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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8일 월요일

"문 대통령은 '역사 공부'가 부족… 어떻게 北강제수용소에 침묵하나"

입력 2018.05.28 03:00

[북한 인권 단체를 처음 조직한 마르크스주의자…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도쿄대 명예교수]

'인권 공세'로 나오면 핵실험 같은 초강경 조치 취할 필요 있다.
그들 시선을 핵 문제로 돌리는 것. 우리가 핵 위기 고조하면
미국은 별수 없이 '先 핵 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설 것이다.
핵으로 인권 덮어버리는 것…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이뤄졌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77)씨의 개인 연구실은 도쿄의 고지마치(麴町)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였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찻물을 끓이며 그는 말했다.

"도쿄대 교수 퇴직금으로 마련했습니다. 아내는 6년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내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알기로 문재인 대통령도 민주화 운동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김정은과 포옹을 하면서 북한의 인권유린에는 눈감는 게 난 이해가 안 됩니다."
오가와 대표는
오가와 대표는 "북한 인권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도쿄=최보식 기
그는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창립했다. 북한 인권 단체의 시초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2년 뒤 한국에서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만들어졌다. 1999년에는 처음으로 '북한 인권·난민 문제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북한 인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되면서 유엔의 북한인권보고서와 북한인권결의문이 나올 수 있었다.

"전쟁 위기까지 갔다가 남북 정상이 만나 화해 무드로 바꾼 것은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판문점 선언'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중단 등을 명시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가장 즐거워하는 일을 해준 겁니다. 전 세계가 다 주목하는 인권이나 강제수용소에 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없고 정상회담도 성사가 안 되니까 그렇겠지요. 모를 리야 있겠습니까.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문 대통령은 역사 공부가 부족해요. 한국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 있습니까. 문재인 정권이 북한 인권을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명색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어떻게 강제수용소 문제에 침묵할 수 있습니까."

―북한을 잘 달래야 하는 현 정권의 고충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3월 말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문정인 특보가 연사로 나왔습니다. 질문 시간에 내가 '북한과의 회담에서 인권과 강제수용소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문 특보는 '상대가 싫어하는 의제는 올리지 않는다. 인권 문제는 NGO 중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인권 문제를 중시하는 국제 정치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답변입니다. 더욱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정권 요직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옵니까.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의 전공은 동아시아근대사다. 1960년 평양에서 출간된 '조선철학사'를 읽고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국과의 인연이다. 도쿄여자대학에 재직하던 지명관(池明觀·일본 잡지에 'TK生' 필명으로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썼음) 선생의 주선으로 조선문화강좌를 했고, 1978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도쿄대 재학 시절 학내 투쟁에 참여했고 교수가 된 뒤로 사회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김지하·김대중의 석방 구명 운동을 일본에서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문화대혁명, 베트남전쟁,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북한은 관심권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였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문고판 책을 꺼냈다. 1966년 8월 노동신문 논설을 모아놓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일본어 번역본이었다.

"이 노동신문 논설에는 '공산주의자는 자기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힘을 믿어야 한다' '맑스레닌주의는 행동의 지침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진리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듬해 북한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유일 수령 사상'이 채택된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대대적인 사상 점검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늘어났고, '자주 주체'의 나라가 김일성 신격화의 나라가 됐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993년 8월 21일 도쿄 시내의 한식당에 초대받아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식당 여주인의 세 아들은 1960년 말 북송선(北送船)을 탔습니다. 북한이 가족의 방문을 허용한 것은 1979년부터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방북했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다시 가서 뇌물을 주고 알게 된 것은 두 아들이 강제수용소에 10년째 갇혀 있고 한 아들은 두들겨 맞아 숨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그녀는 이를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한(恨)이 쌓였다가 그날 처음 이를 증언한 겁니다."

그 자리에서 평양방송의 일본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오빠를 둔 다른 재일동포의 증언도 있었다. 오빠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숨진 사실을 알고는 조총련에 2000만엔을 바치고 올케를 구출했다. 고왔던 올케는 늙은 노파가 돼 있었고 손톱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북한을 지지해 온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수용소를 탈출한 강철환·안혁·안명철씨 등의 체험 수기가 일본어로 번역됐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해나 아렌트는 일당(一黨) 지배와 비밀경찰, 강제수용소를 전체주의의 지표라고 했는데,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전체주의가 북한에서 실현된 겁니다. 북한의 공포 체제를 받쳐주고 있는 게 강제수용소입니다. 무엇보다 북송 조선인 중 상당수가 유일 수령 사상에 불만을 표시하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북송 사업)'은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이뤄졌다.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 공동으로 추진됐고, 재일동포 약 9만3000명이 북송선을 탔다.

"1967년 일본 적십자는 손을 뗐지만, 북송 사업은 일본 언론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계속됐습니다. 당시 나도 지지했습니다. 정말 반성합니다. 진짜 문제는 북송된 이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본 언론도 이들의 인권유린 실태를 다룬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앞장섰던 일본공산당의 기관지도 그렇습니다. 내가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시작했을 때 조총련계 사람들이 몰려와 '내정간섭이다'라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북한 강제수용소에는 12만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핵화 협상이 타결되고 개혁·개방이 이뤄지면 북한의 인권 상황도 개선되지 않을까요?

"정권 유지를 하려면 주민 통제가 더 심해질 것으로 봅니다. 강제수용소가 있는 한 주민들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폭파 쇼를 한 풍계리 핵실험장 근처에 '화성 강제수용소'가 있습니다. 이 수용자들이 핵실험장을 만들 때 동원됐습니다. 만약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대한 사찰이 이뤄진다면 화성 강제수용소의 사찰도 요구해야 합니다."

―선생은 2008년 '노 펜스(No fence·북한 수용소를 없애는 행동 모임)'라는 단체도 만들었지요?

"2007년 6자 회담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단념하면 체제를 인정해주는 걸로 합의한 데 놀랐습니다. 주변국에서 북한 체제를 인정한다면 강제수용소와 인권유린도 인정해준다는 얘기인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 미·북 간에 시끄러워도 정상회담은 열릴 겁니다. 미국은 비핵화를 받고 경제 보상과 체제 보장을 약속할 것으로 봅니다. 북한 인권은 회담 의제에서 빠질 겁니다.


"나는 젊어서 '미 제국주의 반대'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면서 미국관(觀)이 좀 바뀌었습니다. 미국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지키려고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만약 미·북 회담에서 트럼프가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는 한낱 장사꾼이 분명합니다. 미국 안에서도 비판에 직면할 겁니다."

최근에 출간된 태영호 공사의 증언록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보면, 2001년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과 협상할 때 의제에 없던 인권 문제를 꺼냈다고 한다. 태영호는 통역 자격으로 배석했다.

〈페르손 총리가 "핵 문제가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인권 문제가 남아 있는 한 북한은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은 "우리와 서방은 인권의 사회정치적인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는 않으리라 본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차이점을 줄여나가면 인권 문제도 결국 해결할 수 있다. 대화에 응하겠다"고 맞받았다. 그 뒤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1부상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유럽이 인권 대화를 하자는 것은 결국 우리 내부를 파보겠다는 것인데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인권은 국권이다.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 강경 보수파를 눌러놓을 수 있다. 유럽을 얼려(속여) 넘기는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

이에 북한 외무성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법원, 감옥, 수감자들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 만일 미국과 유럽이 연합해 인권 공세로 나온다면 핵실험과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시선을 핵 문제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핵 위기를 고조시키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선(先) 핵 후(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핵으로 인권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40일 뒤 브뤼셀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된 예비 접촉이 있었다. 북한은 외국인의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정치범 수감자들을 선별해 사전 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끌다가 인권 문제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북한 정권은 생각보다 훨씬 노련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7/2018052702641.html

2018년 5월 10일 목요일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 동굴: Ice Caves that never melt

The Ice Caves That Never Melt, Even In Summer

In the mountains of the Shanxi province in China, is the country’s biggest ice cave—an 85-meter deep bowling pin shaped subterranean structure set into the side of the mountain. Its walls and floors are coated with thick layers of ice, while large icicles and stalactites stretch from the ceiling to floor. The Ningwu Cave has the unique ability to stay frozen throughout summer even when the outside temperature climbs into the high teens.
Across continental Europe, Central Asia, and North America are many such ice caves where winter lasts all round the year. The majority of these ice caves are located in cooler regions, such as Alaska, Iceland and Russia, where the year-long low temperature helps keep the caves naturally cool and frozen. However, ice caves also exist in warmer clim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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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Most of these caves are what is known as “cold traps”. These caves have conveniently located chimneys and exits that allow cold air to enter during the winter, but not the warm air in summer. In winter, the cold dense air settles into the cave, displacing any warmer air which rises and exits the cave. In summer, the cold cave air remains in place as the relatively warm surface air is lighter and cannot enter.
The ice inside the cave also acts as a buffer that helps stabilizes the temperature inside the cave. Any warm air entering the cave is immediately cooled by the ice before it can cause any significant warming of the cave’s inside. Sure, it melts some ice, but the ambient temperature inside the cave stays pretty much constant. The reverse is also true: in winter, when very cold air cascades in, any liquid water in the cave freezes, releasing heat and stopping the cave’s temperature from plummeting too low.
For ice caves to form there must also be sufficient quantities of water available over the right period of time. In winter the climate must be such that the mountains are sufficiently covered in snow, and in summer the temperature should be high enough to cause the snow to melt but without significant warming of the air which streams into the caves. There needs to be a delicate balance between all these factors for an ice cave to form and maintain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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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rgest ice cave in the world is Eisriesenwelt, located in Werfen, Austria, about 40 km south of Salzburg. The cave stretches for more than 42 kilometers. Photo credit: Michael & Sophia/Flickr
The Decorah Ice Cave in Iowa, the US, is one of the largest caverns containing ice in the American Midwest. The cave remains relatively ice free during fall and early winter. During this period, chilly winter air enters the cave and lowers the temperature of the rock walls. When snow starts to melt in spring, the melt water seeps into the cave and freezes upon contact with the still-cold walls, reaching maximum thickness of several inches in May-June. Ice often remains inside the cave until late August, while outside temperature breaks into the high thirties (high nineties for Americ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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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imilar phenomenon is seen at Coudersport Ice Mine in Pennsylvania. It’s a small pit, where ice forms only during the summer months, and melts away in winter. Photo credit: rivercouple75/Tripadvi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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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ming Ice Chasm in the Canadian Rockies in Alberta is known for its incredible acoustics. It is said that as rocks tumble down and crash to the cave floor, 140 meters below, it causes booming echoes. The cave was discovered only in 2005 on Google Earth. Photo credit: Francois-Xavier De Ruyd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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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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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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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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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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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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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ngwu Ice Cave in China. Photo credit: Zhou Junxiang/Image China

지구의 좌표: 위도(緯度)와 경도(經度): Latitude and Longitude


[경도와 표준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 그리니치천문대에 기준선 그었어요
우리나라 1961년 동경 135도 확정… 北, 127.5도로 옮겼다 최근 원위치

우리나라와 북한의 시간이 같아졌어요. 과거에는 서울 시각이 오후 1시이면 평양 시각은 오후 12시 30분으로 30분씩 차이가 났지만, 이제는 서울과 평양 시계가 똑같은 오후 1시를 가리키게 됐답니다.

사실 서울과 평양은 지도상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있어요. 이런 경우 보통 표준시 차이가 없는데, 왜 서울과 평양은 30분이란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선원의 생사가 걸린 '경도' 측정
중세 이후 사람들은 지구 모양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근 구(球)'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여행이나 무역을 할 때 험난한 육로를 피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큰 배를 타고 멀리 나아가는 일이 잦아지자 배가 길을 잃고 침몰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 위에 위도(緯度)와 경도(經度)를 그린 지도예요.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특정 지점이 남북(南北)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가로선'이에요. 적도부터 극지방까지 15도씩 0~90°(도)로 구분하는데, 적도 북쪽을 '북위'라 하고 남쪽을 '남위'라고 해요.

반면 경도는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 그어진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을 중심으로 동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낸 '세로선'이에요. 지구 둘레를 360°로 나눈 뒤 본초자오선 동쪽 180°까지 '동경'이라 하고 서쪽 180°까지 '서경'이라 불러요.

이렇게 위도와 경도를 이용하면 지구상 어느 지점도 쉽게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답니다. 어떤 장소든 위선(위도 선)과 경선(경도 선)이 만나서 생긴 네모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평양은 위도 39°, 동경 125°에 있고 서울은 위도 37°, 동경 126°쯤에 있어요.

◇위도는 기후, 경도는 표준시 결정
위도와 경도는 각각 기후와 표준시에 큰 영향을 미쳐요. 먼저 위도는 그 지역이 열대 기후인지, 온대 기후인지, 한대 기후인지를 결정하는데요. 이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도에 따라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즉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저위도 지역(남·북위 0~30° 지역)은 대체로 1년 내내 더운 열대 기후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위도 지역(남·북위 30~60° 지역)은 온화한 온대 기후예요. 하지만 태양 빛이 넓은 지역에 걸쳐 비스듬하게 비추는 고위도 지역(남·북위 60~90°)은 1년 내내 추운 한대 기후이지요.
위도와 경도 설명 그래픽
 그래픽=안병현
경도는 각 나라에서 표준시(한 나라·지역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시각)를 결정하는 기준이 돼요.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스스로 회전(자전)하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구를 24개 세로선으로 나누고 시간을 정했답니다. 경선 하나마다 한 시간씩 차이가 나는데, 동쪽으로 가면 한 시간씩 빨라지고 서쪽으로 가면 한 시간씩 늦어지는 거예요.

재밌는 건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적도에서 극지방으로 갈수록 경도 15도에 해당하는 거리가 작아진다는 거예요. 경도 1도는 세계 어디에서든 4분(1시간÷15도) 정도 시차를 나타내지만, 거리로 환산하면 적도에선 약 111.3㎞이고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0㎞에 해당하지요.

◇그리니치천문대가 경도 기준 되다
위도는 지구 자전축과 수직을 이루는 적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지구상 동서(東西) 위치인 경도를 구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지요. 위도처럼 자연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의 시간을 알아낸 뒤 그 차이를 통해 경도를 구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요. 오늘날에는 두 개의 시계로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진자(振子)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답니다. 배 위에서 진자의 진동 속도가 달라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1735년 시골의 이름 없는 목수였던 존 해리슨이 해상용 시계인 'H1(크로노미터)'을 제작합니다. 이 시계는 무엇보다 스프링(용수철)을 써서 흔들림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이 특징이었어요. H1은 영국 포츠머스항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영국 군함 센추리언호에 실려 그 정확성을 검증받았고, 이후 지속적인 개선 작업을 통해 오차를 크게 줄여나갔지요 .

1800년대 경도 문제는 국가 간 분쟁으로 옮아갔습니다. 많은 나라가 경도와 위도를 사용한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각기 자기 나라를 기준으로 경도를 표시했기 때문이지요. 이에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경도대회에서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경도를 '본초자오선(기준 경도)'으로 삼기로 결정했어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이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각국 대표들을 설득한 결과였지요. 이에 따라 전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에서 가장 근접한 경도를 기준으로 1시간 단위(15°)로 표준시를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어요.

우리나라 표준시 기준의 경우 대한제국 말부터 동경 127.5도와 135도를 오가다 1961년 일본과 같은 '동경 135도'로 최종 확정했어요. 이에 따라 서울 표준시도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135÷15) 빠른 시각으로 정해졌지요. 북한도 오랫동안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사용해 왔지만, 2015년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이유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시각이 달라진 거예요. 이번에 남북이 함께 시간을 맞춘 만큼 앞으로 여러 가지 다른 점들을 좁혀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


서금영·과학 칼럼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죤 매캐인 의원: "세상은 지킬 가치 있는 곳"

말기암 판정받은 '美보수의 상징' 매케인, 미국과 세상에 건넨 苦言
"트럼프는 리얼리티 쇼하듯 자신의 터프함 보이는 것을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겨"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다. 겸손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이해'일 뿐 대단한 게 아니다. 그 겸손이 (대화와 타협을 가능케 해) 더 생산적인 정치를 만든다.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는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다."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한 미국의 보수 정치인이 생애 마지막이 될 회고록에서 호소한 것은 겸손(humility)이었다.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존 매케인(81)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이 병석에서 집필한 회고록 '쉼 없는 파도(The Restless Wave)'가 오는 22일 출간을 앞두고 요약본이 1일(현지 시각) 공개됐다.

이 책은 산전수전 겪은 노(老) 정치인이 미국과 세계에 건네는 고언(苦言)이다. 매케인은 "나는 5년 더 살 수도, 이 책이 나오기 전 떠날 수도 있다"면서 "세상은 좋은 곳이며 싸워 지킬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떠나기가 싫다. 불평하진 않겠다. 인생은 여행과도 같았다"고 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 정치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2008년 10월 오하이오주의 오터바인 대학교에서 연설하는 모습.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그는 오는 22일 출간할 회고록 ‘쉼 없는 파도’에서 “오늘날 정치에는 겸손이 부족하다”고 일갈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 정치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2008년 10월 오하이오주의 오터바인 대학교에서 연설하는 모습.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그는 오는 22일 출간할 회고록 ‘쉼 없는 파도’에서 “오늘날 정치에는 겸손이 부족하다”고 일갈했다. /AP 연합뉴스
그는 "나는 (6선 의원으로서)여섯 명의 대통령과 일하면서 그들 모두에 반대하고 싸워봤다"면서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평범한 미국인으로서 서로가 가져야 할 존중을 약화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또 "정치 성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좋은 부모, 충성스러운 미국인, 고결한 인간일 수 있다"고 했다.

매케인은 미국 정치가 '이념의 게토(ghetto·집단 거주지)'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은둔하는 양극화가 심하다고 우려했다. "자신만의 뉴스 소스를 갖고,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들과만 생각을 나누며, 그렇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팩트(fact)'만을 취사선택하고 그에 배치되는 어떤 경험적 증거도 '가짜(fake)'로 치부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터프하게 보이는 것, 또는 리얼리티 쇼처럼 터프함을 모방하는 행위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극우·극좌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목소리를 내라"면서 "선거에서 누가 '워싱턴에 백마를 타고 가서 세금을 털어가는 깡패들을 혼내주고, 그들과는 함께 일하지도 타협하지도 않겠다'고 하면, 그 후보만 안 뽑으면 된다"고 했다. 뭐든 다 해줄 듯이 터무니없는 공약을 내걸고, 상대방 정파는 무조건 비난하는 후보는 뽑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정치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케인 의원의 말이라면 무게가 다르다. 그의 인생 자체가 '미국의 살아 있는 양심'이자 '정의로운 보수주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해군 출신인 매케인은 29세 때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공산당에 포로로 붙잡혀 5년 반 동안 고문을 당했다. 한국전 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해군 제독 아버지(잭 매케인)가 미 태평양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부담을 느낀 베트콩이 그에게 조기 석방을 제안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 수칙을 내세워 동료부터 풀려나게 했다.

이때의 경험이 매케인의 이후 정치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 애리조나주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내리 6선 상원의원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과 정파의 이익보다 인권과 정의,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시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2013년 수행원도 없이 현지에 들어가 실태를 조사한 뒤, 오바마 정부에 시리아 반군 지원을 촉구했다. 최근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 지명자의 알카에다 포로 물고문 전력이 논란이 되자 공화당 소속임에도 인준을 반대했다.

매케인은 회고록에서 "이번이 나의 마지막 임기다. 이젠 (정치적)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속내를 말할 수 있다"고 했지만, 평생 인기를 따지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그는 2008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아랍인"이라고 욕하는 공화당의 백인 지지자에게 "그건 아니죠"라고 훈계했다. 같은 진영에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그를 트럼프 대통령은 "베트남 같은 데서 붙잡히기나 하는 주제에"라고 조롱했다. 뉴욕타임스는 "어쩌면 매케인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봉사는 베트남 포로로 고생할 때가 아니라, 상원의원으로서 보수 진영에 몸담고 있는 지금일 수도 있다"고 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누구]
1936년 파나마생
1954년 해군 제독인 조부·부친을 따라 해군사관학교 진학
1965년 베트남전 참전했다 5년 반 포로 생활
1982년~ 애리조나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재선
1986년~ 연방 상원의원 6선, 상원 군사위원장
2005년 포로 고문을 금지한 '매케인 정치범 수정법' 통과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조지 W 부시에게 패배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
2017년 악성 뇌종양 발병, 투병 중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3/20180503002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