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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폴 세잔의 명화 감상

[문화칼럼/전영백 ] 가을산에서 느끼는 세잔 .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미술가 폴 세잔(1839∼1906)의 100 주기를 맞아 대규모 회고전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첫 장은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가 열었는데 그 제목이 ‘프로방스의 세잔 ’이다. 제목에서 세잔이 친숙했던 공간을 배경으로 살피자는 의도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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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을 보는 방식은 미술사를 거치면서 달라졌다. 시대마다 작품을 보는 눈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당시의 미적 욕망을 반영한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세상을 원추, 구, 그리고 원기둥으로 보는 그의 구조적 시각이 부각되었다. 초기 모더니즘의 입체주의는 세잔 없이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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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세잔의 색채, 그리고 자연과의 연관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성과 언어를 넘어서는 색채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살았던 삶의 공간이 재조명 되었다. 세잔은 진정한 지역 작가였기에 세계적인 대가가 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현대미술의 화두인 지역성과 세계화의 연결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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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오렌지색을 즐겨 썼다. 그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가보면 그 오렌지의 근원을 알게 된다. 바로 그곳의 토양색이다. 또 그 흙으로 만든 지붕의 색깔이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이, 생활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세잔은 무엇보다 프로방스의 ‘지역작가’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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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작업은 위대한 예술이 자연과 얼마나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일깨운다. 프로방스의 풍경은 그에게 미적 영감을 안겨 주었다. 특히 생트빅투아르 산 이 작가의 ‘모티프’였다. 산기슭 작업실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매일 그 산에 올랐다. 독창성의 근원인 자연 속에서 그의 붓 터치는 화면과 대상 사이의 거리와 공기를 담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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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그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산들바람을, 그 잡을 수 없는 자연의 숨결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세잔을 제대로 보려면 그림 속 동요하는 이미지와 떨리는 공기를 느껴야 한다. 세잔 풍경의 거대한 바위는 견고한 입체이면서도 흔들림을 지 닌다. ‘세잔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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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비사교적이고 종잡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다. 열정에 휩싸였다가 금세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작업 방식도 독특했다. 세잔은 누드를 그릴 때 실제 모델을 쓰지 않았다. 여성의 벗은 신체 를 직접 본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잔의 수욕도(水浴圖)는 사실 상상의 결과다.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은 더욱 괴벽스럽다. 꾸미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사과처럼 앉아 있으라”는 엄명을 내리니, 세잔의 모델이 된다는 건 고문 그 자체였다. 115번이나 포즈를 취했는데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다. 말기로 갈수록 아내의 초상화와 자화상이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 그의 ‘사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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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후기인상주의 미술가 세잔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잔은 고전주의와 인상주 의를 연결하려 했다. 대상의 견고한 구조를 눈으로 지각하는 빛과 색채로 표현하였다. ‘자살하는 짓’이라는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해냈다. 세잔은 1900년대 초부터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등 후배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도 그는 여전히 가장 많이 연구되는 작가다. 세잔의 작품이 담고 있는 깊은 내용은 미술사가 뿐 아니라 메를로퐁 티나 들뢰즈 등 철학자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풍이 물든 가을이다. 세잔이 그렸던 자연의 생동감과 유동성을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산에 직접 가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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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 홍익대 미대 교수
동아일보 /2006.11.04

<註>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ieau-Ponty  1908-1961)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  (Gi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Paul Cezanne

    프랑스 화가 폴 세잔(Paul Cezanne, 1839.1.19- 1906.10.22)





프랑스의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   근대회화의 아버지 .

"생명의 1분이 지나간다! 그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잊어라 !
    그것 자체가 되라. .... 실제로 보는 것의 이미지를 주 라."

부슈뒤론주 엑 스앙프로방스 출생. 





  폴세잔 Village Road, Auvers. c.1872-73.



부친은 모자 제조업자였으나 후에 은행가 각도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 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폴세잔 1867. The Abduction



1852년 남프랑스에 있는 중학교에 사이가 좋은 두 소년이 있었는데 그들은 휴일이면 자주 들길을 걸으며 장래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알게 되어 그들의 관계는 사회에 나가서도 계속되었다. 덩치가 작았던 졸라는 어느날 급우와 싸우고 있었는데 이때 세잔이 나타나 도와준다. 졸라는 고맙다는 표시로 세잔에게 사과를 하나준다. 세잔과 사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







  폴세잔 1873 Self-Portrait in a Cap. Art print on canvas



폴 세잔은 13세였다. 어머니 앤느가 폴에게 말했다. "폴, 9월이 되면 너도 중학생이야. 브르봉 중학교에 들어가는거야. 그러니 좀 더 용기를 내어 사내답게 행동해야 해. 알겠니?" 어머니는 폴이 말이 적고 언제나 우울하게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활발한 아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폴은 어머니의 희망대로 약간 활발한 소년이 되었고 말도 좀 많이 하게 되었다.







  폴세잔 1873년 작. House of Pere Lacroix



중학교에서 에밀 졸라라는 소년과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세잔의 생활은 에밀 졸라의 출현으로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세잔은 학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졸라의 영향으로 흥미를 가지게 되어 둘은 책을 자주 읽기도 했다. 


졸라와 세잔, 이 두 소년은 그 무렵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여기에 바이유라는 소년(뒤에 공과 대학 교수)이 끼여 이른바 '3총사'이루어졌다. 세 소년은 마냥 즐거웠다. 학교에서 뿐만 아 니라, 들에서 뒹굴고 노래도 하면서 달리기도 하였다.







   폴세잔 1879-1880 The Bridge of Maincy near Melun



 졸라는 낭만파의 시를 좋아하여 세잔에게 자주 읽어주곤 하였다. 세잔도 보들레르의 시를 즐겨 읽었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방하여 시도 지어보곤 하였다. 그림도 가끔 데생을 하였으나, 세잔이나 졸라가 그리 뛰어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졸라는 이때 이미 세잔이 그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친구를 위해 이렇게 권하였다 . 







   폴세잔 Self-Portrait. c. 1877-1880



 "너는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되어야 한다."  세잔은 화가의 길도 매력이 있어 보였으나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소년들의 즐거운 나날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집안 사정으로 졸라는 파리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


단짝인 '3총사'의 하나가 빠져나가게 되자 세잔의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쓸쓸하고 적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구멍을 메꿔주는 것이 시 와 그림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하루 종일 데생만 하는 날이 많아졌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너는 화가가 되어야 한다." 는 졸라의 음성이 힘차게 들려 오곤 하였 다.






   폴세잔 The Banks of the Marne. 1888



 졸라는 파리에서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그는 세잔에게 화가가 될 결심을 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주저하고 있느냐. 네게는 화가가 될 재능이 있어. 재능을 모르고 있는 것은 너 혼자 뿐이야. 결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졸라의 편지에 세잔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소년의 가슴은 검은 구름에 싸여 무겁기만 하였다.







   폴세잔 The Mount Sainte-Victoire. 1885-95.



이윽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나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가 보다." 세잔은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세잔의 고민을 눈치챈 것은 어머니였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여보, 저 유명한 화가 루벤스 벨로네즈는 모두 이름이 폴이지 않아요? 우리 아이도 이름이 폴이구요. 폴도 화가를 시키면 어떻겠어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지며 어머니에게, "뭐, 화가라고!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인간은 빵으로 살지만 재능으로 죽는 것이요." 하면서 반대를 했다 .






   폴세잔 Still-life with Apples (Nature morte. Les Pommes). c. 1890.



폴은 이같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나와 모네,드가, 르느와르 등과 사귀면서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마침내 그는 19세기가 낳은 최대의 화가로 평가받는 화가가 되었다.  1858년 에밀 졸라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갔다.







   폴세잔 Stilleben mit Korb



세잔도 가능하면 자신도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향에 있는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61년 세잔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법률공부를 그 만두고 파리로 나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






   폴세잔 Still Life. c. 1890.



그 때 세잔의 나이 22세때의 일이었다. 세잔은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굉장히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했다고 한다. 파리로 나온 세잔은 회화에 전념해 자유롭게 공부를 하는 한편 관립의 미술학교에도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


1866년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자 당국에 항의서를 보냈 고 이때 카페게르보아에 마네를 중심으로 출입하게 된것이다.






   폴세잔 Still Life.



그 시기에 피사로를 만나 그에게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피사로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참아가며 끈기있게 가르친 유일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 C.모네,P.A.르누아르어울렸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아들 폴이 태어났다 .
《검은 대리석의 탁상시계가 있는 정물》이 대표작이다 .  






   폴세잔 Still Life with Apples and Oranges. c. 1895-1900.



F.V.E.들라크루아,G.쿠르베,E.마네 등 반관전적(反官展的)인 입장의 혁신적인 경향에 눈을 뜨고 무거운 분위기의 원숙한 정물화,초상화 등을 그렸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과 파리코뮌의 동란기를 마르세유 근처 어촌에서 지낸
세잔은, 71년 가을 피사로와의 교우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인상주의의 원칙을 배웠다






   폴세잔 Vase with Flowers. Chrysanthemums. c. 1900.



 74년 제1회 인상파전 《교사자(絞死者)의 집》 등 3점, 77년의 제3회전에 《쇼케상(像)》 등 16점을 출품하고, 인상파 핵심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품에 비해 화면은 더 작고 밝아졌으며, 필촉(筆觸)도 섬세하면서 신중하고, 때로는 정성을 들인 색조분할(色調分割)도 이루어졌다.

문학적인 주제에 대신하여 수욕도(水浴圖)가 등장한 것, 시각이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 






   폴세잔 1900년작 Still Life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 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피사로의 영향으로 세잔은 1872년경부터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







   폴세잔 Chestnut Trees at Jas-de-Bouffan. 1885-87 



그 안에서 세잔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명쾌한 색채로 표현해 내는 것에 대한 새로 운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세잔의 인상주의 시대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18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그는 인상주의에 대한 회의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몰두했던 광선과 색채 변화에 대한 추구가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 즉 형태와 구성을 말살시키는 행위로 간주했다. 세잔의 그림 역시 인상주의 회화에서 출발한다. 






   폴세잔 The Mount of St.Victoria (La Montagne Sainte-Victoire). c. 1897-98.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를 뛰어넘어 20세기 회화에 기틀을 마련하는 원천을 제공한다. 사과 하나로 현대미술의 창시가 된 세잔. 세잔은 인상파 화가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그러나 세잔의 작품은 인상주의보다 후기 인상주의 경향으로 분류된다 .









1880년대 이후의 화가들은 대개가 인상주의의 경향을 흠모 했지만, 그 양식에 만족할 수 없었던 화가들에 의해 후기인 상주의의 탄생을 낳았고, 세잔은 그 화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 후기 인상파 화가들 중 최연장자 였던 세잔은 1861년 파리로 가면서 낭만주의에도 심취했다.

그는 마네가 추구했던 명암법의 규칙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화면 구성의 내부를 위해 외부를 파괴하는 현상 또한 대담하게 무시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구도를 마네의 <피립 주는 소년>의 양식으로 옮겨놓는 문제, 즉 동굴처럼 움푹들어간 공간을 닫는 것으로써 표면과 깊이의 요구를 잘조화시키는 문제였다. 또한 화면 구성원리를 위해 외적현상 논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마네보다 더 대담하다 .







 

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 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그 뒤 세잔은 인상파전에 참가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2번의 출품에 대한 세평이 좋지 않았고, 살롱응모에 관하여 인상파 내부에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잔에게 1886년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막역한 고향 친구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와의 오랜 우정을 이 해에 끊는다. 세잔의 진가를 알지 못한 졸라는 자신의 소설 [명작]에 실패한 화가의 모습으로 세잔을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세잔은 1890년대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시절을 보냈다. 화가들에게 있어서 사과를 그리는 목적은 감상자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전달하거나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세잔의 사과에는 아무런 상징도 없다. 먹음직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구도가 완벽한 것 같지도 않은 듯하다 .


세잔의 사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실성에 얽매인 우리의 선입견 을 버려야 한다. 세잔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림은 결코 실제의 사과를 그릴 수 없다는 점"이라는 명제가 필요한 것이다 . 





 

세잔은 일찌감치 평면적인 도화지 위에 입체적인 사물을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흰 도화지 위에 사과를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재의 형태가 왜곡된다고 하더라도, 오직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잔의 사과는 플라스틱같은 사과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사과 주위를 잘 보라. 그를 둘러싸는 주변의 색과 형태를 볼 때 세잔의 사과는 어느새 그림으로 창조된 매우 훌륭한 또 하나의 사과가 되어 있다 .








세잔은 화가이자 연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였다. 그는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뿔, 구, 원통 모형으로 작품에 담고자 했다. 즉 사물이 갖는 여러 가지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단순해진 사물의 형태는 세잔의 작품 속에 배열되면서 나름대로 질서와 약속을 지켜 간다. 절대적인 질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잔은 순간적인 빛을 쫓고 일순간의 외관을 추구하는데 회화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회화란 구도와 채색이 오랜 노력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질서를 통해 초월적인 자연의 힘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세잔은 견고하고 영구적인 회화를 지향하고자 했다. 그는 고향인 남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머물면서 자연 풍경을 그리는데 자신의 생활을 전부 바쳤다. 그 풍경에서 보여지는 자연을 그는 기하학적인 틀로 환원시키고, 이를 뼈대로 당당하고 안정감을 지닌 자연의 모습을 그려냈다.

1880년대에 그려진 세잔의 인물화와 정물화는 바로 이같은 형태와 구성이 만드는 조형적 질서를 추구하고자 했던 한 방편이었다 .






   폴세잔 1895 Plaster Cupid and the 'Anatomy'



만년에 보이는 세잔의 회화는 이전보다 더 웅대하고 자유로운 호흡을 지니게 된다. 화면 구성의 기본 뼈대는 항상 고전적인 질서와 균형에 두되, 대담한 형태의 왜곡이 나타나며 그 균형은 때로는 우주적이랄 수도 있는 자연의 리듬 속에 용해되고 있다.


세잔은 애당초부터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했지만 모네시슬리와는 달리 태양광선의 효과보다 형태와 구도 등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세잔에게 있어 미술은 일시적인 잔상의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이었다. 완벽한 조형적 형태를 창조해 내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전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회화적인 쾌락을 즐겼던 것이다 .






   폴세잔  Mount Sainte-Victoire. 1904-1906.



 세잔의 회화가 이룩하고 있는 모든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주의적인 엄격한 질서 이전에 그는 따뜻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조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자연의 풍경 변화에 누구보다도 예민했고, 그 과정 속에서 선과 형태, 색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 특히 형태의 단순화라는 세잔의 시도는 현대 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같은 영향은 후에 피카소와 브라크 등 입체파 화가들에 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주제가 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 사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된 것이다.






   폴세잔 Blue Landscape 1904-6



사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따른 색감의 변화가 다양하다.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주홍색 등으로 색채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과에서 나오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그리기 위해 급급했다.


하지만 후기 인상파의 대가 세잔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변치않는 사과의 고유 형태를 그리기 위해 몰두했다. 샬뎅이래로 단순하고 일상적인 사물이 화가의 눈에 이처럼 중요한 것으로 비쳐지는 일은 없었다 .






   폴세잔 De leden van de Centrale Ondernemingsraad



세잔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물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기법은 다음과 같다.첫째는 색채 분할법이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색을 그대로 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 없이 계산된 부분 부분에 적용해서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둘째는 전통적인 명암과 원근법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그는 전통적인 명암법을 포기하고 인위적인 명암을 만들었다.






   폴세잔 Group of Women



또한 세잔은 형태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잔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물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세잔의 사과가 마치 플라스틱처럼 맛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세잔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인 명암이나 색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 위에 나타나는 이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자랑한다. 이는 현대 회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세잔을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폴세잔 Les jouers de cartes (the card players)



말년에 세잔은 사람들과 떨어져 깊은 명상에 잠긴 덕분인지 가장 위대한 예술가만이 생전에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감정에 이르렀다. 그는 "풍경은 나의 마음 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되고 생각하며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나는 나의 그림과 일체가 된다. 우리는 무지개 빛 혼돈 속에서 하나가 된다." 말했다 .  


세잔의 풍경화에는 자연의 무한한 뉘앙스를 지닌 색조들이 인접한 색조와 조심스럽게 연결되어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생트-빅토와르 산 풍경화들에서 처음엔 초록의 자연과 따뜻한 땅의 색조가 지배적이었다가 뒤로 갈수록 푸른색을 띠게 된다. 사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따른 색감의 변화가 다양하다.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주홍색 등으로 색채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 






   폴세잔 Plain by Mount Sainte Victoire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과에서 나오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그리기 위해 급급했다. 하지만 후기 인상파의 대가 세잔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변치않는 사과의 고유 형태를 그리기 위해 몰두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개성적인 붓질과 대상에 작용하는 빛이라는 그들의 관심사를 넘어서 그가 "마치 박물관들에 있는 예술작품처럼 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어떤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창조하였다 .

그리고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라고 견해를 밝힐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Paul_Cezanne_30234



95년 말 파리에서 가진 세잔 전은 그 무렵의 젊은 화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인상파이면서도 훨씬 지적이고 신선한 야성미가 넘치는 세잔 예술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세잔은 수채화를 많이 그리게 되었고, 제작의 간편함과 색채의 투명감 탓으로 수채화 기법이 유화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림물감은 엷게 칠해져 엷은 물감의 층이 복잡하게 겹쳐져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컷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유화나 수채화에서 칠하고 남은 여백이 많아졌는데, 그 여백조차 일종의 표현력을 지니고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 








말년의 작품 대부분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법은, 사물의 형태를 복수의 시점에서 보는 구도상의 연구와 어우러져, 입체파와 추상미술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미술은 V.고호, P.고갱, G.쇠라뿐 아니라 세잔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생동안 거의 전시회를 열지 않았고, 예술적 고립 속에서 그의 관심사를 점점 더 깊이 추구해 나갔던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은 오늘날 현대 회화의 위대한 선구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는데, 그의 눈이 자연에서 본 것을 정확하게 캔버스에 옮겨 내는 일에서 발전해간 방법과, 그가 공간과 양감, 색채를 독특하게 다루어 획득한 회화적 형태의 특질들 양면 모두에서 그러하다 .






     폴세잔 Still Life with a Skull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 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 작품들이다. 1882년 오래 전부터 종종 출품하였으나 언제나 낙선의 고배를 마신  살롱에 1882년 처음 입상하였다. 80년 무렵부터 자화상과 부인상이 많아졌다.









90년부터 수년 사이에 《붉은 조끼의 소년》과 《트럼프를 하는 사람들》 등의 연작, 《온실의 세잔부인》 등의 걸작을 잇따라 그렸다. 1900년 경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져 마침내 1904년에는 싸롱 도톤에서 그의 작품이 특별전시실에 마련되었다. 세잔은 말했다. '채색이 진행되어짐에 따라 데생은 정확하게 된다. '

"예술가의 목표는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할수있게 굳센 정신을 지니는 것이지. 그 나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네."라고 베르나르에게 말했다. 세잔의 팔레트는 황색군, 적색군, 녹색군, 청색군의 순으로 수많은 물감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의 화가들이 따라서 색을 섞을 필요도 별로 없었으며, 따라서 채도가 높은 색을 얻을 수 있었다. 세잔은 오랫동안 당뇨병에 시달려 병이 악화되고 , 1901년 엑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세우고, 1906년 10월 15일 교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뇌우로 졸도, 22일 사망하였다.


Paul Cez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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