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기자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나오기까지
- 문갑식
- 편집국
- E-mail : gsmoon@chosun.com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영국에 오며 세운 목표 가운데 하나가 팩션(Faction)의 대가 댄 브라운의 소설 속 현장 탐사였습니다. 그가 쓴 '다빈치코드'며 '천사와 악마'같은 작품을 좋아했거든요. 팩션은 팩트(사실)과 픽션(허구)의 합성어입니다.
서양사 이해에 필독서가 있지요. 기본은 성경(聖經)과 그리스-로마신화입니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현재의 영국-프랑스-독일을 이루는 켈트족-게르만족의 이동(移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문학과 형제 사이지요. 고전을 소개하자면 영국은 캔터베리 이야기-원탁(圓卓)의 기사 또는 아더왕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4대 희극이 중세를 이루는 축입니다. 프랑스는 샤를 마뉴, 독일은 지그프리트 정도가 원조로 봐야겠습니다. 문학은 나라별로 분화하기에 일일이 다루기 어렵지만 역사 쪽에선 로마사-프랑스사-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왕가(王家)의 역사(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역사의 상당 부분이 여기 중첩됩니다)-영국사가 필독서겠지요. 유럽에는 대전(大戰)이 많았는데 그리스-페르시아전쟁, 로마-카르타고전쟁을 제외하면 십자군전쟁, 스페인 왕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30년 전쟁-나폴레옹 전쟁이 세계 1-2차 대전이 있기 전 대규모 충돌이지요.
댄 브라운은 이런 요소를 밑에 깔고 있는데 그가 다룬 소설의 스케일은 한 번에 섭렵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워낙 여러 나라에 퍼져 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몇몇 장소를 답사해보려 마음먹었습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에는 한 단체가 골격을 이룹니다. 바로 템플(Temple)기사단(騎士團)인데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아래의 내용을 재미삼아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십자군전쟁은 성지탈환이 목표였습니다. 622년 무함마드-마호멧은 일본식 표기법입니다-가 이슬람을 전파하며 이슬람, 혹은 사라센이 유럽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성지중의 성지인 예루살렘도 이슬람에 귀속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교에서는 마지막 선지자(先知者) 혹은 '하느님의 아들'로 보지만 이슬람에선 예수를 '선지자 중 한명', 무함마드를 최후의 선지자로 봅니다. 예루살렘을 기독교에선 최고 성지지만 이슬람에서도 메카-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로 보지요. 두 종교세력간 쟁탈전이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십자군전쟁은 서양에 의한 예루살렘 탈환작전이었습니다.
서양사 이해에 필독서가 있지요. 기본은 성경(聖經)과 그리스-로마신화입니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현재의 영국-프랑스-독일을 이루는 켈트족-게르만족의 이동(移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문학과 형제 사이지요. 고전을 소개하자면 영국은 캔터베리 이야기-원탁(圓卓)의 기사 또는 아더왕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4대 희극이 중세를 이루는 축입니다. 프랑스는 샤를 마뉴, 독일은 지그프리트 정도가 원조로 봐야겠습니다. 문학은 나라별로 분화하기에 일일이 다루기 어렵지만 역사 쪽에선 로마사-프랑스사-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왕가(王家)의 역사(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역사의 상당 부분이 여기 중첩됩니다)-영국사가 필독서겠지요. 유럽에는 대전(大戰)이 많았는데 그리스-페르시아전쟁, 로마-카르타고전쟁을 제외하면 십자군전쟁, 스페인 왕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30년 전쟁-나폴레옹 전쟁이 세계 1-2차 대전이 있기 전 대규모 충돌이지요.
댄 브라운은 이런 요소를 밑에 깔고 있는데 그가 다룬 소설의 스케일은 한 번에 섭렵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워낙 여러 나라에 퍼져 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몇몇 장소를 답사해보려 마음먹었습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에는 한 단체가 골격을 이룹니다. 바로 템플(Temple)기사단(騎士團)인데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아래의 내용을 재미삼아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십자군전쟁은 성지탈환이 목표였습니다. 622년 무함마드-마호멧은 일본식 표기법입니다-가 이슬람을 전파하며 이슬람, 혹은 사라센이 유럽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기독교 사회에서 성지중의 성지인 예루살렘도 이슬람에 귀속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교에서는 마지막 선지자(先知者) 혹은 '하느님의 아들'로 보지만 이슬람에선 예수를 '선지자 중 한명', 무함마드를 최후의 선지자로 봅니다. 예루살렘을 기독교에선 최고 성지지만 이슬람에서도 메카-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로 보지요. 두 종교세력간 쟁탈전이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십자군전쟁은 서양에 의한 예루살렘 탈환작전이었습니다.
-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새로운 명물 유리 피라미드./사진=이서현
1099년 7월15일 제1차 십자군전쟁 때 기독교세력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지요.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안티오키아후작령(侯爵領)-트리폴리백령작(伯爵領)-에데사백작령 4개국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십자군을 이뤘던 방대한 인력은 귀환해야 하는데 누가 예루살렘을 지킬 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이 무렵 기사단이 생깁니다. 1118년 템플기사단, 1120년 요한기사단, 1190년 튜튼기사단이 생깁니다. 종교기사단은 군소 조직을 제외하면 세 단체가 있었습니다. 템플기사단-요한병원기사단-튜튼독일기사단입니다. 독일인이 중심인 튜튼기사단이 뒤늦게 발족한 것은 십자군원정 중 부상당한 독일군이 차별당했기 때문입니다. 템플기사단과 요한기사단의 이름에 유래가 있지요. 예루살렘왕국의 보두엥2세가 솔로몬의 성전(聖殿) 근처에 본부를 마련해줬다고 해서 '템플', 성스러운 요한병원 옆에 거처가 있다고 해서 '요한'이란 말이 붙은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과연 기사들은 어느 정도 전투력을 지닌 것일까요? 우리는 요즘 식으로 중세기사들을 우둔하기 짝이 없고 거추장스러운 무장을 하고 다니는 존재쯤으로 비하하지만 실상은 딴판이었습니다. 중세시대 기사 한명은 현대식으로 치면 핵잠수함이나 스텔스 전투기 같은 '전략무기'였습니다. 당시 말 한 마리 값은 황소 다섯 마리 값이었는데 기사들이 소유한 전마(戰馬)는 일반 말보다 가격이 네배 이상 나갔습니다. 그들의 무장(武裝)도 대단했지요. 기사들은 다리 보호대→솜옷→사슬 호버크→롱소드 칼집이 달린 벨트→투구를 착용한 뒤 방패와 창을 잡습니다. 기사 한명은 최소 5명의 수습기사와 전마 두 마리를 가져야 했습니다. 호버크(Hauberk)란 사슬 모양으로 된 갑옷의 일종입니다. 롱소드(Long sword)란 말 그대로 장검(長劒)을 말합니다. 이쯤 되면 갑옷에 장검과 장창(長槍), 거기에 방어무기로 방패를 든 기사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기사단에게 십자군은 '사수(死守)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템플기사단과 요한기사단은 상당한 기간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요.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기사단은 불퇴전(不退戰)의 정신을 보였습니다. 이런 전략무기들을 앞세웠으니 이슬람 측에서 볼 때 이들은 목에 박힌 가시 같았습니다. 기사단이 주둔한 시리아의 '크락 드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는 반드시 공략해야 할 목표였는데 마침내 가시가 뽑힙니다. 십자군의 기습에 고전하던 이슬람은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황제) 말리크 샤(1055~1092)가 죽은 뒤 지리멸렬하지만 이마드 아딘 장기(1127~1146)-누르알딘(1118~1174)-살라딘(1138~1193)같은 명장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들이 차례차례 중동에 있던 십자군 요새를 공략하다 1291년에는 최후의 종말이 옵니다. 이슬람이 기독교세력 최후의 보루였던 아코(Acco)를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군은 모두 철군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화(神話)는 여기서 싹트지요. 지중해 키프로스섬으로 물러간 기사단은 상당기간을 버티다 엇갈린 행로(行路)를 밟습니다. 튜튼기사단은 발트해로 가 프로이센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요한기사단은 해적 비슷하게 됩니다. 템플기사단은 어떻게 됐을까요? 붉은 십자가에 흰옷을 걸친 템플기사단은 프랑스 샹파뉴의 위그 드 파앵이 결성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물러난 그들은 유럽 전역에 퍼졌는데 1314년 하루아침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요.
거기엔 사연이 있었습니다. 신심(信心)이 강한 유럽인들은 용감한 템플기사단에 많은 돈과 땅을 기부했습니다. 그들은 전투만 능한 것이 아니라 이재(理財)에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 구호금으로 재산을 불린 거지요. 돈과 기부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템플기사단은 현대식 은행업을 시작합니다. 현금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노상(路上)강도를 만나 빼앗길 위험이 크지요. 템플기사단은 그들에게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금화(金貨)나 은화(銀貨)는 지역별로 함유량이 많아 등가(等價)교환도 힘들었습니다. 환전수수료 역시 만만치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순례자들은 템플기사단 지역본부를 찾아가 현금을 맡기고 어음증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팔레스타인 지역의 템플기사단에서 어음증서와 현금을 다시 바꿨지요.
그런데 템플기사단의 한 기사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순례자들이 맡긴 돈 가운데 불과 8~10%만이 태환(兌換), 즉 현금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은행의 지불준비율과 같지요. 고객이 100억원을 맡겨도 은행은 몇 %만 준비해도 된다는 겁니다. 전쟁 같은 비상사태가 아니면 고객이 일시에 현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돈으로 무엇을 할까요? 교황으로부터 면세혜택을 받았던 그들은 어음을 숨기기만 하면 세금과 상속세를 피할 수 있고 고리(高利)로 자산을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템플기사단은 이제 유럽 최대의 헤지펀드 같은 존재로 부상하지요.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4세가 템플기사단 최대 채무자(債務者)였다는 사실은 템플기사단의 비극이었습니다. 필리프4세는 자기 빚을 일시에 탕감하는 것은 물론 템플기사단의 막대한 부(富)까지 노리려 계략을 꾸밉니다. 1307년 10월13일 필리프4세는 프랑스 전역에서 일시에 템플기사단을 검거합니다. 그들에게 남색(男色)행위-반(反)그리스도 행위-악마숭배 같은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날조된 혐의를 입증하려 고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고문(拷問)앞에 장사 없습니다. 필리프4세는 100가지 이상의 죄목에 혹독한 고문을 가한 끝에 템플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와 참모들을 센강 시테섬에서 화형에 처합니다. 나머지 3000명의 기사는 사면받자 국외로 떠났지요.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공식적으로 템플기사단의 해체를 결정합니다. 필리프 4세의 요청이 있었지만 여기도 배경이 있습니다. 클레멘스5세는 당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긴 교황청에서 선출된 최초의 교황입니다. 프랑스왕의 입김에 좌우되는 '바지사장'격이었던 겁니다. 템플기사단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오명을 벗지 못하는 대신 신비의 대상이 되지요. 필리프4세의 검거령이 하필 '13일의 금요일'인 것도 하나의 예입니다. 템플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는 1314년 죽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하늘에서 당신들을 정죄(定罪)하겠소." 말이 '씨'가 됐을까요, 클레멘스5세는 그해 숨졌고 필리프4세도 같은 해 기사단장의 뒤를 따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가지 전설은 전(前) 기사단장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프랑스왕의 기습이 있기 전, 스페인의 요새로 떠났으며 자크 드 몰레 역시 체포되기 직전, 각종 보물을 배에 실어 스코틀랜드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은 여기서 비롯되지요. 몰락한 템플기사단이 사실은 '시온수도회'의 무장조직이었고, 교황청 쪽에선 이것을 숨기려 '오푸스데이'라는 조직을 동원한다…. 그런데 그들이 밝히고 감추려 했던 것은 뭘까요. 바로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낳았다는 자식입니다.
고대 기독교도들은 그리스도가 몇 가지 성물(聖物)을 남겼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훗날 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게 성배(聖杯)입니다. 성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온 피를 받은 것으로 일설(一說)에는 '아리마대의 요셉'이란 인물이 프랑스로 가지고 떠났다는 겁니다. 영화 레이더스 시리즈에도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두 번째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槍), 세 번째가 세례 요한의 머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설(異說)은 성배가 그릇이 아니라 예수의 자식이 담긴 여성의 자궁, 즉 막달라 마리아가 낳은 딸이라는 겁니다.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 딸은 어디로 갔을까요? 프랑스로 간 딸은 후손을 이어가다 482년 클로비스가 메로빙거왕조(王朝)가 됐다는데 클로비스의 할아버지 메로비치(재위기간 447~457) 때부터 '예수 후손설'이 돌았습니다. 클로비스의 할아버지 메로비치를 둘러싼 '예수 후손설'은 브라운의 소설이 나오기 1500년도 훨씬 전에 등장했습니다. 왕이 자신의 왕국을 세울 때 그럴듯한 전설과 권위로 포장하려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스코틀랜드로 간 보물은 당시 잉글랜드왕 에드워드2세가 비록 프랑스왕 필리프4세의 사위이긴 했지만 템플기사단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당시 스코틀랜드왕 역시 템플기사단 소속이었기에 보물을 잘 은닉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템플기사단의 뒤를 이은 프리메이슨 단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상징적으로 담아놓았다는 게 댄 브라운 소설의 골격이지요. 다빈치는 자기 그림에 각종 상징을 그려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는 개봉 후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소송에 시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이, 만일 그가 여자와 관계해 자식을 낳은 것으로 바뀐다면, 2000년 가까이 이뤄놓은 교회의 역사가 일거에 바뀔 테니까요. 종교학자들에 따르면 댄 브라운의 소설은 그로부터 10여 년 전에 나온 '성혈(聖血)과 성배'라는 책에서 상당 부분 아이디어를 차용했으며 문헌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다고 합니다. 몇 가지 팩트를 흥미로 버무렸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다빈치코드'의 무대는 어딜까요? 맨 먼저 시작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그중에서도 박물관 입구 앞에 있는 초대형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가 걸린 전시실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1190년 필립2세가 요새로 지은 게 시초입니다. 노르만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요새는 14세기 후반 샤를5세가 레이몽 뒤 탕플에게 성(城)으로 개조할 것을 명하면서 바뀌지요. 16세기 들어 프랑수와1세가 다시 왕궁(王宮)으로 바꿀 것을 마음먹으며 당대 최고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가 총괄지휘를 맡고 벽면장식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 장 구종이 맡았습니다. 여기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등장하죠.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1516년 프랑수와1세의 초청으로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와 프랑스로 가는데 그때 들고갔던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입니다. 역사는 알수록 기묘한 인연이지요?
루브르궁전은 1682년 루이14세가 거처를 베르사이유궁으로 옮기면서 박물관이 됩니다. 소수 특권층만 향유하던 이 박물관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국민을 위해 국가의 걸작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1793년 8월10일 537점의 회화작품을 전시하면서 일반에게 공개됩니다. 소설 속 유리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가 1983년 국제현상설계에 당선돼 6년 만에 완공했는데 설계 당시엔 반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1989년 3월30일 완성되자 찬사가 쏟아집니다. 소설 속에는 악마의 숫자 '6'이 세 번 겹치는 666개의 유리로 만들어졌다지만 실은 675개입니다. 가로-세로 35m, 높이 22m로 유리와 알루미늄 빔이 이뤄낸 걸작입니다.
- 유리 피라미드는 처음엔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루브르박물관을 상징하는 작품이 됐다./사진=이서현
- 소설 다빈치 코드는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사진=이서현
- 여기가 템플교회 정문이다. 신도들보고 오라는 건지 오지 말라는 건지 분간이 안 선다. 처음 간 사람들은 정문을 찾기가 힘들다./사진=이서현
- 런던 한복판에서 가장 비밀스런 공간이 템플교회. 일요일인데다 꽉 닫혀있다./사진=이서현
'수도원중의 수도원'이라는 의미로 'The Abbey'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사원은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가 세운 성베드로성당이 모체입니다. 13세기 헨리3세의 지시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고딕양식으로 완성되지요. 사원은 정복왕 윌리엄부터 엘리자베스2세까지 역대 왕의 대관식 장소로 쓰였으며 내부에 처칠, 뉴턴, 헨델, 셰익스피어, 윌리엄 워즈워드 같은 위인들의 묘비와 기념비가 가득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는 곳은 런던에서도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영국의 상징이자 런던의 심장이다. /사진=이서현
-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상징이다. 국왕의 취임식부터 나라를 빛낸 영웅들의 장례식이 열린다. / 사진=이서현
- 빅벤-영국의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사원은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한 건물처럼 연달아 붙어있다. / 사진=이서현
-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정면은 각종 인물과 상징의 부조로 가득하다. 유능한 작가는 이것만 보더라도 모티브를 얻을 수 있을 정도다. / 사진=이서현
제가 갔을 때는 10여명 남짓한 관광객들과 예배자들만 있었고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됐지요. 지하에 가보니 으스스한 분위기의 묘 같은 것들이 나왔는데 '영화 다빈치코드 속 설정과 이곳은 다르다'는 안내문이 있더군요. 1950년 잘 부서지는 사암을 보호한다며 시멘트를 덧칠했는데 이게 실책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이 시멘트로 사라지자 영국은 1995년부터 시멘트를 벗겨내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합니다.
- 영국 에딘버러 근교에 있는 로슬린성당의 전경이다./사진=이서현
- 로슬린성당 지하는 으시시한 공간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영화의 내용과 실제가 다르다는 포스터가 덩그러니 놓여있어 더 무섭다./사진=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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