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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5일 금요일

독일 교회와 한국 교회



善의 길을 간 독일교회, 惡한 길을 걷는 한국교회 統獨은 동독의 기도회가 뇌관이 되었고 이것은 소련까지 무너뜨리는 쓰나미로 휘몰아친다.

金 成 昱
독일 전총리 - 말로 표현 할 수 없을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뿐이다
 
역사에서 神靈(신령)한 기운이 느껴질 때가 많다. 실제 統獨(통독)은 동독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뇌관이 되었고 이것은 소련 공산제국까지 무너뜨리는 쓰나미로 휘몰아친다.
 
 동유럽 최강의 국가인 東獨(동독)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 5월7일 지방선거였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지정한 후보에 대한 찬성률이 98.85%라 발표했지만 사실은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시민들은 라이프치히 집회를 기화로 동독 전역에서 100여 차례 시위를 벌였고 ‘1989년 선거실패(Wahllfall 89’)라는 책자를 만들어 뿌렸다. 같은 해 여름 150여 개 단체들이 결집하는데 이들을 보호해 준 곳은 東獨의 교회였다.

 특히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예배는 5월7일 부정선거를 계기로 참석자들이 100여 명에서 500여 명으로 번졌다. 인원은 6월 말 2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0월2일에는 1만 여 명이 참석했다. 급기야 10월9일에는 7만 여 명, 11월6일에는 50만 명 대규모 시위로 폭발해 버렸다. 11월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도 100만 명의 군중이 참가했다.

 이슈도 커갔다. 최초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예배에서 ‘여행의 자유, 신앙·언론의 자유(10월9일)’를 외치는 시위로 번졌고 11월6일에는 ‘자유선거’와 ‘베를린 장벽 철거’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안전요원이 수천 명씩 배치됐지만 경찰이 촛불을 들 정도로 민심은 넘어가 있었다.
 
 코너에 몰린 동독정부는 11월9일 새 旅行法(여행법)을 발표했다. 정권의 의도는 여행규제를 완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샤보브스키 공보비서는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법이 여행규제 緩和(완화)가 아니라 撤廢(철폐)인 것처럼 발표해 버렸다. “개인 해외여행은 별도의 전제조건을 제출하지 않고도 신청할 수 있다. 여행허가는 즉시 내려진다. 여행거부근거는 특별한 예외 경우에만 적용된다.”며 “이 법은 제가 알기로는 즉각(ab sofort)지체하지 않고 발효될 것”이라고 잘못 대답한 것이다. 이 발표가 나오자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는 뉴스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동독 시민들은 해머를 들고 몰려나와 베를린 장벽을 부셨고 “갔다 다시 올 것이다(Wir kommen wieder)”를 외치며 개방된 국경통과소와 국경검문소를 통해 서독으로 차를 몰았다. 세인들은 샤보브스키의 실언(?)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실수’로 불렀다.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전만 해도 통일은 먼 미래의 일로 여겨졌다. 89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브란트 前수상마저 “독일통일보다는 한반도 통일이 먼저 될 것”이며 “독일 통일은 10년 후쯤에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장벽이 무너진 뒤 같은 달 20일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의 구호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어 있었다. 게르만 민족의 열정은 1년 후인 90년 8월23일, 동독 인민의회가 같은 해 10월3일자로 동독이 서독 기본법 적용영역에 들어간다(Beitritt)는 결정으로 마무리됐다.

 독일 통일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월요예배·월요집회로 상징되는 기독교 세력이었다.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기독교 세력은 대규모 平和的(평화적) 시위를 벌였고 평화적 시위인 탓에 공산당도 무력진압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동독을 통치한 호네커는 10월9일 라이프치히 월요집회를 무장탱크로 진압하자고 주장했으나 공산당 지도부에 거부당했다. 국가보위부는 發砲(발포)를 제외한 모든 힘을 다 하라 했으나 총을 쏠 수도 없었다. 시위대는 진압경찰에 장미꽃을 주는가 하면 밤이면 촛불을 들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질서정연한 시위를 벌였다.

 보제 라이프치히 시 공보관은 최근 출판된 ‘브란덴브르쿠 비망록(양창석 著)’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위 주도세력들은 기독교 신자들로서 종교적인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와 베를린의 겟세마네 교회에서 平和(평화)예배를 드리고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평화시위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더욱더 강했다.”

 당시 동독 교회연합회 부총재였던 드메지어는 통일 직전 東獨총리로서 콜 西獨총리와 함께 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 붕괴의 지렛대가 東獨교회였으며 이는 西獨교회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며 이렇게 증언한다.

 “동독 교회는 동독 주민 권리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다른 사람 생각을 서로 전해들을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동독 공산당은 교회를 쳐부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가 지닌 전통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 후 동독 공산당이 오히려 교회와 협력을 모색하려 했지만 이제는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독의 교회는 자율권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서독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인용 브란덴브루크 비망록)”

 종교를 떠나 독일의 통일이 自由(자유)와 人權(인권)을 향한 동서독 교회의 용기와 실천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북한정권의 사악한 만행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된 비판은커녕 끝없이 타협해가는 상당수 한국교회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동독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 강제송환, 영아살해·강제낙태는 물론 地下기독교인에 대한 참혹한 학살 등 전대미문의 惡行(악행)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는 탓이다.
惡(악)에 대한 관용을 넘어 김정일 정권을 돕는데 열을 내는 상당수 교회는 惡(악)과 한 패거리가 되고 있다.
북한해방을 넘어 자유통일, 자유와 인권의 北進(북진)은 그래서 북한을 살리기 이전에 한국교회가 살고 한국이 사는 길이다.
우리의 선한 마음, 의로운 용기를 구하는 길이다.


[ 2011-05-24, 00:23 ]
 
 
 <韓國敎會> 改新敎歷史上 가장 墮落했다 !!!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교계 원로의 평가는 냉혹했다.
지난 2월17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72)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어긋난다.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만큼 타락한 교회는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돈 선거' 파문을 지켜보면서는 "창피하고 화가 난
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손교수는 "한기총은 개혁이 불가능하다"라고 진단한 후 "해체 운동에 나서겠다"라고 밝혔
다. 그는 또 "목사 상당수가 독재자이다. 견제와 비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철
학회 회장, 동덕여대 총장을 역임한 손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이
끌어왔다. 그동안 개신교인의 윤리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대표적인 개신
교계 인사이다.

한기총의 금권 선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과거에도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그때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공
개적으로 밝혀진 만큼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한기총은 해체되어야 한다. 개혁은 불가능하
다고 생각한다.
직접 나서서 해체 운동을 하겠다. 우선 어느 교단이 양심적인가 지켜보려고 한다. 제대
로 된 교단이라면 한기총에서 탈퇴해야 한다.
그런 후 한기총에 스스로 해체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도 해체하지
않으면 서명 운동을 펼칠 생각이다. 최근 활동가 모임에서 한기총을 해체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한기총은 개신교인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

교계 지도자의 명예욕을 지적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문제인가?

한국 개신교는
 기복 신앙 이 강하다. 그런데 복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이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긴다. 그렇다 보니 목사가 명예에 집착하게 된다.
더구나 한국 정치권은 개신교계에 약하다. 개신교 대표를 청와대에 초청하는 등 굉장한
대우를 해준다. 이것이 한국 교회 타락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계를 대표하는 자리가 왜 필요하나.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한기총처럼 교계 전
체를 대표하려는 기관이 없다. 불교도 한목소리를 내고, 천주교도 한목소리를 내는데, 개
신교만 한목소리를 못 내면 손해를 보지 않느냐고 하는데, 손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
다. 개신교는 핍박을 받아야 순수해진다. 지금처럼 특권을 누리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정치권과의 관계 정
립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많은 분들이 앞으로 대통령은 개신교인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서 정치
권력자가 개신교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
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회에 아무런 이익이 안 된다.

돈 문제는 교계에서 민감한 사안 가운데 하나인데, 교회가 너무 물신주의
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돈과 하느님은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버는 것
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어긋난다. 예수님은 철저히 가난했고, 사도들도 다 가난했다.

장로를 비롯한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나?

돈을 많이 연보(헌금)하는 사람이 훌륭한 교인이고, 장로가 되려면 연보를 얼마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철저히 비개신교적이다.
그렇게 해서 장로가 된다면 교인들의 대표성을 지닐 수 있겠나. 또 장로로서 존경받고 권
위가 서겠나. 교인들은 장로를 뽑아놓고 존경하지도 않고, 장로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장
난을 쳐서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아직도 이른바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국 개신교는 내가 아는 한 가장 타락한 교회이다.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만
큼 타락한 교회는 없었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데, 신뢰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성경대로 살면 신뢰도 높아진다. 우선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을 안 해야 한다.
과장하지 말고 솔직해야 한다. 또 사치하지 말고 검소해야 한다. 교회가 휘황찬란할 필요
가 있나? 가난한 이들이 들어와도 마음에 부담을 안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의
돈을 사회 봉사에 쓰면 왜 신뢰를 못 받겠나. 너무 간단한 것을 지금 못하고 있다.

일부 목사들로 인해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격 없는 목사들로 인해 하급 종교가 되었다.
교양 수준이 형편없는 목사가 많다. 절에 가서 땅 밟기를 하지 않나, 고함을 지르지 않
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상당수 목사가 독재자이다. 잘못에 대해 견제와 비판을 받
지 않는다. 교인들이 진정 목사를 사랑한다면 견제하고 비판해야 한다.
미리 그랬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곪지 않도록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다. 성
문제도 목사가 너무 절대적인 위치에 있으니까 생긴다.

존경받는 목사도 많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들에 대한 미움이 더 크다. 그분들의 고결함이 도매급으로 상처를
입으니까 그렇다.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면 자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자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평신도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교회가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서 목사들에게 압력을 넣어야 한다. 교인들이 대개 한
탄만 하지 실제 행동으로 잘 나서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내의 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면 위축되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는데?

많이 위축되어야 한다. 위축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욕을 먹어야 한
다. 한국 교회가 잘못을 숨겨놓을 위치에 있는가. 개신교는 현재 막강한 세력이다.
그런 집단이 우리끼리 보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말 핍박받는 소수라면 그런 것
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장로인 현실에서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무책임
하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

많은 교회에서 은혜받고 구원받는 것만 강조하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강조하
지 않고 있다.
이제는 진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논리적 모순이나 혼돈을 가져서는 안 된다.
윤리적인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
다. 또 하나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라는 말씀이다. 물론 나의
원수는 용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 이웃의 원수를 용서할 권한은 없다. 오히려 분노
해야 한다. 나의 원수와 내 이웃의 원수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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