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샤토(Chateau)는 일본 산토리사가 인수했고 저기 보이는 저 샤토는 중국인이…. 이 비싼 와인을 지금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나라는 딱 두군데뿐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인들이죠. 한국기업이 인수한 곳? 없어요.”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와인투어를 할 때 칠순의 가이드 알랑이 한 말입니다. 그 ‘일제(日製)와인’은 ‘샤토 라그랑주(Lagrange)’입니다. 1983년 일본기업이 와이너리를 인수할 때 이런 말이 돌았다지요.
“감히 일본인이…. 몇년이나 버티나 한번 보자.”
삼십 여년이 지난 뒤 몰락했던 라그랑주는 예상을 깨고 1855년 당시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일본식 기업살리기가 와인산업에서도 통용된 사례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프랑스 와인회사 인수로 국력(國力)을 논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조금 더 성장했으면 더 큰 파이(Pie)를 국민이 나눌 수 있었을텐데…, 인내심 부족으로 마지막 도약기회를 놓쳤지요. 일본이 밉지만 이런 점은 우리와 격차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세계가 인정하는 ‘재팬’과 삽심년 다 되가는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 축구, 아니면 북한으로 상징되는 ‘사우스코리아’를 만들었을 겁니다.
지난 11월1일 옥스포드에서 도버해협을 건넜습니다. 칼레(Calais)는 여전히 불법이민자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칼레에서 보르도까지는 승용차로 6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한국으로 치면 광주(光州)쯤 되는 위치지요. 영국에서 와서 두번째로 대륙으로 갔습니다. 지금 영국은 완연한 겨울입니다.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연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영국의 우기(雨期)는 11월부터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계속된다고 합니다. 많은 영국인이 겨울이면 우울증 같은 증세를 느낀다고 합니다.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寒氣)와 우중충한 하늘에 비까지 계속되니 외출은커녕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홀로 사색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유럽 각국을 살피다보니 저절로 4대 강국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비교할 기회가 많아집니다. 예술분야로만 본다면 프랑스가 미술, 이탈리아가 건축-조각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독일은 음악이 강하지요. 음악은 굉장히 과학적인 분야입니다. 정밀기계-금속가공-광학에서 세계 최고인 독일인들이 영 다른 분야인 것 같은 음악에서 선두인 것은 ‘과학 DNA’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전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문학을 살피다보면 유독 황무지나 자욱한 안개 이야기가 많은 걸 볼 수 있는데 기후나 날씨가 발전의 한 원인이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악한 환경을 돌파하는 능력을 영국은 와인산업에서도 보여줍니다.
11월20일 올해의 보졸레누보가 출시됐습니다. 보졸레누보는 부르고뉴주(州) 보졸레에서 9월에 수확한 포도를 4~6주 숙성시킨뒤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에 출시하는 와인입니다. ‘햇과일주’ ‘젊은 와인’이라 하겠지요. 보졸레에서는 그해 생산된 와인을 오크통에서 꺼내 마신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특유의 상술(商術)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51년 보졸레 지방에서 시작된 이 축제는 1985년 바야흐로 세계의 축제가 됩니다. 프랑스 정부가 ‘11월 셋째주 목요일 자정’을 판매 개시일로 만들자 세계의 와인판매상들이 몰려옵니다. 이것은 ‘와인정치학’ ‘와인경제학’의 일부일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프랑스 와인의 복잡한 등급을 살펴볼까요?
오크통에서 잠자고 있는 와인.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묵은 술은 신비한 액체로 변신한다. /사진=이서현
‘명품은 절차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와인산업을 보며 실감하게 됩니다. 프랑스와인의 등급은 매우 복잡한데 시작은 업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지금은 신비로움마저 자아내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먼저 그랑 크뤼 클라세는 1855년 4월18일의 ‘행사’때문에 시작됐습니다. 그날은 파리 세계박람회 개막식이었지요. 당시 나폴레옹 3세 황제는 박람회에 출품할 보르도와인을 선택하기 위해 등급을 정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자 메독지역의 레드와인 60개에 그라브지역의 샤토 오브리옹 1개를 1~5등급으로 구분해왔지요. ‘와인 터줏대감’격인 이 61개 샤토엔 ‘그랑 크뤼 클라쎄 1855(Grand Cru Classe en 1855)’라는 문구가 들어갑니다. 그중에서도 1등급을 받은 샤토는 모두 5개에 불과한데 그중에는 일본만화 ‘신의 물방울’에 자주 등장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가 있습니다. 영국식으론 로스차일드라고도 하는 로칠드는 아시다시피 유태인 재벌이지요.
160년전 정한 그랑 크뤼 클라쎄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프랑스에는 와인제조업자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 와인을 4종류로 나누지요. 첫번째가 서민이 마시는 뱅 드 타블르(Vin de Table)입니다. 여기엔 산지명(産地名)기재같은 통제가 없습니다. 특정지역 포도만 사용하는 뱅 드 페이(Vin de Pays)에는 포도산지를 표기해야합니다. 상급으로 갈수록 규제가 심합니다. VDQS와인은 지정지역 보증이 있어야하지요. 1935년 원산지 호칭통제법이 실시되면서는 최상급 AOC와인에 재배지역-품종-재배방법-생산량-당도(糖度)-양조방법을 표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원산지 호칭통제법 시행 이전 메독에 반기를 든 지역이 있었습니다. 1855년 그랑크뤼 클라쎄에서 제외된 지역들이지요. 1932년 보르도상공회의소는 이런 샤토에 ‘크뤼 부르주아’라는 명칭을 부여하려했지만 워낙 숫자가 많고 말도 많아 247개 샤토가 정해진 건 2003년 6월17일입니다.
포도밭에도 단풍은 든다. 보르도 길 주변에 늘어선 포도밭의 노랗게 변한 이파리와 파란
하늘이 색다른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보르도의 포도밭은 광활한 평원에만 있는게 아니다. 주민들이 사는 집 주변도 온통 포도밭이다.
여기까지는 보르도에서도 메독지역의 이야기고 같은 보르도의 생테밀리옹과 그라브지역의 다른 샤토는 1959년에야 그랑 크뤼 클라쎄에 등급별 지정이 됩니다. 즉 그랑 크뤼 클라쎄는 ‘보르도’만의 기준이라 하겠습니다. 부르고뉴와 알사스지방에서는 ‘그랑 크뤼’로만 분류합니다. 보르도는 와인명(名)이 주인이 바뀌어도 유지되는데 부르고뉴-알사스는 포도밭 주인이 여러명일 경우 일일이 표기한다는 전통 때문에 복잡하기 그지없지요.
이런 지식을 배경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①와인은 프랑스 전유물이다 ②로마가 지금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를 정복해 와인생산법을 가르쳤으니 원조는 이탈리아다 ③프랑스와인은 영국과의 합작품이다.
눈치있는 분들은 ②번이 답인 것을 아시겠지만 ③번도 맞습니다. 그럼 역사를 되짚어보기로 합니다. ‘Rome subdued Gaul’, 즉 로마가 골을 복속시켰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골’은 지금의 프랑스민족을 지칭합니다. 로마는 자기 영역밖의 민족을 둘로 구분했지요. 게르만과 갈리아입니다. 갈리아는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 사는 켈트족(族)을 말하는데 켈타이를 라틴어식으로 발음하면 갈리아입니다. 그것을 인칭(人稱)으로 부르면 바로 ‘골’이 되는데 로마가 골족이 살던 땅을 정복한게 BC 1세기입니다. 카이사르, 즉 시저가 이 땅을 손에 넣으면서 그 유명한 저서 ‘갈리아원정기’ 혹은 ‘갈리아정복기’를 남기지요.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續州)중 1등으로 꼽혔습니다. 독일 땅인 게르만, 영국 땅인 브리타니아, 프랑스 땅인 갈리아나 야만(野蠻)이긴 마찬가지였는데 기후-토양이 이탈리아와 비슷했고 지적 수준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와인, 즉 포도주는 원료인 포도의 품질이 가장 중요합니다. 포도는 아주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입니다. 자갈이 많아도, 모래 성분이 많아도 수분만 공급해주면 쑥쑥 자라는 ‘불모지의 총아’같은 과일입니다. 로마인들은 여기에 포도 재배법을 이식합니다. 그것을 양조해 와인을 생산해내는 법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금 프랑스는 ‘원조’인 이탈리아와인이나 스페인와인과 함께 세계 3대 와인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지요. 이후 국력이 강해지면서 프랑스와인은 ‘고급’의 상징처럼 됩니다. 로마멸망 후 도시국가에 머문 이탈리아나 ‘무적함대’ 참패 후 이류국가가 된 스페인은 ‘원조’의 명성을 지키지 못했으니 와인에도 국력은 작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프랑스는 샤를마뉴 대제(大帝) 이후 유럽 최강으로 군림하지만 12세기 들어 쇠퇴일로를 걷습니다. 프랑크왕국 영토는 줄어드는 대신 이런 저런 공국(公國)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합니다. 이 가운데 아키텐공국이 있었습니다. 아키텐공국은 명목상 프랑스왕의 신하지만 면적이 프랑크왕국보다 세배나 컸는데 중심지가 보르도 일대입니다. 아키텐공국은 와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인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아키텐공국 공주 엘레아노르가 유럽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여성입니다. 미인에 빼어난 패션을 자랑했으니 뭇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했겠지요. 보르도 공작(公爵) 엘레아노르는 프랑스왕 루이 7세와 결혼합니다.
이 정략결혼은 실패로 끝납니다. 남부 프랑스의 자연에서 생활하던 그에게 화려한 파리의 생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염증을 느끼며 남편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15년만에 이혼하는데 놀랍게도 곧 재혼을 합니다. 상대는 앙주백작이자 노르망디 백작의 아들로, 그녀보다 열살이나 어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영국이 한때 프랑스의 ‘신하’같은 위치였고 그로 인해 프랑스 본토에 상당한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합니다. 엘레아노르의 재혼상대는 훗날 영국왕이 되는 헨리2세였습니다. 헨리2세는 잉글랜드뿐 아니라 아버지의 땅 앙주와 노르망디에 이어 나이 많은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보르도까지 차지하는 ‘횡재’를 하게 된 거지요.
영국인들은 엘레아노르가 보르도 땅을 영국에게 넘긴 사실에 환호합니다. 너무 척박한 땅에 수질(水質)조차 엉망이어서 영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보르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와인을 수입해 물 대신 마셨기 때문입니다. 보르도가 와인의 주요 산지가 된 이유는 지형적 요인 때문입니다. 보르도의 서쪽은 대서양입니다. 바다를 낀 이 지역에는 강이 3개나 있습니다. 지롱드(Gironde)강, 도르도뉴(Dordogne)강, 가론(Garonne)강이지요. 이 가운데 남북으로 흐르는 가론강을 경계로 동서로 메독(Medoc)과 생테밀리옹(Saintemilion) 지역으로 나뉩니다. 생테밀리옹은 평생 동굴에서 살며 기적을 낳았다는 기독교의 성인(聖人) 에밀리옹이 살았던 곳입니다.
이 두 지역은 토질(土質)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메독이 모래와 자갈이 많다면 생테밀리옹은 흙이 조금 더 많은 땅입니다. 당연히 품종이 다른 포도가 자랄 수 있는 차이가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와인의 질도 달라졌지요. 강(江)은 포도를 키워 와인을 생산하게 해줄뿐 아니라 운송로 역할도 해주지요. 영국인 입장에서 배로 옮기는데 시간과 돈이 드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와인보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은 훨씬 이익이 되는 존재였을 겁니다.
보르도에서도 메독 지역의 땅은 온통 자갈투성이다. 포도나무 아래를 자세히 보면 자갈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보르도에서는 포도를 이모작한다. 단풍 사이에 영글어가는 포도가 대조를 이룬다.
앞서 ‘옥스포드레터’에서 영국인을 ‘돈냄새를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맡는 민족’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영국인들은 보르도 출신 왕비를 맞자 총공세를 폅니다. 먼저 수입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보르도가 ‘영국령(英國領)’이라는 것을 이렇게 과시한 거지요. 영국인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 보르도산 와인이 담긴 오크통의 크기를 타 지역 와인을 넣은 오크통보다 작게 만든 거지요. 다른 와인과 구별을 쉽게하기 위해서라는데 이설(異說)도 있습니다. 영국인 하역부들의 체격에 맞게 오크통의 크기를 조정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영국인들은 보르도 지역에서 다른 곳에서 만든 와인의 판매를 금지합니다. 횡포에 가까운 조치였지만 이것은 스페인-포르투갈 와인에게 치명타가 됩니다. 영국이 보르도 와인만 쉽게 하역해주자 두나라는 보존기간을 늘이려 알콜돗수가 높은 세리(Sherry), 포트(Port) 와인으로 방향을 바꾸지요.
여기까지만 봐도 프랑스 보르도산(産) 와인은 ‘메이드 인 프랑스, 메이드 바이 잉글랜드’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은 한발짝 더 나갑니다. 무서운 영국의 이면, 그 내용은 옥스포드레터 30편에 계속됩니다.
전통적인 샤토의 내부 모습이다. 샤토는 영어로 캐슬, 즉 성(城)을 뜻한다
샤토 내부에서는 포도밭이 훤히 보인다. 아마 이런 샤토에 살고 있으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생테밀리옹 중심가 수도원의 회랑이다. 밖은 훤하지만 안은 어둡다. 뭔가 진리를 찾는 곳다운 모습이다.
아침 햇살이 성당 창문을 통하면 녹색으로 변한다. 인위적인 수정을 가한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진이 신비로운 색깔을 내고 있다.
요즘같은 11월에는 오후 네시반이면 사위가 어둑어둑해진다. 포도밭이 짙은 먹구름에 하루를 마감한 채비를 하고 있다./사진=이서현
문갑식 기자의 Oxford Letter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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