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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2일 금요일

우리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


 
 
우리의 건국 大統領은 이렇게 죽어갔다

現代史 발굴 연재④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李東昱(前월간조선 기자)   

 또다시 좌절된 서울行
 
  프란체스카 女史(여사)와 吳重政(오중정)씨 그리고 催伯烈(최백렬)씨가 상의를 했고, 李承晩(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목적하에 催伯烈씨가 아무런 정치적 의도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작성 한 것이다.
 
  이로써 국내의 귀국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한 李박사측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催伯烈씨는 한국의 날씨를 생각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씨는 마키키가의 목조 주택을 팔려고 내 놓았으며, 李박사와 가족들의 비행기표까지 예매해 두었다. 李박사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표시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떠날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출발 예정일(3월17일) 사흘 전부터 李박사는 보행에 불편을 느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귀국할 것이란 소식이 하와이 교민사회에 알려지자 많은 교포들이 달려와 작별인사를 했다. 李박사는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이 되어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하며 손을 흔들고 기뻐했다. 그야말로 완전히 준비가 된 셈이었다.
 
  1962년 3월17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한 뒤 李박사는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차가 李박사의 집 앞에서 멈추더니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굳은 표정이 되어 내렸다.
  잠시 후 방안에서는 李박사의 왼쪽에 李仁秀(이인수)씨, 오른쪽에는 催伯烈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씨와 프란체스카 女史가 李仁秀씨 맞은편으로 앉았다. 金 총영사는 윌버트 최씨 옆에 앉게 되어 李박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金 총영사와 함께 영사관으로부터 왔던 催伯烈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李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 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李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金 총영사가 “아직은 本國實情(본국실정)이 가실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李박사의 눈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李仁秀씨는 李박사의 싸늘해진 왼손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진정시키려 했다. 다 듣고 난 李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아주 작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그리고는 갸날프게 “나라... 나라...”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李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李박사는 그날 이후로 휠체어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귀국이 실현됐더라면 함께 귀국했을 愛犬(애견) 해피만이 조용히 엎드려 주위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모두 허탈함과 서러움에 빠져 넋을 잃은 표정이었는데 李仁秀씨는 단신으로 귀국할 결심을 한다. 어차피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었기에 李仁秀씨는 그 길로 귀국해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 한 것이다.
  어머니 프란체스카 女史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아들을 막지는 않았다. 영문도 모르는 李박사에게 평소처럼 “다녀오겠습니다”한마디 인사를 남기고 李仁秀씨는 마키키의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백발에 여윈 서양 할머니가 李仁秀씨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가야, 몸조심 해라”
 
 
 제 3부 슬픈 황혼
 
  마우나라니 요양원
 
  1962년 3월17일 귀국이 좌절된 87세의 李承晩 박사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혈압이 급속도로 올라가 뇌출혈 증상이 생겼다. 급히 트리풀러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조치를 받고서야 정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수족은 거의 마비상태가 되어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중풍이 든 것이다.
  이제는 아들도 귀국해 노인 부부만 남게 된 마키키에서 62세의 노파가 87세의 수족이 마비된 남편을 간병하며 살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런 사실이 하와이 교민사회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동정과 호의가 베풀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구했던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하와이 교민들은 끝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교포들은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섭섭해 했다. 특히 나이든 노인들일수록 더했다. 모두가 李박사의 뇌출혈이 중풍으로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함에 대한 울분이 폭발해서였다고들 말했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 큰 변화는 거처를 마키키의 목조 주택에서 마우나라니 요양원으로 옮기게 된 일이다. 하와이에서 5대 재벌의 하나로 꼽히는 딜링햄씨는 李承晩 박사와 독립운동 시절부터 익히 잘 알고 지내온 막역한 사이였다. 그의 재정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는 최고의 요양원이 바로 마우나라니 요양원이었다. 일종의 노인병원인 셈이다.
 
 ▼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물론 이 과정에서는 吳重政 씨와 崔伯烈씨 그리고 이 요양원의 후원자였던 윌버트 최씨의 노력이 컸다. 막막했던 프란체스카 女史 앞으로 마우나라니 요양원 원장 존슨 女史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 해 3월22일이었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李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모든 비용은 무료로 해 드리겠으니 女史님의 회답을 바랍니다.”
  프란체스카 女史는 평소 일기를 쓸 때도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 후 여러 기록을 통해 그 당시 존슨 女史에 대한 고마움을 남겨놓았다. 뿐만 아니라 작고할 때까지도 이 편지를 고이 보관했었다. 프란체스카 女史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도움이었다.
 
 “國父와 國母의 자격을 갖춘 분”
 
  문제는 병실 하나에 침대가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도 교포들의 노력에 의해 어렵지 않게 해결됐다. 프란체스카 女史를 위해 요양원측에서는 본관 건물 뒤편에 자리한 고용인 숙소의 작은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女史를 李박사의 간호보조원으로 인정해 주어 항상 곁에 머물 수가 있었다.
 
  1962년 3월29일에는 李박사 부부가 마우나라니 요양원으로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이 날 李박사의 엄명에 의해 주위 사람들은 李박사의 집안에 들여놨던 가구들을 모두 원래 주인들에게 찾아 돌려주고 나서야 요양원으로 떠날 수 있었다.
  요양원 생활을 시작한 李박사는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낮에는 부인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아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보기도 했다. 이 무렵에도 항상 “빨리 가야 되는데, 빨리 가야 돼...”하며 귀국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요양원 시절에는 吳重政씨와 崔伯烈씨가 자주 찾았다. 吳씨를 통해 들어 본 프란체스카 女史의 간병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런 烈女(열녀)가 없었지요.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쇼핑하러 나가거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요. 마담은 항상 李박사 옆에서 성경을 읽어 드리고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손발이 마비되니까 손발을 주물러 드렸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제가 심부름해 드렸지요. 점심 때는 李박사가 기르던 개 해피에게 밥을 주기 위해 잠시 떠났을 뿐 망명생활 5년 동안 그녀는 李박사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교포들도 ‘저런 분은 처음 봤다’고 들 했지요.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吳重政씨는 프란체스카 女史와 李박사의 병동에서 종종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생활비가 오스트리아에서 매월 200달러씩 오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 집안에서는 커다란 종이 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다. 그녀는 이 종이 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종이 옷장’은 지금도 梨花莊(이화장)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 이화장 전시관에 보존된 프란체스카 여사의 ‘종이 옷장’
 
  “그 분은 실, 바늘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우리가 사다 준 적은 있지만 그 밖의 것들을 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 두 분 다 강했던 분이셨어요. 國父(국부)와 國母(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어머니... 어머니...”
 
  이 무렵 吳重政씨는 李박사가 좋아하는 노래를 병실에서 자주 불러드렸다고 한다. 찬송가 371장‘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란 노래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이 주신 동산/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이 주신 동산/이 동산에 할 일 많아/사방에 일꾼을 부르네/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후렴)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삼천리 강산 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남궁억 작사)>
 
  李박사는 마지막까지도 고국을 잊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언제나 고향산천의 풍경이 완연한 듯, 한국에서 누가 오면“지금도 서울 청량리 밖에는 누런 벼이삭이 굽이치고 있나? 언제 다시 그것을 보고 죽을 수 있을지“하면서 어릴 때 그곳에서 메뚜기를 잡고 남산에서 연날리기를 하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李박사는 잠을 잘 자는 편이 아니었으나 식사는 여전히 잘했다. 李박사의 병세는 고령의 노인에게서 보이는 동맥경화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이었다. 병상에 누운 채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할 정도로 말도 하고 의식도 있었지만 간병하기엔 무척 힘든 환자에 속했다.
  무엇보다 프란체스카 女史의 애를 태웠던 것은 李박사가 약을 워낙 싫어해 그녀가 회고록에도‘약을 먹일 때는 참으로 힘들었다’고 기록해 두었을 정도였다.
 
  오랜 병상생활에서 李박사는 힘이 들면 “아이고, 아이고...”하며 괴로워 할 때도 있었고, 열이 심할 때는 “어머니, 어머니...”라면서 신음을 했다.
  아침에는 사리에 맞는 정확한 영어를 구사했지만 흥분하거나 오후가 되면 한국말로만 말하는 때가 많았다. 주치의는 뇌의 혈액순환관계로 정신 상태가 흐리며 老衰(노쇠)로 하체는 약해졌으나 식성이 좋아서 비교적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韓國으로 돌아갈 여비 걱정한 초대 대통령
 
  李박사는 병원식사를 싫어했지만 늘 그릇은 깨끗이 다 비웠다. 늙은 아내가 李박사를 침대에서 일으키거나 눕힐 때는‘하나, 둘, 셋!’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그때마다 李박사는 아내 프란체스카 女史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힘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프란체스카 女史도 때때로 고달프고 괴로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李박사와 함께 먼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이나 女史의 서툰 도라지 타령을 부르며 위안을 삼았다.
  병원음식에 질려버린 李박사를 위해 그가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열거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 李박사도 따라서 함께 부른 적도 있었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1963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1964년 2월이 되자 養子(양자) 李仁秀씨가 다시 하와이로 나왔다. 점차 병세가 악화된다는 소식을 받았던 것이다. 李仁秀씨가 머물렀던 기간은 약 한 달 보름정도였다. 그동안은 李仁秀씨도 李박사의 수족을 주무르곤 했었다.
 
  하루는 병원장 존슨 女史가 여러 병실을 돌아보다가 李박사의 병상이 있는 202호실에 들렀다. 병상에 누워 무엇을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는 듯한 李박사의 표정을 본 존슨 女史는 “닥터 리!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즉석에서 李박사는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 말이요”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아직도 李박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세요?”하고 묻자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존슨 女史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터번 리!(고집쟁이 李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병상에서도 李박사는 아내에게“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굴을 찾아 간다는데... 남북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李박사는 때때로 李仁秀씨가 베란다에 나가 바람을 쐬고 있으면 프란체스카 女史에게 아들 仁秀의 교육 문제를 걱정하곤 했다.
  “저 녀석이 공부를 더 해야 할 텐데 내 곁에서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늘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李仁秀씨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었으니 李박사는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시킬 궁리만 했었다.
 
 7월19일 0시35분
 
  1964년 4월에는 李박사의 別世(별세) 후를 생각하며 그 준비차 李仁秀씨가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65년 6월 말에는 다시 李仁秀씨를 급히 하와이로 불러야 했다. 李박사의 병세가 매우 위독해진 것이다.
  6월20일. 李박사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胃(위)에서 內出血(내각혈)이 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급히 퀸즈병원으로 후송해서 응급처치를 했다. 긴급 수혈로 혈압을 조절하고 안정을 찾기까지 5일이 걸렸다. 그동안 호놀룰루 텔레비전 방송 등 하와이의 모든 언론들은 李박사의 병세를 자세히 보도했다. 李박사가 요양원의 202호실 그의 방으로 돌아온 것은 6월25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펌프가 작동중인 호스를 입 속에 꽂고 연명해야 했다. 피를 뽑아내고 가끔씩 우유를 그 호스를 통해 넣어주었다. 이 모든 일은 아내 프란체스카 女史가 끝까지 다해냈다. 의식이 거의 없는 李박사의 비쩍 마른 양팔에는 이미 무수한 주사바늘 자국으로 인해 검게 변해 있었지만 얼굴의 혈색은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7월4일. 연락을 받고 호놀룰루 공항에 내린 李仁秀씨는 곧장 요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내출혈이 심해지더라도 퀸즈병원의 응급실로 가지는 않을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7월18일. 胃에서 너무 많은 피가 나오는 바람에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李仁秀씨가 李박사의 곁에 누워 수혈을 했다. 잠시 후 안정된 기미를 보이자 李仁秀씨는 프란체스카 女史의 방으로 와 누웠다. 헌혈을 너무 많이 해서 핼쑥해진 그의 곁에 崔伯烈씨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친부모님처럼 지금까지 모셔온 李박사님의 마지막을 보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오후가 되자 다시 李박사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날 밤 열시가 조금 넘자 주치의 토마스 閔(민) 박사는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했다. 급히 교포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이미 토요일 밤이라 많은 사람들과 연락할 수가 없었다. 李박사의 침대 곁에는 프란체스카 女史와 崔伯烈씨 그리고 李仁秀씨가 나란히 앉아서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호원이 가끔씩 맥박을 체크했다. 병실 밖에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吳重政씨, 윌버트 최씨, 그리고 조선일보 통신원 車指壽(차지수)씨만이 있었다.
 
  병실에서는 이미 각오를 하고는 있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갑자기 호스를 입에 문 李박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간호원이 李박사의 맥박을 체크하고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7월19일 0시35분. 임종하셨습니다.”
  그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으로 건국을 성취해 냈고, 전쟁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해 내며 全 생애를 아낌없이 불살랐던 위대한 한국인 李承晩은 이역만리 떨어진 땅 하와이 섬에서 고국을 그리다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프란체스카 女史는 아들 앞에서 두 번째 눈물을 보였다. 잠깐 동안이지만 崔伯烈씨와 李仁秀씨 앞에서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눈물을 닦고는 아들 李仁秀씨에게 귓속말로 “절대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말아라, 아가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늘 들고 다니던 팬암항공사 표지가 찍힌 낡은 비닐 쇼핑백에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담아 들고는 총총히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본 吳重政씨는“마담은 결코 울지 않았다”고 했다. 볼 수가 없었으니 당연했다. 당시 吳重政씨가 본 그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문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을 본 프란체스카 女史는 “굿바이”라는 단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보스윅의 절규-“내가 너를 안다네...!”
 
  故人(고인)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윌버트 최씨와 관계가 있었던 ‘누와누’ 장의사가 달려왔다. 이 일은 당시 보스윅씨에게는 상당한 섭섭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한편, ‘누와누’ 장의사에서 故人의 靈柩(영구)가 영결식장인 韓人(한인) 기독교회로 출발한 시각이 7월21일 오후 4시40분. 韓人 기독교회에서의 영결식이 열리던 이 날은 하와이의 모든 방송매체들이 李박사를 떠나보내는 哀掉(애도)방송을 했다.
 
  미망인 프란체스카 女史가 입장한 오후 8시30분경에는 弔花(조화)가 교회 전체를 꽉 메웠고 수많은 현지인들과 교민들이 애도를 표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
  유해는 故人이 건립했던 韓人 기독교회의 실내에 안치되었고 故人의 상반신을 볼 수 있도록 관 뚜껑의 반은 열려져 있었다. 얇은 베일이 故人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영결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연락을 받고 달려 온 보스윅씨가 교회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李박사의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이 되어 故人의 얼굴에 덮여있는 베일을 걷어내더니 李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 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李仁秀 교수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 한 편의 詩(시)같은 보스윅의 애절한 절규는 영결식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겁게 적셔 내리고 있었다.
 
  이어서 한 시간 동안의 영결예배가 끝나자 고인의 靈柩는 하와이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검은색 리무진에 실려 히컴 공군기지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때 프란체스카 女史는 기력이 쇠잔해져 두 번씩 졸도를 한 끝에 결국 그곳에 남게 되어 서울에서 있었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공항을 향해 출발한 시간이 9시30분. 히컴 공군기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30분.
 히컴 공군기지에서는 美 의장대가 나와서 사열하는 가운데 6명의 陸海空軍(육해공군 의장대가 弔砲(조포)를 발사하며 영결식을 진행했다. 그를 존경하던 美 장군들의 추도사와 함께 한 의장대원의 진혼 나팔소리가 열대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유해가 의장대원들에 의해 C-118 軍 특별기에 실리자 뒤늦게 따라왔던 밴플리트 장군도 故人과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한국까지 가기를 희망해 모두 16명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1965년 7월21일 밤 11시 정각. 히컴 공군기지로부터 李박사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서서히 이륙해 밤하늘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하와이섬에 마지막으로 착륙한지 5년 2개월 만이었다. 
 
 (마침)
 
 
'現代史 발굴 연재' 1부 다시보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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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 발굴 연재' 3부 다시보기(링크)
 
 
 
 ▼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동영상(1965년 7월27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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