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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1일 목요일

대한민국 그 위대한 힘

1964년 12월 8일 오전 10시 55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루르 지방 탄광 지대의 한 공회당에 도착했다. 막장에서 작업을 끝내고 급히 나온 약 500명의 광부들이 새까만 얼굴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목이 메어 음악만 흐르고 가사가 나오지 않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가면서 조금씩 소리가 커져 갔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마침내 행사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대통령이 준비해온 연설문을 펼쳤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하지만 연설은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더니 끝내는 대통령도 울었던 것이다.”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의 강연이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청중석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졌다. 한국전쟁 중에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던 독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던 백 원장은 3년 만에 ‘경제학 박사 1호’가 되어 귀국했다. 백 원장은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는데, 1964년 서독 방문 당시 그는 통역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울자 육영수 여사도, 수행원도,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열심히 일합시다. 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봅시다.’ 대통령은 울음 섞인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나에게 그것은 가난을 반드시 끝장내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연설이 중단되고 밖으로 나오는데 1시간이 걸렸다. ‘손 한 번만 잡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시렵니까?’ 광부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며 대통령에게 매달렸다. 밖으로 나오자 더 많은 광부들이 운집해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간신히 아우토반에 오르자 대통령의 두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줬다. 앞좌석에서 나는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았다.”


아우토반을 적신 ‘대통령의 눈물’


뤼브케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격려했다.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독일이 돕겠습니다.” 칠순의 노 대통령과 40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이 나누는 우정 어린 대화 내용을 통역하면서 백 원장 역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백 원장은 이후부터 한국이 왜 이런 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 성찰했다고 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요한 바그너가 저술한 <역사의 대실패>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 왕조가 실패한 3가지 원인을 분석했는데, 공감이 갔다. 첫째, 바깥세상을 몰랐다. 개방을 선택한 일본과 반대로 쇄국을 선택한 결과 역사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둘째, 관료사회와 지식그룹이 부패하고 타락했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봉기하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였다가 강화도조약 체결이라는 치욕적 수모를 당했다. 셋째, 위기 앞에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했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오랜 당파 싸움에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이 겹쳤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왕실에서는 시아버지(대원군)와 며느리(명성황후)까지 싸웠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멸망은 불가피했다.”


백 원장은 조선 왕조의 몰락을 ‘테마의 부재’에서 찾았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독일에는 비스마르크, 중국에는 손문이라는 리더가 등장해 ‘도약을 위한 통일’이라는 테마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망국 100년이 지나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2011년에도 여전히 분단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적인 사가(史家)들은 한민족이 겪었던 지난 100년을 지구상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빈말이 아닌데, 지난 100년 동안 무려 500만의 한민족이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일제강점 기간 60만, 한국전쟁 기간 400만).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사망자가 120만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봐도 한국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전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전파 중에도 18만이 순교했는데, 찬송가 586장의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라는 가사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1955년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의 인도 대표 메논은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런던타임스’ 사이몬즈 기자도 같은 표현을 헤드라인에 올렸다.”


그러나 한국은 보란 듯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개도국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이 피워낸 이 장미꽃을 ‘한강의 기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백 원장은 “‘한강의 기적’이 ‘라인강의 기적’에 빚진 것이 많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61년 일어난 5.16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다.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쿠데타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전면 중단했다. 원조 재개를 요청하기 위해 백악관까지 찾아갔지만 냉대만 받고 돌아와 확인해 보니 한국은행에는 2000만 달러밖에 없었다. 앞이 깜깜해진 박 대통령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나를 불러 독일과의 교섭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눈물겨운 간청과 설득 끝에 독일 정부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 상업차관을 약속받았으나 지급보증을 할 담보가 없었다. 바로 그때 추진한 것이 광부 5000명 간호사 2000명 파견이었고, 그들의 3년간 임금을 담보로 간신히 ‘한강의 기적’에 시동을 걸 수 있는 첫 종자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CEO가 명심해야 할 5가지 경영철학


1963년 12월 20일 가장 먼저 선발된 광부와 간호원 150명이 독일로 떠났다. 그들이 가족과 이별을 고하던 김포비행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하지만 그들은 낯선 나라의 탄광 막장과 시골 병원에서 헌신적 노동으로 ‘코리아 엔젤’로 불리며 독일인을 감동시켰고, 마침내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독일 의회가 여야 만장일치로 한국지원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21세기에는 아시아태평양시대가 활짝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지는 15~17세기에는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이 주도하던 지중해권이었고, 18~20세기에는 영국,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권이었다. 그런 그가 일본, 중국, 한국이 주도하는 태평양이 앞으로 21세기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케네디는 작년 일본의 동경대에서 특강을 했는데, ‘아시아 3국 중 누가 중심국가 역할을 담당하는 리더가 될 것으로 보느냐?’는 민감한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케네디는 망설임 없이 'Never Japan, never China, only Korea'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도덕성, 정신적 문화력, 자유민주주의 역량 등 3가지 근거까지 제시했다.”


세계지도에서 한국 영토가 차지하는 비율은 0.075%에 불과하다. 이렇게 좁은 땅을 가진 나라가 작년 4900억 달러를 수출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국가 전체 수출의 약 2배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백 원장은 “이 엄청난 역사를 일군 사람은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원 등 근로자와 기업인”이라면서 CEO가 명심해야 할 슘페터의 경영철학 5가지를 소개했다.


“첫째, 경영의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닌 성취의 희열에 있다. 그래서 경영을 인류의 미래를 창조하는 예술, 사상, 철학으로 부르는 것이다. 둘째, 경영은 학문적 지식이 아닌 실천을 위한 지혜이다. 여기에는 결단, 개척, 모험 등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셋째, 경영은 끊임없는 혁신의 과정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영원한 창조적 파괴를 해야 한다. 넷째, 경영은 조직력(team spirit)이다. 이를 위해 리더는 조직 안에서 절대, 무한, 불멸의 책임을 져야 한다. 다섯째, 경영은 자본과 기술이 아니라 인적 자산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 명령, 지시, 복종, 관리, 감독 등 행정 용어가 아니라 대화, 설득, 신뢰, 참여, 성취 등 경영 용어를 사용할 때 경영은 ‘휴머니즘 혁명’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인간개발연구원 2011.8.10 실린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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