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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4일 수요일

아름다운 순간들

Not many people know that the phrase, “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 was coined by an American by the name of Fredrick R. Barnard to commend the effectiveness of graphics in advertising. However, there’s a Chinese proverb which states that “one picture is worth ten thousand words,” and when it comes to the following pictures, we tend to think that the latter is more appropriate. We’re sure that you’ll ag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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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idcow 

2018년 6월 23일 토요일

“정부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나눠 줘 경제가 성장한다? 있을 수 없는 일” - 趙淳 전 부총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保守는 나라의 뼈대이자 아이덴티티

⊙ 부총리로 재직 시, 자택에서 관악산 넘어 과천청사로 출근… ‘산신령’ 별명 생겨
⊙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원론》 1974년 간행… 지금까지 전면개정 10판 찍어. 저자도 조순·정운찬·전성인·김영식 등 4인 共著
⊙ “조순 후보의 눈썹이 희고 강직하니 포청천으로 하는 게 어때요?”
⊙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에 최저임금 강요하면 해를 못 넘겨. 좋지 않은 정책은 아무리 기다려도 더욱더 나빠져”
⊙ “기본적으로 북한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해”
⊙ “보수 기치를 든 사람, 보이지 않아”
서울 관악구 행운동(봉천동) 자택에서 만난 조순 전 부총리. 포청천 상(像)을 곁에 두고 웃고 있다.
  외국서점에 가면 신간서적 코너에 예외 없이 전기(傳記)물이 있다.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간 위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길 좋아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인은 얼마나 전기를 좋아할까.
 
  조순(趙淳) 전 부총리가 10여 년 전에 쓴 〈율곡전서라는 책〉이라는 짧은 글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그 글 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전기는 소설보다 재미있다는 말이 있는데, 인간의 머리가 꾸며내는 스토리가 재미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소설은 조화(造花)지만 전기는 생화(生花)이다.…〉
 
  조순은 인간의 삶이 소설보다 더 위대하고 극적이라는 믿음을 분명 갖고 있는 듯하다. 기자는 이 전설적인 ‘생화’를 만나러 지난 6월 8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으로 향했다.
 
  이 ‘생화’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1967~1988년)와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초대 학장(1975~19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88~1990년), 한국은행 총재(1992~1993년), 서울시 초대 민선 시장(1995~1997년), 한나라당 1대와 2대 총재(1997~1998년), 국회의원(강릉 을구·1998~2000년) 등을 거쳤다.
 
  한때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혔다. 때 묻지 않은 청렴한 이미지가 기성 정치권에 식상한 국민을 설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정글 같은 정치권을 뒤로하고 2000년 이후 정치권과 멀어져 갔다.
 
  조순 전 부총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봉천동에서 살았다. 지금은 행운동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선생의 아호 중 하나는 ‘봉천학인(奉天學人)’이다. ‘하늘을 받드는 학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봉천동에 사는 학자’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집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소나무 두 그루가 대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그가 부총리로 재직할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자택인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청사로 출근했다. 새벽의 산 정기를 받으며 산을 넘었는데, 부총리 시절 경제기획원 직원들이 그런 그에게 ‘산신령’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이 별명에는 그의 눈썹이 하얀 점도 작용했으리라.
 
  기자와 만난 그의 눈썹은 여전히 백미(白眉)였다. 1928년 2월 1일생이니 올해로 꼭 90년을 살았다. 백미의 모습이 인생을 달관한 듯 보였다. 건강해 보였다.
 
 
  奉天學人과 산신령, 골프채 이야기
  
서울 관악구 행운동 조순 부총리의 자택에 걸려 있는 문패.
  — 점심때 뭘 드셨나요.
 
  “점심? 어… 밥하고 (하하하) 된장찌개하고, 또… 구운 갈치 한 토막하고, 그리고 김치 다소하고 야채 절인 것하고 그렇게 먹었습니다.”
 
  — 아침 식단하고 달랐습니까.
 
  “아침 식사는 내가 해 먹고요, 해줄 사람도 없고… 옛날부터 내가 해 먹었어요. 야채하고… 떡 몇 조각, 계란하고… 그렇게 먹습니다. 그러카구(그렇게 하고) 요구르트라든지 두유랑….”
 
  — 골프는 치십니까.
 
  “골프 칠 기회가 있었는데요, 부총리 할 때 어떤 분이 좋은 골프채를 보내왔어요. 내가 그걸 가만히 보관해 놨다가 얼마 후 다시 보냈습니다. 비서에게 ‘그 사람이 잘 받아들이더냐’ 하고 물으니 ‘아주 좋아합디다’ 그래요. (하하하) ‘왜 그리 좋아하더냐’고 하니 ‘좋은 골프채가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했다는 겁니다.
 
  또 한 번 누가 골프채를 보내왔어요. 그렇게 고급은 아니더구먼. 한참 (집에) 오래 두었어요. 한번은 셋째 아이 녀석이 ‘저를 주십시오’ 그런단 말이에요. ‘글쎄, 내가 쓸지 안 쓸지 모르겠네’라고 하니까 ‘안 쓸 것 같으니 저를 주시죠’ 그래요. 가만히 생각하니 또 보낸다는 것은…, 그래서 아들을 줬습니다. 그래서 골프채를 만져본 적이 없어요.”
 
  — 저도 골프채를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바람, 잔디, 하늘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골프라는 운동이 부럽습니다.
 
  “아, 그럼요. (골프는) 좋은 운동입니다. 다만, 내가 보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골프) 배우는 시간도 많이 걸려요. 어떻게 보면 학자가 치기에는 사치스럽고… 그래서 안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풀브라이트 한국 위원입니다. (조순 전 부총리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어떤 분이 ‘선생님 저를 풀브라이트에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그래요.
 
  풀브라이트 위원회에다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괜찮은 학교에 보내줄 수 없느냐’고 청을 했더니 ‘프린스턴’에 보냈어요. 이분이 미국에서 전공 교수에게 ‘제가 골프를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제의를 했나 봐요. 그 교수가 깜짝 놀라며 ‘한국에선 교수가 골프를 치느냐’고 묻더래요. 부끄럽고 난처했다고 하더군요. 몰라… 요새는 다르겠지요.”
 
  — 미국에서 골프는 대중화되고 값도 싸다고 하던데요.
 
  “아마… (미국 교수들은) 지금도 안 할 겁니다.”
 
 
  자서전과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원론》
  
조순 부총리 서재 책장에 꽂혀 있는 《경제학원론》. 1974년 첫 발간 때는 저자가 조순이었지만 지금은 조순·정운찬·전성인·김영식 등 4인 공저가 됐다.
  —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 내지 두 잔을 마십니다. 많이 안 마시는 편이지요. 음식을 특별히 가리지 않아요. 많이 안 먹어서 그렇지. 뭐… 건강을 위해 특별히 조심하기보다 무리한 짓은 안 합니다. 옛날엔 술도 많이 먹었지만 쉰이 안 돼 아주 줄였습니다. 담배도 완전히 끊었고요. 에… 또… 일찍 자요.
 
  서울시장 후보 할 적에도 저녁 9시가 넘으면 잤어요. 후보가 빨리 잔다고 걱정하던 분이 있었는데 ‘일찍 자야 캠페인도 잘 할 게 아니냐’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건강에 좋다고 하면 잘 따라요.”
 
  — 운동은 안 하시나요.
 
  “젊었을 때 가정 요가를 배웠는데 지금도 해요. 이부자리 위에서 해요.”
 
  — 침대에서 안 주무시고요.
 
  “침대가 있지요. 침대 밑에 요를 하나 깔아 놓고 요가를 합니다. 오래는 안 해요. 한 40~50분 합니다. 덕분에 몸이 유연해요.
 
  한때는 등산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전국 유명 산은 몇 번씩 다 가봤으니까요. 나처럼 등산 많이 한 사람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소용이 없더구먼. 하하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그는 관악산·북한산·화악산·설악산의 만개한 봄꽃,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의 화려한 단풍 아래서 제자들과 함께 보냈다. 누구보다 등산을 좋아했다. 그의 제자인 한국외국어대 김승진(金勝鎭) 교수는 “산에서 선생님과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며 들었던 강론(講論)은 우리에게 일종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었다. 자택에서 벌어진 바둑시합 때도 제자들은 둘러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기자는 전기를 예찬한 선생의 글이 떠올라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 직접 자서전을 쓰지는 않으셨나요.
 
  “자서전… 안 썼어요. 없어요.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선배인 데이비드 흄이라는 분이 있어요. 18세기 철학의 대가지요. 흄의 말씀이 항상 생각납니다. ‘날 보고 자꾸 자서전 쓰라는데 (자서전은) 결국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짓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내 저서에 다 나와 있는데 뭐 또 자서전을 쓰나’ 했다고 합니다. 물론 난 데이비드 흄보다 못하지만….”
  
조순 부총리. 지난 2014년 《경제학원론》 발간 4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순 부총리는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는데 그중에서도 1974년 간행된 《경제학원론》은 세월이 흘러도 경제학 교과서로 읽힌다. 당시만 해도 경제학 교재가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 1판(版)이 나왔을 때의 목차는 이랬다.
 
  제1편 경제학과 그 방법론
  제2편 수요, 공급의 이론
  제3편 소비자 이론
  제4편 생산이론
  제5편 시장형태와 산업지식
  제6편 분배이론
  제7편 경쟁시장의 공과와 미시경제정책
  제8편 국민소득 결정이론
  제9편 화폐금융 이론과 정책
  제10편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관한 이론
  제11편 국제경제이론
  제12편 성장 및 발전이론

 
  미국 최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사무엘슨이 쓴 《경제학원론》을 모델로 집필한 모범적인 교재인 《경제학원론》은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생의 필독서가 된 것은 물론이다. 동시에 각종 국가공무원 시험의 필수·선택 과목인 ‘경제원론’의 교과서가 됐다. 조순 부총리가 관계로 정계로 진출한 1990년 제4차 전면개정판 이후 그의 제자인 정운찬(鄭雲燦) 전 국무총리와 공저로 출판했다.
 
  지금은 10판(2013년 8월 간행)이 나왔고 저자도 조순·정운찬에 더해 홍익대 전성인(全聖寅) 교수, 서울대 김영식(金永植) 교수가 참여해 4인 공저가 됐다. 800쪽에 이르고 제1~10편, 25장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 《경제학원론》은 출간한 지 4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입니다.
 
  “많이 찍었어요. 얼마나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책이 나올 때 한 제자가 ‘선생님, 이 책이 팔리겠습니까’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왜냐? 그런 책을 본 적이 없거든.”
 
  — 그때 제자에게 뭐라고 답하셨나요.
 
  “‘아마 팔릴 거야’라고 했지요. 솔직히 말해 대학교수가 가난하고 그렇잖아요.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생이 다 봤으니까요. 저도 ‘경제학개론’ 수업을 그 책으로 공부했어요.
 
  “책이 나올 때 정운찬 교수가 그 책을 위해 참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부탁도 안 했는데 스터디 가이드를 만들고, 문제집도 만들고, 경우에 따라 문장 표현도 고치고…. 내가 말했죠. ‘보게! 자네하고 나하고 공저를 해야 되겠네’ ‘아이고, 별말씀 다 하십니다’ ‘아니야. 자네가 정성을 그만큼 들였잖아. 공저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겠네’ 해서 공저를 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에 정운찬이가 (서울대) 총장이 되고 바빠져서 제자 전성인이라고, 지금은 홍익대 교수를 하고 있는데 매사추세츠공과대(MIT)를 나오고 똑똑해요. 이후 서울대 김영식 교수가 공동저자로 이름이 올랐어요.”
  
趙淳과 케인스
 
  케인스는 巨視경제학을 창안… 대학 시절, 케인스의 ‘케’도 듣지 못해
 
  조순 전 부총리 하면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가 떠오른다.
 
  조 부총리는 케인스 이론을 열심히 공부해 ‘한국의 케인스’가 되길 꿈꾸었다. 또 1982년 자신이 직접 《J.M.케인즈》(유풍출판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케인스는 경기침체나 불황이 일어날 경우 정부의 적극적인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경제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불황이 찾아왔을 때 특별한 대책 없이 기다리다 보면 경기가 순환된다고 소극적으로 생각했다. 조 부총리의 말이다.
 
  “내가 다녔던 서울대 상과대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래요. 그냥 고등상업학교였어요. ‘경제학원론’이란 과목이 있긴 했어도 전부 마르크스였어요. 좌익 학생이 다 퇴출된 후에도 교재는 마르크스 경제학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케인스 이론이란 학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케인스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 상대 시절, 조순은 경제학 공부 대신 영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한 토머스 하디나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원서로 읽으며 경제학의 지평을 넓혔다.
 
  ― 케인스라는 이름은 언제 들었나요. 유학 가셔서 처음 들어보셨군요.
 
  “그렇지.”
 
  ― 케인스 이론을 책으로 배우니 어떻던가요.
 
  “뭐… (마음에) 와 닿았지요. 야, 그 참! 멋 떨어지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나중 케인스 책을 번역도 했어요.”
 
  ― 케인스 경제학의 요체를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경제학에 소위 미시경제학이 있고 거시경제학이 있거든요. 케인스 이전에는 거시경제학이란 게 없었습니다. 케인스가 만들어 낸 거예요. 케인스 경제학이란, 숲의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숲 전체를 바라보자는 것이죠. 미시경제학이 나무를 보는 것이라면 거시경제학은 숲을 보는 것이지요. 이 숲이 아주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생각을 케인스가 한 것이죠.”
 
  아버지 조정재와 숙부 조평재
 
  조순은 1928년 2월 1일 강원도 강릉시 구정(邱井)면 학산(鶴山)리에서 태어났다. 오대산이 병풍처럼 뒤를 감싸고 쪽빛 동해를 마주한 마을이었다. 부친 조정재(趙正載)는 아들이 이율곡(李栗谷), 김시습(金時習), 심언광(沈彦光), 최치운(崔致雲) 등 강원도가 낳은 명신(名臣)이나 대학자로 대성하기를 바랐다.
 
  — 아버님한테 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을 배운 거죠.
 
  “아뇨. 안 가르치셨어요. 아버지는 한문을 시스템으로 가르치시기보다 닥치는 대로 책에 나오는 한자를 골라 가르치셨어요. 이를테면, 일본의 《수신(修身)》 책에 어려운 한자가 나오면 그걸 가르치셨어요. 한번은 《비서삼종(秘書三種)》이란 책을 사서 책 서문에 나오는 한자를 가르치셨어요.”
 
  — 일본 책인가요.
 
  “한국 책이지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음부경(陰符經), 제갈량심서(諸葛亮心書) 등 3가지로 구성됐는데 지금도 많이 기억을 합니다. 서문이 꽤 길어요.”
 
  그러면서 조순 부총리는 책 서문을 빠르게 외기 시작했다.
 
  “황석공소서 육편은 안전한열전에 황석공이, 비교소수 자방소서니, 세인이 다이삼략으로, 위시나 개전지자 오야라….”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황석공소서’의 여섯 편은 전한 열전(前漢 列傳)에 황석공이 비교(橋)에서 자방(子房)에게 가르친 것이 소서(素書)이니, 세상 사람이 흔히 삼략(三略)을 이것이라고 하나 대체로 전해진 것이 잘못된 것이다.(黃石公素書六篇 按前漢列傳黃石公 橋所授子房素書 世人多以三略爲是 蓋傳之者誤也)
 
  조순 부총리의 말이다.
 
  “아주 글이 좋아요. 서문을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배웠어요. 아버지는 글 읽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한자만 가르치셨어요. 그 양반(아버지)은 공부는 안 하셨어요. 성질이 활달하고 남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선비였지요.”
 
  — 유학자는 아니셨네요.
 
  “유학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억지로 분류한다면 뭐 그렇지요.”
 
  조정재의 동생인 평재(趙平載)는 당시 강릉 지방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해안 시골에서는 드물게 경성제대에 입학했고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판사, 변호사를 거쳤고 훗날 국제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숙부(조평재)께서 (강릉서) 서울로 오셨을 때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어요. 내가 듣기로 배재중학 3학년에 편입했는데 숙부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아무런 배경도 없었는데 어떻게 3학년에 들어갔냐’고요. 또 ‘영어는 알아듣겠던가요’라고 물었지요.
 
  숙부 말씀이 ‘처음에는 몰랐지. 난 그래도 한문을 잘했잖아. 한문을 잘하니까 별문제가 없었어’ 그랬어요. 속으로 ‘그럴 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양반이 배재를 나오자마자,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들어갔어요. 수재 아니면 못 들어가는 곳이잖아요. 제1고보인 경기중학도 한 해 2~3명이 들어갈까 말까인데 난 참 믿기지 않았어요. 고등고시도 패스하고 판사가 됐는데 일찍 그만두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셨어요. 나는 그 양반 따라 다니며 기식(寄食)을 했어요. 하하하!”
 
  — 따라 다닌다는 의미는.
 
  “그 양반 가시는 곳마다 갔습니다. 하하하!”
 
  — 의뢰인을 만난다거나 어떤 행사가 있을 때 가셨다는 의미입니까.
 
  “아니요, 그 양반이 밥을 먹여주니까….”
 
  — 외람된 표현입니다만, 집안이 다 머리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율곡전서》와 육사 영어교관, 그리고 한자교육
  
조순 부총리의 서재에서 바라본 앞마당 모습. 제법 초여름 녹음이 우거졌다.
  조순은 경기중학교에 다녔는데 숙부 조평재처럼 한학을 공부한 덕에 영어 공부를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문 구조를 영문법에 대입(代入), 나름 영문 체계를 쉽게 익혔다. 그는 “영어를 쉽게 배우기 위해서라도 한문을 알아야 한다. 언어란 구조를 알면 배우기가 훨씬 쉽다”고 했다. 그 덕에 육사 교관으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미국 유학 시절 현지인 중에서도 최고 수준(King’s English)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문 교육을 유난히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어린 시절, 존경하던 스승은 누군가요.
 
  “보통학교(초등) 때는 일정(日政) 시절이라 일본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았어요. 학교 낭하에 옛날 분들의 초상화를 놓았는데 예컨대 토머스 에디슨 같은 이의 사진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 사진은 안 걸어놨어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퇴계와 율곡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당시 교과서에도 그분들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퇴계·율곡을 자연히 존경하게 됐고 책도 다 읽었습니다. 《율곡전서》는 부총리 시절, 몇 번씩 읽었습니다. 참 도움이 됐습니다.
 
  율곡은 대단한 충신이자 애국자였습니다. 대천재였으나 겸손하고 티 없이 맑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를 좋게 만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지도자의 리더십, 역사, 도덕, 교육, 지방자치, 국방, 그리고 시국에 대해 많은 저서와 기록을 남겼는데 지금 읽어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애는 48세로 막을 내렸고 그가 바랐던 경장(更張·정치적 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은 못 이루었지만 할 일은 다했다는 의미에서 유감없는 일생이었습니다.”
 
  —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1952~1957년) 영어를 직접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육사 11기생들을 만난 것이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그 양반들하고 아주 친했습니다. 잘 지냈습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었어요. 4년 정도 차이였으니까 형제나 비슷했지요.”
 
  당시 육사 11기, 12기 생도들은 대체로 1932년생이 많았다. 조순 부총리는 1928년생이니 4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셈이다. 육사 11기생들은 첫 정규 육사 졸업생이었다. 이 기수는 2명의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을 포함, 6명의 장관(정호용·이상훈·이기·김식·김성진·김영균), 다수의 고위 장성(김복동·최성택·최연식 등)을 배출했다.
 
  — 11기생 중 가장 특출한 학생은 누구였나요.
 
  “아주 머리 좋은 이가 한 명 있었어요. 김성진(金聖鎭)이라고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고 학생부대장도 했지요. 전두환 대통령도 나한테 그랬어요. ‘(김)성진이는 보통 대우를 해선 안 됩니다. 육사의 심벌(상징) 아닙니까’ 그랬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전두환 장군이 1979년 12·12를 일으키던 날 저녁, 김성진이하고 식사를 같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육사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던 김성진은 5공 당시 안기부 차장과 체신부 장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 육사 시절에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서로 친했습니까.
 
  “지역별로는 전두환이는 합천 출신이고 노태우는 대구니까 그렇게 가깝다고 볼 수는 없었지. 전두환 대통령은 학생 때 뭘 했냐면 골키퍼를 했어요.”
 
  — 노태우 대통령은요.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당시에도 인상적이었나요.
 
  “그때는 잘 몰랐지요.”
 
  — 부총리께서는 영어를 가르치셨지만 한자 교육도 강조해 오셨어요.
 
  “우선 한자를 배우고 쓸 수 있어야 동북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한자를 모르면 문화적으로 (동북아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중국어도, 일본어도 못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또 (한자를 몰라) 옛 신문을 못 읽으니 사람의 지식과 지능이 성숙해지나요. 아주 완전히 우민정책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일본과 중국 틈에서 우리가 문명국이라 자랑할 수 있습니까. 난 그것 생각하면 정말 참… 아주… 몸이 떨립니다. 딴 뜻은 하나도 없어요.
 
  말이 부족하면 좋은 생각을 안출(案出)하고 정리하며 표현하고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한글만으로는 말의 수가 부족해요. 어휘가 부족합니다. 이를테면 전문어가 하나도 없어요. 추상어, 기술어도 없습니다. 중요한 대목의 어휘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한글로 풀어 쓴다? 어떻게 풀어요. 못 풀어요. 풀어서 쓸 수 있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국어 어휘 중에는 한자어가 74%나 됩니다. 한자를 안 쓰고는 뜻을 몰라요. 한자를 하지 않고서는 과학도 할 수 없습니다. 한글 전용으로 인문학은 불가능합니다.”
 
 
  1995년 지방선거와 6·13지방선거
  
1995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젊은 세대들이 많이 모이는 여의도, 명동, 대학로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유세 때 포청천 시장의 이미지를 살리려 포청천 모델을 등장시켰다.
  1995년 6월 조순은 ‘산신령’ ‘포청천’의 이미지로 서울시 초대 민선 시장에 당선됐다. 선거를 치르기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여론조사는 불리했다. 박찬종 32%, 조순 18%, 정원식 10% 순이었다. 당선은 고사하고 2위 자리마저 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시 선거에서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TV 토론과 연설 덕분이었다. TV 훈련은 마포 케이블 TV 스튜디오를 빌려 타 후보와 패널리스트까지 선정해 놓고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실시됐다. 카메라 적응훈련도 이 과정에서 이뤄졌다.
 
  — 어떻게 출마를 결심하셨나요.
 
  “난 선거에 나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인간이란, 운명이란 아무리 싫어하거나 생각지 않았다고 해도 닥쳐오면 하는 거예요. 대중연설, 정치연설도 처음엔 못 하겠던데 여성 두 명이 와서 ‘좀 봐주겠습니다’고 하더군요.”
 
  — 평생 강단에 섰는데 연설을 잘하셨겠지요.
 
  “아뇨. 강단에 서는 것과는 달라요. (여성 두 명이)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해도 안 돼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연습할 때보다 나아요. 그래서 ‘저 양반은 실전에 강해’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 그때 그 여성이 정미홍씨, 아닌가요.
 
  “맞아요. 정미홍씨가 기여를 많이 했어요.”
 
  KBS 뉴스 앵커 출신의 그녀는 당시 조순 캠프의 부대변인을 맡아 미디어 선거를 지휘했었다. 또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민석, 훗날 강원도지사가 된 이광재 등이 있었고 캠프 본부장은 이해찬 전 총리였다. 이해찬 본부장과 배기선 비서실장을 빼고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로 캠프가 꾸려졌다.
 
  — ‘포청천’ 이미지는 캠프에서 구상한 것인가요.
 
  “아마 캠프였겠지요. 정직하고 강직해서 포청천과 같다…. (몸을 뒤로 돌리며) 저기, 포청천이 있어요.”
 
  부총리의 서재 뒤편 쇠로 만들어진 포청천 상(像)이 눈에 띄었다. 직접 만져 보았는데 꽤 무거웠다.
 
  “경기고 총동창회장을 지내신 김집(金潗·체육부 장관 역임) 선배가 중국 카이펑(封)에 직접 가셔서 포청천 상을 가지고 오셨어요. 쇠로 만들어 상당히 무거웠는데 ‘포청천처럼 돼라’는 뜻이었어요. 정말로 감격했습니다.”
 
  포청천 캐릭터의 등장은 캠프 내 한 자원봉사자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조순 후보의 눈썹이 희고 강직하니 포청천으로 하는 게 어때요?”라며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30대들 사이에 제일 많이 보는 드라마가 〈포청천〉이었다. 그래서 ‘서울 포청천 조순’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만들어졌다.
 
  조순 부총리와는 6·13지방선거 전에 만났기에 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물론 결과를 미리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선거 분위기는 일방적이었다.
 
  — 며칠 후 6·13지방선거가 있습니다. 후보를 정하셨나요.
 
  “아뇨, 안 정했습니다. 선거 홍보물이 저기 있는데 봐야지요.”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참… 우리나라 정치 수준이 너무 떨어졌어요. 거기다가 최근에는 사법부까지 저렇게 대법원장이 서로 싸우고… 그 참,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조순 부총리는 “남은 힘이 있다면 (적폐청산을) 해도 좋은데 지금 정부가 당면한 문제는 항상 미래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고 했다.
 
  “박근혜씨가 잘못하고, 이명박씨가 잘못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처리하는 데가 있잖아요. 그것보다 미래를 어떻게 하느냐, 거기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계를 떠나신 뒤 계속 여의도를 관망하고 계신지요.
 
  “관망은 했지만… 한나라당이란 당명을 내가 만들었잖습니까. 처음에는 ‘한겨레’로 (당명을) 정할 생각도 있었고 ‘한나라21’도 고민했어요. ‘21세기를 바라보는 한나라당’이란 의미죠. 그런데 당시 김태호 사무총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더군요. 얼마 후 김 총장이 찾아와 ‘한나라당으로 그냥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기에 ‘좋아!’ 그랬지요.”
 
  — 한나라당 당명이 사라질 때 섭섭하셨습니까.
 
  “박근혜씨가 그렇게 했는데…, 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많이 섭섭하셨나 봐요.
 
  “하하하!”
 
  — 지방선거 이후 자유한국당 운명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수가 당선되더라도 정말로 심기일전해 우리나라 보수가 제 역할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든, 선진국이든 그 나라 기둥은 보수당입니다. 그게 옳은 일이에요. 왜냐? 보수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 전통과 정체성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나라의 뼈대지요.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보수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어요. 한 적이 글쎄… 별로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보수는 결코 재벌을 위한 당도 아니고, (재벌은) 보수와도 관계없어요.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위한 당도 아닙니다. 나라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그것을 좋게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는 게 보수당입니다.”
 
  — 제대로 된 보수의 정체성을 내건 정당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물론이죠. 그것 없이는 국가가 제대로 잘 안 됩니다. 그게 있어야 해요. 모든 나라에서 그 나라의 뼈대입니다. 글쎄, 보수의 기치를 들고, 보수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소득주도형 성장정책과 ‘중소벤처기업부’
  
2012년 6월 1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강당에서 조순 부총리의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가 동반성장연구소를 창립하자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오른쪽부터 조순, 정운찬, 정 총리 부인 최선주씨, 김영환·김성태 의원.
  — 문재인 정부는 ‘분배, 공정, 일자리 경제’를 내세운 정부입니다. 그러나 집권 1년 동안 소득격차가 더 심화됐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소득주도형 성장이란 이론은 경제이론이 아니거든요. 저는 경제이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득이라는 것은 생산이 있어야 소득이 나오는 거예요. 정부가 얘기하는 소득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 돈을 말합니다. 돈을 쓰면, 소비자들에게 (돈을) 주면, 소비자가 돈을 쓸 것 아니냐, 소득이 거기서 생기는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소득이라기보다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전지출’이거든요. 정부가 돈을 가난한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경제성장이 이뤄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봅니다.”
 
  — 그래도 소득주도 성장론은 ‘분배’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 갈래가 아닌가요.
 
  “분배라는 것은요, 어떤 소득이 나오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극단적으로 표현해 재벌에게 돈을 얻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준다? 그것은 진정한 분배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일을 하고 물건을 팔아 생기는 게 소득이지, 이런 식의 이전지출로 돈을 받는 것은 소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얘기입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지난 4월 13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때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 해임을 요구했다. 홍 수석을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꼭 집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일련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우리 경제를 되레 악화시키고 소득격차마저 심화시키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홍장표 수석은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을 가장 일선에서 지휘하고 있는데, 그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따르는 학문집단인 ‘학현학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학현(學峴)은 변형윤 교수의 아호. 학현학파는 서강학파, 조순학파와 더불어 한국경제학의 ‘빅3 학파’ 중의 하나다.
 
  —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의 생각들이 변형윤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그쪽에서 많은 연구를 한 토대에서 소득주도 성장론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글쎄, 난….”
 
  — 집권 1년 차인데 분배상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성급하다는 견해도 있어요. 좀 기다리면 달라질까요.
 
  “좋은 정책을 쓰면서 기다리면 좋지만, 좋지 않은 정책을 가지고 아무리 기다려 봐도 좋지 않을 겁니다. 내가 보기엔 소득주도형 정책이 좋은 정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몰라… 반박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난 그렇게 안 봅니다. 좋지 않은 정책은 아무리 기다려도 더욱더 나빠집니다.”
 
  — 빨리 폐기해야 되겠네요.
 
  “내가 보기에는 달리 생각해야 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제에이일(제일) 필요한 것은 이 나라 창업이 이뤄져야 돼요. 중소기업과 창업이…. 그냥 있는 중소기업을 자꾸 도와주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게 나와야 하는데 이 나라는 너무나 너무나 부족합니다.
 
  2014년 중국에서 하루 1만 개 업체가 창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루 1만 개씩이면 1년에 365만 개 아닙니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현재 베이징대, 칭화대는 그런 창업 육성을 대학의 임무로 삼고 있어요. 2016년인가 17년 자료를 보니 하루 1만5000개씩 창업한다더군요.”
 
  — 중국의 창업정책에 대해 배울 점은 무얼까요.
 
  “정부만이 아니라 학교, 기업이 동시에 창업에 적극 나서니 아이디어가 나오지요.”
 
  — 현 정부가 ‘중소벤처기업부’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재벌 없는 경제가 잘되는 경제는 얼마든지 있지만 중소기업 없는 경제는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정부도 중소기업에 대한 얘기는 없더구먼. 단지 중소벤처기업부를 만든 것은 봤습니다만, 부(部)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왜 그런가? 부를 만든다고 중소기업이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중소기업을 방해합니다. 왜냐? 이런저런 기준을 세운단 말이야.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돼! 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옳은 방법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안 따라온 것이죠”
  
국정감사 마지막 날인 1989년 10월 7일 경과위의 경제기획원 감사가 끝난 뒤 조순 부총리와 유준상 경제과학위원장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저소득층의 고용과 소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경제학자들도 예측하기 어렵나 봅니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한테 최저임금 강요를 하면 해를 못 넘겨요. (임금을) 줄 능력이 없으니 해고를 하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내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정부는 기업에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요. 기업이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 오늘 자(6월 8일) 《조선일보》를 보니 주52시간 근로시간과 관련, 기업들이 말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이고… 기업들이 부담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하게끔 해야지 자꾸자꾸 조건을 만들어서 따라오라, 오라… 안 따라갑니다.”
 
  — 그동안 너무 안 따라와서 강제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요.
 
  “옳은 방법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안 따라온 것이죠.”
 
  — 현 정부가 추진했던 소득주도 성장정책 과제(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재벌개혁 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 기업들이 부담을 느낀 것은 아닌가요? 하나씩 하나씩 한다면….
 
  “하나씩 할 필요도 없고 그런 것은 기업에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용을 할 수 있는 벤처기업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 부총리 시절, 경제 기사를 읽어 봤습니다. 그때 강조하셨던 게 내수 진작, 일자리, 고용, 중소기업 지원 등 강조하셨는데 지금도 유효한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도 유효해요. 단지 정부가 직접 그런 것에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이죠. 당사자들한테 맡겨야 합니다. 당사자들이 그런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 북핵 문제만 여쭙고 물러나겠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국민들은 지금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합니다. 6·12 미북회담에서 큰 틀의 비핵화 타결을 이루더라도 비핵화는 불투명하다고 봅니다.
 
  “난 기본적으로 북한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그 외에 살아날 방법이 없어요. 그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봅니다.
 
  그리고 북한의 장래는 지금 노선만 잘 추진하면 기본적으로 밝다고 봅니다. 이미 북한의 기술 수준은 상당해요. 또 국민의 질(質)도… 한국인의 질이야 어떻습니까. 시장도 중국이 가까이 있고, 압록강을 넘으면 조선 사람 천지입니다.”⊙

2018년 5월 28일 월요일

"문 대통령은 '역사 공부'가 부족… 어떻게 北강제수용소에 침묵하나"

입력 2018.05.28 03:00

[북한 인권 단체를 처음 조직한 마르크스주의자…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도쿄대 명예교수]

'인권 공세'로 나오면 핵실험 같은 초강경 조치 취할 필요 있다.
그들 시선을 핵 문제로 돌리는 것. 우리가 핵 위기 고조하면
미국은 별수 없이 '先 핵 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설 것이다.
핵으로 인권 덮어버리는 것…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이뤄졌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77)씨의 개인 연구실은 도쿄의 고지마치(麴町)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였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찻물을 끓이며 그는 말했다.

"도쿄대 교수 퇴직금으로 마련했습니다. 아내는 6년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내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알기로 문재인 대통령도 민주화 운동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김정은과 포옹을 하면서 북한의 인권유린에는 눈감는 게 난 이해가 안 됩니다."
오가와 대표는
오가와 대표는 "북한 인권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도쿄=최보식 기
그는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창립했다. 북한 인권 단체의 시초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2년 뒤 한국에서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만들어졌다. 1999년에는 처음으로 '북한 인권·난민 문제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북한 인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되면서 유엔의 북한인권보고서와 북한인권결의문이 나올 수 있었다.

"전쟁 위기까지 갔다가 남북 정상이 만나 화해 무드로 바꾼 것은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판문점 선언'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중단 등을 명시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가장 즐거워하는 일을 해준 겁니다. 전 세계가 다 주목하는 인권이나 강제수용소에 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없고 정상회담도 성사가 안 되니까 그렇겠지요. 모를 리야 있겠습니까.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문 대통령은 역사 공부가 부족해요. 한국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 있습니까. 문재인 정권이 북한 인권을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명색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어떻게 강제수용소 문제에 침묵할 수 있습니까."

―북한을 잘 달래야 하는 현 정권의 고충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3월 말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문정인 특보가 연사로 나왔습니다. 질문 시간에 내가 '북한과의 회담에서 인권과 강제수용소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문 특보는 '상대가 싫어하는 의제는 올리지 않는다. 인권 문제는 NGO 중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인권 문제를 중시하는 국제 정치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답변입니다. 더욱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정권 요직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옵니까.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의 전공은 동아시아근대사다. 1960년 평양에서 출간된 '조선철학사'를 읽고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국과의 인연이다. 도쿄여자대학에 재직하던 지명관(池明觀·일본 잡지에 'TK生' 필명으로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썼음) 선생의 주선으로 조선문화강좌를 했고, 1978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도쿄대 재학 시절 학내 투쟁에 참여했고 교수가 된 뒤로 사회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김지하·김대중의 석방 구명 운동을 일본에서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문화대혁명, 베트남전쟁,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북한은 관심권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였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문고판 책을 꺼냈다. 1966년 8월 노동신문 논설을 모아놓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일본어 번역본이었다.

"이 노동신문 논설에는 '공산주의자는 자기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힘을 믿어야 한다' '맑스레닌주의는 행동의 지침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진리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듬해 북한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유일 수령 사상'이 채택된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대대적인 사상 점검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늘어났고, '자주 주체'의 나라가 김일성 신격화의 나라가 됐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993년 8월 21일 도쿄 시내의 한식당에 초대받아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식당 여주인의 세 아들은 1960년 말 북송선(北送船)을 탔습니다. 북한이 가족의 방문을 허용한 것은 1979년부터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방북했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다시 가서 뇌물을 주고 알게 된 것은 두 아들이 강제수용소에 10년째 갇혀 있고 한 아들은 두들겨 맞아 숨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그녀는 이를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한(恨)이 쌓였다가 그날 처음 이를 증언한 겁니다."

그 자리에서 평양방송의 일본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오빠를 둔 다른 재일동포의 증언도 있었다. 오빠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숨진 사실을 알고는 조총련에 2000만엔을 바치고 올케를 구출했다. 고왔던 올케는 늙은 노파가 돼 있었고 손톱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북한을 지지해 온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수용소를 탈출한 강철환·안혁·안명철씨 등의 체험 수기가 일본어로 번역됐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해나 아렌트는 일당(一黨) 지배와 비밀경찰, 강제수용소를 전체주의의 지표라고 했는데,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전체주의가 북한에서 실현된 겁니다. 북한의 공포 체제를 받쳐주고 있는 게 강제수용소입니다. 무엇보다 북송 조선인 중 상당수가 유일 수령 사상에 불만을 표시하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북송 사업)'은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이뤄졌다.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 공동으로 추진됐고, 재일동포 약 9만3000명이 북송선을 탔다.

"1967년 일본 적십자는 손을 뗐지만, 북송 사업은 일본 언론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계속됐습니다. 당시 나도 지지했습니다. 정말 반성합니다. 진짜 문제는 북송된 이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본 언론도 이들의 인권유린 실태를 다룬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앞장섰던 일본공산당의 기관지도 그렇습니다. 내가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시작했을 때 조총련계 사람들이 몰려와 '내정간섭이다'라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북한 강제수용소에는 12만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핵화 협상이 타결되고 개혁·개방이 이뤄지면 북한의 인권 상황도 개선되지 않을까요?

"정권 유지를 하려면 주민 통제가 더 심해질 것으로 봅니다. 강제수용소가 있는 한 주민들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폭파 쇼를 한 풍계리 핵실험장 근처에 '화성 강제수용소'가 있습니다. 이 수용자들이 핵실험장을 만들 때 동원됐습니다. 만약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대한 사찰이 이뤄진다면 화성 강제수용소의 사찰도 요구해야 합니다."

―선생은 2008년 '노 펜스(No fence·북한 수용소를 없애는 행동 모임)'라는 단체도 만들었지요?

"2007년 6자 회담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단념하면 체제를 인정해주는 걸로 합의한 데 놀랐습니다. 주변국에서 북한 체제를 인정한다면 강제수용소와 인권유린도 인정해준다는 얘기인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 미·북 간에 시끄러워도 정상회담은 열릴 겁니다. 미국은 비핵화를 받고 경제 보상과 체제 보장을 약속할 것으로 봅니다. 북한 인권은 회담 의제에서 빠질 겁니다.


"나는 젊어서 '미 제국주의 반대'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면서 미국관(觀)이 좀 바뀌었습니다. 미국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지키려고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만약 미·북 회담에서 트럼프가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는 한낱 장사꾼이 분명합니다. 미국 안에서도 비판에 직면할 겁니다."

최근에 출간된 태영호 공사의 증언록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보면, 2001년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과 협상할 때 의제에 없던 인권 문제를 꺼냈다고 한다. 태영호는 통역 자격으로 배석했다.

〈페르손 총리가 "핵 문제가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인권 문제가 남아 있는 한 북한은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은 "우리와 서방은 인권의 사회정치적인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는 않으리라 본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차이점을 줄여나가면 인권 문제도 결국 해결할 수 있다. 대화에 응하겠다"고 맞받았다. 그 뒤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1부상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유럽이 인권 대화를 하자는 것은 결국 우리 내부를 파보겠다는 것인데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인권은 국권이다.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 강경 보수파를 눌러놓을 수 있다. 유럽을 얼려(속여) 넘기는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

이에 북한 외무성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법원, 감옥, 수감자들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 만일 미국과 유럽이 연합해 인권 공세로 나온다면 핵실험과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시선을 핵 문제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핵 위기를 고조시키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선(先) 핵 후(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핵으로 인권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40일 뒤 브뤼셀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된 예비 접촉이 있었다. 북한은 외국인의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정치범 수감자들을 선별해 사전 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끌다가 인권 문제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북한 정권은 생각보다 훨씬 노련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7/2018052702641.html

2018년 5월 10일 목요일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 동굴: Ice Caves that never melt

The Ice Caves That Never Melt, Even In Summer

In the mountains of the Shanxi province in China, is the country’s biggest ice cave—an 85-meter deep bowling pin shaped subterranean structure set into the side of the mountain. Its walls and floors are coated with thick layers of ice, while large icicles and stalactites stretch from the ceiling to floor. The Ningwu Cave has the unique ability to stay frozen throughout summer even when the outside temperature climbs into the high teens.
Across continental Europe, Central Asia, and North America are many such ice caves where winter lasts all round the year. The majority of these ice caves are located in cooler regions, such as Alaska, Iceland and Russia, where the year-long low temperature helps keep the caves naturally cool and frozen. However, ice caves also exist in warmer clim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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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Most of these caves are what is known as “cold traps”. These caves have conveniently located chimneys and exits that allow cold air to enter during the winter, but not the warm air in summer. In winter, the cold dense air settles into the cave, displacing any warmer air which rises and exits the cave. In summer, the cold cave air remains in place as the relatively warm surface air is lighter and cannot enter.
The ice inside the cave also acts as a buffer that helps stabilizes the temperature inside the cave. Any warm air entering the cave is immediately cooled by the ice before it can cause any significant warming of the cave’s inside. Sure, it melts some ice, but the ambient temperature inside the cave stays pretty much constant. The reverse is also true: in winter, when very cold air cascades in, any liquid water in the cave freezes, releasing heat and stopping the cave’s temperature from plummeting too low.
For ice caves to form there must also be sufficient quantities of water available over the right period of time. In winter the climate must be such that the mountains are sufficiently covered in snow, and in summer the temperature should be high enough to cause the snow to melt but without significant warming of the air which streams into the caves. There needs to be a delicate balance between all these factors for an ice cave to form and maintain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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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rgest ice cave in the world is Eisriesenwelt, located in Werfen, Austria, about 40 km south of Salzburg. The cave stretches for more than 42 kilometers. Photo credit: Michael & Sophia/Flickr
The Decorah Ice Cave in Iowa, the US, is one of the largest caverns containing ice in the American Midwest. The cave remains relatively ice free during fall and early winter. During this period, chilly winter air enters the cave and lowers the temperature of the rock walls. When snow starts to melt in spring, the melt water seeps into the cave and freezes upon contact with the still-cold walls, reaching maximum thickness of several inches in May-June. Ice often remains inside the cave until late August, while outside temperature breaks into the high thirties (high nineties for Americ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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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imilar phenomenon is seen at Coudersport Ice Mine in Pennsylvania. It’s a small pit, where ice forms only during the summer months, and melts away in winter. Photo credit: rivercouple75/Tripadvi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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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ming Ice Chasm in the Canadian Rockies in Alberta is known for its incredible acoustics. It is said that as rocks tumble down and crash to the cave floor, 140 meters below, it causes booming echoes. The cave was discovered only in 2005 on Google Earth. Photo credit: Francois-Xavier De Ruyd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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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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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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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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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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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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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지구의 좌표: 위도(緯度)와 경도(經度): Latitude and Longitude


[경도와 표준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 그리니치천문대에 기준선 그었어요
우리나라 1961년 동경 135도 확정… 北, 127.5도로 옮겼다 최근 원위치

우리나라와 북한의 시간이 같아졌어요. 과거에는 서울 시각이 오후 1시이면 평양 시각은 오후 12시 30분으로 30분씩 차이가 났지만, 이제는 서울과 평양 시계가 똑같은 오후 1시를 가리키게 됐답니다.

사실 서울과 평양은 지도상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있어요. 이런 경우 보통 표준시 차이가 없는데, 왜 서울과 평양은 30분이란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선원의 생사가 걸린 '경도' 측정
중세 이후 사람들은 지구 모양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근 구(球)'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여행이나 무역을 할 때 험난한 육로를 피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큰 배를 타고 멀리 나아가는 일이 잦아지자 배가 길을 잃고 침몰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 위에 위도(緯度)와 경도(經度)를 그린 지도예요.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특정 지점이 남북(南北)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가로선'이에요. 적도부터 극지방까지 15도씩 0~90°(도)로 구분하는데, 적도 북쪽을 '북위'라 하고 남쪽을 '남위'라고 해요.

반면 경도는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 그어진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을 중심으로 동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낸 '세로선'이에요. 지구 둘레를 360°로 나눈 뒤 본초자오선 동쪽 180°까지 '동경'이라 하고 서쪽 180°까지 '서경'이라 불러요.

이렇게 위도와 경도를 이용하면 지구상 어느 지점도 쉽게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답니다. 어떤 장소든 위선(위도 선)과 경선(경도 선)이 만나서 생긴 네모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평양은 위도 39°, 동경 125°에 있고 서울은 위도 37°, 동경 126°쯤에 있어요.

◇위도는 기후, 경도는 표준시 결정
위도와 경도는 각각 기후와 표준시에 큰 영향을 미쳐요. 먼저 위도는 그 지역이 열대 기후인지, 온대 기후인지, 한대 기후인지를 결정하는데요. 이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도에 따라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즉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저위도 지역(남·북위 0~30° 지역)은 대체로 1년 내내 더운 열대 기후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위도 지역(남·북위 30~60° 지역)은 온화한 온대 기후예요. 하지만 태양 빛이 넓은 지역에 걸쳐 비스듬하게 비추는 고위도 지역(남·북위 60~90°)은 1년 내내 추운 한대 기후이지요.
위도와 경도 설명 그래픽
 그래픽=안병현
경도는 각 나라에서 표준시(한 나라·지역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시각)를 결정하는 기준이 돼요.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스스로 회전(자전)하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구를 24개 세로선으로 나누고 시간을 정했답니다. 경선 하나마다 한 시간씩 차이가 나는데, 동쪽으로 가면 한 시간씩 빨라지고 서쪽으로 가면 한 시간씩 늦어지는 거예요.

재밌는 건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적도에서 극지방으로 갈수록 경도 15도에 해당하는 거리가 작아진다는 거예요. 경도 1도는 세계 어디에서든 4분(1시간÷15도) 정도 시차를 나타내지만, 거리로 환산하면 적도에선 약 111.3㎞이고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0㎞에 해당하지요.

◇그리니치천문대가 경도 기준 되다
위도는 지구 자전축과 수직을 이루는 적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지구상 동서(東西) 위치인 경도를 구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지요. 위도처럼 자연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의 시간을 알아낸 뒤 그 차이를 통해 경도를 구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요. 오늘날에는 두 개의 시계로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진자(振子)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답니다. 배 위에서 진자의 진동 속도가 달라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1735년 시골의 이름 없는 목수였던 존 해리슨이 해상용 시계인 'H1(크로노미터)'을 제작합니다. 이 시계는 무엇보다 스프링(용수철)을 써서 흔들림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이 특징이었어요. H1은 영국 포츠머스항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영국 군함 센추리언호에 실려 그 정확성을 검증받았고, 이후 지속적인 개선 작업을 통해 오차를 크게 줄여나갔지요 .

1800년대 경도 문제는 국가 간 분쟁으로 옮아갔습니다. 많은 나라가 경도와 위도를 사용한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각기 자기 나라를 기준으로 경도를 표시했기 때문이지요. 이에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경도대회에서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경도를 '본초자오선(기준 경도)'으로 삼기로 결정했어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이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각국 대표들을 설득한 결과였지요. 이에 따라 전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에서 가장 근접한 경도를 기준으로 1시간 단위(15°)로 표준시를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어요.

우리나라 표준시 기준의 경우 대한제국 말부터 동경 127.5도와 135도를 오가다 1961년 일본과 같은 '동경 135도'로 최종 확정했어요. 이에 따라 서울 표준시도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135÷15) 빠른 시각으로 정해졌지요. 북한도 오랫동안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사용해 왔지만, 2015년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이유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시각이 달라진 거예요. 이번에 남북이 함께 시간을 맞춘 만큼 앞으로 여러 가지 다른 점들을 좁혀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


서금영·과학 칼럼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죤 매캐인 의원: "세상은 지킬 가치 있는 곳"

말기암 판정받은 '美보수의 상징' 매케인, 미국과 세상에 건넨 苦言
"트럼프는 리얼리티 쇼하듯 자신의 터프함 보이는 것을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겨"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다. 겸손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이해'일 뿐 대단한 게 아니다. 그 겸손이 (대화와 타협을 가능케 해) 더 생산적인 정치를 만든다.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는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다."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한 미국의 보수 정치인이 생애 마지막이 될 회고록에서 호소한 것은 겸손(humility)이었다.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존 매케인(81)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이 병석에서 집필한 회고록 '쉼 없는 파도(The Restless Wave)'가 오는 22일 출간을 앞두고 요약본이 1일(현지 시각) 공개됐다.

이 책은 산전수전 겪은 노(老) 정치인이 미국과 세계에 건네는 고언(苦言)이다. 매케인은 "나는 5년 더 살 수도, 이 책이 나오기 전 떠날 수도 있다"면서 "세상은 좋은 곳이며 싸워 지킬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떠나기가 싫다. 불평하진 않겠다. 인생은 여행과도 같았다"고 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 정치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2008년 10월 오하이오주의 오터바인 대학교에서 연설하는 모습.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그는 오는 22일 출간할 회고록 ‘쉼 없는 파도’에서 “오늘날 정치에는 겸손이 부족하다”고 일갈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 정치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2008년 10월 오하이오주의 오터바인 대학교에서 연설하는 모습.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그는 오는 22일 출간할 회고록 ‘쉼 없는 파도’에서 “오늘날 정치에는 겸손이 부족하다”고 일갈했다. /AP 연합뉴스
그는 "나는 (6선 의원으로서)여섯 명의 대통령과 일하면서 그들 모두에 반대하고 싸워봤다"면서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평범한 미국인으로서 서로가 가져야 할 존중을 약화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또 "정치 성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좋은 부모, 충성스러운 미국인, 고결한 인간일 수 있다"고 했다.

매케인은 미국 정치가 '이념의 게토(ghetto·집단 거주지)'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은둔하는 양극화가 심하다고 우려했다. "자신만의 뉴스 소스를 갖고,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들과만 생각을 나누며, 그렇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팩트(fact)'만을 취사선택하고 그에 배치되는 어떤 경험적 증거도 '가짜(fake)'로 치부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터프하게 보이는 것, 또는 리얼리티 쇼처럼 터프함을 모방하는 행위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극우·극좌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목소리를 내라"면서 "선거에서 누가 '워싱턴에 백마를 타고 가서 세금을 털어가는 깡패들을 혼내주고, 그들과는 함께 일하지도 타협하지도 않겠다'고 하면, 그 후보만 안 뽑으면 된다"고 했다. 뭐든 다 해줄 듯이 터무니없는 공약을 내걸고, 상대방 정파는 무조건 비난하는 후보는 뽑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정치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케인 의원의 말이라면 무게가 다르다. 그의 인생 자체가 '미국의 살아 있는 양심'이자 '정의로운 보수주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해군 출신인 매케인은 29세 때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공산당에 포로로 붙잡혀 5년 반 동안 고문을 당했다. 한국전 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해군 제독 아버지(잭 매케인)가 미 태평양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부담을 느낀 베트콩이 그에게 조기 석방을 제안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 수칙을 내세워 동료부터 풀려나게 했다.

이때의 경험이 매케인의 이후 정치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 애리조나주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내리 6선 상원의원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과 정파의 이익보다 인권과 정의,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시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2013년 수행원도 없이 현지에 들어가 실태를 조사한 뒤, 오바마 정부에 시리아 반군 지원을 촉구했다. 최근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 지명자의 알카에다 포로 물고문 전력이 논란이 되자 공화당 소속임에도 인준을 반대했다.

매케인은 회고록에서 "이번이 나의 마지막 임기다. 이젠 (정치적)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속내를 말할 수 있다"고 했지만, 평생 인기를 따지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그는 2008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아랍인"이라고 욕하는 공화당의 백인 지지자에게 "그건 아니죠"라고 훈계했다. 같은 진영에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그를 트럼프 대통령은 "베트남 같은 데서 붙잡히기나 하는 주제에"라고 조롱했다. 뉴욕타임스는 "어쩌면 매케인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봉사는 베트남 포로로 고생할 때가 아니라, 상원의원으로서 보수 진영에 몸담고 있는 지금일 수도 있다"고 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누구]
1936년 파나마생
1954년 해군 제독인 조부·부친을 따라 해군사관학교 진학
1965년 베트남전 참전했다 5년 반 포로 생활
1982년~ 애리조나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재선
1986년~ 연방 상원의원 6선, 상원 군사위원장
2005년 포로 고문을 금지한 '매케인 정치범 수정법' 통과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조지 W 부시에게 패배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
2017년 악성 뇌종양 발병, 투병 중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3/20180503002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