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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1일 일요일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너무나 포근한 사진 모음
      - ☆ 조 우 (遭 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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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만남이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깊은 만남을 갖는 사람은
      불과 10여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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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손가락으로 셀 정도의 극소수의 사람과
      깊은 만남을 우리는 가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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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 핏줄기로 얽힌 2, 3명의 형제 자매,
      그리고 아내 또는 남편, 나의 분신인 2, 3명의 내 아들과 딸들,
      그리고 막역한 2, 3명의 지기(知己), 사숙(私淑)하는 은사님 한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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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한둘과 가까운 친척 2, 3명,
      그 밖에 어떤 인연으로 얽힌 한두 명의 선배 또는 은인(恩人),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는
      이런 범위 이런 정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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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겨우 10여 명의 사람과 일생 동안 깊은 만남을 가질 뿐이다.
      그 밖의 만남은 모두 옅은 만남이요, 일시적인 만남이요,

      피상적인 만남이요, 만나나 마나 한 만남들이다.
      10여 명의 사람과 우리는 깊은 실존적인 만남을 가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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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 10여 명의 사람을 神이 내게 주신 은혜요, 선물이요,
      운명으로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극진하게 대해야 한다.
      그것은 불교적 표현을 하면 전생(前生)의 한량없이 깊은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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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에서 옷자락 한 번 스치고,
      얼굴을 잠깐 보고 지나쳐 버리는 무연(無緣)의 중생들이 많다.
      그들은 나와 아무 깊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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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하잘것 없는 인연도 전생에 5백 번 만난
      사람이라야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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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붕 밑에서 한솥의 밥을 먹으면서 일생 동안 같이 살아가는

      부모 자식, 아내, 형제 자매는 아마 전생에서 수억 번 만난

      깊은 인연의 결과요, 산물일 것이다.
      우리는 전생의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은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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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생에서 만났던 친구를 금생에서 또 만나는구나,
      하고 다정다감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불교의 신앙인은 아니다.
      그러나 인연사상(因緣思想)을 퍽 의미 깊게 또 재미있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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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10여 명의 인간과의 깊은 만남 이외에
      고인(古人)들과의 두터운 정신적 만남을 갖는다.
      그것은 주로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독서는 옛사람과의 깊은 정신적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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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고인을 볼 수 없다. 또 고인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고인을 만난다.
      우리는 독서를 하면서 원효(元曉)도 만나고, 퇴계(退溪)도 만나고,
      만해(萬海)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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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공자(孔子)의 음성도 듣고, 노자(老子)의 말도 듣고,
      도연명(陶淵明)과 상봉(相逢)하고 손자(孫子)와 조우(遭遇)한다.
      또 예수를 만나고, 석가를 대하고, 플라톤에 접하고, 괴테와 해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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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책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분들과 정신적 만남을 가질 수가 없다.
      시공을 초월하여 동서고금의 위인들과 깊은 정신적 만남을
      갖는 길은 오직 책을 통해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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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책처럼 위대한 것이 없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옛 시인은 읊었다.
      나라가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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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무너져도 책은 남는다.
      책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요, 말씀의 집이요,
      사상의 창고요, 얼의 결정체(結晶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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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고인(古人)들과 깊은 정신적 만남을 갖는다.
      그것도 인생의 큰 인연이다.
      서로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그 분을 좋아하고 그 어른의 말에 감명을 받는 것이다.
      그런 고인도 10여 명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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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정신 형성에, 인격 건설에, 사상 심화(思想深化)에
      크고 깊은 영향을 준 이는 약 10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도산(島山)과 춘원(春園)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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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중국인으로서는 공자를 들어야 되겠고,
      인도인으로서는 간디와 석가를 들고 싶다.
      또 그리스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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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인으로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키에르케고르,
      파스칼, 스피노자, 러셀, 괴테, 톨스토이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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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내가 살아 오면서 정신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분들이다.
      모두 10여 명 정도다.
      이분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신적 공허(空虛)에 빠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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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상이나 인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살아 있는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만난 10여 명의 고인(古人)들이다.
      그러고 보면 산 사람보다도 죽은 사람의 힘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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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20여 명의 존재가 나의 보배요, 나의 사랑이요,
      나의 재산이요, 나의 세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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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너와 나의 깊은 만남이다.
      만남처럼 소중한 것이 없고, 만남처럼 뜻깊은 것이 없다.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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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 대하여: 일본 약국에서 판매


 ▲ 일본 약국에서 막걸리 판매가 시작되면서
그 효능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연합뉴스

술집에서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면 위 대화를 듣고 생소함을 느낄 것이다.하지만 앞으로는 비슷한 대화를 종종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약국에서.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2009년 최고의 히트 상품 막걸리가 일본에서 약국에 진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국내 막걸리 생산업체인 ㈜우리술(대표 박성기)이 최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일본 최대 약국 체인인 마쓰모토 키요시는 쌀 막걸리와 배 막걸리를 지난 21일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막걸리는 예전부터 몸에 좋은 술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효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연 어떤 부분이 술집에 머무르던 막걸리를 약국으로 진출시켰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기분 좋고 건강까지 챙기는 마법의 12~14%
알코올 도수와 열량이 낮아 노동주로 널리 사랑받았던 막걸리는 물이 80%, 나머지 
20%로 구성돼있다. 나머지 20% 중 알코올 6~8%을 제외한 17~14%에 건강의 비결이 있다.

▲ 우울한 비 오는 날에 막걸리가 생각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알코올과 물을 제외한 단백질 1.6~1.9%, 탄수화물 0.8%, 지방 0.1% 나머지 약 10%는
식이섬유, 비타민B군, 당질, 콜린, 유산균, 효모 등이 혼합된 물질이다. ‘술’의 탈을 쓴 건강발효식품이라 봐도 될 정도이다.

먼저 1.6~1.9%를 차지하고 있는 단백질부터 살펴보자. 곡물과 누룩 속에 함유된 
단백질은 발효 과정에서 다양한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는데,

여기서 일반 성인의 몸에 꼭 필요한 8대 아미노산 중 7가지(발린, 류신, 이소류신,
메티오닌, 트레오닌, 리신, 페닐알라닌)가 생성된다. 이 필수 아미노산은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1.6~1.9%라는 수치는 우유의 단백질 함량이 3%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양임을
알 수 있다. 막걸리의 라이벌(?)인 소주는 0%, 맥주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아미노산은 또한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막걸리에 함유돼있는 
비타민B와 아미노산이 ‘세로토닌’을 구성하는 중요 물질이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은 중요한 두뇌화학 물질 중 하나로,

 그 분비량이 적으면 우울장애, 섭식장애 등 다양한 정서행동장애를 일으킨다.
또한 비타민B를 섭취하게 되면 우리 몸의 탄수화물 대사가 높아져 일시적으로 기분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우울한 비 오는 날에 막걸리가 생각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몸에 좋은 효모와 유산균, 식이섬유가 가득

살아있는 효모가 많은 것 역시 막걸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예부터 술을 빗는데
활용돼 온 효모는 비타민 B와 단백질, 아미노산, 무기질 등 인체에 유효한 인자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이런 특성으로 효모는 영양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환자식, 영양제 등에 걸쳐 널리 이용되고 있다.

▲ 막걸리의 풍부한 효모는 환자식, 영양제 등에 걸쳐 널리 이용되고 있다.


풍부한 유산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제품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생막걸리 100ml에 유산균 1억~100억 마리가 들어있다. 참고로 유산균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으로 유명한 요구르트는 100ml에 10억마리 수준이다.

유산균은 장내에서 비피더스균 등 이로운 세균을 증가시키고 해로운 세균을 감소시킨다. 
또한 장 속의 발암 물질을 빨리 배출시켜 암을 예방하고 쾌적한 장 환경을 만들어 준다.

이밖에도 막걸리에 들어있는 유기산(산성을 띤 유기화합물)은 특유의 상쾌한 신맛으로
갈증을 멎게 하고, 소화를 도와준다. 유기산은 이와 함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몸에 피로물질이 쌓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피로물질을 제거함으로써 피로 회복의 효과는 물론 피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걸리 한 사발에 ‘식이음료 함유 음료수’의 100~1천배가 들어 있는 식이섬유도 있다. 
식이섬유는 대장 운동을 활발하게 해 변비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 심혈관 질환 예방 효과가 있다.

막걸리의 진화, 어디까지 진행될까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고려대학부설 한국영양문제연구소 주진순, 유태종 교수의 '
막걸리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 따르면 단백질과 당질은 혈당의 감소 현상을 막아준다. 또한 비타민B2와 콜린은 간의 부담을 덜어 알콜성 간경화증이나 영양실조 현상을 예방할 수 있다.

2009년 ‘한국식생활문화학회’에 발표된 ‘막걸리박 열수 추출물 첨가 식이가 선천성 고혈압 쥐의 혈압 저하에 미치는 영향’(이현숙 외 5인)에서는 막걸리의 술지게미가 혈압 저하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밖에도 막걸리가 항암 효과, 혈중 콜레스트롤 수치 감소 등의 의학적 효능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최근에는 막걸리 피부미용, 막걸리 마사지에서부터 막걸리 다이어트까지 등장하면서 막걸리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제조 및 장기보관 기술의 발전과 한류 열풍을 바탕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막걸리의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제조 및 장기보관 기술의 발전과 한류 열풍을 바탕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막걸리의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막걸리의 역사



막걸리라는 이름은 <막 거른> 술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고유한 술의 하나이며, 맑은 술을 떠내지
아니하고 그대로 걸러 짠술로, 주정 도수는 6%정도이며,
빛깔이 흐리고 맛이 텁텁하다" 는 것이 막걸리에 대한 사전적 의미이다.

  막걸리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하기>이다.
고려때에는 막걸리용 누룩을 배꽃이 필 때에 만든하고 하여 이화주(梨花酒)
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이 외 에 맑지 않고 탁하기 때문에 탁주라
부르기도 하고 식량대용 또는 갈증해소로 농부들이 애용해 왔으므로
농주(農酒)라고도 불러왔다. 곡주(穀酒)의 청탁(淸濁)은 숙성 중의 여과에 의해서 구별되며 막걸리는 탁하게 양조한 흰 백색의 주류로서,
좋은 막걸리는 감(甘-단맛) , 산(酸-신맛) , 신(辛-매운맛) , 고(苦-쓴맛) , 삽(澁-떫은맛)이 잘 어울리고 적당한 감칠 맛과 청량 미가 있었다

 이 청량미는 땀을 흘리고 일한 후에 갈증을 멎게 하는 힘도 있어
농주(農酒)로서 애용되어 왔다.
  막걸리의 이름도 다양하여 십여 가지가 넘는데, 그 명칭을 열거하여 보면
탁주(濁酒) , 탁(濁)료 , 곡주(穀酒) . 재주(滓酒) , 회주(灰酒) , 백주(白酒) ,
합주(合奏) , 가주(家酒) ,  부의주(浮蟻酒) , 농주(農酒) , 이화주(梨花酒) 등
열 두가지나 된다.
  일반적으로 숙성된 양조주를 여과하여 약주를 제조한 후
막걸러 막걸리를 만들기도 하나 약주를 만들지 않고 순수한 막걸리만을
제조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최근 발효식품으로서 ㄱ새로운 주목을 받게 될 정도로 건강에 매우 좋은 술이며 검증되지 않은 술이나  값비싼 외국산보다는 우리기술로 효모들이 많은 먹걸리가 더 좋았지만 우ㅡ리가 이를 미쳐 발견하지 못하고 알코홀과 증류수인 소주를 죽자 살자 먹는 것은 깊이 반성을 하여야 할 음주문화이다.

  막걸리는 저도주이고 효모로 발효, 숙성시켜서  건강에 좋은 것은 누구나 알지만 대량생산된 수주 맥주의 자나칠 만큼 과다한 선전과 판초으로 먹걸리가 뒤로 불러나는 것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적당히 마시면 '藥' 과하게 마시면 '毒'  조선일보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는 6~8도로 맥주와 비슷하다. 막걸리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알코올성 지방간이나 간경화를 일으킬 수 있다. 반대로 적당하게만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루 1~2잔의 술은 특히 혈관에 '보약'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더욱이 막걸리는 발효식품으로 효모, 단백질, 당질, 비타민B2, 콜린 등 기능성 성분들까지 풍부하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이동호 교수는 "막걸리도 분명히 술이기 때문에 과음은 알코올성 지방간, 알코올 중독 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며 "다만 막걸리를 한 두잔 정도 마신다면 효모와 비타민 등이 풍부하므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막걸리의 건강 효과에 대한 연구는 와인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동물실험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부 실험결과가 있을 뿐이다.

◆ 당뇨병 있는 사람이 마셔도 되나

술은 혈당 상승을 억제한다. 알코올이 식후 인슐린 분비를 활성화할 뿐 아니라 간에 저장된 포도당이 혈액 속으로 방출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외국 연구에 따르면 식후 혈당 상승 억제 효과는 와인이 가장 크고, 양주, 맥주 순이다. 막걸리도 맥주와 비슷한 혈당 상승 억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막걸리는 맥주보다 단백질 등의 함량이 높아 혈당 상승억제 효과가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뇨병 약을 복용하는 환자들은 반주가 금물이다.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박철영 교수는 "당뇨병 약이 혈당 상승을 억제하는데 알코올까지 더해지면 저혈당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공복 시 막걸리를 포함해 술을 절대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심혈관 질환 예방 효과

하루 1~2잔 정도의 술은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콜레스테롤을 낮춰 심혈관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에서 입증돼 있다.

이런 효과는 와인뿐 아니라 막걸리에도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배송자 교수팀이 실험 쥐 42마리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 쪽은 막걸리 농축액을 투여하고, 다른 쪽은 같은 양의 생리 식염수를 투여했다. 시간대별로 혈중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사한 결과 막걸리 농축액을 투여한 그룹에서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졌다.

배 교수는 "알코올을 많이 섭취하면 혈중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져 동맥경화증, 고혈압 등의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막걸리는 정반대로 나왔다"며 "왜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이 낮아졌는지는 더 연구해봐야 하겠지만 막걸리 발효 성분들이 알코올의 작용을 억제하고 약리효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배 교수팀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지게미)에는 고혈압 치료제와 비슷한 정도로 혈압을 낮추는 물질인 펩타이드가 함유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혈압 치료제의 혈압 강하 효과를 90으로 할 때 막걸리 지게미의 효과는 80쯤 된다는 것. 고혈압 예방효과를 얻으려면 막걸리를 잘 흔들어서 마셔야 한다.


◆ 항암, 면역력 증강 효과

막걸리의 식이섬유와 단백질 성분이 항암 효과가 있다는 실험결과도 있다. 2008년 한국식품영양과학회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연구팀이 농축시킨 막걸리를 유방암, 간암, 대장암, 피부암 세포에 주입한 결과 암 세포 성장억제 효과가 나타났다.

한경대 생명공학부 이학교 교수는 "막걸리는 효모 등이 장 속에서 발효돼 유해 세균을 억제하고 유익한 세균을 활성화시켜 면역력을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사상체질과 김달래 교수는 "막걸리는 소화가 잘 안되거나, 손발이 찬 소음인에게 좋은 술"이라며 "한 잔(200~250cc)정도 먹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한국의 맛 막걸리1


한국의 맛 막걸리2


한국의 맛 막걸리3


막걸리 만들기.avi


한일협정과 박정희


 
   문서 공개 할수록 박정희는 빛난다.
 
한일협정과 박정희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이었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19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일본의 소니사는 아키오모리타가 이룩한 신화였고,
파나소닉사는 마츠시타고노스케가 이룩한 신화였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가론 유다같은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는
입에 들어가는 밥숫갈마저 빼내고 싶어진다.  
 
일제 강점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해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한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 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0%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싸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 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의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봐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 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이
박대통령에게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써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
(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공개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권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 나긋 하게 얇아져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 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19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19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난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서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17,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 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