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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9일 토요일

인구 2600만 상하이 봉쇄…수십만 아사한 1948년 창춘의 기억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6회> 봉쇄와 박멸...1948년 창춘 봉쇄, 1958년 20억마리 참새 대학살 떠올라 지난 4월 5일 국제 금융 허브 상하이 지역의 전면 봉쇄가 무기한 연장되면서 세계의 촉각이 다시금 중국에 쏠리고 있다.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위드(with) 코비드” 정책으로 돌아섰는데, 중국은 “제로(zero) 코비드”를 외치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다수 국가에선 의학적 상식에 따라 결국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공존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중국은 강력한 봉쇄 작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지역에서 2600만에 달하는 거주민들이 모두 집안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보이지 않는 인민의 적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세계 최대의 대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중국공산당의 전격 방역 작전은 중국 현대사의 두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국공내전(1946-1949)이 절정이던 1948년 5월부터 5개월간 지린성 창춘(長春)시를 완벽하게 봉쇄해서 10만의 국민당군을 굴복시키고 수십만 양민까지 아사시켰던 공산당군 사령관 린뱌오(林彪, 1906-1971)의 현대판 공성전(攻城戰)과 1958년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을 동원해서 20억 마리의 참새를 박멸했다는 “참새 대학살 촌극”이다. (송재윤,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참고) 중공 중앙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진정 전 중국을 무균지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인가? 설사 중국 전역이 일시적으로 무균지대가 된다 한들 과연 며칠, 아니 몇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대체 이 활달한 전(全) 지구화의 시대에 중국은 국제사회를 향한 “개혁개방”의 문호를 다시 걸어 잠글 수 있나? 이후 신종 바이러스가 엄습할 때마다 대규모 봉쇄령을 내릴 작정인가? 상식적으로 방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50년대 이래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시진핑 “코로나와 투쟁은 인민 전쟁 총체전”...관제 언론, 연일 방역 칭송 1949년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색출해 박멸하는 정치운동이나 대규모 국책 사업에 전(全) 인민을 불러내는 총동원령을 발동시켜왔다. 인민 총동원령의 최고조는 최대 45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대약진운동(1958-1962)과 “1억1천 3백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표출되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1950-60년대와 같은 인민 총동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에도, 중공 중앙은 틈만 나면 다양한 형식의 정치운동을 쉴 새 없이 벌여왔다. 2020년 이래 시진핑 총서기는 코비드-19와의 투쟁을 “인민 전쟁 총체전”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인민 전쟁”이란 전면적 위기의 타개책으로 전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총동원하는 전시의 비상 전략을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은 바이러스에 대항한 “인민 전쟁”의 대의(大義)를 내걸고 “동태청령(動態淸零)”의 전술을 취해왔다. “동태청령”이란 역동적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검사하고,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감염자를 격리하는 방법으로 깨끗이 박멸하고 청소해서 급기야 제로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지난 2년 동안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동태청령”의 정책이 놀라운 성과를 냈다며 중국식 방역 성공을 칭송해왔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코비드-19 확진자의 누적 집계는 30만 명도 못 미치며, 그중 사망자의 총수는 4638명에 그친다. 물론 중국 측의 수치는 객관적으로 국제적 공신력이 없을뿐더러 대규모 봉쇄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피해와 인권 침해는 전면 배제된 정치선전용 통계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로 2021년 중국의 사망률은 1천 명당 7.18명으로 200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20년에 비해 2021년 16만 명이 더 많이 사망했다.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봉쇄령 때문에 기저질환자의 병원 내방이 어려워지고, 응급 치료의 실패나 의료 방치의 사례도 늘어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인민 전쟁”이 설혹 바이러스의 확산세를 둔화시켰다 해도,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중앙정부서 지방 농촌까지 486만개 공산당 기층조직을 가진 나라 제로-코비드 방역은 오직 중국과 같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일당독재의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전면 통제(total control)의 극단적 방법이다. 현재 세계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제로-코비드 방역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단 한 마디의 행정명령으로 수천만의 시민들을 가택 연금 상태로 묶어놓은 후 군사작전 펼치듯 순식간에 감염자를 색출해내는 ‘빅브라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략 일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공산당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의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무려 486만여 개의 공산당 기층조직을 잘 갖춘 탄탄한 레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둘째, 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집단주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 대다수 중국 인민은 이미 70여 년 동안 당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넷째, 정보기술 혁명의 결과 중국공산당은 최첨단의 디지털 장치를 활용하여 대민 감시와 통제의 능력을 극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은 오늘도 강력한 법적제재를 통해 반대자를 억압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정부가 공적 매체를 독점한 결과 비판적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늘날 중국의 헌법 체계가 이상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선 1978년 민주장(民主牆) 운동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개혁개방” 초기 10년의 세월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실패가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중국의 기본 체제”...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 이미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18일 강화문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지도 체제) 개혁”에서 과감하게 권력 집중을 비판하면서 당정 분리의 당위를 설파했다. 덩샤오핑이 화두를 던지자 중공 중앙의 이론가들은 본격적으로 민주 담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앙당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1980년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전면에 나섰다. 1980년 10월 14일 연설에서 후야오방은 “민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우리나라의 기본 체제”라는 과감한 테제를 던졌다.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초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후 그는 중공 중앙의 보수파들에 맞서서 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과 정치 개혁을 주도했고, 그 결과 1987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서거한 후, 4월 22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5만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요컨대 후야오방은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화두를 받아서 민주 담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그들 중 다수는 1950년대부터 중공중앙의 사상·문화·이념을 담당했던 이론가들이었다. 표면상 그들은 마르크시즘을 깊이 연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개혁개방의 정국에서 해빙의 시기가 왔을 땐 기다렸다는 듯 열성적으로 자유와 권리, 권력분립, 민주의 가치 등을 논하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말, 중공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부주임 류가이룽(廖盖隆, 1918-2001)은 공개적으로 언론의 자유, 개인의 기본권, 입법부의 독립, 정부 내 견제와 균형, 노동조합의 독립성까지 강조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공중앙 정치국의 시녀에 불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양원제의 입법기구로 재편하는 파격적인 개혁안도 제출했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다는 문혁의 극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민주의 가치를 역설했던 자생적 민주주의자였다. <1980년 2월, 산시(山西)성 한 농촌 마을에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사진/Wang Yue> 이때쯤 중공 중앙의 학술지에 민주 관련 논문들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최고의 가치로 선양했던 레닌의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는 논문도 있었다. 가령 1980년 10월 <<철학연구>>에 실린 논문 “민주는 수단이며 목적이다”에서 후즈차오(卢之超, 1933- )는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를 권력 집중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파격적인 논변을 개진했다. 만주족 출신의 탁월한 헌법학자 위하오청(于浩成, 1925-2015)은 문혁 시절 친청 감옥에 수감되어 3년 넘게 독방에서 혹사당했던 반골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1978년에야 사면·복권되었고, 이후 군중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전제적 통치와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성에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20년 훨씬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적 장치에 관해 논할 수 있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독립 언론의 창간을 요구했다. 그는 주요 언론이 모두 당에 장악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점이 종식되지 않고선 자유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그는 1989년 톈안먼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당적을 박탈당했다. 이들 외에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서 투쟁을 이어갔던 난징대학 교수 출신의 궈뤄지(郭羅基, 1932- )와 언론인이자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 역시 1980년 이래 맹활약을 펼쳐지는데, 이 두 사람의 빛나는 투쟁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다루기로 한다. 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에 민주, 언론 독립, 자유와 권리, 삼권분립, 입헌주의를 주장했던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은 이후 10년의 세월을 거쳐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는 바로 그들의 육성을 억누르고 굴러가는 반민주적 일당독재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2022년 4월 6일 수요일

58년 記者’ 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송의달이 만난 사람] ‘제66회 신문의 날 ‘특별인터뷰...김대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 5월 하순 쓴 光州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 회한 남아” 김대중(金大中) 칼럼니스트는 한국 언론계의 ‘살아있는 전설(傳說·legend)’이다. 3주 단위로 그의 칼럼이 실릴 때마다, 그는 한국 최고령·최장수 칼럼니스트 기록을 경신(更新)하고 있다. 1965년 6월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55년간 조선일보 한 곳에서만 일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2020년 3월31일 고문(顧問)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조선일보에 <김대중 칼럼>을 계속 쓰고 있다. 격주隔週)이던 간격이 한 주 늘었을 뿐이다. 1939년생으로 올해 83세의 ‘58년차 기자(記者)’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고령(高齡)의 현역 기자들이 많은 미국에서 조차 ‘김대중’의 경륜을 능가하는 이는 없다. ◇‘칼럼 쓰는 83세 기자’...세계 언론史 기록 일례로 ‘미국 신문계의 대부(代父)’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1889~1971)은 82세에, 뉴욕타임스(NYT) 편집인·부사장을 지낸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1909~1995)은 80세에 퇴장했다. 그러나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글은 지금도 당당한 직필(直筆)의 맛과 굵은 선(線), 독창적인 관점(觀點)으로 특유의 매력(魅力)을 발산하고 있다.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1960년 2월15일자

2022년 3월 23일 수요일

우크라 전쟁, 유라시아 제국…푸틴의 망상 부추긴 ‘푸틴의 브레인’

‘올해 60세 알렉산드르 두긴의 유라시아 구상: 중국은 해체돼야 …러시아의 극동 파트너는 일본 이철민 선임기자 러시아의 무리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달이 되면서, 애초 201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반도 침공과 동부 돈바스 지역의 사실상 병합을 부추겼던 러시아의 정치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60)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두긴은 1997년 600쪽에 달하는 ‘”지정학의 기초: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라는 책을 냈다. 더블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제국의 건설을 꿈꾸는 두긴의 생각은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정치엘리트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 책과 평소 지론을 통해, 영국을 유럽연합(EU)에서 떼어내야 하며,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는 극도로 위험하고, 독일의 러시아 자원 의존도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또 미국의 인종∙종교적 분열을 부추기고 고립주의 성향을 촉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실제로 지난 20년간 푸틴의 국제정치 ‘각본’이 됐다. 그래서 과장됐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두긴은 이후 ‘푸틴의 브레인’으로 불렸다. 일각에선 반대로 푸틴의 ‘라스푸틴(제정 러시아 말기의 황당한 궁정 예언가)’라고 비꼬기도 한다. 푸틴의 철학가, 브레인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두긴(왼쪽). 그러나 일각에선 그를 제정 러시아 말기에 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폭정을 일삼은 황당한 예언가 그레고리 라스푸틴(오른쪽)에 빗대기도 한다./위키피디아 두긴의 ‘유라시아 구상’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할이다. 러시아∙중국의 외견상 ‘밀월(蜜月)’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긴은 중국은 러시아의 유라시아 제국을 위해 결국 ‘해체’돼야 하며, 극동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주니어 파트너는 일본이라고 봤다. ◇소련 해체 후 새로운 이념 찾아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새로운 이념에 목말랐다. 1996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20세기 러시아를 보면, 왕조주의∙전체주의∙페레스트로이카∙민주화를 밟았고 각 단계마다 이념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때 러시아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한 일군(一群)의 학자들은 ‘러시아의 이름으로 합의’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러시아의 과거 ‘영광’을 되찾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라는 러시아 전통에서 답을 찾았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1999년 12월31일 대통령 직무대행이 된 푸틴은 이 ‘러시아의 이름으로 합의’에 속한 학자들과 연을 맺었다. 그에겐 러시아 경제와 정치체제의 안정화라는 급선무가 있었다. 때마침 고(高)유가의 도움으로 경제는 살아났고, 2000년대말 푸틴은 옐친이 애초 찾았던 ‘러스키야 이데야(러시아의 사상)’의 문제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푸틴은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라는 기존의 틀이 아니라, 러시아 고유의 법칙과 도덕성을 통해 부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회와 결탁했고, 동성애를 범죄화하고 서방의 자유주의 성향을 배격했다. 러시아의 이러한 보수주의는 서방의 보수주의와는 정반대였다. 국가 권력을 옹호하고 개인은 국가에 복종∙봉사해야 한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이었다. 애초 1920년대 러시아의 망명 지식인들이 불을 피웠고, 두긴이 되살린 신(新)유라시아주의와 맞아 떨어졌다. ◇볼셰비키 혁명의 망명자들이 ‘유라시아주의’ 펼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유럽 문명의 지진아’로 보는 서구화주의자들이나, 러시아 전체를 계급투쟁을 통해 개조하려는 볼셰비키주의자 모두 배격했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를 비롯한 이들 지식인은 “러시아는 고유의 발전 경로와 역사적 사명을 지닌 나라로서, 유럽∙아시아 양쪽의 기질을 갖춘 새로운 문명과 권력의 핵(核)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는 궁극적으로 몰락하며, 러시아가 세계의 대표 국가가 되는 때가 온다고 믿었다. 1921년 이들은 ‘동방으로의 탈출(Exodus to the East)’이라는 이념집을 냈다. 이 책에 따르면, 러시아 지배자는 영토 확보의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변경의 위험한 인구∙민족은 동화시켜야 하며, 지도자는 반드시 제국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나 개방 경제, 지방 정부, 세속적 자유는 매우 위험하고 수용할 수 없었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의 모델은 징키스칸 따라서 이들 망명 지식인에게, 18세기 러시아 제국을 세우고도 서구화하려고 했던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역적’이었다. 오히려 칭키스칸 제국이 러시아에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이며, 피라미드식 복종과 통제 체제라는 교훈을 제공했다. 이 유라시아 주의는 1990년대말 러시아의 새로운 이념을 찾는 캠페인에서 다시 부각됐다. 푸틴과 같은 ‘애국주의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두긴의 등장: 세계는 로마(러시아)와 카르타고(영국∙미국)과의 싸움 알렉산드르 두긴은 1991년 ‘대륙들간 전쟁‘이란 팜플렛을 내 유명세를 얻었다. 두긴에게 세계는 두 글로벌 파워의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한 편은 국가주의∙공동체∙이상주의∙바다 문명∙공동선(善)을 우선하는 ‘영원한 로마’이고, 다른 편은 개인주의∙무역∙물질주의에 기초한 ‘영원한 카르타고’였다. ‘영원한 로마’ 러시아와 ‘영원한 카르타고’ 미국∙영국 사이에 공존(共存)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선, 개인의 욕구와 필요를 다수와 국가 주도 경제, 준(準)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회 가치에 복종시키는 보수적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야 한다. 푸틴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두긴이 1997년에 낸 책 '지정학적 기초'의 표지. 두긴은 이 책에서 "중국은 가능한 한 최대로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말 그는 러시아 전체 극우 진영의 지적 지도자가 된다. 1997년 그가 낸 책 ‘지정학의 기초: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는 러시아 군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두긴, 1920년대 유라시아주의를 흡수 발전시켜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자들처럼 두긴도 기본적으로 서구∙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전체주의∙이상주의∙사회적 전통을 주창한다. 그러나 두긴의 신(新)유라시아주의는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보다 범위가 훨씬 크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는 동쪽의 만리장성에서 서쪽의 카르파티아 산맥(루마니아-폴란드)에 그쳤다. 두긴이 꿈꾸는 유라시아 제국은 구(舊)소련 국가들을 품고, 지금의 EU(유럽연합) 국가들은 이 제국의 보호령이 된다. 동쪽으로는 만주∙신장∙티베트∙몽골까지, 남서쪽으로는 인도양에 닿는다. 두긴의 이 세계관에서 미국은 “서로 다른 형질이 하나의 생물체에 사는 괴물(chimera) 같은 존재로, 이식(移植)된 문화를 가진 주제에 타(他)대륙에 반(反)인종적∙반(反)전통적 바벨론과 같은 모델을 강요하는” 최대 적(敵)이다. ◇푸틴의 사상적 자산으로 떠올라 점차 독재자로 변모해 간 푸틴에게 두긴의 사상은 적절한 역사∙지정학적 배경을 제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정책 목표를 위해 두긴의 생각을 차용했다. 두긴은 크렘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TV에 단골로 출연하며 푸틴의 맹방이 됐다. 두긴은 러시아가 ‘대국’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선 개인의 자유 제한, ‘전통적’ 가족 중시, 동성애 반대, 러시아 정교회의 중요성을 필수적으로 본 푸틴의 생각을 대중화했다. ◇우크라이나 침략의 이론 제공 두긴은 2014년 푸틴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동부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환영하고 기대하며 ‘제발 와달라’고 요청한다”고 썼다. 당시엔 러시아인의 65%가 푸틴의 침공을 지지했다. 두긴은 또 ‘지정학의 기초’에서 “영토적 야망을 가진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전체에 막대한 위험이 된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대륙 정치를 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썼다. 이에 앞서, 1920년대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를 주장한 트루베츠코이도 1927년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은 러시아인과 러시아정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했다.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푸틴이 행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와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연설은 바로 이 ‘지정학의 기초’에서 온 것이었다. ◇지난 20년간 두긴의 ‘각본’대로 움직인 푸틴 러시아는 지난 20년간 그의 각본대로 움직였다.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트럼프 시대에 더욱 두드러진 미국의 인종∙종교적 갈등과 국제적 고립주의, 나토 분열, 영국 내부의 독립주의 성향 고조, 석유∙가스∙곡물을 통한 서부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등 국제정치는 의도했든 안했든, 두긴이 주장한 대로 흘러갔다. 최소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는 그랬다. ◇우크라이나 이후 푸틴의 수순은? 두긴의 큰 꿈은 대(大)유라시아 제국의 건설이다. 두긴은 유럽이 결국 독일과 러시아 영향력 관할(zone)로 나뉘고, 러시아 자원에 의존하는 독일보다는 러시아가 더 큰 주도권을 쥘 것으로 봤다. 영국이 해체되면서, 러시아의 유라시아 제국은 더블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다. 물론 ‘정상적인’ 사고로 볼 때, 이는 과대망상이다. 그러나 시진핑도 주목할 대목이 있다. 두긴에 따르면,중국은 궁극적으로 해체돼야 한다. 러시아의 아시아 야망은 “중국의 영토적 분해, 조각내기, 정치 행정적 분할”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후 러시아의 극동 파트너는 일본이 된다. 워싱턴포스트는 22일 두긴의 제국주의 세계관을 재조명하면서 “망상(delusion)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망상도 (푸틴 같은) 폭군들이 수용하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했다. 조선일보 2022.3.24.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프랑스 최고 지성 파스칼 브뤼크네르 “삶은 터무니없는 은총, 늙을수록 더 사랑하라”

파스칼 브뤼크네르 소설가 겸 철학자 프랑스 소르본대 철학과, 현 그라세 출판사 편집인, 현 ‘르 몽드’ 칼럼니스트, 전 파리 정치대 교수, 전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초청교수, ‘순진함의 유혹’ 저자 사진 ⓒJF PAGA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인터뷰 책을 썼던 터라,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 약진하는 이 프랑스 지성의 작품이 몹시 궁금했다. 동서양의 지혜는 이토록 다르게 생동했다. 이어령 선생이 정오의 분수처럼 죽음을 생의 한가운데로 초대해 감각하고 사유했다면, 브뤼크네르는 사랑과 일을 노년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여 임종 전까지 ‘욕망할 것’을 권고한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엄숙한 생명의 질서만큼이나 ‘젊은이도 늙은이도 욕망 앞에 평등하다’는 브뤼크네르의 선언은 정신이 얼얼할 만큼 센세이셔널(sensational) 했다. 에로스와 디오니소스의 충동으로 가득 찬 당대의 철학자는 말한다. ‘살아있으려면 사랑하라’고. ‘노년에 욕망이 감퇴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고령에도 통찰력과 푸릇푸릇한 정신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분별력의 대가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어쩌면 우리는 고령화에 대한 담론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74세의 파스칼 브뤼크네르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그는 르노도상과 메디치상, 몽테뉴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고 파리정치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나이듦’이라는 주제를 전하기 위해 따로 준비가 필요했나. “‘노년’이라는 주제 자체가 대단한 힘과 매력을 갖고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문구를 첫 번째로 쓸 것인가였다. ‘포기를 포기하라!’ 이 첫 문구를 골라서 쓰는 그 순간, 글 전체의 톤이 정해진다. 좋은 아이디어란 식탁보의 실과 같다. 실 하나를 당기면 식탁보 전체의 올이 풀린다.” 프랑스는 ‘노년’에 관한 철학적 유서가 깊은 듯하다. 몽테뉴, 파스칼, 시몬느 드 보부아르에서 이어진 ‘노화에 관한 사유’가 칼칼하더라. “고통, 노화 그리고 죽음이라는 문제를 성찰하는 프랑스 사상가들의 문학적 전통이 있다.”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라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세 시대의 중간 지점인 50대만의 생물학적 화학적 신비가 있을까. “오십 세라는 좌표는 하나의 이정표다. 은총과 붕괴 사이에서 파도를 타는 나이다. 더 높은 것을 꿈꾸고, 더 멀리 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건강한 상태지만, 노화의 첫 징후도 나타난다. 특이한 건 오십 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 짧아지기 시작한다. 오십이 넘었다면 당신은 이미 사랑, 가족, 직업 등에서 많은 의무를 치렀고 시니어로 불릴 것이다. 그때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여전히 또 다른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다행히 오십 이후에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30여 년이 더 있다. 남은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할까. 그것은 각자에게 위대한 과제고, 그래서 우리는 단지 늙어가는 것만으로 자기 인생의 철학자가 된다. 적어도 오십 년은 지나야 ‘되어야 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생이 자기 앞에 펼쳐진다.” 이미 절반이 지났는데, 도전은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 아닌가. “에너지를 쓰는 게 곧 삶이다. 여러분은 10년을 주기로 자신을 거침없이 재구축해야 한다. 50, 60, 70, 80⋯ 숫자가 바뀔 때마다 안주하지 말고, 위험을 무릅써도 된다. 자기로 사는 편안함과 자기일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인지해야, ‘나’로 살 수 있다. 만약 도전할 에너지가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반짝거림을 잃어가는 중이다. 죽기도 전에 사라질 이유가 있나?” 최근에 나는 한국의 지성을 인터뷰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라스트 인터뷰다. 그는 컵을 육체, 그 안에 담긴 물을 욕망과 마인드, 컵 안의 빈 곳을 영혼으로 설명했다. ‘욕망의 역동성’에 큰 가치를 두는 당신에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다가가나.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답을 하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당신이 지나갈 때 문이 저절로 닫히는 어두운 복도를 걷는 것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두 개의 문을 최대한 늦게까지 열어 두는 것이다. 바로 그 문이 욕망의 변화구다.” 시간이 주인공인 이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는 없나.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성 안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 사람의 평생은 새벽과 아침, 정오와 황혼이라는 하루의 여정과 유사하다. 인생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한 해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매일 아침 우리는 태양을 선물로 받는다. 여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거나 빠르게 걸을 때,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내가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 맞서 싸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살아있으려면 사랑을 나누라. 미끄러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행복한 순간은 항상 ‘앙코르’를 원한다. 반복이 시간의 기약이고, 우리가 좋은 환상에 몰두할 수 있는 동안은 소망이 있다. 100세 노인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내일을 말한다. 그러니 죽음보다 지금의 삶에 더 집중하라. 우리는 내일 깨어날 테고, 내년에도 새해 인사를 나눌 거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메멘토 모리만큼 인생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제껏 철학은 죽음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간단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왜 우리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죽음이라는 암울한 시각으로 망쳐야 하는 걸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플라톤이나 몽테뉴가 말했듯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대해 배우는 거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교과 과목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결국 100% 죽게 돼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뛰어난 성적으로 통과하게 될 유일한 시험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는 것이다.” ‘죽음을 알면 삶을 알게 된다’라는 명제가 삶의 생기를 억누른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앞서 말했듯, 메멘토 모리의 폐해는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해로운 독으로 파괴한다는 거다.” ‘죽음을 가정할 때 일상은 더 농밀해진다’는 동양 현자의 말도 ‘죽음의 환기는 생이라는 축제를 망칠 뿐’이라는 서양 현자의 말도 다 일리가 있다. 그 차이는 ‘생명을 어떻게 감각하느냐’에 있는 듯했다. 생명을 생육과 번성으로 보느냐, 사랑과 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간은 영원이 되기도 하고 순간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나이 들수록 반복하는 날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사계절을 맞는다. 줄거리를 알면서도 같은 기대, 같은 전율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 반복 속에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제 각자의 미세한 파동을 만들어간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시시한 일상 ‘루틴’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한다. 반복은 불모성과 생산성의 양가적 힘이 있다고. 반복의 영성을 지닌 성실한 사람들, ‘바른 생활 루틴이’라는 별명을 지닌 요즘 세대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통찰이다. 프랑스 소설가 겸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 사진 ⓒJF PAGA프랑스 소설가 겸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 사진 ⓒJF PAGA 반복을 ‘정체된 전진’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자리로 계속 파고들어 가야만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다고. 특별히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반복’이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 “반복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끔찍한 루틴 또 하나는 정반대로 인생을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다. 물론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때문에 우리 삶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첫 번째 반복이 지속했었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반복은 숨은 재능을 찾게 해준다. 자신을 흉내 내는 과정에서 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프루스트도 고유한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자기를 베끼고 또 베끼면서 천재성을 갈고 닦았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발견했다.” 자기 쇄신의 시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당신만의 하루 루틴이 있나. “가장 중요한 루틴은 피아노를 치고 운동을 하는 거다. 그 루틴으로 나를 충전하고, 다른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든다.” ‘일, 참여, 공부’ 이 세 가지가 우리를 맥없는 시간에서 구원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나이 들수록 우리는 일을 통해 공동체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소속감도 매우 중요하다. 공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닫게 하는 ‘자기 구제’의 핵심이다. 일, 참여, 공부⋯ 이 세 가지를 통해 삶은 단시간 내에 충만해질 수 있다.” 모든 것에서 찬란함을 재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면, 선생은 노인과 어린아이 중 어떤 시기를 택해 살고 싶은가. “노인의 지혜를 가진 어린아이로 살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유년은 실제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기질이다. 다시 젊어지진 못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하면 굳어버린 삶에 맞서서 경탄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늙은이에게 꼭 필요한 것은 또 무엇인가. “사랑, 건강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욕망.” 책과 친구와 여행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나. “우선적으로 책을 선택하겠다. 그다음이 친구와 여행 가는 것이다.” 물려받은 재능 중 어떤 것이 감사한가. “성실함, 책과 예술에 대한 호기심, 겸손함과 존경심을 물려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했고,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당연히 받았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이 엔딩 문장에 감동받았다. 이 소박하고 강렬한 결론은 어떻게 나왔나. “완벽한 구조는 절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반복과 노력, 유사한 문장들이 있었다.” 선생의 바람대로, 우리 세대는 ‘평화롭고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행복한 노화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대신 놀라움과 발견의 연장선상에서 역동적이고 요란스럽고 또 풍족해야 한다. 평화란 RIP(Rest In Peace)란 유명한 어구처럼 제일 마지막에 찾아올 거니까.” 마지막으로 언젠가 당신의 묘비에 새길 문장을 말해달라. “나는 인생을 사랑했고, 인생은 나에게 백배로 갚아줬다(I loved life, it rewarded me a hundredfold).”

2022년 2월 27일 일요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 내가 받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 "죽음 알기 위해 거꾸로… 유언같은 '탄생' 써내려가" "촛불 꺼지기 전 한번 환하게 타올라, 그것은 신의 은총" "나중 된 자 먼저 돼,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딸 좇아" "괴테처럼… 인간과 학문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로" 이어령 전 장관(87세). 생의 마지막 시간을 치열하게 쓰고 있다. "이번 만남이 아마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 이어령 선생이 비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주에 보기로 했던 약속이 컨디션이 안 좋아 일주일 연기된 터. 안색이 좋아 보이신다고 하자 "피에로는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운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품위 있게 빗어넘긴 백발, 여전히 호기심의 우물이 찰랑대는 검은 눈동자, 터틀넥과 모직 슈트가 잘 어울리는 기개 넘치는 한 어른을 보며 나는 벅참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달리는 자가 이어령이었다. 그가 쏟아낸 말은 과거를 달릴 때나 미래를 달릴 때나 주저가 없었다. 스킵(skip)과 시프트(shift), 축지법과 공중부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선생과 앉아 인터뷰하던 서재는 늘 ‘매트릭스’나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의 세트처럼 느껴지곤 했다. 오늘 마주 앉은 방엔 책 한 권, 서가 한 칸 없이 고적했다. 기품이 넘치는 이태리산 적갈색 책상과 의자 한 벌. 한 면을 가득 채운 녹색 벽엔 선생과 교류했으나 먼저 세상을 뜬 세계의 지성들이 보내온 편지와 사진,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루이제 린저, 이오네스코, 누보리얼리즘의 창시자 알랭 로브그리예, 노벨문학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 등등. 선생은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그들과의 인연을 즐겁게 회상했다. 한국의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어령. 22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유명 인사가 이후, 65년간 때로는 번뜩이는 광야의 언어로 때로는 천둥 같은 인식의 스파크로 시야의 조망을 터주었던 언어의 거인. 벼랑 끝에서도 늘 우물 찾는 기쁨을 목격하게 해준 우리 시대의 어른. 십수 년 전 이미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라는 아름다운 미래문명을 선창한 분임에도, 당신이 제일 잘한 일은 문화부 장관 시절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했다. 오늘 선생 앞에 앉아 있으니, 갑자기 아득하여 88올림픽 개막식에서 그가 연출했던 잠실벌의 굴렁쇠 소년이 생각났다. 햇빛 내리쬐는 광장에 쓰였던 한 줄 정적의 시. 가을비가 대지를 적시는 오늘, 나는 그에게서, ‘죽음'이라는 한 편의 시를 듣게 될 터였다. 그는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책을 쓰고, 강연하고, 죽음까지 기록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머지 않아 ‘탄생'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 인터뷰로 가까운 이들에게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사진 촬영을 할 땐 "씽킹맨(Thinking Man)은 웃지 않는다"고 겁을 주더니, 인터뷰 내내 "쫄지 마!"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의 말 속에서 과거의 탄생과 미래의 죽음이 만났고, 그렇게 그의 주례로 ‘아름다워진’ 현재가 탄생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 보여요." "건강해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겐 관심이 없어요. 허허. 왜 머리 깎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허허." 남겨진 생의 시간이 유한하여, 나는 선생께서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듣고 싶었다. 토씨 하나, 한숨 한 자락이라도 놓치기 싫어 "예전처럼 자유롭게 대화하자"고 부탁드렸다. -혼자 기다리며 녹색 벽에서 선생께서 젊은 시절에 신문에 쓰신 ‘모리악의 기침 소리'를 보았습니다. "(미소지으며)내가 프랑스에서 모리악 선생을 만나고 쓴 거지. 여기엔 없지만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추억도 있어요. 그때 그분이 여든이 좀 넘었을 때야. 생각해보면 지금 나보다 젊었는데 아파트 계단을 못 올라가셨어요. 내가 등에 업히라고 했더니 화를 내요. 나는 시체가 아니라고(웃음). 서양 문화는 부축은 받아도, 업히는 건 수치로 여겨요. 한국은 다르지. 상호성이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봐도 처음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업고 업혀서 냇물을 건너잖아. 사위가 장모를 업고 사장이 사원을 업어줘요. 다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이 있거든." -업어준다는 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준다는 건데… 서양인에겐 익숙지 않은 경험이군요. "그들은 아이를 요람에서 키우니까.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분리하지요. 땅에 놓으면 쥐들이 공격해서 아이를 천장에 매달아 두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포대기로 싸서 둘러업잖아. 어미 등에 붙어 커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성이 착해요(웃음). 서양은 분리가 트라우마가 돼서 독립적인 만큼 공격적이거든. 한국의 전통 육아는 얼마나 슬기로워요. 오줌똥도 쉬쉬~, 끙아끙아~ 하면서 어린애 말로 다 유도를 했거든." -요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뵐 때 ‘마지막 파는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가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한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온 얘기죠. 살아 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가령 이런 거예요.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 거라.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1982년, 이어령은 일본인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명명하며, 섬나라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경종을 울렸다. 그 책은 일본에서 출간 5개월 만에 12만 부가 판매되었다. -어디서 힌트를 찾으셨나요? "죽을 때 뭐라고 해요?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인 건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2~3억 마리의 정자의 레이스를 통해서 내가 왔어요. 수능 시험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거지(웃음). 그런데 그 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 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요.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들어요." -죽음을 느끼면서 태어남 이전을 복기한다? 엄청난 속도의 플래시백인데요. 뇌에서 빅뱅이 일어났겠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모험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있어요. 진화론자의 의견에 비추어보면 내 존재는 36억 년 원시의 바닷가에서 시작됐어요. 어찌 보면 과학은 환상적인 시야. 내가 과거 물고기였을까, 양수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아 형성 과정을 보면 아가미도 물갈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거든. 그렇게 계산하면 내 나이는 사실 36억 플러스 여든일곱 살이야. 엄청난 시간을 산 거죠.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과거로 가서 미래를 본다는 설명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이어령이다. 평생 창조적 역발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물처럼 안겨준 사람. -선생은 오래전에 이미 ‘디지로그가 온다'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예언하셨어요. 미지의 죽음을 탄생의 신비로 푸니, 이번엔 또 뭐가 보이던가요? "난 옛날부터 참 궁금했어요. 왜 외갓집에만 가면 가슴이 뛸까? 왜 외갓집 감나무는 열린 감조차 더 달고 시원할까(웃음)? 그게 미토콘드리아는 외가의 혈통으로만 이어져서 그래요. 거슬러 가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깨 벌어진 외할머니한테서 내가 왔는지도 몰라. 허허. 이렇게 한발 한발 가면서 느껴지는 게 신의 존재예요. 최초의 빅뱅은 천지창조였구나…" 과학을 잘 모르면 무신론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알면 신의 질서를 만난다고 했다. 죽음이 아닌 탄생을 연구하면서 선생은 점점 더 자신만만해졌다. 말하는 중간에 '쫄지 마'라는 악센트를 농담처럼 박아넣었다. "탄생을 연구하면 무섭지가 않아. 지적으로도 그래요. 아리스토텔레스 나와보라, 그래. 너는 생명을 알고 썼냐? 나는 이제 안다, 이거지(웃음)." 웅장한 지성. -그런데 요즘엔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안 태어나는 게 행복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이렇게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건 무의미해.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 나야말로 젊을 때 저항의 문학이다, 우상의 파괴다, 해서 부수고 무너뜨리는 데 힘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그 놀라움의 힘으로 또 무엇을 보셨나요? "생명은 입이에요. 태내에서도 생명은 모든 신경이 입으로 쏠려 있어요. 태어난 후엔 그 입으로 있는 힘껏 젖을 빨지요. 그 입술을 비벼 첫 소리를 내요. "므, 브…" 가벼운 입술 소리 ㅁ으로 ‘엄마, 물’을, 무거운 입술소리 ㅂ으로 ‘아빠, 불’을 뱉어요. 물은 맑고 불은 밝잖아. 그런데 그 ㅁ과 ㅂ이 기가 막힌 대응을 이루는 게 바로 우리 한글이에요. water와 fire로는 상상도 못할 과학이야. 놀랍죠." 어떤 주제든 언어로 시작해서 언어로 끝난다는 게 더 놀라웠다. -프로이트도 구강기를 정신분석의 첫 단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프로이트는 뱃속 세계를 몰랐어요. 태어난 후부터 트라우마를 적용했는데, 기실 태아 때 더 많은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걸 그는 몰랐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의 후손 중 많은 사람이 폐소 공포증을 앓았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전은 내 조상의 정확한 이력서예요. 동양의 탄생학과 서양의 유전학은 동시에 말하고 있어요.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스승이 10년 가르친 게 뱃속에서 가르친 10개월만 못하다잖아. 그래서 지혜로운 한국인은 태중의 아이를 이미 한 살로 보는 거예요." 그 사실을 프로이트가, 칸트가, 헤겔이 알았겠느냐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가슴뼈가 커지는 화통한 웃음에 공기 틈이 시원하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쫄지 마!' 허허. 알고 보면 프로이트는 돌팔이였어요. ‘우상의 추락’이라는 책에도 있잖아. 다만 인간의 에고를 구조적으로 봤다는 데 의의를 두는 거죠. 인격은 다층적이라 의학뿐 아니라 인문학자의 상상력으로도 봐야 해요."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했지요. 선생은 인격의 핵심을 뭐라고 보십니까? "하하. 핵심은 인격과 신격은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흉내 내기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고 했던 괴테가 그 인간다움으로 구제를 받았어요. 나는 유다가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봐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다는 교회가 아니라 피의 밭을 남겼어요.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유다에 가까워서 더욱 신격을 욕망해요. 그래서 고통스럽죠. 내 마음의 빅뱅을 그 누가 알겠어요? 한 소녀가 "이 남자와 헤어질까요?"라고 물으면 아인슈타인이 뭐라고 할까? 그는 물리적 상대성 이론의 대가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몰라요. 각자의 마음은, 두뇌는 지구에서 하나예요. 기술로 찍어낸 벽돌이 아니거든. 내 몸의 지문도 마음의 지문도 세상에 하나뿐이지. 하나님의 유일한 도장이야. 내 마음의 지문에는 신의 지문이 남아있어요." -요즘 들어 신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할 지식도 자격도 없는 자들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나 유다나 똑같아. 베드로도 유다처럼 닭이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부정했잖아. 오래 관찰하면 알아요.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요.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또 하나. 살아있는 것은 공평하게 다 죽잖아." -왠지 선생의 유니크함은 탄생부터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내 유니크함의 80%는 어머니가 주셨어요. 내가 돌상에서 돌잡이로 책을 잡은 걸,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뻐하셨어. 그때는 쌀이나 돈을 잡아야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달랐죠. "우리 애는 돌상에서 책을 잡고 붓을 잡았다"고 내내 자랑을 하셨어요. 내가 앓아누워도 어머니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셨어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나는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우는 인간이 됐어요." -언어적 상상력은 어린 시절에 길러진 것인지요? "그랬어요. 형님이 놓고 간 책, 대학생이 보던 한자투성이 세계문학 전집을 읽었어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상상으로 단어를 익혔어. 사전도 없었죠. 내 언어 조직의 세포가 그때 활성화된 거라. ‘눈이 내릴 때 루바시카를 입었다’는 문장을 만나면 전후 문맥으로 그 겉옷을 상상해 보는 거야. 동화만 읽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죠. 라틴어 고전도 그렇게 읽었어요. 나는 지금도 외국 여행을 가면 대실망이야. 어릴 때 소설을 읽으며 파리, 런던, 러시아를 다 상상으로 여행했어요. 내가 실제 만난 에펠탑은 내가 언어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했지. 어릴 때 어려운 책을 읽으면 상상의 언어 능력이 발화돼요. 지금도 나는 모든 문제를 어원으로 접근해요." “처음부터 내 목숨은 빌린 거였어요. 바깥에서 저 멀리서 36억년의 시간이 쌓여 온 거죠.” 어원은 화석과 같아서 그 자신, 고고학자처럼 언어라는 화석 조각을 찾아 거대한 공룡을 그린다고 했다. 모든 게 어린 시절 독서의 힘이었다고. -글도 그렇지만 평생 말을 하면서 살아오셨어요. 지성에 막힘이 없고, 재미까지 있는 이야기꾼으로 사랑받으셨습니다. 선생의 뇌 구조가 궁금합니다. 질문이 어떤 방식으로 입력되고 흘러나오는지요? "하하. 나는 좌뇌 우뇌를 다 써요. 나의 최전선은 말이고 생의 의미야. 말이 나오면 언어의 전선이 형성되거든.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하다 보면 수억 개의 정보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고를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시인 이상은 좀 달랐어요. 이 사람은 수학적 언어를 썼어. 수학적 머리와 문학적 머리가 다 트였던 사람이야. 그래도 쫄지 마(웃음). 이상은 일찍 죽었잖아." -신기합니다. 어떤 천재는 단명하고 어떤 천재는 장수하는 걸까요? "오래 살면 생각이 계속 달라져요. 내가 존경하는 이들은 다 일찍 죽었지. 이상도, 랭보도, 예수도. 단명한 이들의 공통점은 번뜩인다는 것. 둔한 게 없어요. 면도날로 소를 잡았지. 소를 잡으려면 도끼를 써야 하는데, 이상은 날카로운 면도날로 단번에 그었어요. 반면 괴테는 80살까지 살았어요. 도끼날 같았지. 도끼로 우주를 찍어 내린 사람이었어요. 형태학, 광산학까지 했잖아. 천재는 악마적 요소가 있어요. ‘파우스트'를 봐요. 파우스트는 신학을 했던 성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사색적인 그가 한계에 부딪혀 자살하려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만, 결국 신은 그를 구원해요. 나는 서른이 지나고 모델이 없었는데, 그때 잡은 게 괴테였어. 괴테는 바이마르의 재상을 지냈죠. 그런데 나도 문화부 장관을 했잖아. 바이마르 인구보다 한국 인구가 더 많으니, 나는 괴테한테 쫄지 않아요(웃음)." -선생이 한 말, 쓴 글, 해오신 일은 그 영역이 너무 방대해서 입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괴테도 유니버설맨이었어요(웃음). 동과 서를 알았고 성과 속을 알았고, 인공지능인 호몬클루스까지 써서 미래의 정황을 보여줬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랬죠. 코끼리의 전체를 보려면 그들처럼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해요. 코만 만지고 코끼리를 봤다고 하면 엉터리야. 그렇게 인간과 학문의 전체를 보려고 했던 르네상스맨이 다빈치와 괴테였어요. 그런데 제너럴리스트들은 종종 욕을 먹어. ‘전공이 뭐냐’는 거죠. 허허." -전공의 구분이 없으셨지요. 언어기호학자이면서 언론인, 비평가이면서 소설가, 시인, 행정가, 크리에이터로 살아오셨어요. 최종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우물 파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는 않았어요. 미지에 대한 목마름, 도전이었어요. 여기를 파면 물이 나올까? 안 나올까? 호기심이 강했지.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어요. ‘두레박'의 갈증이지요. 한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제 그 마지막 우물인 죽음에 도달한 것이고." -죽음의 상태에 관한 공부도 하셨습니까? "했지요. 인간에게도 퇴화한 날개가 있어(웃음)." -무슨 말이지요? "새는 날짐승이잖아. 그런데 무거운 새는 못 날아요. 그때는 날개가 덮개가 되죠(웃음). 인간도 몸이 불으면 못 날아. 늙고 병들면 머리가 빠지고 이빨이 빠지고 어깨에 힘이 빠져요. 비극이지. 그런데 마이너스 셈법으로 몸이 가벼워지면 날아요. 고통을 통과해서 맑고 가벼워진 영혼은 위로 떠요. 덩컨 맥두걸이라는 학자가 실험했어요. 죽은 후 위로 떠오르는 영혼의 무게를 쟀더니 21g이었죠. 그러니 죽어갈수록 더 보태지 말고 불순물은 빼야 해요. 21g의 무게로 훨훨 날아야지요." -평생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동양에선 덧없는 것을 꿈(夢)이라 하고 서양은 판타지를 꿈(dream)이라 하죠. 나는 평생 빨리 깨고 싶은 악몽을 꿨어요.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빠져 외길을 걷는 꿈, 어릴 때 복도에서 신발을 잃고 울던 꿈, 맨발로 갈 수 없던 공포, 뛰려면 발은 안 떨어지고, 도망가보면 아무도 없는 험한 산길이었지요. 자기 삶의 어두운 면이 비치는 게 꿈이에요. 깨면 식은땀을 흘리고 다행이다 했어요. 현실에서 눈뜨고 꾸는 내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문학적 상상력, 미지를 향한 호기심…" -요즘엔 어떤 꿈을 꾸십니까?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꿔요.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혹은 터널 끝에 보이는 점 같은 빛. 그러나 역시 8할은 악몽이에요. 죽음이 내 곁에 누워있다 간 느낌... 시계를 보면 4시 44분 44초일 때도 있어요(웃음). 동트기 전에,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 시간이죠. 그 시간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에요. 섬뜩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라는 거였어요. 누구도 그 길에 동행하지 못하니까요. 다행히 그때 또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젊은 날 인식이 팽팽할 땐 몰랐던 것."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87년간 행복한 선물을 참 많이 받으셨지요? "그랬죠. 산소도, 바다도, 별도, 꽃도… 공짜로 받아 큰 부를 누렸지요. 요즘엔 생일케이크가 왜 그리 그리 예뻐 보이는지 몰라. 그걸 사 가는 사람은 다 아름답게 보여(웃음). "초 열 개 주세요." "좋은 거로 주세요." 그 순간이 얼마나 고귀해. 내가 말하는 생명 자본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자기가 먹을 빵을 생일 케이크로 바꿔주는 거죠. 생일 케이크가 그렇잖아. 내가 사주면 또 남이 사주거든. 그게 기프트지. 그러려면 공감이 중요해요. 공의가 아니라, 공감이 먼저예요." -공의보다 공감이라는 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상품 경제 시대에서 멀리 왔어요. AI시대엔 생산량이 이미 오버야. 물질이 자본이던 시대는 물 건너갔어요. 공감이 가장 큰 자본이지요. BTS를 보러 왜 서양인들이 텐트 치고 노숙을 하겠어요? 아름다운 소리를 좇아온 거죠. 그게 물건 장사한 건가? 마음 장사한 거예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즐거움, 공감이 사람을 불러모은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지금의 한국 사회는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는 시기라고.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고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썰물 후에 갯벌이 생긴다는 말이 파도처럼 가슴을 적셨다.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이어령 선생은 7년 전 2남 1녀 중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먼저 보냈다. 미국에서 검사 생활을 했던 딸은 목사 안수를 받았고, 위암 발병 이후, 수술하지 않고 시한부를 택해 열정적으로 쓰고 강연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요즘 따님 생각을 더 많이 하시겠습니다. 암 선고받은 후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는 까닭도 따님과 관련이 있는지요? "(미소지으며)우습지만 성경에는 나중 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있어요. 내 딸이 그랬어요. 그 애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지 않았어요. "지금 나가면 3개월, 치료받으면 6개월" 선고를 듣고도 태연하니까, 도리어 의사가 놀라서 김이 빠졌어요. 민아가 4살 때였어요. 아내가 임신해서 내가 아이를 데리고 대천해수욕장 앞 해변 바라크 건물에 묵은 적이 있어요. 아이를 재우고 다른 천막에 가서 문학청년들과 신나게 떠들었지. 그때 민아가 자다 깨서 컴컴한 바다에 나가 울면서 아빠를 찾은 거야. 어린 애가 겁에 질려서...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우리 애는 기억도 안 난다지만(웃음). 그랬던 아이가 혼자 미국에 가서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그 어렵다는 법대를 조기 졸업하고 외롭게 애 키울 때, 그날 그 바닷가에서처럼 "아버지!"하고 목이 쉬도록 울 때, 그때 나의 대역을 누군가 해줬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야. 내가 못 해준 걸 신이 해줬으니 내가 갚아야겠다. 이혼하고도 편지 한 장 안 쓰던 쿨한 애가,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면 내가 믿어볼 만 하겠다, 그렇게 시작했어요.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눈도 함께 밝아진 거지. 딸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딸의 뒤를 좇고 있어요(웃음)." 따님인 고(故)이민아 목사의 대학 졸업식 사진. -언제 신의 은총을 느낍니까? "아프다가도 아주 건강하게 느껴지는 아침이 있어요. 내 딸도 그랬죠. "아빠, 나 다 나았어요"라고. 우리 애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어요. 1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죠. 암에 걸리고 큰 선물을 받았어요.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썼어요. 망막 수술도 성공해서 밝은 세상도 봤지요. 내가 보내준 밸런타인데이 꽃다발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호텔 방에서 "아빠, 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라며 전화가 왔어요. 육체가 소멸하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고, 기도 드리고 쓰러져서 5~6시간 있다가 운명했어요. 어떤 환자라도 그런 순간이 와요. 촛불이 꺼질 때 한번 환하게 타오르듯이. 신은 전능하지만, 병을 완치해주거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게 해주진 않아요. 다만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어요.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잖아. 그리고 이따금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요.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해요."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옛날엔 나는 약하니 욥 같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지금은…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해요. 역사적으로도 부활의 기적은 오로지 예수 한 분뿐이니까. 나의 기도는 이것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갈피를 넘기던 책, 내가 쓰던 차가운 컴퓨터… 그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어요." 그 전까지는 죽음의 의미, 생명의 기프트를 마지막까지 알고자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사형수도 형장으로 가면서 물웅덩이를 폴짝 피해 가요. 생명이 그래요. 흉악범도 죽을 때는 착하게 죽어요. 역설적으로 죽음이 구원이에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최악은 없다고. 노력하면 양파 껍질 벗겨지듯 삶에서 받은 축복이 새살을 드러낸다고. 빅뱅이 있을 때 내가 태어났고, 그 최초의 빛의 찌꺼기가 나라는 사실은 ‘수사'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여러분도 손놓고 죽지 말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고 맞으라고. "종교가 있든 없든,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기프트를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천지 차이예요." 한마디 한마디, 목구멍에서 빛을 길어 올려 토해내는 것 같았다. 녹색 칠판 앞에 앉아 선생이 마지막으로 판 우물물을 거저 받아 마시자니, 감사가 샘처럼 벅차올라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는 나이 들면 과거를 반복해서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성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지혜의 전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소지으며)창을 열면 차가워진 산소가 내 폐 속 깊숙이 들어와요. 이 한 호흡 속에 얼마나 큰 은총이 있는지 나는 느낍니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죽음의 형상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로 올지, 온갖 튜브를 휘감은 침상의 환자로 올지 나는 몰라요.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마지막에 ‘END’ 마크 대신 꽃봉오리를 하나 꽂아놓을 거라고 했다. 피어있는 꽃은 시들지만, 꽃봉오리라면 영화의 시작처럼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을테니. "끝이란 없어요. 이어서 또 다른 영화를 트는 극장이 있을 뿐이지요(웃음).

2021년 8월 4일 수요일

20대 대통령선거 출마 공식선언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어떤 인물인가

“작은 자, 보잘것없는 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 글 월간조선 뉴스룸 트위터페이스북기사목록프린트하기글자 크게글자 작게 [편집자주] 4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20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월간조선>은 최 전 원장이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던 작년 10월 그의 삶을 심층탐구했다. 당시 독자들로부터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해 취재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월간조선>은 정치적 의미 부여를 배제하고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인간 최재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렸다.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경기도 파주 한 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에 앞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0 2020 MAGAZINE전체기사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인물 문화 안보 북한 연재 화보 사람들 심층탐구 ‘인간 최재형 감사원장’, 그 삶의 궤적 “작은 자, 보잘것없는 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트위터페이스북기사목록프린트스크랩글자 크게글자 작게 ⊙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판사의 길 걸으며 ‘원칙주의자’ ‘작은 예수’란 평가 받기까지 ⊙ 부친이 최재형 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예언적’ 사자성어 ⊙ 동생이 최재형 원장에게 ‘종교개혁’의 주역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을 메시지로 보낸 까닭 ⊙ 최재형 원장이 필리핀 선교지에서 구겨진 ‘바람개비’를 일일이 폈던 이유 ⊙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던 법조인의 회고 “최재형 원장 부부는 아들들에게 헌신, 그 자체였다” ⊙ 아내의 지극한 아들 사랑 “막내가 유학을 떠납니다. 그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 ‘평생지기’와의 운명적 만남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 감사원장 발탁 秘話 “조국 민정수석이 ‘감사원장 맡아달라’고 전화했다” ※편집자 註 ‘대쪽’. 누군가의 별명이었던 이 단어가 요즘 자주 들린다. 개원 72주년을 맞은 감사원을 이끄는 수장 최재형에게서 과거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 감사를 진행하면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겨눴던 감사원장 선배 ‘이회창’의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어서일 것이다. 실제 《월간조선》에 최재형 원장에 대해 취재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쇄도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에 본지는 ‘감사원장 최재형’이란 이면에 감춰진 ‘인간 최재형’을 조명해봤다. 정치적 의미 부여를 배제하고, 주변인의 증언과 자료 등을 통해 ‘인간 최재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려본 것이다. 직무 수행과 인품,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호평(好評)을 받는 최재형 원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2017년 말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우리가 (감사원장 후보로) 여러분을 인사 검증했는데 (사법연수) 원장님이 최적임자라는 판단이 서 이렇게 연락을 했습니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그의 비서로 일하며 각별한 신임을 받은 부친에게 대통령직에 오른 박 대통령이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각하, 저는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문재인 정부 탄생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자신이 감사원장직을 맡는 게 도의(道義)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완곡히 사양 의사를 밝히니 조국 수석이 말을 이었다. “원장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후보로 추천하겠습니다. 많은 분을 검증했는데,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사람은 원장님이 유일합니다.” 그렇게 최 원장은 여야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제24대 감사원장직에 올랐다. ‘神이 내린 인간’이란 극찬 최영섭(상단의 네모 박스) 대령, 최재형(하단의 네모 박스) 감사원장 父子의 해주 최씨 족보. 최영섭 대령의 두 동생도 각각 해병대 대령, 해군 부사관으로 전역했다. ‘감사원장 최재형’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명문(名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13기) 수료 후, 줄곧 판사의 길을 걸었다. ‘엘리트 이미지’는 인간미와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최재형 원장은 거기에 더해 ‘철저한 원칙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원전(原電) 감사를 놓고 일고 있는, 정치권의 파상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확인이 됐다. 감사원이라는 기관이 주는 인상도 한몫한다. 감사원은 각 정부 부처(部處)를 상대로, 외부의 압력 없이 독립적인 감사를 벌일 수 있는 국가 최고 감사기관이다. 감사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그 직무에 관해서는 독립성이 보장된다. 그만큼 감사원(장)이 주는 위압감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보만 갖고 있다면 ‘감사원장 최재형’의 인상은 딱딱함과 완고함으로 여겨질 것이다. ‘인간 최재형’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최재형 원장과 오랫동안 교류한 지인(知人)들은 최재형 원장을 가리켜 ‘신(神)이 내린 인간’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가 감사원장에 발탁되자 대다수 언론은 그와 관련한 미담(美談)을 쏟아냈다.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기 앞서 그의 본관과 집안부터 살펴보자. 최재형 원장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서운부정공파 최용(崔·생몰년 미상)의 36대손이다. 해주 최씨는 고려 왕조에서 가장 빛을 발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역사는 곧 해주 최씨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가(史家)도 더러 있다. 해주 최씨의 시조(始祖)는 최온(崔溫·생몰년 미상)이다. 최온은 고려 광종(光宗·925~975)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해도 해주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최온의 초기 벼슬은 호장(戶長)이었다. 최온보다 더 유명한 이가 그의 아들인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는 최충(崔沖·984~1068)이다. 문장과 글이 뛰어난 최충은 고려 초기 율령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주력해 최고 관직이자 재상(宰相) 자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 최충은 교육기관인 ‘9재(齋) 학당’을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란의 침입으로 유명무실해진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대체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사숙(私塾)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9재 학당의 모태(母胎)다. 최충은 아들들에게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顯達)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한해협 전투’ 승리로 이끈 父親 최영섭 (예)대령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최영섭 예비역 해병대 대령. 사진=조선DB. 최재형 원장의 부친은 해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낸 최영섭(崔英燮·93·해사 3기) 예비역 해군 대령(현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이다. 최 원장은 최영섭 대령의 4남 중 차남이다. 최영섭 대령은 우리 해군에서 ‘신화적인’ 존재다. 6·25전쟁 발발 직후, 우리 해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대한해협 해전’의 실질적인 주역(主役)이어서다. 이 해전은 6·25전쟁 최초의 해전이자 첫 승전(勝戰)이었다. 당시 최영섭 대령은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다. 제2함대 소속이었던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이 해전에서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쪽 해상에서 무장 병력 600여 명을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1000t급 북한군 무장 수송선을 5시간에 걸친 추격과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후방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179만명의 유엔군과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고, 이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당초 최영섭 대령은 “공직자의 직무(職務)를 수행하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만남을 완곡히 사양했었다. 최영섭 대령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서야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 아버지라도 아들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칼날 위에 서 있는’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父親) 아니던가. 최영섭 대령은 “정치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자”며 최재형 원장의 유년 시절 일화에 한해서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동교동에서 마장동까지 왕복 4시간 통학 “재형이 출생지가 경남 진해로 돼 있지만, 사실 거긴 두어 달밖에 안 살았어요. 재형이가 태어나던 해인 1956년 10월인가 11월, 제가 서울에 있는 해군본부로 발령이 났어요. 그전에는 경남 진해에서 관사(館舍) 생활을 했는데, 서울에는 집이 없었어요. 그래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죠. 그때 찾아간 게 창덕궁 부근 종로구 와룡동에 있던 어느 기와집이었어요. 집에 들어가니까 문 왼쪽에 머슴방이 월세로 나와 있었어요. 한 세 평쯤 되는 그 방을 얻었어요. 재형이가 9월 2일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거죠. 그 핏덩어리만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그 머슴방에서 한동안 둘이 같이 살았죠. 큰아들하고 아내는 어머니랑 진해에 있었고요.” 와룡동 단칸방에서 살던 최영섭-최재형 부자(父子)는 회현동을 거쳐 동교동으로 이사했다. 그 사이 최영섭 대령은 전역을 했고, 진해에 있던 가족들도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됐다. 일가(一家)가 동교동에 정착했을 무렵, 최재형 원장은 한영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영중학교는 현재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있지만, 당시는 성동구 마장동에 있었다. 동교동에서 마장동은 서울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가야 한다. 최영섭 대령은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아 재형이가 통학하는 데에만 왕복 4시간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최재형 원장은 그 먼 거리를 군소리 없이 3년간 다녔다. 상무대에서 군사훈련 받을 때에도 ‘솔선수범’ 최재형 원장은 사법연수원 13기로 수료했다. 이 기수에서는 제법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가장 유명한 이 중 두 명을 꼽으라면 역시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한상대 전 검찰총장, 조대환 전 청와대 민정수석, 최성준 전 방송통신위원장, 허익범 드루킹 특별검사팀 특별검사도 13기다. 최재형 원장의 연수원 동기(同期)이자, 현재 법무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A 변호사의 얘기다. “최재형 원장이 연수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공교롭게도 ‘두 명의 최씨’, 즉 ‘3최’가 친했던 걸로 기억해요. 한 명은 현직 판사고, 또 한 사람은 정부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이 중 고위직을 지낸 최씨하고는 연수원뿐 아니라 중·고교, 대학까지 동기랍니다.” 이들 연수원 13기생은 1983년 광주 상무대에서 군(軍) 법무관 임관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A 변호사는 “상무대에서 훈련받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유격훈련이었다”며 이런 말을 했다. “상무대 유격훈련장은 상무대로부터 약 60km인가? 아무튼 아주 멀리 있었어요. 거기까지 완전군장을 한 채 행군(行軍)을 해 가야 합니다. 그게 굉장히 힘들어요. 나도 일주일 동안 양치 한 번 못 했으니까요. 그때 최재형 원장이 분대장이었어요. 아무리 우리가 법무관 임관을 앞둔 사람들이라고 해도, 훈련병은 훈련병이잖아요. 교관(敎官)들이 적당히 훈련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죠.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 기를 죽이려고 했어요. 분대장이었던 최재형 원장은 훈련병하고 교관 사이에서 조율과 중재를 참 잘했어요. 우리 편하게 해주려고요.(웃음) 늘 솔선수범해서 다들 좋아하고 따랐지요.” 판사와 ‘앙숙’인 검사 출신 법조인도 好評 지금은 모 기업 고문으로 있는 연수원 동기 B씨(검사 출신)의 회고는 좀 더 자세하다. “상무대에서 훈련받을 때 최재형 원장은 제 옆 내무반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연수원 기수(期數)에서 가장 많았던 학번이 77학번이었는데, 최 원장은 고시(考試)가 늦은 편은 아니지만 75학번으로 학번상 연장자 축에 속했습니다. 어느 날 최 원장 내무반에 있던 녀석들이 요령을 피워 단체기합을 받더라고요. 그럼 분대장으로서 화도 날 법도 하잖아요. 나이도 어린 녀석들 때문에 기합을 받으니까요. 그런데 최 원장은 아무런 불평 없이 그들을 다독거리더라고요. 오히려 행군할 때 힘들어하는 동기들의 총이나 군장을 대신 메주기도 하고요. 생색은커녕 아무 말 없이 묵묵히요. 그래서 제가 ‘아니 저런 숨은 영웅이 요즘도 있냐’고 물어보니 다른 동기가 ‘몰랐어? 경기고 다닐 때 몸이 아픈 친구를 업어서 등교시켰던 사람’이라고… 그때 처음 들었어요.” 판사 출신 변호사 C씨는 “판사들은 동기회에 잘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최 원장은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노력해 동기회에 신뢰를 줬다”고 말했다. C씨는 “나는 사회 비판적인데다가 할 말도 하는 편이지만, 최재형 원장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은자형(隱者型)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판사 출신 변호사 D씨(모 법무법인 대표)도 “원칙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최재형 원장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소탈하고 유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D씨 역시 “최 원장은 자기 얘기보다는 주로 경청하는 스타일”이라며 “어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中庸)을 추구하는 분”이라고 했다. 보통 판사와 검사는 ‘앙숙 관계’다. 판사에게 검사 평을 물어보거나, 검사에게 판사 평을 주문하면 혹평이 한두 개쯤은 나온다. 기자가 몇몇 검사 출신 법조인에게 최 원장에 대한 평가를 주문했더니 그 반응 역시 비슷했다. 고검장 출신의 현직 변호사는 “무결점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최재형 판사는 무결점에 가까운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잠시 최재형 감사원장 집안의 병역 사항을 짚어보자. 감사원장 인사청문회에서도 언급됐듯이, 최재형 원장 집안은 ‘병역 명문가’다. 이는 최영섭 대령의 영향으로 보인다. 최영섭 대령의 국가관은 투철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최 대령의 말이다. “내 밑에 동생 2명이 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은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하고, 한 명은 해군 부사관 출신입니다. 아들 넷 중 첫째는 해군 대위로, 재형이는 육군 중위로, 셋째는 공군 대위로, 넷째는 육군 소위로 복무했어요. 손자 1명은 해병대 중위로 DMZ(비무장지대) 소대장을 했고, 2명은 육군에서 복무했지요.” 최재형 원장의 두 아들도 각각 해군과 육군에서 복무했거나 복무하고 있다. 최영섭 대령과 최재형 원장의 장남은 2016년 6월 28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와 삼성 경기의 시구·시타자(始球·始打者)로 마운드에 섰다. 당시 최 원장의 장남은 현역 해군 병사였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시구·시타자로 나선 건, 해군과 롯데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계획한 장병사랑 캠페인 ‘땡큐 솔저’의 일환이었다. 최영섭 대령 3대(代)가 해군으로 복무했다는 게 이들이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최재형·강명훈의 피보다 진한 우정을 다룬 1981년 6월18일자 《조선일보》 기사. 최재형 원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 키워드 중 하나는 그의 종교다. 최 원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최재형 원장 지인 중 상당수가 최 원장을 평가할 때, 종교와 연결 지어 설명하곤 했다. 그만큼 종교, 즉 기독교 정신은 최재형 원장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요소로 작용했다. 그가 교회를 다니게 된 배경엔 부모가 있었다. 최영섭 대령과 아내 고(故) 정옥경씨는 동교동 인근 신촌교회에 출석했다. 최재형 원장도 자연스럽게 신촌교회를 다녔다. 신촌교회 장로인 최 원장은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휴무(休務) 장로가 됐다. 아내 이소연씨도 신촌교회 권사다. 최재형 원장은 신촌교회에서 ‘평생지기’ 강명훈(姜明勳) 변호사를 만난다. 최 원장이 학창 시절, 소아마비 친구를 2년간 업고 등교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이 일화 속 ‘친구’가 바로 강명훈 변호사다. 그들의 피보다도 진한 우정은 1981년,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큰 화제를 낳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해 《조선일보》 6월18일자에 ‘신앙(信仰)으로 승화한 우정(友情) 10년’이란 제하의 기사로도 실렸다. 최재형-강명훈의 끈끈한 우정과 최재형 원장의 인격(人格)을 잘 보여주는 기사라 조금 길지만 요약·인용해보도록 한다. 〈친구끼리인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그리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그 두 사람이 유달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떠들썩한 얘깃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강명훈 군(25·서울대 법대 80년 졸업)과 강 군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해온 최재형 군(25·서울대 법대 79년 졸업)이 17일 나란히 사법시험(2차)에 합격하기까지에는, 우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인간애의 고뇌들이 있다. 명훈과 재형이 처음 만난 것은 명훈이 보인중 3년에, 재형이 경기고 1년에 재학 중이던 72년 봄이었다. 둘 다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학년은 하나 위였으나 나이는 명훈과 동갑이었던 재형은 지체(肢體)가 부자유스러우면서도 구김살 없는 명훈이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고, 사지(四肢)가 자유스러우면서 때로 좌절하기 잘하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명훈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됐다. 재형은 몰래 기도했다. 이왕이면 명훈이가 자기가 다니는 경기고에 입학해서 같이 도와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명훈이가 창천동에, 재형이가 동교동에 살았기 때문에 같이 다닐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기도의 덕분이었는지 명훈이는 경기고에 추첨이 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지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명훈이는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은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보통 20대 중반의 청년이라면, 젊음을 무기로 세속적인 즐거움에 심취하는 게 보통이다. 이들은 달랐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는 두 사람만의 ‘특별한’ 우정을 읽어보자. 〈명훈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신촌 부근에서 내린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명훈이는 양손에 책가방을 들고 재형이는 명훈이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 중간쯤 왔을 때 등 뒤에 업힌 명훈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공중변소나 화장실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명훈이는 등에서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명훈이는 등에 업힌 채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재형이는 명훈이가 우는 걸 보았다. 그 눈물은 다 큰 녀석이 길거리에서 실례했다는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감추고 스스로 극복하려 했던 신체의 결함이 사소한 곳에서 아픔으로 되살아난 그런 눈물이었다. 그날 밤 둘은 명훈이의 집에서 같이 밤을 새워가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서로 믿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재형이는 75년에, 명훈이는 76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명훈이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이면 강의실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아침 일찍 찾아와 주는 재형이를 볼 때마다 명훈이는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명훈이는 성경(聖經)의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을 외었다. “내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에게 모두 빚진 자이니라.” (하략)〉 최재형 원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둘이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도 서로 도우라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 같아요. 앞으로 저나 명훈이나 많은 문제에 부딪히겠지만 훌륭히 극복할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또 “명훈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눈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있을 뿐 아니라 지체가 자유스러운 사람보다 훨씬 넓은,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니까요”라고 친구 강명훈에 대한 깊은 마음을 표현했다. 강명훈 변호사는 기자에게 “고등학교뿐 아니라 사법연수원 2년간도 함께 통학했었다”며 “잠시의 선행(善行)이 아닌, (진심으로) 장기간 친구를 도왔던 이가 최재형”이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몸이 아픈 친구를 도왔던 일이나 아이 둘을 ‘가슴으로 낳은’ 일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힘 덕분”이라고 했다.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무리 선(善)한 일이라고 해도 아버지 입장에서는 안타까웠을 법하다. 최영섭 대령의 말이다. “(재형이는) 원래부터 착한 애예요. 뭐, 걔는 본성이 착한가 봐요. 지금도 아침 8시에 매일 문안 인사를 올려요. 대학생 때도 자기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요. 재형이 친구들도 다 착해요. 명훈(강명훈 변호사)이도 그렇고, 지금 기독교 계통의 모 재단 사무총장으로 있는 김○○이도 그렇고…. 세 명 다 신촌교회 청년부 출신이거든요.” “최재형 장로는 삶과 신앙이 일치” 최재형 원장이 오랫동안 출석해온 신촌교회를 찾았다. 그곳에서 남진희(35) 목사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진희 목사는 신촌교회에서 7년째 일하고 있으며, 최재형 원장과 깊은 교분을 나눴던 목회자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장로 최재형’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즘 한국 교회 내에서 장로라고 하면 ‘덕스럽지 못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로가 어떤 계급처럼 일반 신도들과 다른 계층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다른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품을 대부분 ‘학습된 겸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에 비해 최재형 장로님은 참 보기 드문 분입니다.” — 어떻게 보기 드뭅니까. “최재형 장로님은 신앙이나 삶이 괴리되지 않아요. 항상 일치해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해도 가까이서 보면 흠이 보이잖아요? 근데 이분은 아니에요. 늘 한결같고 소탈해요. 이분은 자기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고, 그게 일관됩니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어요. ‘판사들이 다 이런 건가’ 법관에게 이런 이야기 하면 좀 웃길 수 있지만 ‘이분은 법 없이도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올해 초 우리 교회 집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얘깁니다. 이 집사님은 변변찮은 직장도 없고, 가족도 몸이 안 좋은 아들만 있는 분이셨어요. 보셨다시피 우리 교회(신촌교회)는 굉장히 서민적인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 집사님께 잘 보인다고 어떤 이득을 얻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최재형 장로님은 그분 장례에 오셨어요. 현직 감사원장이 장례에 오신 거죠. 이미 조화(弔花)를 보냈음에도요. 얼굴만 내밀고 가신 게 아니라 계속 자리를 지키셨어요. 장로님은 교회 내의 모든 경조사(慶弔事), 특히 조사엔 빠짐없이 다 참석하세요.” — 장로라는 책임감에 그랬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4년 전 얘기를 해드릴게요. 그때 최 장로님이랑 필리핀 선교를 갔어요. 필리핀 같은 곳에 선교를 가면 어린아이들이 정말 많이 몰려옵니다. 그럼 준비한 선물도 다 동이 나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장로님께 ‘포화 상태라 더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일정도 있고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애들이 얼마나 상처받고 돌아가겠나.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면서 준비해 간 바람개비를 나눠 주시더라고요.” ‘바람개비’ 일화 2016년 최재형 감사원장은 필리핀 선교를 갔을 때 현지 아이들에게 선물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선교를 담당했던 남진희 신촌교회 목사는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사진=신촌교회 제공. — 바람개비요? “그냥 돌려보낼 수 없으니 바람개비라도 주자는 거였어요. 바람개비 중에는 행사하느라 구겨진 것도 있고 그랬거든요. 빨리 애들한테 줘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최재형 장로님은 바람개비를 하나씩 하나씩 다 확인하시더라고요. 구겨진 걸 일일이 편 다음에 제대로 돌아가는지까지 확인하신 거죠. 장로님은 ‘우리가 선교를 하러 왔으니 아이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거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는 장로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끼리 피드백을 하면서 장로님의 그런 모습을 상기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을 정도니까요.” 남진희 목사는 최재형 원장의 이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있다고 했다. 기자는 그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필리핀 선교지에서의 최재형 원장은 판사도 장로도 아니었다. 그곳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순수한 모습으로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남 목사는 필리핀 선교 당시 최재형 감사원장이 적은 기도 제목도 보여줬다. 필리핀 선교를 떠남에 있어 일종의 ‘마음가짐’을 적은 글이었다. 최재형 원장의 기도 제목은 ‘선교 과정이 정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주님의 마음으로 필리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남진희 목사는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필리핀 선교지에서 짐을 옮기는 최재형 감사원장. 남진희 신촌교회 목사는 최재형 원장을 “늘 솔선수범하는 분”이라고 했다. 사진=신촌교회 제공. “선교를 갔던 필리핀 불라칸(Bulacan)은 제대로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 아니에요. 빈민가죠. 사실 씻는 것도 아주 불편해요. 물이 제대로 안 나오는 곳이니까요. 잠자리도 불편해 남자들은 조그마한 예배당에 대충 매트 깔고 누워 자야 하는 상황이죠. 최재형 장로님은 그런 곳에서 그냥 주무세요. 절대 숙소를 따로 잡지 않으세요. 다른 데에서 잠시 쉬었다가 행사 때 잠깐 얼굴 비치는 그런 것도 없어요. 공항 출발부터 현지(現地)에서까지 우리랑 똑같이 참여하는 거죠. 짐을 나를 때에도 더 솔선수범하세요. 거기 기자가 있겠어요, 아니면 감시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평소랑 똑같이, 그리고 진심을 담아 행동하시는 겁니다.” — 침식(寢食)을 같이했으니 ‘날것 그대로의’ 최재형 원장을 많이 봤겠습니다. “하루는 일정이 끝나고 저녁에 최재형 장로님은 물론 교역자들이 다 함께 샤워를 했어요. 물 사정이 안 좋으니 찔끔찔끔 나오는 물로 다 같이 씻고, 등 밀어주고 그랬죠. 사실 장로님도 연세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발가벗고 샤워하는 게 쑥스러울 수 있잖아요. 장로님은 그런 권위의식이 없어요. 그냥 허물없이 함께 샤워를 했어요. 그러곤 다 같이 선풍기 켜고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죠.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예수’ — 아까 말한 소탈함이 그런 모습인 거 같습니다. “소탈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하죠. 그냥 적선(積善)하듯이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거죠.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호흡하고 생활하는 그런 장로님의 모습에서 우리도 완전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는 ‘작은 예수’라는 말이 있어요. 예수가 그랬듯 작은 자, 보잘것없는 자를 진심을 다해 섬기는 사람들을 흔히 ‘작은 예수’라고 일컬어요. 아마도 최재형 장로님이 ‘작은 예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 감사원장이 된 후에도 뵌 적이 있습니까. “1부 예배 ‘호산나 성가대’에 매주 나오셨어요. 지금은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가 됐지만, 그전까지는 성가대 활동을 계속하셨어요. 감사원장 취임 후, 우리 교회 부교역자(부목사)들을 초대해줘서 (감사원에) 한번 간 적이 있어요. 가면 직접 원두커피를 내려주세요. 장로님이 커피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좋은 원두 있으면 우리에게 나눠도 주세요. 장로님 중에는 일부 공직(公職)을 맡으면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내려놓는 경우가 많아요. 최재형 장로님은 교회에서 맡은 봉사에 다 참석하세요. 근데 본인이 드러나는 자리는 안 가세요.(웃음) 농어촌 선교 같은 데 가면 앞에 나가서 몇 마디 이야기할 법도 한데 그런 건 전혀 안 하세요. 이분이 집중하는 건 딱 두 가지, 전도(傳道)와 봉사입니다.” — 부인 이소연씨는 어떻습니까. “부인도 장로님과 똑같아요. 신앙심이나 인품 전부 다요. 우리 교회에서 주방 봉사를 하세요. 원래 장로님 댁이 서울 목동입니다. 이소연 권사님은 목동 지역에서 집사 두 분이랑 같이 협력하면서 그 지역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세요. 아주 화기애애하고 분위기가 좋은 곳입니다.” 가족 그 이상의 가족… 두 아들 이야기 최재형 감사원장이 어린 막내아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과자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진=부인 이소연씨 페이스북 두 아들의 ‘입양’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명훈 변호사는 기자에게 “최재형 원장을 말할 때 기독교와 관련해 꼭 얘기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는데,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입양’이었다. 최재형 원장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고, 그 밑으로 아들 둘을 각각 2000년(차남)과 2006년(장남) 입양했다. 흔히 ‘가슴으로 낳아 기른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최재형 원장 부부는 한 명이 아닌 둘을 자녀로 받아들였다. 여기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최영섭 대령이 말하는 ‘입양 스토리’다. “며느리(이소연씨)가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던 고아(孤兒)들을 기르는 기관에서 봉사를 했어요. 거기서 핏덩어리를 맡아 1년 정도 봉사 차원에서 키웠는데, 그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죠. 그렇게 받아들인 아이가 지금의 둘째 아들이에요. 내가 재형이한테 그랬어요. ‘네 나이가 이제 50줄에 접어드는데 괜찮겠냐’고요. 재형이 부부는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더라고요.” 최영섭 대령은 손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재형이 첫째 아들이 나처럼 해군에 입대했잖아요. 근데 이 녀석이 사격에서 1등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중에 갑판병으로 배정될 때에도 10등 이내로 들어갔다고 하대요. 손자 두 놈이 나를 좋아해요.(웃음) 그중 큰놈이 나한테 ‘할아버지 제가 군대에서 배운 게 있어요’ 그러대. ‘뭐냐’고 물었더니 ‘인생을 사는 데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리워드(reward·보상)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대요. 큰놈은 손재주가 있어서 지금 패션 디자인 계통에서 일하고 있어요. 재형이 부부가 두 아들을 살뜰하게 키웠어요. 그건 내가 너무 잘 알지.” 최재형 감사원장 부부가 ‘가슴으로 낳은’ 두 아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는 건 여러 계통으로 확인이 된다. 과거 최재형 원장 부부와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던 한 법조인의 회고다. “최재형 원장은 제가 살던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사셨어요. 막내아들이 초등학생 때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하루는 막내아들이 등교하면서 준비물을 두고 집을 나섰나 봐요. 그랬더니 (최재형) 원장님 부부가 집 밖에까지 나와 챙겨주더라고요.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그저 ‘친아들 챙겨주고 있겠거니…’ 했을 거예요. 최재형 원장 부부는 아들들에게 헌신,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 ‘가슴으로 낳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최재형 원장의 차남은 지난 8월 17일 육군에 입대했다. 그래서일까. 최재형 원장 카카오톡 계정에는 ‘○○야 힘내라’라고 써 있다. 여기서 ‘○○’(이)가 바로 최 원장 차남이다. 극진한 ‘아들 사랑’은 아내 이소연씨의 페이스북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2월 25일 이소연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한 대목이다. 〈즐거운 꿈을 또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딸 두 명의 엄마라 할 때, 제 맘속에는 항상 딸들뿐 아니라 아들들이 내게 있을 거 같은 그 당시로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 수도 없었던 소망을 주께서 주셨던 거 같아요. 우리 막내 ○○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손목이 부러지기 전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의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가 어릴 적 엄마를 쳐다보던 그 눈길에서 저는 주님이 날 보시면 이리 사랑스런 눈으로 보실 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들을 보내려니 허전합니다. 날개를 달고 넓은 곳으로 비상하려는 우리 아들 축복해주며 웃으며 보내주렵니다.〉 “내가 받은 상처 많아 아들들을 일반 학교에 넣고 싶지 않았다” 차남(막내아들)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기독교 계열 학교로 진학했다. 이소연씨는 차남을 이 학교에 입학시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14년 2월14일자 페이스북 글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은 늘 ‘멀기만 한 당신’이셨다. 고등학교 때는 특히 힘들었다. 잔디를 아이들이 모르고 밟으면 잔디에 백 번씩 절하라는 학교, 조회시간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불려 나가 전교생 앞에서 뺨 맞는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눈 마주치면, 지난 시간에 배운 거 물어봐서 모르면 교실 끝에 밀려가도록 때리던 선생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두려움이 생기곤 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많아서인지, 나는 내 아들들을 일반 학교에 넣고 싶지 않았다…. 자존감이 낮은 우리 아이들이 받는 대우를 미리부터 너무 겁먹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참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차남)가 6년을 다니던 학교를 떠나 하얼빈이라는 먼 곳에 있는 만방학교로 간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여셨다. 오늘 종업식으로 드림학교, 이 정든 아름다운 학교를 떠난다. 교장 선생님, 선생님들의 퇴임식이 아이들과 선생님, 엄마들의 눈물 바다가 되었다.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늘 간식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는 선생님들, 내가 엄마인지 선생님이 헷갈릴 정도로 아이를 이해해주시던 선생님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늘 장점으로 격려해주시던 분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 써주시는 교장 선생님.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늘 기도하시는 우리 사랑스러운 선생님들. 고마워요. 당신들의 사랑의 수고로 우리 아들들, 아니 저까지 치유받고 떠납니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이소연씨가 2012년 3월 7일 남긴 글에서도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배어 나온다. 〈○○(장남)이가 두레자연학교에 입학을 했다. 자기는 안 춥다고 고집부리며 이불도 안 가져간 아들이 추워진 날씨 때문에 걱정스럽다. 에구 옷이라도 입고 자겠지…. ○○(차남)는 지각할까 봐 노심초사 5시 반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면 나간다. 오늘도 8시에 도착했다고 기쁜 목소리로 전화 왔다. 학교가 멀지만 씩씩하게 다니는 ○○가 고맙다.〉 이소연씨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했다. 이소연씨의 선친이자 최재형 감사원장의 장인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중견 기업을 운영했던 고(故) 이해원(2015년 별세)씨다. 장녀인 이소연씨 밑으로 여동생 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Here I stand, help me God!’ 지난 9월 2일 최재형 원장의 동생 최재민(62) 원장을 찾았다. 최재민 원장은 서울 양재동에서 소아과를 운영 한다. 최재민 원장을 찾은 이유는 동생이 생각하는 형의 모습이 궁금해서였다. 남자 형제끼리는 서먹한 듯하면서도, 때론 흉금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묘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재민 원장은 “나하고 형은 특별한 추억이 없다”며 “병원에 환자들 외에 다른 사람이 와선 곤란하다”며 기자의 방문에 난색을 표했다. 때마침 이날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생일이었다. 최재민 원장은 형(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여주며 별말 없이 “읽어 보라”고만 했다. 최재민 원장은 형의 생일을 축하하며 ‘미션(mission·사명)’을 강조하고 있었다. 최재민 원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형이 감사원장으로서, 지금 국가 현안을 다루고 있는데 그게 형에게 부여된 미션이죠. 그 미션을 사심(私心) 없이, 무엇이 최선인지 국민의 입장에서 현명히 판단해달라는 당부를 담은 겁니다. 이런 간단한 메시지 외에 형과 전화통화도 안 합니다. 혹시라도 불이익이 갈까 봐요.” 최재민 원장은 지난 7월 29일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보낸 메시지도 보여줬다. 이날은 최재형 감사원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날이었다. 최재형 원장이 월성 1호기 감사 과정과 관련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며 여당 의원과 설전(舌戰)을 벌인 바로 그날이다. 최재민 원장은 국회 출석을 앞두고 있는 형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메시지 속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했다는 ‘Here I stand, help me God’이라는 말이 써 있었다. 최재민 원장은 이 메시지를 보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잖아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가 마르틴 루터를 만나자고 했어요. 황제가 루터에게 (종교개혁에 관한) 신념을 버릴 것을 종용하려고 부른 거죠. 황제는 하루의 시간을 더 줍니다. 다음 날 루터는 황제 앞에서 ‘하나님 제가 교황 앞에 서 있지만, 저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겠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육신은 저 사람(교황)에게 있지만, 제 마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저를 살펴주십시오(Here I stand, help me, God!)’라고 부르짖은 겁니다. 즉 진리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배반하지 않겠다는 마르틴 루터의 고백을 형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파문(破門)을 당해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어 지내야 했다. 숨어 있는 동안 루터는 일반 시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것이 훗날 ‘면죄부(免罪符)’를 팔며 타락했던 구교(舊敎)에서 신교(新敎)가 갈라져 나오는 종교개혁으로 승화됐다. 父親이 최재형 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사자성어 최영섭 대령이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써준 네 개의 사자성어. 단기출진(單騎出陣) 불면고전(不免苦戰) 천우신조(天佑神助) 탕정구국(蕩定救國). 위 사진 역시 최영섭 대령이 친필로 기자에게 써준 것이다. 기자는 이 문자 메시지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 마르틴 루터가 처해 있던 500여 년 전 상황과 최재형 원장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 봤다.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 진리란 무엇이었고, 최재형 원장에게 있어 진리는 무엇일까.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한 최재형 원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친 최영섭 대령이 한 말도 문득 떠올랐다. 최영섭 대령은 최재형 원장이 감사원장으로 발탁됐을 때, 특별히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사자성어를 써줬다고 한다.(해석은 기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단기출진(單騎出陣) 홀로 진지를 박차고 나가면, 불면고전(不免苦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천우신조(天佑神助) 그럴 때 하늘(하나님)에 도움을 구하면, 탕정구국(蕩定救國) 나라를 안정시키고 구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최영섭 대령은 최재형 원장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항상 “의연하게 살라”고 가르쳐 왔다고 했다. 마르틴 루터가 한 말과 최영섭 대령이 일러준 네 개의 사자성어, 그리고 ‘의연함’은 최재형 원장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최재형 원장이 나아갈 방향까지도 미리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2021년 4월 19일 월요일

이인호 전 주러대사 “문재인 집권 후 한국은 포퓰리즘의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공화국의 생존 위협당해”

미 의회 사상 첫 ‘한국인권’ 톰 랜토스 청문회 증인으로 선 이 전 주러대사 증언 전문 번역 “박근혜 탄핵은 정상적 정권교체 아닌 혁명적 쿠데타” “보궐선거에서 야당 승리했으나 문재인 정권의 과두 집권층은 준사회주의 일당 독재체제 강화할 것” 지난 15일(현지시간) 미 하원의 초당적 기구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사상 처음 ‘한국인권’을 주제로 개최한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 이인호 전 주러대사(서울대 명예교수)의 연설이 화제다. 드물게 보는 명문인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의 상황적 진수를 용기있고 감동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대사는 청문회 모두에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조국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 상황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경고를 인식했기 때문에 나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다”며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조국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미국의 친절한 우려의 주제로 또다시 떠올랐다는 것에 저는 깊은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서 미 의회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증언을 해야 하는 개인적 딜레마와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이 전 대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정상적 정권교체 아닌 혁명적 쿠데타”이며 “촛불시위의 결과는 대한민국이 1948년 반공산주의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탄생했고 여전히 그러한 국가로 존재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남자에게 최고 권력을 넘겨준 것”이라며 과감하게 역사적 진실을 밝혔다. 그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임명으로 인해 일반 대중들이 문재인 정권에 대해 실망하고 깨어나기까지 문재인 집권 4년 간 거세게 휘몰아쳤던 적폐청산의 광기와 임종석과 같은 극좌세력들의 정권 중심부 진출, 언론통제, 사법부 장악, 친북친중 행보, 대기업 압박, 사회분열, 코로나 팬데믹을 이용한 반정부 시위 억압 등을 집약적으로 묘사했다. 이어 지난해 4.15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뒤 더욱 과감해진 문 정권과 집권여당이 ‘반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색채’와 일당독재의 전형인 오만함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면서 대북전단금지법과 5.18특별법, 공수처법 등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들을 줄줄이 통과시킨 것을 기술했다. 이어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탈북민들을 포함해 북한주민들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 할지라도, 김정은의 뜻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문재인의 결심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5.18 특별법에 대해서는 “정치적 토론의 자유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유에 내려진 사형선고에 버금간다”고 했다. 공수처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자신의 측근을 향한 공정한 조사와 기소를 막아줄 무제한적 권한을 부여하게 될 것”이며, 국정원법 개정안은 “한국의 국가정보원(NIS)으로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조사할 권한을 박탈하는 법으로, 북한과 중국 공산당 요원들이 한국에서 발각될 위험 없이 활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 대사는 문재인 정권을 ‘포퓰리즘적 전체주의’로 규정하면서 지난 4.7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과두 집권층은 그들의 국가 장악 노력을 두 배로 증가시킬 것이며 준사회주의 일당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북한과 중국의 요구를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미얀마의 경우처럼 군복을 입은 사람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는 그 위협을 인식하기가 쉽지만 민주화 투사의 망토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선동됐을 때는 그 위협을 찾아내고 예견하기가 훨씬 어렵다”며 “미국이 지난 많은 세월 동안 그토록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길러왔던 자유라는 꽃이 적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다면 우리 조국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재앙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사의 이날 증언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개인에게 쏟아질 비난과 중상모략조차 감수한 노학자의 절규로 들렸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다음은 이인호 전 주러대사 증언 전문 및 번역 Congressman Chris Smith, Congressman James McGovern, and other members and staff of the Tom Lantos Human Rights Commission, I would like to begin by expressing my sincere appreciation for your decision to address the issue of civil and political rights in the Republic of Korea, and for inviting me to testify. 크리스 스미스 의원님, 제임스 맥거번 의원님 그리고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의 모든 위원님들과 스태프 여러분께 저는 한국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해 논의하려는 결심을 내려주신 것과 저를 증인으로 초대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어린 감사를 표현하며 증언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As a citizen of the Republic of Korea, I fell deeply pained and ashamed that my own country has again emerged as the subject of friendly concern in the United States, Korea’s foremost ally. This hearing is a continued expression of the same spirit of human solidarity and determination to safeguard the cause of freedom that inspired Americans some seventy years ago to sacrifice their lives to save a newly born liberal democratic country and continues to cement our alliance.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조국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미국의 친절한 우려의 주제로 또다시 떠올랐다는 것에 저는 깊은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청문회는 인류 공동의 연대와 약 70년 전 새롭게 태어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준 자유라는 대의를 보호하고 우리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결심과 같은 정신의 지속적인 표현입니다. Testifying against my government in a foreign setting, I run the risk of being branded an “American stooge” by some vociferous critics. I accepted the invitation because I recognize with alarm that the state of civil and political rights in my country is not what it appears to be on the surface. Without timely attention and strategic assistance from friendly neighbors sharing a commitment to freedom and democracy, the 50 million people living in South Korea may be lulled by the tempting slogan of “peace with North Korea at any cost.” This would set us on a path certain to bring about a sudden decimation of South Korean’s human rights through an unprepared merging with the nuclear-armed but oppressed and starving North Koreans. 외국에서 한국 정부에 반하는 증언을 하기 위해 저는 일부 거친 비판자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나는 조국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 상황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경고를 인식했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공유하는 친절한 이웃들로부터 시의적절한 주의와 전략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한국에 살고 있는 5천만 시민들은 “북한과의 무조건적 평화”라는 유혹적인 슬로건에 안도할지 모릅니다. 이는 핵무기로 무장하고 억압받고 굶주린 북한주민들과의 준비되지 않은 병합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갑작스러운 인권침해를 불러오는 것이 확실한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I do not think that any country can or should intervene in purely internal affairs of another but believe that when freedom and democracy are threatened everywhere in the world as now, sharing reliable information and pulling all the available resources globally together is vital to the sustenance of our common cause. 저는 어느 국가나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개입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과 같이 전 세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공유하며 지구적으로 함께 가능한 자원들을 모으는 것이 우리 공동의 대의의 지속에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 Just as communism was collapsing in Russia and Europe, in the early 1990s, the Republic of Korea, with its successes at both economic rise and political democratization, emerged as the model country to be emulated and living proof of the superiority of the free democratic system of governance. 1990년대 초 러시아와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은 경제적 부상과 정치적 민주주의화에 있어 모두 성공함으로써 모방의 대상이 되는 국가이자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 정치체제의 우월성의 살아있는 증거로 떠올랐습니다. Four years ago, Korea again drew the attention of the whole world by impeaching the first woman president the new democracy had proudly elected. The sensational development, christened as the “candlelight revolution” by its promoters, was hailed by the press as proof of the robustness of democracy at work in Korea. Inside Korea, however, it took less than two years before many thoughtful citizens, including some who had participated in the candlelight protest against President Park Geun-hye, began to wonder if they had not made a grave mistake in staking high hopes on Moon Jae-in’s promise to create “a country that no one has experienced before.” Persons with vivid memories of the Korean war, especially, are now fearful that the country is headed for populist totalitarianism and that the very survival of the Republic as an independent country is threatened by intense pressure from an increasingly arrogant China and a nuclear-armed, but abjectly poor, North Korea. 4년 전 한국은 새로운 민주주의가 자랑스럽게 선출했던 첫 여성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또 다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지자들에 의해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충격적인 발전에 대해 언론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견고함이 작동하고 있는 증거라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내부에서는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많은 생각이 깊은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항해 촛불 시위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을 일부 포함해, 그들이 문재인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에 커다란 희망을 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은 특히 이 나라가 포퓰리즘의 전체주의 국가로 향하고 있으며 더 오만해지는 중국과 핵무장을 했으나 비참하게 가난한 북한으로부터의 강도 높은 압력에 의해 독립국가로서의 공화국의 생존이 점점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However, such pessimistic voices, rarely catch the ears of outsiders because no major South Korean media channel was free enough to give space to views directly opposed to the official government position and the loud populist current. The aura emanating from the “mandate of the candle” was at first so strong that anyone daring to criticize the politics of the Moon government was likely to bring upon themselves, if not an official reprisal, the wrath of a modern Korean equivalent of the Red Guard.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들은 외부인들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주요 미디어 채널들은 공식적인 정부의 입장과 시끄러운 포퓰리스트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견해들을 보도할 만큼 충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촛불의 명령”이 발하는 아우라는 처음에 너무 강해서 감히 문재인 정권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은, 공식적인 보복이 아니라면, 홍위병과 맞먹는 현대 한국인들의 분노를 스스로에게 불러올 것 같았습니다. If one is to understand the peculiarities informing the current civil and political rights situ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at the impeachment of President Park was a revolutionary coup d’etat, not a normal change of presidential administrations. What the vast majority of the candle-holding crowd expected was an apology from or resignation of the woman president about whom they felt disappointed and ashamed because of the scandal involving her wardrobe manager. The outcome of the candlelight demonstrations, however, was handing over of supreme power to a man who openly denies the historical fact that the country of which he became president was and still is an anti-communist liberal democratic republic launched in 1948. Characteristically, when President Moon visited North Korea in 2018, he stood before Kim Jong-un and a cheering North Korean crowd calling himself not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but the “President of the southern side.” 현재 한국의 시민적 정치적 인권 상황으로부터 유래하는 특징을 이해하고자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정상적인 대통령제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혁명적 쿠데타였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든 대다수 군중들이 기대한 것은 여성 대통령의 사과 또는 사임이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의 의상 담당자와 관계된 스캔들 때문에 실망하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결과는 그가 대통령이 된 국가가 1948년 반공산주의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었고 여전히 그러한 국가라는 역사적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남자에게 최고 권력을 넘겨준 것이었습니다. 특징적으로 2018년 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는 김정은과 환호하는 북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남측 대통령”이라고 불렀습니다. With the hindsight of five years, many Koreans now suspect that the intent of Moon Jae-in’s ruling circle was from the beginning not the elevation of Korean’s liberal democracy to a hight level as the majority of those who ha voted for him expected but rather its systematic undermining. Moon’s government, however, was not so candid about the hidden intention behind their radical undertaking as some of its ideological advocates were. Anti-corruption, economic justice, people’s right over the presidential power, peace at any cost, clean environment were unobjectionably attractive slogans held up as the “mandate of the candle,” while two former Presidents-Park Geun-hye and Lee Myong-bak, a former Chief Justics-Yang Sung-tae, three former chiefs of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NIS)-Nam Jae-jun, Lee Byong-kee, Lee Byong-ho, and heads of many large business corporations starting with Lee Jae-yong of Samsung were thrown into prison. Nuclear power plants, considered to be the safest and economically most competitive in the world, were ordered to be dismantled. It was a sort of revolutionary euphoria, in which the media and civil society alike played the chorus, and no one dared to object to the sudden overturning. 5년 동안의 뒤늦은 깨달음 뒤에 많은 한국인들은 현재 문재인의 집권 여당의 의도는, 문재인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기대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지지자들의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혁명적 작업의 뒤에 숨겨진 의도에 대해 솔직하지 않았습니다. 적폐청산, 경제적 정의, 대통령의 권력 위에 존재하는 국민의 권력, 무조건적 평화, 깨끗한 환경은 “촛불의 명령”으로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슬로건이었으며, 이 와중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박근혜와 이명박), 전직 대법원장(양승태), 세 명의 전직 국가정보원장(남재중, 이병기, 이병호), 그리고 삼성의 이재용과 같은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구속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것으로 알려진 원전은 해체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혁명적 환희였으며, 언론과 시민사회가 똑같이 합창했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갑작스러운 전복에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Moon Jae-in won the presidential election by promising to cut down on what he termed the “imperial power” of the presidency. Once in power, however, he moved in just the opposite direction. Power concentrated in his Blue House. Besides the former top leaders accused of high crime, over one hundred lesser figures have also been arrested or brought to trial under charges which, with rare exceptions, amounted to little more than having faithfully served the precious government with its anti-communist thrust. Almost everyone who had been appointed to top posts in any government of semi-governmental organization, especially the major broadcasting corporations such as KBS and MBC, was hounded out of his or her position. Many individuals chose to commit suicide instead of having their honor and family destroyed. 문재인은 자신이 “제왕적 권력”이라고 이름붙인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자 그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권력은 문재인 청와대에 집중됐습니다. 중대 범죄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반공주의적 추진력으로 이전 정부를 충실하게 섬겼던 100명이 넘는 고위직들이, 거의 예외없이 체포되거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정부나 공공기관, 특히 KBS와 MBC와 같은 주요 방송사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명예와 가족이 파괴되는 것을 보는 대신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The positions thus vacated were filled promptly with persons most of whom belonged to a few specific far-leftist circles since their university years. The most notable case was the appointment of Im Jong-suk as chief of the presidential administration. Im had been a prominent leader of the pro-North underground student circle, the National Liberation faction, which trained its members to worship the founder of North Korea’s Kim Il-sung dynasty as the true embodiment of Korea’s national spirit. To them, the Republic of Korea was little more than an American colony that should not have been recognized as an independent country. 비워진 그 자리는 곧 대학시절부터 극좌세력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채워졌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임종석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입니다. 임종석은 친북 지하 학생 조직인 민족해방(NL)계열의 유명한 리더였습니다. 이 조직은 소속 학생들이 북한의 김일성 왕조의 창시자를 민족정신의 진정한 화신으로 숭배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 이상이 아니었으며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After four years of Moon’s radical populist politics, the Republic of Korea remains a free democratic country in the sense that elections are regularly held. Despite the profuse democratic verbiage, however, all the accepted procedural norms of policymaking and appointments have been discarded. Huge corruption scandals continue to erupt and often end up with ill-explained and under-investigated suicides of prominent personages. There is increasing, pervasive fear of unexpected blows to come, whether from the political, economic, or social directions. South Korea has become sharply divided into pro-Moon and anti-Moon camps, and people talk in hushed voices even among close friends. 문재인의 4년 동안의 급진적 포퓰리즘 정치 이후 한국은 정기적으로 선거가 실시된다는 점에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민주주의적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과 임명과 관련해 그동안 인정받았던 모든 절차적 규범들은 폐기됐습니다. 거대한 부패 스캔들은 계속해서 발생했으며 설명이 잘 안되고 조사되지 않은 저명한 인물들의 자살로 마감되었습니다. 정치계나 경제계, 또는 사회적 측면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있으며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재인을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으로 날카롭게 나뉘어졌으며 사람들은 심지어 친구 사이에서도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합니다. The most comprehensive loss suffered by the entire nation is the right to reliable information and freedom to communicate honestly with their government and with each other. The vast majority of older citizens still regard liberal democracy, the market economy, and the ROK-US alliance to be the three pillars buttressing their country but that is at odds with the pro-North and pro-Chinese direction in which the Moon government is headed. The “sovereign people” have become objects of manipulation through constant propaganda and, during the election season especially, outright bribery as both taxes and national debt keep rising sharply. Artful control of the mass media and cultural, and educational venues are hallmarks of the Moon government earning the name “theater state.” Even YouTube channels cannot escape government interference. 이 나라가 겪은 가장 큰 손실은 신뢰할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와 정부 및 서로 간에 정직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장년층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한미동맹이 한국을 지탱하는 세 가지 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문 정권이 지향하는 친북, 친중 방향과 불화합니다. “주권자”는 끊임없는 프로파간다와 특히 선거 기간에는 노골적인 뇌물을 통해 조작의 대상이 되었으며 세금과 국가 채무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와 문화와 교육 현장에 대한 예술적 지배는 문 정부에 “극장 국가”라는 이름을 가져다 준 고유한 특징입니다. 심지어 유튜브 채널도 정부의 간섭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The next touchstone of democracy to go was equality before the law and the fair trial. As more and more courts are headed by judges drawn from specific formerly dissident circles, a double standard in court judgments has become prevalent. President Moon had set up five criteria to be used when making governmental appointments but none of his ministerial appointees met them. If the same stringent legal and moral criteria used in prosecuting the officials of the former governments were to be applied to Moon’s people, most of them would now be sitting in prison. 민주주의의 앞날을 예상할 수 있는 다음 시금석은 법 앞의 평등과 공정한 재판이었습니다. 재판정의 수뇌부가 점점 더 반체제 조직에 가담했던 재판관들로 채워지면서 재판에 있어 이중잣대가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공직자 임명의 5가지 기준을 정했지만 그가 지명한 장관들 중 그 기준을 만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 행정부 관리들을 기소할 때 적용했던 것과 똑같은 엄중한 법적, 그리고 도덕적 기준을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 적용했다면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 감옥에 가있을 것입니다. Korea’s general public woke up to the danger president Moon represented when he insisted on appointing as Minister of Justice Cho Kuk, his Blue House counsel and unrepentant former member of a revolutionary circle, every though he and his wife were facing serious moral and legal chargers. Massive anti-Moon demonstrations began to take place. Resistance to Moon’s increasingly arbitrary exercise of power grew even among his erstwhile supporters, including, notably, Attorney General Yoon Seok-youl and Inspector General Choi Jae-hyung, both Moon’s own appointees.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자 전직 혁명 세력의 일원으로 전향하지 않은 조국을 법무부장관에 임명하자 한국의 일반대중은 문 대통령이 대표하는 위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반문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문재인의 증가하는 독단적 권력 행사에 대한 저항은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그의 지지자였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검찰총장 윤석열과 감사원장 최재형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문재인이 직접 임명한 사람들입니다. The Moon government, however, shows no sign of relenting. Instead, using the virus pandemic as an excuse to put down any resistance movement, and emboldened by the electoral victory by which the ruling party secured a surprising 3/5 majority in April 2020, it began openly to exhibit its anti-liberal ideological color and arrogance typical of one-party dictatorships. The government party started to churn out packet after packet of new laws designed to put an effective end to what remained of civil rights and economic freedoms. The ousted President Park was given the final sentence of 22 years of imprisonment and a fine and indemnity payment amounting to over 20 million dollars and the head of Samsung was again imprisoned although no clear evidence of a crime was found against either of them. 그러나 문정권은 누그러지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바이러스 팬데믹을 반정부 운동을 억압할 명분으로 이용하면서, 2020년 4월 총선에서 국회 의석의 5분의 3을 차지했던 선거에 과감해져서, 문 정권은 반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색채와 일당 독재의 전형인 오만함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여당은 시민의 권리와 경제적 자유로 남은 법들을 효과적으로 끝장내기 위해 연이어 새로운 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축출된 박 대통령에게는 최종적으로 22년 형이 선고되었으며 2천만 달러 이상에 달하는 벌금과 보상금 지급이 선고됐습니다. 삼성의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나 그와 관련된 범죄의 분명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구속됐습니다. Of these new enactments detrimental to the cause of freedom, the first to catch the attention of this commission seems to be the law criminalizing the sending of information balloons to North Korea. It is only a cap put on the Moon government’s steady refusal to endorse the UN efforts to intervene in North Korea’s human rights situation and reflects his determination not to do anything against the wishes of Kim Jong-un, even on matters affecting the life and death of Korean citizens including refugees from the North. Officially enshrined as the “5.18 democracy movement,” the tragic incident is seen by many witnesses and researchers as a student movement for democracy which was exacerbated into a massive anti-state insurrection through undercover incitement and participation of North Korean agents. This new law is tantamount to a death sentence to academic freedom as well as political freedom of discussion. The idea that historical truth can be regulated by law spells an end to rational thinking on the part of the lawmakers-a frightening prospect. 자유라는 대의명분에 해로운 새 법률들 가운데 이 위원회의 주목을 처음으로 끈 것이 북한으로 정보를 실은 풍선을 날리는 것을 범죄화하는 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문 정권이 북한의 인권 상황에 개입하려는 UN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을 꾸준히 거부한 것이자 심지어 그것이 탈북민들을 포함해 북한주민들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 할지라도, 김정은의 뜻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문재인의 결심을 반영합니다. 동일한 정도로, 만일 더 심하지 않는다며, 불길한 것은 1980년 광주사태에 대해 집권 여당이 선호하는 버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만드는 법입니다.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신성시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많은 증인들과 연구자들은 학생 민주화 운동이 비밀 선동과 북한군의 참가로 인해 대규모 반정부 봉기로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법은 정치적 토론의 자유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유에 내려진 사형선고에 버금갑니다. 역사적 진실이 법률 주문에 의해 규제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입법자들의 입장에서 이성적 생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며 이는 두려운 전망을 불러일으킵니다. Another particularly dreadful act established the Corruption Investigation Office for High-ranking Officials(CIO). Under the direct control of the President, it will have an exclusive, irrevocable right to investigate and prosecute any high-ranking official charged with a misdemeanor, including judges and military generals. Officially promoted as an organ designed to root out corruption and abuse of power, in the context of current partisan politics, CIO will give the president unlimited power to shield his close associates from impartial investigation and prosecution. Still another law deprives Korean’s national security agency, the NIS, of the right to probe into pro-communist activities and makes it possible for the agents of North Korean and Chinese communist parties to operate in Korea without any fear of being caught-this when South Koreans are forbidden even to send information balloons to North Korea. 또 다른 특히 두려운 법률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CIO)입니다. 대통령의 직접적인 통제에 놓인 공수처는 비행으로 기소된 고위공직자들을, 판사와 장군들을 포함해, 조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부패와 권력 남용을 뿌리 뽑는 기관으로 홍보되었지만 작금의 파벌정치에서 공수처는 대통령에게 자신의 측근을 향한 공정한 조사와 기소를 막아줄 무제한적 권한을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법은 한국의 국가정보원(NIS)으로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조사할 권한을 박탈하는 법으로, 이 법은 북한과 중국 공산당 요원들이 한국에서 발각될 위험 없이 활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법은 대북전단법과 함께 통과됐습니다. The landslide victory of the opposition party candidates in the by-election held on April 7, this year, show that the Korean voters finally woke up from the populist spell by the Moon government and started to reclaim lost territory. Yet winning back mayoral posts in Seoul and Busan does not bring about a reduction in the nu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seats occupied by the ruling party. The governing oligarchy will only redouble their effort to solidify their grip on the country and keep making new laws to strengthen their quasi-socialist one-party dictatorship and better cater to the demands made by North Korea and China. 올해 4월 7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한국 유권자들이 문 정권의 포퓰리즘 주문(呪文)에서 마침내 깨어나 잃어버린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 시장직을 얻은 것이 국회에서 집권 여당의 숫자를 줄이는 것은 아닙니다. 과두 집권층은 그들의 국가 장악 노력을 두 배로 증가시킬 것이며 준사회주의 일당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북한과 중국의 요구를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 것입니다. Threats to freedom and democracy are easy to perceive when they come from persons donning military uniforms as in Myanmar, but much more difficult to detect and forestall when instigated by persons wearing the mantle of democracy fighters. I have to admit ruefully that the Republic of Korea, despite its economic superiority, lost the war of propaganda and agitation to North Korea. I sincerely hope that the United States will awaken to the alarming situ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today. It would be a disaster not only for my country but for the United States as well, if the flower of freedom, so carefully nourished by America for so many years at such great expense, were to fall under the control of its foes. If a country of 50 million is left to slide into a totalitarian society from being a vibrant liberal democracy in this pivotal corner of the global community, nowhere will freedom remain safe and secure. I thank you for your attention. 미얀마의 경우처럼 군복을 입은 사람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는 그 위협을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투사의 망토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선동됐을 때는 그 위협을 찾아내고 예견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이 경제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선전선동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슬프게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저는 미국이 오늘날 한국의 경악스러운 상황에 깨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미국이 지난 많은 세월 동안 그토록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길러왔던 자유라는 꽃이 적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다면 우리 조국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재앙이 될 것입니다. 만약 5천만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전 세계에서 중심축을 형성하는 자유롭고 활기찬 민주주의국가로부터 전체주의 사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어느 곳에서도 자유는 안전하고 무사하게 남지 못할 것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펜앤드마이크 출처 명기한 전재 및 재배포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