) 정서를 담았다는 이유로 ‘학지광’이 판금(販禁)되면서 역사 속에 묻혔었다.
‘만만파파식적’은 “그대의 적은 운율이/만인의 가슴을 흔들든 져날/가즉이 그대의 발알에 없딜여/황홀 동경의 눈물을 흘니든 져무리/아아 어듸어듸…정령이 이는 불/ 뛰노는 물결…”라고 노래한다.
‘세계의 처음’은 “포탄이 난다/창검이 번듯인다/뭇헤/바다에/드울집 새며느리/바람에/하늘빗에 놀내일때…”라고 노래한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흥사단에 가입한 김여제는 도산 안창호를 돕다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인 1931년에는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국 근대시의 효시' 김여제  87년만에 첫 공개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3-06-23 18:27:00
‘한국 근대시의 효시’ 중 하나로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유암 김여제(流暗 金輿濟.사진)의 시 ‘세계의 처음’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을 울음’ 전문이 87여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국문학자 심원섭(沈元燮·일본 와세다대 강사)씨는 최근 입수한 김여제의 시 두 편을 ‘문학사상’ 7월호에 공개했다. 김여제는 자유시의 선구자인 주요한으로부터 신시의 첫 작가로 평가받았으나 이 시 두 편만 남긴 뒤 붓을 꺾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김여제의 시는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學之光)’(1916년말∼1917년초 발행) 8호와 11호에 각각 수록됐다. 이 시가 실린 학지광 8, 11호는 일본 경찰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와세다대 언어교육팀이 지난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이를 찾아냈다.
시 ‘세계의 처음’은 도치적 통사 구조나 대담한 행 구성 등 ‘근대시로의 이행기’적 모습이 나타나며, ‘만만파파식적을 울음’은 정제된 언어로 항일정신이 내포된 비애의 정조를 표현하고 있다고 심씨는 설명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김여제의 시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최남선과 ‘불노리’를 쓴 주요한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김여제(金輿濟)
1893(고종 30)∼? 시인•교육자. 평안북도 정주 출신. 호는 유암(流暗).
1918년 3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 학업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줄곧 특대생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시작품은 양적으로 극히 한정되지만, 《학지광》 5호에 실린 〈산녀 山女〉를 비롯한 〈한끗〉•〈잘따〉 등 몇 편의 시작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에 뒤이어 현상윤(玄相允)•최소월(崔素月)•김안서(金岸曙) 등과 함께 주요한(朱耀翰)이 등장하기 이전, 1910년대 신체시단의 일원으로서 과도기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 시대로 보아 ‘산(山)’을 의인화한 시의 제목조차도 특이하지만, 그 전체의 표현기법도 고도하다.
당시의 시작들에 나타난 외형적 음수율이나 행련법의 제약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로부터 〈불노리〉에 이르는 한 과도기적 작품치고는 시적구조, 곧 이미지와 은유는 물론, 시어구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자유시형에 가깝게 접근시키고 있다.
전대의 개화기 시가나 최남선과 이광수의 시작에 나타난 민중적 집단의식과는 달리 개아(個我)의 서정성을 시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외삼촌의 딸인 사촌 누님 김향자의 글도 소개한다.

김여제 金與濟 / 김향자  抗親在知駐/日美中蘇 
2011/08/17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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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1921년 臨時議政院 사진 명단

제1열 왼쪽부터 ~.전재순田在淳,김구金九,오희원吳希元,~,~,유기준劉基峻,정태희鄭泰熙,
                                           김재덕金在德,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정재형鄭載亨
제2열 왼쪽부터 이규홍李奎洪,김철金澈,신익희申翼熙,신규식申奎植,이시영李始榮,이동휘
                                           李東輝,이승만李承晩,손정도孫貞道,이동녕李東寧,남형우南亨祐,안창호
                                           安昌浩
,오영선吳永善,윤현진尹顯振,서병호徐炳浩,조완구趙琬九
제3열 왼쪽부터 ~,임병직林炳稷,~,김복형金復炯,도인권都寅權,최근우崔謹愚,김인전金仁全,
                                         이원익李元益,정광호鄭光浩,김태연金泰淵,이복현李福賢,~,김홍서金弘敍,
                                         나용균羅容均,황진남黃鎭南,김정목金鼎穆,
제4열 왼쪽부터 ~.왕삼덕王三德,차균상車均祥,김여제金與濟,안병찬安秉瓚,장붕張鵬,
                                         김석황金錫璜,김규서金奎瑞,김용철金容喆,~,송병조宋秉祚,양헌梁憲,
                                         조동호趙東祜,이유필李裕弼.
"그리운 아버님의 모습"
http://bit.ly/pZYQ4k
                                                                                    김향자(49회)

백 여년전 조선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우리와 많이 다른 길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척신세력 싸움과 외세의 압력으로 분주했고 일본의 식민지국이 되다가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했다. 민주주의로 위장된 전제자의 부정부패에 민중은 더 이상 참지 못해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고 폭발되기도 했다. 독재가 필요하다는 독재자의 명분 앞에 지식인들은 깊은 절망에 빠진다.

1894년 탐관오리의 횡포에 농민이 봉기를 든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을 불러오고 황해도와 평안도는 폐허가 되었다. 갑오혁신으로 노비제도가 철폐되고 단발령이 내리고 개화의 바람이 분다. 1910년 8월 29일 경실국치의 한일합방으로 일본은 조선을 송두리째 먹으려했다.

1895년 음력 5월 29일 부친 김여제(金輿濟)는 연안(延安) 김씨로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 는 유암(流岩)이다. 가문에서 조선시대에 왕비가 나왔는데 왕손이 없었다. 부친은 딸자식을 가끔 중전마마라 불러 주었다.
할아버지는 보통이 아닌 대단한 한문학자이었다고 하고 서당 훈장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치를 때에 부친이 부의(賻儀)를 받지 않아 종친들의 비난이 있었다한다.

1907년 남강(南綱) 이승훈이 평양 모란봉에서 도산(島山)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을 받고 고향인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부친은 오산학교에 입학해서 춘원(春園) 이광수를 스승으로 만났다. 춘원은 오산의 건아들에게 피히테의 민족교육을 도입시키고 1910년 톨스토이가 서거했을 때는 학생들과 영면식을 가졌다.
그때에 부친은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1911년 그는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나와 경성산업에 진학했다가 남강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가서 1918년 6월에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19년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고 '유혈만이 있다' 하고 2.8 독립선언을 했다. 2.8독립선언서는 춘원이 기초해서 송계백이 모자 속에 숨겨 국내로 들어와 현상윤이 기독교측의 남강에게 알려 천도교와 불교도 합세하고 민족이 궐기하는 3.ㅣ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학생운동은 3.1독립운동의 전위적인 역할을 하게되었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33인의 민족 대표자 순서에 대해 남강은 "하. 하. 하.---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 하는 말을 남긴다.
1919년 3월 중순 부친은 춘원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한다. 머릿속에 만경창파를 읊으며...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상해로 모여든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4월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에서 안창호가 도착해서 국무총리대리직을 수락했다. 7월에 임시정부사료편찬부가 설립되어 총재 안창호, 주임(主任) 이광수, 간사(幹事)에 김홍서로 했다. 부친은 사료편찬위원으로 선임되고 김병조, 이원익, 조동호, 이한근, 박현환, 장붕, 차상균, 제씨와 2개월 만인 9월에 한.일관계사료집 전 4권을 편찬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9월에 섭외부 선전부장으로 피선되어 임정의 국내외 홍보, 외교, 선전사무와 독립군자금 조달 등으로 1921년 10월까지 활동하고 1920년 2월말부터는 국무총리 이동희와 이동녕의 비서로 재직했다.

상해판 '독립신문' 편집위원으로 부친은 이름 불명이거나 김흥(金興)이라는 이름을 썼으며 1920년 3월 동 신문에「3월 1일」과 「오오! 자유」란 시를 게재하여 독립과 자유를 절규했다. 같은 때 '상해영문대륙보' 기자인 다니엘 페이퍼가 쓴 책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을 번역 출간했다. 동년 5월 안창호의 주선으로 그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발기위원이 되어 인재들을 모으고 심신단련과 인격수양을 했다.
비밀히 하는 활동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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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차 흥사단총회 ( Robinson Store in Down Town) 1924
11th Assembly of the Young Korea Academy in front of Robinson's Department store
on Senventh Street in Downtown Los Angelels in 1924
휘장을 두른 사람들 중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째 안경 쓴 김여제

1993년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에게 임정에서의 독립활동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대한민국인물록 참조)
'한승인' 저서 '민족의 빛 도산안창호' 에는 당시의 임정의 실태를 목격한 국무원 김여제(金輿濟)의 회고담이 아래와 같이 실려져있다.
"이 독립자금(미주 교포들이 보낸 2만 5천불)으로 프랑스조계 마장로 보강리에 집을 세내서 임시 청정을 설치하였다. 이직 거두들이 다 모이지 아니한 관계로 각부차장들로 하여금 총장직무를 대행케 하고 각부직원을 임명하여 사무를 규율 있게 집행토록 하였다. 그 무렵 백범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이채를 띄었다.

임시정부에서 고용한 인도인 파수병의 미련한 듯한 웃음이 요인들을 맞이하는 것으로부터 하루의 일과는 시작된다. 아침 8시반에 등청하면 요인들이 모두 강당에 모여 조회를 하였다. 태극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몸과 손을 내어 흔들고 신이 나면 누가 더 부르라고 한지 않는데도 몇 번을 거듭 불렀다." 라고--- 애국가 가사 중에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 라고 도산이 고친 것도 이때의
일이라고 했다.

1922년 부친은 캘리퍼니아주 UCLA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1926년애는 시카고 Northwestern 대학에서 "A STUDY OF THE HIGHER EDUCATION OF WOMEN IN THE UNITED STATES" (by Frank Yerjeh Kim, Filled with the Dean; Date Feb l, 1926)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하고 가정에서 현모양처나 내조자의 역할뿐 아니라 시민과 국민으로써도 몫을 해야한다는 이념이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로 할 때에는 귀한 자식이라도 내놓아야한다고 했다. 칠거지악과 남존여비가 사회의 개념이던 한말(韓末) 대원군 시대에 여성인권옹호자가 되었다.

2002년 1월 나는 명문의 사립대학인 Northwestern University 를 방문해서 미시간 호수가 내다보이는 캠퍼스와 건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면서 그 시절 부친은 어떤 수로 학비를 감당할 수 있었을 가하는 생각에 잠겼다.

우강(友江) 송종익선생의 아들 위리(偉理)는 자신의 선친 우강이 학비를 부담해 주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한국근대사의 산 증인이었던 위리는 77세로 생애를 마치고 금년 4월 라성의 Angeles-Rosedale 에 묻혔다.

도산의 장녀 안수산(安繡山)여사는
"I (Susan) was a rough tom-boy. Hung Sa Dahn Officers told me to be like a lady. But Kim, Yerjeh (김여제) was humane
and broad-minded, so I liked him very much. I will always remember him as a young man whom I played with as my best friend."
라고 부친을 회고한다.
수산은 자라서 미국최초의 여성 'gunnery officer' 가 되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마음의 보고(寶庫)라고 생각된다.

1929년 부친은 춘원의 주례로 서울에서 윤자혜와 결혼했다.
1930년 그는 독일 베르린대학에서 교육행정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5월에 남강이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1년 서들러 귀국한 그는 오산 14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오산에서도 식민지교육 반대와 만세운동을 하고 동맹휴학이 있던 때이다. 기마(騎馬)를 타고 교정으로 들어갔다.
9월에 일본의 조작된 만주 사변으로 학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앞날을 기약하며 운동으로 학생들의 체력향상에 주력한다.
1932년에는 휘문고전에서 축구부가 승리했다. 교육의 정신은 진실(眞實)이다.

그는 민족의 개선할점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했다.
고등학생들간에 세비로를 입거나 장발족이 유행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자부심과 낭만의 표시로 보아주고 관대한 태도로 대했다.
학생 때 별명이 '여제(輿濟)선생'이었다는 김재율 남강재단이사장님은 뵈니 비슷한 모습이 부친을 본듯하다.

1933년 부친은 연희전문 학교교수를 겸임하게되고 서울과 정주를 통학했다.
그가 시인 동우회를 만들었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에는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다. 1943년 장거리도보경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그는 참가선수 중 제일 나이가 많았는데 첫째로 꼴인 했다.

동아일보는 기사를 크게 실려 살아있는 민족의 힘을 과시했다. 제 이차 세계대전 말 일본 야마시타 대 사령관은 남양군도침략에 통역관으로 쓰기 위해 부친을 끌고 갔다. 히로시마 폭탄으로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전쟁통에 전사한 줄로 알았던 부친이 어둑어둑해진 저녁 대문으로 들어섰다. 종전 후 몇 달이 지나서였다.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된 그를 보고 어머님은 "누구인지?" 하다가 쓰러져 버렸다.

1946년 부친은 재건을 위하여 인도네시아 시찰을 다녀왔다. 둘로 쪼개어진 한반도는 이념의 대립, 반탁운동, 암살 등으로 혼란했다. 1947년 서재필 박사가 딸을 대동하고 귀국해서 백인제병원에서 환영파티가 있었다. 그때 부친은 딸을 길러 서박사 처럼 세계를 두루 데리고 다닐 생각을 했다. 그가 겨울 사냥을 해서 꿩과 노루를 얼려 가지고 집에 들어올 때는 어머님은 요리를 만들고 그는 좋아하는 치즈로 요기를 했다.

1948년 그는 다시 태평양을 건넌다. 박사학위를 하러 간다고 했는데 외로운 망명길이었는지? 부친과 지프차를 타고 총독부 앞에 도착했다. 뿔이 하나 달린 영물이라는 돌 해태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는 종이를 벗겨 캬라멜을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콤한 맛에 에 취해 "굿 바이 파파" 하는 네 살배기를 공중높이 앉았다가 내려놓았다.

부친은 미국에 도착해서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을 했고 1947에서 1953년까지 미국무성소속 "미국의 소리" 편집과 번역 관으로 근무했다. 어머님이 다섯 명의 자녀들과 남게되고 초등 학교선생으로 일했다.

그녀는 경성여고 (전 경기여고)와 여자사범을 나왔다. 부친에게서는 거의 매달 두 번씩 편지가 왔다. 동생과 나는 그의 사진에 절을 하면서 빨리 돌아오기를 빌었다.
때때로 덕여 고모가 소고기를 사 갖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는 고기와 당면을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고모는 영락교회 권사였고 윤기 나는 까만 머리와 흰 치마 저고리에 어디가나 커다란 성격 책을 갖고 다녔다. 나를 불러 앉히고 먼 곳에서 고생하는 그를 잘 보살펴달라고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1950년 '리' 라는 사람이 라성에 왔고 부친을 만나 "김군, 나와서 나를 도와주게나" 했다. 그때 부친이 귀국을 안 한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6.25가 터졌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내 손을 잡고 허둥지둥 걸어서 백병원을 향해 가다가 한강다리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동네 빨갱이들이 미국 놈의 앞잡이 집이라고 어머니를 붙잡으러 다녔다. 어머님은 아슬아슬한 순간들로 숨어 있다가 아현동 고모 집으로 피신을 했다. 기차길 굴다리를 파괴하는 폭격의 광음이 점점 더 요란해졌다. 1.4 후퇴 때 우리는 미국무성의 주선으로 화물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하얀 눈으로 덮인 마을의 초가집들은 전쟁과 무관하게 평화롭게 시야에 들어왔다. 밤중에 기차가 굴속을 지날 때 꼭대기에서 자던 사람들이 '툭 툭' 떨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가다가 '미국의 소리' 에서 피난민에게 방송하는 부친의 음성을 들었다.
그의 목이 메어 있었다. 상해에서 흘린 피는 어디 가고 나라가 이지경이 되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인지... 유엔군이 힘껏 싸우고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고 질서를 유지하여 무사한 피난길이 되기를 바랜다고 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유엔군참전을 적극 종용하는데 공이 컸다는 부친의 공적사항을 나는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알게되었다.

기차는 열흘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오빠 둘은 목판에 껌과 담배를 들고 다니면서 신문을 파는 생활전선에 나섰다. 나에게 무거운 신문뭉치를 주면서 뛰어다니면서 팔라고 했다. 나는 여기저기 초행길을 다녔다. "쬐끄만 놈이 왜 나와 다녀?
못 쓸놈의 세상! 쯧 쯧 쯧" 신문을 사던 사람이 혀를 찼다. 온 종일 신문 2매를 팔았다. 길을 잃어 버려 한참 헤매다가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기진맥진하고 배도 고팠다. 하마터면 고아가 될 번했다.

피란 가기 전 형제들은 집에서 가끔 연극놀이를 했다.
하루는 꽹과리를 치고 '엉클 톰스 캐빈 (검둥이의 설음)'으로 막을 올렸다.
나는 언니가 해주는 대로 종이 풀로 입술을 두툼하게 하고 꽃 나막신도 신었었다. 그 날밤 그때처럼 흥분돼서 밤새도록 가슴이 두근대었다. 하루로 끝난 신문팔이는 나에게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 되었다.

어느 날 키 큰 흑인병사 한사람이 골목으로 터 있는 부엌 앞을 지나다가 밥을 짓고 있은 어머니를 보더니 멈추어서 손짓 발짓 지껄여댔다. 어머니가 부엌 땅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니까 병사는 껌을 쩍쩍 씹다가 머쓱해서 떠났다. 전쟁 때 여성들이 겪는 수난이었다. 우리는 무섭다고 이사를 했다. 집 옆에는 동회가 있었다.
어머니는 대서 일을 보면서 명필로 많은 문맹인 을 대필해주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우리는 서울로 왔다. 부친의 소중 품과 사진첩을 장독에 묻고 피란 을 갔었는데 속이 텅 비고 뚜껑이 여기저기 깨져서 해와와 해탈이로 웃고 있었다. 부친이 시작했던 가족초청 미국수속은 어머니가 반대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해 가을에 부친이 귀국했다. 나를 낳고 심었다는 ju-jube, 대추나무가 뜰에서 제일 큰 나무가 되어 그를 반겼다. 위풍이 센 적산 가옥 온돌방에서 불편한 한국생활이 시작되었다. 부친은 느닷없이 어린 나에게 남강선생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다. 북녘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보였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 같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 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메의 아이로구나.(이광수작사)" 그에게서 우렁찬 오산교가가 울려 나왔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 집에서 과외공부를 했다. 부친은 하루도 빠짐없이 돈암동 전차종점에 나와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의 여중합격은 부친의 덕이다.

그는 영문법 책을 써서 출판했다. "I like my daughter. Do you like me, too ?" 라는 영어 구절을 처음으로 배웠다. 부친과 함께 "King and I" 와 "South Pacific"
이란 영화도 구경했고 포크와 나이프로 양식도 먹었다.
그는 "Gone with Wind" 의 'Scarlet' 이나 서부영화의 'Katharine Hepburn' 처럼 개척자이미지의 여성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천연색 영화 최은희의 '성춘향' 은 어머니도 함께 보러 갔다. 부친은 열 걸음 앞서 가다가 뒤따라오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한국영화를 보러 가는 그가 신기해 보였다.

동네에서는 부친을 하이칼라 선생님이거나 미국사람이라 불렀다. 나는 부친을 따라 '산에 물에' 흥사단 멤버들과 등산도 하고 바다에도 갔다. 부친은 대천해수욕장에서 수영도 가르쳐 주고 발레도 배우게 해주었다.
그는 새벽 5시면 일어나서 미 팔군 방송을 틀어놓고 독일어 공부와 노쇠해진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불편해 하면서 원고도 썼다. 나는 1950년대 미국 팝송과 친하게 되고 음악에 맞추어 훌라후프도 돌렸다.

1955년에 'Al Hibbler' 가 부른 'Unchained Melody' 는 1990년에 영화 'Ghost' 로 다시 히트곡이 되었다.
부친이 보내준 레코드 중에서 Saint-Saens 작곡 '빙상의 백조' 가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로 흘러나오면 나는 날갯짓을 하며 마지막 숨지는 백조의 모습을 발레로 추었다.

1959년부터 1968년까지 부친은 인하공대교수로 근무하면서 세월 속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 길은 지위와 명예를 내세우지 않는 교육자의 한길이며 도산과 남강의 정신을 주체로 하고 가는 만경창파에 일엽편주와 같은 길이기도 했다.

어느새 내가 대학을 졸업한다. 하나씩 뽑아드렸던 부친의 흰머리 가락이 부쩍 많아 보였다.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나는 나에게 "자유의 천지로 훨훨 날아가거라. 날다가 떨어지기도 하겠지. 그러나 너를 믿는다." 그리고 부친은 생각난 듯이 ''가거든 도산의 자녀들과 가까이 지내라'' 라고 덧 붙였다.

1968년 부친은 꿰테연구소 초청교수로 독일에 갔다. 10월 25일 아빠의 편지에는.... 딸아. 곧 너를 보러 갈까한다. 불란서와 캐나다에서 온 학생 둘을 데리고 공원에 나갔다. 단비를 맞은 꽃들이 참으로 찬란하게 피었구나. 여기를 불러 천국이라 할까!

그는 10월 31일 아침 강의실로 가다가 복도 길에서 쓰러졌다.
유암 김여제(流岩 金輿濟)박사 돌아가다. 돌과 돌 사이를, 졸, 졸 조르륵 흐르는 작은 샘은 긔어, 영원(永遠)에 이르도다. 부친의 죽음이 자꾸 여식(女息)의 잘못으로 느껴진다. 2002년 10월 그는 국군묘지로 이장될 것이다. 거기서 조국의 행진을 예고하는 저 나팔소리를 들으리라.

韓國現代時文學大系 1 에 실린 金輿濟 篇 의 詩 "山 女" 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187p)

山 女

뛰는 心腸의 鼓動은 더, 더 한度 한度를 놉히며,
다막힌 呼吸은 겨오, 겨오 새 循環을 닛도다.
그리하여 우리 山女의 들은 팔은 속절없이 에워싼 뜬 긔 운에 波動을 주어 늘이도다.

돌 사이에서 돌 사이를,
적은 샘은 긔여,
졸,졸 졸으륵, 졸으륵 간은 멜너디를 奏하면서 永遠에 흘으도다.

---그리하여 大海에 닛도다.
가을 긔럭이는 黃昏에 나즉히 날도다.
멀니, 멀니 모르는 곳으로---아니, 아니 南켠하늘로,
날아ㅡ 地平線져, 가에 희미한 그림{影}을 떨으도다.
놉흔, 놉흔 無窮에 흘으는 달은,
멧번을 그 얼골을 變하도다.

---우리 山女는,
緊張, 弛緩, 興奮, 沈靜의 더, 더 複雜한 情緖에 차도다.
느즌새의 울음, 반득이는 별이,
얼마나, 얼마나 우리 山女의 가슴을,
져, 져 먼 나라로, 想像의 보는 世界로,
넓은 드을로, 물결의 자는, 잔잔한 바다로,
아니, 아니 로,
얼마나, 얼마나 우리 山女의 가슴을 끄을엿으랴!

우리 山女의 머리에서 발끗까지,
져문날 잠기는 해는,
또 다시 그 검은 깃{羽}을 덥헛도다.
그러나 우리 山女는 다만 가만히{無言}섯도다.
---火氣에찬, 가슴은 한刹那 한刹那에 漸漸더 그 키를 놉히도다.

져긔, 져 무서운 暗黑속에서는, 갑잭이 갑잭이 엇던 엇
던 모르는 힘이나와,
한길에 , 한길에 우리 山女를 삼키어 갈 듯하도다---우리 적은 小女를.
---怪惡한 니 갈니는 소리가 어듸선지 희미하게 들니 도다!

어느때, 모진光風이 닐어와,
압嶺, 늙은 소나무를 두어대 꺽다.
멧벌에가 弱한 피레를 불어울다,
節차자 아름다운 꽂도 피어---향기도 내이다.
그러나 亦是 山 가운듸었다.

잇다금 들퇴끼[野兎}가 튀어, 우리 山女의 비인 가슴에
새 反響을 내일 뿐이였다.
---님은 如前히 안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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