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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9일 월요일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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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재판장 풍경. 한말 지방관아에서 군수가 재판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재판관인 수령이 앉아 있고 마당의 중앙에는 소송에 관계된 두 사람이 꿇어앉아 있으며 이들 좌우로 관속들이 늘어서 있다. 언제 어디에서 촬영한 사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진 제공=심재우 교수>
퇴계 이황 수제자는 누구일까. 이 문제를 놓고 안동 지역 명문사족인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 가문이 400년 넘게 소송 등을 통해 다퉜다. 유성룡 후손과 그 제자들은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이, 김성일 후손과 제자들은 연장자인 김성일이 이황 수제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등의 발단은 제사 지낼 때 위패 위치를 어떻게 놓느냐는 문제였다. 결국 올해 5월 두 문중과 유림 대표가 모여 오랜 갈등을 해결했다.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좌측에 유성룡 위패를, 우측에 김성일 위패를 봉안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 `평등의식` `권리의식` 뿌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조선 사람들은 자기 재물과 권리는 물론 가문과 자존심을 소중히 여겼다.

한국고문서학회가 최근 펴낸 신간 `조선의 일상, 법정의 서다`에 따르면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소송지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매년 적게는 600여 건에서 많게는 1만여 건에 달하는 소송이 제기됐다. 당시 조선 인구가 600만~700만명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조선시대 땐 누구나 신분에 관계없이 관아에 `민장(民狀ㆍ소송 청원 따위를 하는 서류)`을 제출할 수 있었다. 심지어 노비 죄수 여성도 소송을 제기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정이 나서서 소송을 줄이는 `단송`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을 정도였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858년 충청도 연기현(오늘날 세종시) 소송기록(사송록) 618건을 분석한 결과를 논문에 담아 최근 발표했다. 연기 지역 소송 기록을 분석한 건 심 교수가 처음이다. 이 지역 소송 기록은 수개월치밖에 없는 다른 지역에 비해 1년치 자료가 온전히 남아 있어 조선시대 소송 흐름을 사유별ㆍ계절별로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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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수록.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아에 소장(訴狀)을 제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렸으며, 그의 화첩 "형정도첩"에 실려 있다.
심 교수 분석 결과 1858년 연기현 여성이 민장을 제출한 건수는 26건으로 이 중 과부가 17명으로 가장 많았다. 가부장제가 강한 조선시대였지만 가장인 남편이 죽었을 때 여성이 가장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죄수(3건)와 노비(1건)도 숫자는 적지만 관아에 소송ㆍ청원을 제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체 사건 중 평민(539건ㆍ87.2%)이 제기한 건수가 압도적이었다.

심 교수는 이를 근거로 "당시 연기현 백성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과 관련한 문제를 청원ㆍ호소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며 "조선도 명ㆍ청 시기 못지않게 소송이 활발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858년 연기현 백성들은 월평균 51.5건 정도 소송을 제기했다. 농한기인 겨울철(2~3월)에 제일 많았고 농번기인 7월과 9월엔 한 건도 없었다. 농번기에 불필요한 소송으로 농사를 망치는 일을 막는 원칙(`경국대전` 등에 명시)이 비교적 잘 지켜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뭘 갖고 다투었을까.

조선 후기에 가장 큰 법적 분쟁은 바로 `산송(山訟ㆍ묏자리 갈등)`이다. 1858년 충청도 연기현이 접수한 전체 민송 중 181건(29.3%)을 차지한다. 20여 년을 끈 소송이 있는가 하면 패소 판결이 내려진 후에도 곧바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 같은 가족끼리 소송한 사례도 있을 정도로 당시 연기현에서도 다툼이 치열했다.

성리학 질서 속에 살았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명당 자리에 집착했다. 수개월씩 길지를 찾아 헤매느라 정작 장례는 치르지도 못하는 일이 속출했다. 일례로 해남 윤씨 가문은 윤선도 증손자이자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 묘를 △전남 강진 △경기 가평 △김포 △파주 △전남 강진 △해남 △영암 △해남 등 전라도와 경기도 여러 고을을 전전하며 7차례나 옮겼다. 이 과정에서 소송과 분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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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은 시기적으론 유교 질서가 확립된 16~17세기를 전후로 등장해 18~19세기에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서 `목민심서`에서 "살인ㆍ폭력 사건 중 거의 절반이 산송 때문에 벌어진다"고 분석했을 정도다. 명당에 먼저 묘를 쓴 가문이 나중에 들어온 묘를 파내게 해 달라고 소송하는 유형이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 땐 묘를 쓰게 되면 관아에서 해당 가문에 묘 주변 산림이용권을 인정해줬다. 다른 가문 사람들이 자기 가문 묘지 주변 나무를 몰래 베어가는 행위 등을 관아에서 막아 달라는 요청이 그 뒤를 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세제도와 관련된 분쟁이 많아진다.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조세제도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악용됐기 때문이다. 1858년 연기현이 접수한 `환곡(還穀)` 민원이 83건(13.4%)으로 산송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소송 유형이었다. 환곡은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풍년ㆍ추수기에 갚게 하는 구호제도로 시작됐지만 조선 말기로 갈수록 각 지방관청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당시 환곡 민원 대부분은 자신이 환곡을 받을 처지가 아니니 대상에서 빼 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백성들이 높은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군정(軍政)` 민원은 41건(6.6%)으로 1858년 연기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소송 유형이었다. 조선시대 군복무는 관아에 쌀이나 포를 납부해 대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엔 군정이 문란해져 납부 대상자가 아닌 백성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세금이 부과됐다.

당시 군정과 관련해 백성들이 꼽은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죽은 자의 납세를 떠안는 `백골징포(白骨徵布)`였다. 이미 죽은 장인, 처남, 부친, 남편, 동생에게 부과된 군포가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전가돼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조선 전기엔 상속 분쟁이 많았다. 가장 빈번한 유형은 처가와 사위 사이가 벌어지면서 발생한 분쟁 사례들이다. 17세기 중엽 이전에는 재산 상속에서 아들ㆍ딸 구분 없이 평균해서 상속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시집간 여성이라도 친정에서 상속받은 노비ㆍ전답 등 자기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갖고 있었고 사위도 처남과 똑같이 처가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사위도 친정 재산 상속에서 처남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처가에서 사위에게 이미 상속한 재산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거나, 처가에서 불합리한 재산 상속을 받은 사위가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축첩` 문제도 소송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양인 이하 여성을 첩으로 삼는 사례가 많았다. 문제는 그 자녀 신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양인과 천인이 혼인했을 때 일천즉천(一賤卽賤) 원리에 따라 그 자식들은 모두 천인이 됐다.

1568년 전라도 해남 말단관리 허관손은 같은 지역 양반 유희춘과 이 문제를 놓고 37년간 다퉜다. 허씨는 왕에게 직접 상소해 읍소하는 등 전방위로 나섰지만 결국 패소했다. 허씨 처자는 모두 노비가 됐다.

조선 후기엔 양반이 상민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 승려와 양반 간 다툼 등도 발생했다. 조선시대 신분제도가 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방증한다.
 심 교수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858년 연기현 백성들은 노총각이 결혼할 수 있도록 수령이 현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서른 살 이상 노총각, 스무 살 이상 노처녀가 결혼을 못하는 건 지방 수령들 불찰이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로 노총각ㆍ노처녀 구제는 지방관들에게 큰 숙제였다. 또 백성들은 △잔치 베풀 용도인 소 도살 △병든 소 도살 요청 등도 관아에 청원했다.

[이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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