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속의 한국사 기행(9)/조선일보 2010년 10월29일자 중국특집섹션 보도]
아내와 딸들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온 그들을 '환향녀'라며 내친 조선시대의 남자들
심양=조선일보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늦은 밤에도 네온사인이 화려한 심양의 서탑거리./사진=심양벼룩시장님 블로그에서 빌려옴>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온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瀋陽館)의 흔적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심양시 심하구(瀋河區) 조양가(朝陽街) 131호에 있는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이 그것이다. 기와지붕의 모양이 중국의 전통건축과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시대 이곳은 일본 만철(滿鐵)출장소와 봉천영사관 등으로 쓰이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 시립아동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정보다 백성들이 훨씬 더 컸다. 청군은 항복 조건 중 하나로 군이 잡은 포로를 돈을 내고 데려갈 것을 강요했다. 청이 제시한 항복문 8항은 이렇게 되어있다. ‘군에 포로가 된 자는 합법적으로 돌아오는 자를 제외하고는 조선이 모두 잡아서 청으로 보낸다. 조선에 와서 또는 귀화해서 사는 한인(漢人)이나 여진인은 모두 잡아서 청나라로 보낸다. 27일 이전에 잡힌 자는 심양으로 보내고 그 이후에 잡힌자는 석방한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으로 추정되는 시립아동도서관. 기와지붕이 한옥을 닮았다.>
이에 따라 포로를 잡으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청군은 철수하는 동안 포로사냥에 혈안이 되어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갔다. 김영삼 정부시절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주돈식씨는 지난 2007년 펴낸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가 6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지천집(遲川集)’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명이었다”라고 한 것을 들고 있다. 또 왕의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일기(南韓日記)’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은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명(明)을 치기 위해 단기간에 병력과 노동력을 늘리기 위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끌려간 조선인은 양반 평민 할 것없이 만주족의 노예로 전락하여 심양의 상설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중 돈 많은 양반집 가족은 거액의 속환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들이 빨리 빼내려는 욕심에 속환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돈없는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몰래 탈출하다가 붙잡혀 매맞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향땅에 돌아온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다’며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내쫒는 조선의 남성중심 문화 앞에 또한번 좌절해야 했다.
[사족/'환향녀'란 단어는 그후 불륜을 저지르는 여성을 뜻하는 '화냥년'이란 욕으로 변하였으니, 정작 '환향녀'들로서는 만주에서의 삶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기의 딸과 아내를 지켜주지도 못한 조선의 남자들은 이런 남녀차별적 시각으로 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내쫓았다. 비겁하고 한심하기가 이를데 없다.]
<주돈식의 '조선인60만 노예가 되다'>
심양시 9·18사변 기념관 부근에 가면 ‘류조호(柳條湖)’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은 ‘호수’인데 주변 어디를 봐도 호수가 없다. 요녕성 민족사를 연구해온 요녕조선문보 오지훈 기자는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에 제법 큰 호수가 있었는데,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없이 빠져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한 70대 주민은 “60년대까지도 이 주변은 움푹 파인 땅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도로가 생겨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 나라 지도부의 무능으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은 억울한 삶을 이국땅에서 마감했으나, 지금 이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심양 서탑거리는 오늘도 한국인으로 붐빈다./hbj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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