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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2일 화요일

조선시대의 사진- 미국의 대학 소장 1/2

-- Welcome to Chosun Era --
美國이 보관중인 朝鮮時代寫眞에의 招待
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1880년대의 남대문 중앙로조선시대의 길거리를 가운데 두고  늘어선 초가집
1931년 박흥식(朴興植)이 서울 종로(鍾路)
2가에 세운 "화신 백화점"
당시 한국의 랜드마크적인 존재로 일세를 풍미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문을 닫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1999년 그 자리에는 미국 건축가 설계로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1935년 서울 남대문
왼족의 상업은행과 오른쪽 중앙 "레토크림"
(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오른쪽 "기린맥주"(キリンビ-ル) 가로 광고


평양에서 영업중인 왕복 노면전차  -운임 5전-
수풍 댐 수력 발전소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만주국과 조선의
전력확보를 위해 건설이 개시되었다.
건설된 것은 압록강하류의 평안북도 신의주로
부터 80 km지점의 한만국경(현재는 중.북 국경).

담수면적은 일본 비와코의 거의 반에 상당해
총공비는 약 5억엔이다.
(이 금액은 동경에서 시모노세끼를 잇는
신칸센 건설 규모에 필적하는 금액이었다)

그 비용은 당시 한반도에서도 일대 중화학
기업인 조선질소비료 (현재의 질소/日チッソ-칫소)
가 부담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참인 1944년 3월에 수풍수력
 발전소(발전 능력 60만 kW)와 함께 준공했다.

이 발전 규모는 당시의 세계 최대급이며
1940년 당시의 일본내의 수력 발전 규모가
280만 kW와 비교해도 그 크기는 용이하게
 비교할 수 있다.

7기의 발전기는 각각 약 10만 kW의 발전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능력이며
설비제조를 수주한 회사는 동경시바우라
 전기(현재의 토시바)에서 제조를 맡았으며
시공업자는 일본 하자마구미와 니시마쯔
건설(間組, 西松建設)이 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총 7기의 발전기중
5기를 약탈해 갔다.

약탈된 발전기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이리티슈 카와카미류의
 댐에서 확인되었다.

한국 전쟁중에 뇌격을 포함한
미군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댐 구조가 워낙
 견고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전후에 북한은
발전 능력을 증강해 이 댐 덕에 부흥했다.

준공으로부터 60년 이상 경과한 현재도
댐 본체는 큰 개수 공사를 하지 않고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1940년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호텔 "조선호텔"
 선룸무도가 崔承喜의 모습
당시 번화가 명동의 모습
오른쪽 모자쓴 남성뒤로 "빅터 SP 레코드
""(Victor) 세로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간판 위쪽에는 레코드 판 광고판이
걸려 있다.

< 누가 고종황제를 죽였는가?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1912∼1989)
1897년10월12일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가 찾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일본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
또한,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1919년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뒤이고, 
고종도 이미 퇴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 독살설이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라토미의 일기는 일본이 고종황제가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막으려다 여의치 않자 독살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종은 이회영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1919년 19살의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가운데)의 모습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일본친정
황족 출신 이방자(李方子) 여사
-- 대담했던 한국 아낙네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사회에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
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러일전쟁 무럽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여성의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본문 일본어 내용
 - 조선을 둘러 싼 러일간의 대립 -
"조선중립"(조선 여성의 손을 주목)이라고 쓰인, 
이미 깨져버려 못 쓰게 된 단지를 든 조선에
위로 말을 붙이는 일본.
  "그러나 가엾다. 만약 내가 침략해 오지 않았
더라면, 대신 침략한 것은 저 털보
소련놈들이었을 테니...!"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아래의 사진은 프랑스 판화 화가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그녀는 3살 때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인물화를 섬세한 선과 파스칼 컬러로
여성답게 표현했다

- 아침의 잡담 - 1921년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 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바티칸 교황청 한국 대사관에  기증된
"한국판 마리아 상"
2005년 바티칸의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에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의뢰로돌조각가 오채현씨가 약 10개월간 걸쳐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한복을 입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동이는 천주교회에서 쓰이는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역시 압권이라면 성모 마리아가 가슴을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의 여성이 외출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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