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67] 마티스의 '생의 기쁨'김영나 서울대교수·서양미술사동양의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다면 서양의 화가들은 이상향을 상상하여 화폭에 담았다. 대체로 서양 그림의 이상향은 '아르카디아'(Arcadia) 또는 '황금시대'라는 주제 아래 편안하고 목가적이며 시적인 풍경 속에 한가롭게 노니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현대미술에서도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화가들이 많았지만 그중에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앙리 마티스의 '생의 기쁨'(사진·1906년)이다. '생의 기쁨'은 조화로운 색채와 나른하고 교태로운 선이 어우러진 나무와 수풀에 둘러싸인 비원(秘苑)에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춤을 추거나, 플루트를 불거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전체 화면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관능적이다. 이 그림은 마티스가 청년기의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색채와 구불거리는 선이 특징인 독자적인 양식을 정립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생의 기쁨'을 산 사람은 항균제 아지롤을 개발하여 큰돈을 벌었던 미국의 의사 알버트 반즈였다. 1922년에 그는 반즈 재단을 창립했고 약 2500점이 넘는 작품을 구입하였는데 그 중 59점이 마티스의 작품이었다. 반즈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전시 작품들을 생전에 전시되었던 상태 그대로 보존할 것과 미술관은 일주일에 두 번만 열고, 미리 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며, 다른 전시를 위해 대여하거나 순회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출판할 경우에는 흑백도판으로만 가능하다는 약정서를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이유에서 '생의 기쁨'의 색채는 늘 상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재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생의 기쁨'을 비롯한 그의 소장품들이 1993년에서 1995년 사이에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컬러 도판으로 된 도록도 간행하였다. 도쿄에서도 전시되었던 이 작품을 관람했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다. 펜실베이니아의 메리온에 있는 반즈 재단은 앞으로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2010.08.11 앙리 에밀-베노아 마티스 마티스 (프1869~1954) Matisse, Henri-Emile-Benoit 20세기 표현주의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경부터 피카소 등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구성과 단순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독자적 화풍을 전개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착수하여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능하였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마티스는 원래 법율을 공부하였으나 21세때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화가 루오와 함께 작업을 했고,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은 20세기 프랑스 화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00년경에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티스는 평생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소재는 주로 실내 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재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가 넘쳐 흐른다.
▒ 야수파 ▒
"색채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1905년 젊은 화가들의 작품이 진열된 것을 한 신문 기자가 보고"야수의 우리 안에 갇힌 도나텔로【 Donatell : 1386~1466 르네상스시대의 대리석과 청동조각의 대가, 평생독신생활을 하였다. 그의 작품 다비드상(1433), 참회하는 막달라 1453~55등】" 라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즉 대담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주로 빨강, 노랑, 초록,파랑등의 색만을 사용했다. 즉 사실주의적 기법을 버리고 작가의 느낌과 감성을 통해 색을 표현하는 색채 변형의 실험주의라고 할까? 후에 추상 미술의 토대를 이루었고, 대표적인 야수파의 화가로는마티스,루오,블라맹크, 뒤피등이 있다.
▒ 마티스의 대작인 댄스 (1910 ) ▒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1990년 내가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국립 박물관(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겨울 거처이자 세계3대 박물관의 하나인 겨울궁전은 1050개의 전시실, 120개의 계단,27km에 달하는 전시실 공간엔 회화,조각,발굴품등 컬랙션은 약 250만점에 이르고 작품 1점당 1분씩만 본다고 하여도약 5년이란 세월이 걸린다.)을 관람 하던중 근대 이후 작품이 모여있는 3층에 모네,피사로, 밀레, 코로,르아느로등 인상파에서 부터 세잔,고흐,고갱,드가, 쿠르베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걸작품 감상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마티스의 댄스란 작품을 보고 그 강렬한 느낌을 찾아 마티스의 다른 작품도 살펴 보고자 마음먹었다. (이하 모신글) 마티스의 대작 댄스를 본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였으며 지금까지 영원히 나의 기억에 아롱져 있다.
댄스는 러시아 무역상 시츄우킹이 1909년 모스크바에 있는 18세기 양식의 자기 저택을 장식할 커다란 작품 제작을 마티스에게 의뢰해서 탄생한 이 작품은 손을 마주 잡고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힘찬 춤을 추고있는 댄서들을 겨우 네가지 색상으로 평면처리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춤을 추는 다섯명 여인의 인체는 대략적인 굵은 윤곽선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움직임의 부드러움 리듬등을 충분히 느끼게 한 걸작품을 남겼다.
1909~1910년에 걸쳐 그렸는데 최종 작품은 1910년 살롱도오통느에 출품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 왕의 슬품 Sorrow of the King) ▒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
말년에 과슈 색종이를 오린 대작으로 검은색 악사와 녹색 악사가 왕을 위해 연주하고 있는데, 왕은 검고 무시무시한 기운에 둘러싸여 녹색담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왕의 위엄있는 힘의 색은 어디가고 슬픔과 두려움만 나타나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Dance ▒ 마티스 콜랙터인 반스 재단의 빛이 잘 드는 중앙홀에 설치된 벽화
▒ Masque Japonnais(Japanese Mask) ▒
▒ The blue nude Ⅳ 1952 ▒ 옷을 벗는 인물과 무용수들을 파랑색의 종이 오리기로 표현한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보기엔 발가락이 세개로 그려져 불완전한 모습이나 이 작품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구도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 The snail 1953 달팽이 ▒ 절지(切紙) 런던 테이트 갤러리 종이 오려 붙이기 기법으로 물감대신 채색된 종이로 형태를 만들어 붙이는 기법으로 작품으로 완성된 마지막 작품들 가운데 한 작품이다.
▒ 붉은 방 ▒ 이 작품은 푸른 바탕으로 그려진 『푸른색의 조화』로 제작되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붉은 색의 조화』로 완성된 작품으로, 그 특징은 평면화된 공간과 장식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에 있다.
벽지와 식탁보를 같은 색깔과 같은 문양으로 처리해서 평면성이 강조 되었는데, 마티스는 식탁을 나타내는 선과 벽에 걸린 그림 액자로 공간을 창출한 아름다운 걸작품이다.
▒ 화실의 나부(裸婦) ▒
▒ 호사 ▒
▒ 마티스 부인의 초상 (녹색선의 초상화) 1905▒ 이 그림은 비평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도 불쾌감을 느꼈던 작품이며,색상의 변화 만으로 명암을 그려 넣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아주 강열한 색채,있는 그대로의 색을 사용했다. 색이란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감 튜브에서 나온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였다.
왼쪽의 따스한 색상과 오른쪽의 차가운 색상이 묘한 조화를 갖고, 인간의 양면성을 그려내고 있다.
▒ 하얀 깃털 ▒
▒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40년 1939년 11월 부터 마타스는 본격적으로 이 루마니아풍 블라우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홉달뒤 그것을 완성했다.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열석장의 사진이 있으며 "이 작품속에 마티스의 모든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한 신문기자는 소리쳤다고 한다.
▒ 자화상 ▒
▒ Venus on a shell 1930 ▒
▒ Venus Kneeling 1918 ▒
▒ The blue nude 1907 ▒
▒ Woman in purple Coat 1937(Fine Art Museum) ▒
▒ 니스의 명소 마티스 미술관 ▒ 1917~1954년까지 이 곳 니스에 살면서 작업했던 소장품들이 2개층의 18개 룸에 걸쳐 전시되고 있다.
1906년에 제작된 [삶의 기쁨]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주의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기나긴 화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 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그리고 원시적인 형태는 분명히 고갱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그 주제까지도 고갱이 타히티섬에서 추구한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마티스의 그림은 <고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인체에 대한 깊은 지식이 깔려 있음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카데믹한 전통속에서 화가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결정적으로 혁명적인요소가 들어있으며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가 " 그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 라고 예언한 것처럼 훗날 '생략의 천재' 라고 일컬어지는 마티스의 철저한 단순화 , 즉 불필요한 것은 일체 생략하든가 아니면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화면에는 조소적 형태와 공간의 깊이의 본질적 요소가 보유 되어 있었다. "회화란 평면 위에 선과 색채를 리드미컬하게 배치하는 것이다." 라고 마티스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연의 기본적인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 특성을 평면적인 장식으로 환원함이 없이, 자연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까지 단순화할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 내가 탐구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은 인간의 얼굴에 반영된 정열로써 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의 회화적 질서 그 전체가 표현이다. 인물이라던가 대상의 위치, 그것들을 둘러싼 여백의 공간, 비례, 이들 모두가 하나의 역활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 등은 그의 작품 세계가 기본적으로 사물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비설명적이면서 주관적인 강렬한 색채(튜브에서 바로 짜낸 강렬한 원색 ), 붓자국에 심취한것은 인상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며 이는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수 있다. 1908년부터 1917년 까진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그는 더욱 리듬감 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세라믹, 성화, 옷감)을 발견해 그의 작품에 도입한 푸른색 누드 는 큰 물의를 일으킨다. Blue Nude 1919년부터 십년여동안에는 니스에 머물면서 오달리스크, 실내 풍경의 여인, 창문으로 본 풍경 등의 소재를 다루는 작품 활동을 했다. 색채의 효과, 선명한 구도적 의도, 장식 요소의 극대화, 복잡한 공간 구성 연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특징이다.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양한 색채는 서로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티스는 어느날 토마토를 파랗게 그렸는데, 왜 그랬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토마토를 파랗게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유감스럽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항상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곤 한다. 내가 생을 마친 후,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말년에 접어든 마티스가 거동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기법으로 색종이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가지 계속되었다. 생략의 천재인 마티스가 여기에서도 작동하고 있어. 색채수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킴으로써 색채를 독립된 구성 요소로 만들고 있다. 달팽이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Jazz 1947 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준다. 어쩌면 선과 리듬, 색채와 공간의 자율적인 세계 속에서 마티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표적으로 재즈씨리즈는 참으로 경쾌하고 고뇌의 색조을 띄지않는 비상한 의지의 집중과 감각의 직집적인 표현이였다. Red Studio 1948 이 작품은 마티스가 말년에 그린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형태의 테이블 위에 꽃이며 과일들이 가득 놓여져 있는 등 모든 것들이 꽉 차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거나 어지러워보이지 않고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조색인 빵강 속에 융합되어 흡수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적세계에 대한 감정적 반발 다시말해 반 아카데미즘형태로 나타나는 Fauvism 성격을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으며 비교 되기도하는 예술가는 '피카소'뿐이다. 이 두거장의 교류는 1945년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는데,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마티스는 1954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마티스에게는 너무나 많은 찬사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켄버스라는 한정된 투기장위에서 마티스 만큼 훌륭하게 색채를 보다 표현적으로 구조적으로 사용한 화가는 없기 때문이다. 노년에 접어든 마티스는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되면서 색종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특히 관절염과 내장 장애로 인해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상에 누워 종이를 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도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인 질서를 보여줍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색의 즐거움이 두드러지는, 그의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달팽이 관절염으로 붓을 들 수 없게 되자 가위와 색종이를 들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색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 그만의 독특한 색채의 조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순수한 색채의 색종이로 시작한 또다른 자유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가위가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천히 휘돌아 나가는 색종이의 배열이 달팽이를 연상시킵니다. 음악 음악이란 제목에 걸맞게 악보가 그려지고, 기타가 연주되는 듯 합니다. 마티스는 이 작품속에서 곡선과 직선의 하모니를 통해 화면속에서의 음악적 조화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이는 그림을 보며 음악을 느끼게 하겠다던 칸딘스키의 생각과 통하는 듯 합니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여성의 포즈가 인상적입니다. 붉은 실내 붉은 색을 주조로 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타는 듯한 붉은 색을 통해 순수한 관능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림의 뒤 오른편에는 자신의 작품 <파인애플>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티스는 쇠라나 세잔처럼 종종 자기의 작품을 화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작품 속에서 또다른 조화를 꾀하였습니다. 댄스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진 이 작품은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입니다. 손을 맞잡은 5명의 댄서들의 포즈가 아라베스크의 문양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푸른색과 초록색, 붉은 색의 활기 있는 조화가 리듬과 생명감을 느끼게 합니다. 빨간 조화 이 작품은 3차원의 공간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자와 벽, 창문 그리고 오른 쪽의 인물이 모두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식탁보의 무늬가 벽지의 무늬로 연속되어 있고, 음영이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휼륭하게 통일된 명쾌한 화면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호사 정숙 쾌락 당시 마티스는 시냑의 외젠 들라크루와에서 신인상주의까지에 심취하였으며, 그와 함께 남프랑스를 여행하였다. 당연히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시냑의 점묘주의와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가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풍경화에 인물을 배치한 구성이 세잔의 <대수욕도>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푸른 모자를 쓴 여인 오렌지 색, 초록색, 하늘색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색이 여인의 얼굴에 칠해졌습니다. 마티스는 이 그림에 대해 비평가들의 이해도 얻지 못하고, 그림 속 모델인 마티스 부인조차도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들은 화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색채에의 새로운 해석을 노골적인 괴벽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창 스페인 국경 근처의 지중해 연안 마을에서 그려진 이 그림은 신인상파의 터치같은 붓터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거친 점묘주의로 창 아래의 화분들과 꽃, 바다 위의 배를 그린 것이 상당히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화폭 속의 창, 그리고 그 창 속의 바깥 세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움직여주는 구성이 순수하고 시원한 색채 만큼이나 독특합니다. 마티스 부인 얼굴에 초록색을, 머리에는 파란색을 칠한 이 작품은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는 마티스의 감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색채를 양분, 단면화 하여 교묘한 발런스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인상파 보다도 과감한 색채의 향연이 인공적이고도 묘한 깊이감을 주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 1906 이 그림은 마티스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면을 강조하고 더욱 대담하게 분할된 공간구성이 돋보입니다. 상징주의 화가이자 마티스의 스승인 귀스타브 모로의 영향인 듯 화면 전체로 흐르는 선들이 가로 2.3 미터, 세로 1.7미터의 대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더욱 환상적입니다. |
2011년 2월 8일 화요일
앙리 마티스 - '생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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