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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8일 토요일

기독교 초대교회 탐방.

[1] 고린도·아레오바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 고린도에 '사랑'을 외치다
아테네 서북쪽 '풍요의 땅' 1년반 머물며 교회 일궈
그리스神 섬기던 이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한채
위하는 그분, 하나님을 알게하리라"

그리스와 터키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활발히 활동했던 지역이다. 사도 바울과 요한 등이 때로는 치열한 교리 논쟁을 벌이고, 때로는 박해를 받으며 복음(福音)을 전도했던 터전이지만 지금은 흩어진 돌기둥과 마구 자란 엉겅퀴 등이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달 27일부터 5월 4일까지 초대 교회 성지들을 찾아 마음의 눈으로 2000년 전 그리스도교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 노래의 가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코린토스)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고린도전서)의 한 구절이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반을 머물며 교회를 일궜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가량 고속도로를 달리면 저 멀리 밥공기를 엎어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난다. 옛 고린도 시가를 굽어보던 해발 566m의 아크로고린도였다.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부(富)가 넘쳐났던 곳이다. 북쪽의 그리스 본토와 남쪽의 펠로폰테소스반도는 불과 6㎞의 고린도 지협(地峽)으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지금은 19세기 말에 완공된 운하로 배가 다니지만 고대의 고린도는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막대한 부를 누렸다. 고린도 유적지는 거대한 석주(石柱) 7개가 남은 아폴론 신전과 광장인 아고라터, 이오니아해 쪽의 항구인 레가이온으로 이어졌던 폭 6~7.5m의 포장도로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AD 50년 무렵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부가 가져다준 향락에 빠져 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의 여러 신들을 섬겼고,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는 계시를 받고 마음을 다잡는다. 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번 돈으로 선교활동에 나선다.
유대인의 반발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고린도의 그리스도교 유적지. 뒤편에 높이 솟은 산은 아ㅡ로디테 신전이 있던 아크로고린도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대는 거셌다. 결국 바울은 로마 총독 갈리오의 법정에 서게 됐다. 그러나 갈리오는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유대인들을 쫓아냈다. 당시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섰던 단상(Bema)은 고린도 유적지 한복판에 그대로 남아 있다. 높이 5m, 폭 15m의 석조 단상 뒤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미(美)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던 거대한 아크로고린도가 펼쳐져 있다.
바울은 고난을 겪었지만 성과도 상당했다. 유대인들의 회당장(會堂長) 그리스보가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게 됐고, 고린도의 재무(財務) 담당 고관인 에라스도 역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이같은 성과 때문인지 바울은 훗날 마케도니아에 머물던 시절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고린도후서)의 첫머리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그리스 본토 남부 지방)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고 시작한다. 그 사이 그리스도교가 고린도를 중심으로 상당히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자였고 그리스어(헬라어)에도 능통했던 바울의 학식과 담대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이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파르테논 신전 바로 아래 바위 언덕인 아레오바고는 당시 새로운 학설이나 사상을 발표하던 장소였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하기에 앞서 아레오바고를 찾아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라고 새긴 단(壇)을 보았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며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설교했다. 성지순례를 떠난 서울 광림교회 신자들과 함께 고린도를 거쳐 아레오바고에 도착하자 언덕으로 오르는 입구 바위에 헬라어로 새긴 바울의 설교 동판이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지도와 시기

[2] '크리스천'의 시작은 이 컴컴한 절벽 동굴이었다


안디옥·다소
유대인들의 박해 피해온 '난민들의 교회' 안디옥…
다소의 바울 생가터엔 복음처럼 마르지않은 우물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12장 25~26절)

시리아 국경에서 가까운 터키 안타키아(현지명 하타이) 시내에 들어서면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이 한눈에 꽉 찬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위산 절벽 중턱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절벽 중턱에는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동굴교회가 있다. 동굴 안쪽 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경을 양손에 든 베드로상(像)이 있다. 꽉 들어차면 100명 정도가 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런 동굴에서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천'이란 호칭을 받은 초대 교회는 시작된 것이다.

성경에 안디옥으로 표기된 이곳은 로마 시대에 로마·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안디옥이란 지명은 BC 300년경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1세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붙여 안티오키아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영토 내 여러 도시에 같은 이름을 붙였고, 이 때문에 이 도시를 다른 곳과 구분하기 위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곳은 '난민 교회'로 시작됐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하는 등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북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안디옥으로 피란와서 신앙을 지켰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터키 남부 안타키아 실피우스산의 동굴 교회.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이 동굴 교회 한 쪽 구석에 박해를 피해서 피신할 수 있는 작은 구머이 돌산 속으로 이어지게 만들어져 있다.

바울은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던 현장에서 유대인의 옷을 지켜주던 청년이었다. 또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이며 박해에 앞장섰다. 그러던 그는 다마섹(현재의 다마스쿠스)으로 가던 중 하늘로부터 빛과 함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은 예수를 믿게 되고 후에 이름도 바울로 바꾸게 된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거쳐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던 중 안디옥 교회의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다. 안디옥에서 1년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한 바울은 금식(禁食) 기도 중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聖靈)의 말씀을 듣고 선교사로 파송된다.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는 등 성과를 올린 바울은 터키 내륙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옮겨간다.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救主)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며 설교한 그는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려 했으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永生)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에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선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이 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異邦)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하셨다."(사도행전 13장 47절) 바울이 '땅끝 전도'를 선언한 비시디아 안디옥은 현재 터키 중부 얄바치라는 곳 부근이다. 서울 광림교회 순례단이 찾은 이곳엔 황량한 들판에 비잔틴시대에 건축된 교회터만 남아 있었다.

평생 네 차례에 걸쳐 총 7만㎞를 걸으며 당시 서방세계의 중심인 로마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의 고향은 터키 길리기아 지방의 작은 마을 다소(타르수스)였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小邑)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사도행전 21장 39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현재 다소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소읍이었다. 마을 입구에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안토니우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하는 아치형 석조문만이 이곳이 한때 번창한 도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의 생가터로 알려진 곳에는 돌로 만든 우물 하나가 남아 있었다. 관리인은 순례단을 위해 뚜껑을 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줬다. 우물물은 지금도 맑고 시원했다. 마르지 않은 이 우물물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은 2000년 동안 세계를 적시고 있다.

성베드로 동굴교회에서 성찬식을 올리고 있다.


[3·끝] 움푹 팬 바위… 엎드려 기도하던 요한의 자취인가.


밧모·에베소
요한이 유배가던 그날처럼 밧모섬 앞바다는 요동치고…
환상 봤다는 동굴 앞에선 눈앞에 계시록 펼쳐진 듯

'배가 뒤집힐 것 같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지난 4월 28일 오후 3시쯤 그리스의 파트모스섬을 출발해 터키로 향하는 여객선은 전후좌우로 요동쳤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은 작열하고 바닷물도 코발트빛으로 아름다웠지만 바람과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결국 1시간여 만에 파트모스로 뱃머리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험한 바닷길을 2000년 전 배를 타고 건너온 사도가 있었다.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이다.

성경에 '밧모'로 표기된 파트모스섬은 남북 16㎞, 동서 10㎞ 정도의 작은 섬이다. 산 위에서 제주도처럼 돌담을 세워놓은 밭들이 내려다보인다. 바람이 세고 척박한 섬이었다. 사도 요한이 이 섬에 오게 된 것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는 요한계시록 구절처럼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년)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서기 95년 무렵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은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호라마을 위의 바위동굴을 기도처로 삼았다. 지금은 요한을 기념하는 그리스정교회 성당으로 꾸며진 이 동굴에 들어서면 바닥에서 1m쯤 되는 높이의 바위에 작은 홈이 패여있다. 요한이 엎드려 기도한 후 일어날 때 짚으면서 팬 자국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동굴 입구에선 밧모섬 전체와 스칼라 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자리에서 요한은 환상을 보고 그 내용을 계시록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적었다. 당초 밧모섬에는 그리스의 여러 신(神)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지만 요한이 1년 반의 유배를 마치고 에페수스(성경에선 에베소로 표기)로 귀환할 때에는 섬 주민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고 한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쓴 동굴 위에 만들어진 그리스정교회. 뒤로 밧모섬 전경이 내려 보이고 있다.

요한동굴 위로는 그리스정교회의 신학교가 있고 산 정상에는 1088년에 세워진 '요한수도원'이 있다. 각 장(章)의 첫 글자를 황금으로 쓴 '마가복음' 등 진귀한 유물을 다수 소장한 이 수도원에는 요한이 밧줄에 손이 묶인 채 작은 배를 타고 험한 파도를 헤치며 이 섬으로 유배오는 장면을 그린 천장화도 볼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파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겨우 바다를 건너 터키에 닿았다. 이날 낮에 서울 광림교회 순례단이 찾은 에베소는 고대로마의 유적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오랜 지진과 퇴적 작용으로 내륙의 폐허가 됐지만 로마시대 항구도시로서 명성을 날렸던 지역다웠다. 거대한 계곡엔 코린트와 이오니아 양식의 석주(石柱)들이 즐비하고 고대 로마시대의 세계적 도서관이었던 셀수스도서관, 2만명 이상을 수용했다는 대형 원형극장, 풍요와 다산(多産)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 등이 당시 이 도시의 영화(榮華)를 웅변하고 있었다.

요한 수도원 회라의 천장화 사도 요한이 밧줄에 묶인 채 파도를 헤치며 파트로스(밧모)섬으로 유배오는 모습을 그렸다.
에베소는 요한과 바울의 발자취가 함께 남아 있는 곳이다.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복음을 집필했으며 밧모섬에 유배를 다녀온 후에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바울은 에베소에 대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다"고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에베소와 관련된 바울의 행적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령은 모르고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했다. 또 병자와 악귀 들린 사람들까지 고쳐주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다"고 한다. 바울의 이런 눈부신 전도는 아르테미스 여신상(女神像)을 만들어 팔던 은세공업자들의 생업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다른 초대교회 유적지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도 눈으로 볼 수 있는 바울과 요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그리스도교 초대교회 순례길은 역시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에베소 관광

조선일보에서 퍼온 글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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