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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정철과 전라도의 정자들

김윤제와 송강의 만남은 용소에서 놀고 있는 용을 발견한 것과 같다
                                                                                    문갑식 기자: 정철과 전라도의 정자들

전라도 광주-담양-화순에 이름난 정자(亭子)가 많습니다. 이곳이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後學)을 교육하던 장(場)입니다. 이름을 열거해봅니다.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송강정(松江亭)-면앙정(俛仰亭)-취가정(醉歌亭)…. 범위를 전라남북도로 넓히면 그 수가 100개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양-화순의 정자에는 꼭 이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고있지요.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대문호(大文豪)로 자타가 공인하고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선생입니다.

무등산 자락 화순-담양에는 수많은 정자가 산재해있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있다.
무등산 자락 화순-담양에는 수많은 정자가 산재해있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있다.



각 정자와 정철의 연관 관계를 알아봅니다. 식영정은 1560년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어준 것입니다.
식영정은 특이하게도 지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인지 여름에도 곰팡이가 없고 눅눅하지도 않다.
식영정은 특이하게도 지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인지 여름에도 곰팡이가 없고 눅눅하지도 않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11년 연상인데 훗날 식영정은 정씨 가문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서하당은 황혼 무렵에 비치는 석양이 안개처럼 깃든다는 뜻이다.
서하당은 황혼 무렵에 비치는 석양이 안개처럼 깃든다는 뜻이다.

식영정의 마루와 기둥을 보면 우리의 멋을 알 수 있다.
식영정의 마루와 기둥을 보면 우리의 멋을 알 수 있다.
‘식영정 4선(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의병장)-정철을 일컫는 말입니다.
식영정 마루에서 본 천장의 모습이다. 한옥은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식영정 마루에서 본 천장의 모습이다. 한옥은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식영정 마루에 누우면 여름이 느껴지지않는다. 한 커플이 마루에 누워있다.
식영정 마루에 누우면 여름이 느껴지지않는다. 한 커플이 마루에 누워있다.
이들이 경치 좋은 곳을 소재로 1인당 시 20수씩을 지어 만든 80수의 ‘식영정 이십영(二十詠)’은 정철이 쓴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지요.
식영정 뒤에는 성산별곡이 새겨져있다. 정철이 이곳에서 지은 가사문학의 대표작이다.
식영정 뒤에는 성산별곡이 새겨져있다. 정철이 이곳에서 지은 가사문학의 대표작이다.

식영정 맞은 편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지은 정자로, 환벽은 ‘푸르름이 고리를 이루듯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는 김윤제와 정철의 인연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환벽당의 내부다. 어린 정철은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고 중앙 관계로 진출했다.
환벽당의 내부다. 어린 정철은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고 중앙 관계로 진출했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라는 곳이 있는데 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노는 것을 보았지요. 깜짝 놀란 김윤제가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습니다.


환벽당을 앞에서보면 원형과 사각형이 교차하는 묘한 모습이 된다.
환벽당을 앞에서보면 원형과 사각형이 교차하는 묘한 모습이 된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 문답을 하면서 그 영특함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떠나려는 소년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어린 정철이었지요. 사촌은 그를 16세 때부터 27세까지 환벽당에 머물게하면서 학문을 연마시켰습니다

환벽당에서는 영산강 지류가 내려다보인다. 사촌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 용이 멱을 감는 꿈을 꿨는데 놀라 밑으로 내려가보니 어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환벽당에서는 영산강 지류가 내려다보인다. 사촌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 용이 멱을 감는 꿈을 꿨는데 놀라 밑으로 내려가보니 어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정철은 이곳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습니다. 훗날 김윤제는 그를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송강정은 1584년 송강이 대사헌을 지내다 낙향해 지내던 곳입니다.
송강정은 벼슬을 지내던 정철이 낙향해 머물던 곳이다.
송강정은 벼슬을 지내던 정철이 낙향해 머물던 곳이다



원래 이름은 죽록정(竹綠亭)이었는데 1770년 송강의 후손들이 지금 같은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지요. 이곳에서 송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같은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송강정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으나 후손들이 바꿨다.
송강정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으나 후손들이 바꿨다.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한 곳이다.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한 곳이다.




취가정은 환벽당에 가까이 있는데 의병장을 지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金德齡)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지요.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합니다.

취가정은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지었다는 사연이 있다.
취가정은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지었다는 사연이 있다.


의병장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취가정.
의병장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취가정.




면앙정은 1533년 송순(宋純·1493~1583)이 건립했는데 이황(李滉·1501~1570)을 비롯해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글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면앙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외진 곳에 있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면앙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외진 곳에 있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지만 원래는 초라한 초정(草亭)으로 바람과 비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송순은 이곳에서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과 어울렸는데 이들이 김인후-임억령이 정철의 스승이니 역시 송강과 무관치 않은 곳입니다.


면앙정은 원래 초당이었으나 훗날 지금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면앙정은 원래 초당이었으나 훗날 지금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정철과 호남의 유명한 정자를 연결짓는 이유는 그의 풍파많은 인생사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동안 그를 가사(歌詞)문학의 대가로만 알고있었습니다. 교과서에는 그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같은 작품을 쓴 시인으로만 나오지요. 이런 그림자에 가린 송강의 행적은 잘 밝혀지지않았는데 그를 두고 찬반론이 전라도에서는 뜨겁습니다. 후손들은 부인하지만 여러 호남인들은 “정철이 호남인맥에 위해를 가했다”고 말하고있고 일부 전문서적에서도 그런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호남학파의 비조라 할 면앙정. 면앙은 송순의 호다.
호남학파의 비조라 할 면앙정. 면앙은 송순의 호다.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은 정철을 두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상공(鄭相公·정철)을 군자(君子)라 하고 공을 공박한 자는 소인(小人)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김장생이 옹호해야 할 만큼 정철의 사람됨에 논란이 많다는 반증일 겁니다.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입니다. 집안은 명문이지요. 원조(遠祖) 정균지(鄭均之)는 고려 때 평장사, 고조부 정연(鄭淵)은 병조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은 판관을 지냈는데 집안이 대대로 청백(淸白)했다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퇴계 이황마저 칭찬한 송강 정철의 현명함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의 딸로, 아버지는 늘 “내 딸의 효행(孝行)은 열 명의 아들에 못지않다”고 자랑했습니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윤십이월 6일에 수도 한양(漢陽)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그가 열 살 되던 해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 남방행(南方行)이 정철에게는 절묘한 기회가 되니 인생의 깊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서 전한 설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김윤제 선생은 그를 데려다 공부를 시켰고 대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에게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훗날 그의 친구가 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대학자로 명망 높았습니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면앙 송순을 위해 지은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면앙 송순을 위해 지은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정조가 훗날 그 몸가짐이 겨울 하늘에 뜬 흰 달처럼 엄격하다고 해 ‘빙월(氷月)’이라는 호를 내릴 만큼 흠모했던 게 기대승선생입니다. 정조는 “이런 분과 함께 정치를 했어야했는데…”라고 한탄했다지요. 그런 기대승선생이 정철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수석(水石)이 멋진 곳에서 누군가 ‘세상에 이 수석과 비길 만한 청절(淸絶)한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고봉은 ‘오직 정철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지요. 훗날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중봉(重峯) 조헌은 ‘송강은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전라도의 정수(精髓)를 이어받은 그는 1561년(명종 16년) 사마시(司馬試)에 상유(上游)로 합격했고 이듬해 장원(壯元)급제합니다. 사화에 연루된 집안 출신이어서 곧 벼슬을 하진 못했지만 1566년, 헌납(獻納)ㆍ지평(持平)에 발탁됩니다.

식영정 마루에 가득찬 외국인들. 아마 이런 건물을 처음 봤을 것이다.




송강이 얼마나 똑똑했는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 그를 두고 “옛날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어 옥당(玉堂)에 들어가는 등 출세 가도를 질주합니다. 하지만 퇴계의 지적대로 그는 직설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릅니다. 선조 때는 김개가 “오늘날 사류(士類ㆍ선비)의 폐습은 기묘 연간(己卯年間)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묘연간이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선생이 사약을 받은 기묘사화 때를 이르는 말인데 정철은 선조의 면전(面前)에서 김개를 ‘사특하다’고 지적하지요. 임금을 기분 나쁘게 만든 죄로 그는 삭출(削黜), 즉 벼슬을 빼앗기고 내쫓기게 됐습니다. 6년 뒤 직제학(直提學)으로 컴백하지만 이때는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의 당파싸움이 심할 때였습니다. 서인인 그는 동인(東人)에게 밀려 시골로 돌아가지요.


1577년 다시 한양으로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지만 이때 이발(李潑)과 사이가 나빠져, 훗날 대사간(大司諫)이 됐을 때는 “사당(邪黨)을 만들었다”는 상소 때문에 사직합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율곡은 이때 그를 변호하는 소(疏)를 올렸습니다. “정철은 충청 강개(忠淸剛介)하고 한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므로 그 기절(氣節)은 실로 한 마리 독수리에 견줄 만한데 도리어 사당이란 명목을 붙여 조정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 때문에 율곡까지 탄핵을 당하고 맙니다.


명옥헌 옆 베어낸 나무 위로 떨어진 꽃잎. 마치 윤회를 보는 것같다.
명옥헌 옆 베어낸 나무 위로 떨어진 꽃잎. 마치 윤회를 보는 것같다.




1580년 강원감사-병조참의-대사성이 된 것을 보면 선조는 그를 끔찍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이때에도 그가 지은 글에 ‘대신(大臣)을 무시하는 의사(意思)가 들어 있다’는 공격을 받은 걸 보면 그는 성격과 글이 모두 직선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선조는 그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일만 보고 선조를 우둔하기 짝이 없는 암군(暗君)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선조는 상당히 인간의 심리를 잘 간파하는 세심한 왕이었습니다.

“정철은 마음이 바르고 행동이 방정(方正)하나, 다만 그 혀가 곧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직책에 있으면서 죽도록 힘을 다한 충청 절의(忠淸節義)는 초목(草木)까지도 알 것이니, 참으로 원반(鵷班)의 한 마리 독수리요, 전상(殿上)의 사나운 호랑이인 셈이다. 전날 바른말로 간사한 무리를 지탄하기에 내가 이미 오늘날 이런 훼방이 있게 될 줄을 짐작하였다. 만약 정철을 죄준다면 이는 주운(朱雲ㆍ후한 때의 직신(直臣))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송강이 전라도와 척을 진 것은 기축옥사 때문입니다. 1589년 10월2일 선조에게 전달된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로 인해 시작된 사화는 4대 사화 중 가장 많은 1000여명의 피해자를 낳았으며 동인ㆍ서인은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지요.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ㆍ1546~1589)은 이이-성혼을 따르던 서인인데 당시 집권 동인에 아부하고 스승 율곡이 죽자 그를 배반한 인물로 기록됐습니다. 선조는 그가 성혼을 비판하자 불쾌해 생각했고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지요.

식영정 올라가는 계단마다 이끼가 껴있다.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했다.
식영정 올라가는 계단마다 이끼가 껴있다.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했다.


문제는 정여립이 전북 진안 죽도(竹島)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신분에 제한이 없이 불평이 많은 객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킨 것입니다. 한때 대동계는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정여립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였던 의연(依然)같은 기인모사(奇人謀士)를 끌어들이는 한편 ‘정감록’을 이용해 ‘이씨가 망하고 정씨 시대가 도래한다’는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리며 쿠데타를 계획한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이 황해관찰사 한준, 신천군수 한응인,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에 의해 잇따라 선조에게 전해지자 관군이 출동하지요. 결국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에서 자살합니다. 정여립의 난을 두고는 아직도 말이 많습니다. 일례로 조선일보 이한우 부장은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책에서 정여립의 난을 이렇게 봅니다. 즉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 18척의 왜적이 상륙해 노략질을 벌이자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조선 수군 100여명이 오히려 왜구의 포로가 돼지요.



당파싸움 희생양 된 정여립의 결정적인 실수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명옥헌의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내친김에 진안현감 민인백이 정여립을 찾아와 나눈 대화도 소개해볼까 합니다. 민인백은 갑자기 정여립을 방문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순(子順ㆍ임제의 호)을 만난 적이 있다”고 운을 뗍니다. 그러면서 무서운 덫을 정여립에게 던지지요. 그는 “자순이 생전에 ‘예로부터 나라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천자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만이 홀로 그렇지 못하다’고 하기에 내가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미 급한 정여립은 덜컥 “백춘(민인백의 호)이 틀렸다”며 선조를 지칭하면서 “백성의 뜻을 얻지 못한 임금이 무슨 임금이냐”며 큰일 날 소리를 뱉습니다. 민인백이 이 말은 훗날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 유력한 증거로 역할을 하게 되니 무서운 게 인간입니다.

여하간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일 뿐 모반을 꾀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 연루자를 색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희생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시민-이억기-신립-이순신 등을 이끌고 오랑캐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구촌 사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게 대표적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 역시 정여립과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요. 이때 선조는 정철로 하여금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빌미로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 동인 가운데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됐고 전라도 출신 선비들이 대거 희생된 것입니다. 훗날 정철은 ‘동인백정(白丁)’이라는 말이 따라다닐 만큼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런 감정 대립은 오늘날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전라도 인사들이 얼마나 희생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기축옥사 전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입니다. 이것을 보년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는데 기축옥사 이후에는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로 떨어집니다. 결국 기축옥사 후 호남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됐음을 잘 알 수 있지요.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축옥사 전 정철은 아들의 상(喪)을 당해 경기도 고양(高陽)의 선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여립의 모반 사실이 드러나자 즉시 입궐(入闕)하려 했을 때 친구 한명이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었다면 그는 오명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철은 “역적이 군부(君父)를 모해하려 하는데, 소위 중신이라는 자가 가까이 궐문(闕門) 밖에 있으면서 망설이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달려간 것입니다. 감동한 선조는 그에게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라는 위관-사실은 선조의 악역을 대신한 것이지만-을 맡기니 그것도 정철의 팔자(八字)인 모양입니다.

기축옥사는 책 한권으로 다뤄도 못 미칠 분량이나 이번 편에서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한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같이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길삼봉이라는 이름이 묘하지요. 길은 당시 도둑 수령으로 꼽히던 홍길동의 ‘길’이고 삼봉은 국초 대역죄인의 우두머리로 간주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호입니다. 이 둘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름이니 선조가 공포를 느낄 만도 했겠습니다. 결국 선조는 팔도에 길삼봉을 잡으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그의 생김새를 두고 ‘나이는 60쯤 돼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이고 귀가 크고 얼굴을 여위었다’, ‘나이는 50쯤인데 수염이 길어 배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희고 길다’는 설이 난무한 겁니다.

또한 길삼봉으로 지목된 이가 최영경(崔永慶ㆍ1529~1590)인데 그가 하필 정철과 사이가 나빴던 탓에 ‘정철이 최영경을 죽이려 길삼봉 소문을 냈다’는 말까지 나돌았지요. 실제론 정철이 최영경을 구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매를 맞고 옥사(獄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최영경 역시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전라도 인맥으로 분류되던 이였습니다. 이러니 정철에 대한 전라도의 인심을 날이 갈수록 뜬소문이 눈덩이처럼 악성으로 불어나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구(老軀)를 이끌고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다 선조에게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청하다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되지요. 때는 온 나라가 전쟁으로 엉망일 때였습니다.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정철은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합니다. 사인이 영양실조니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당대의 권력자치고는 어이없는 최후였는데 놀라운 것은 제자였던 사람도 비슷한 죽음을 맞았다는 겁니다. 그 제자가 바로 제가 앞에 언급한 취가정에서 김덕령의 혼과 시를 주고받은 권필(權韠ㆍ1569~1612)입니다. 스승을 닮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혔던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겠지요. 권필의 목숨을 앗아간 시는 ‘궁류시(宮柳詩)’로, 광해군의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습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宮柳青青花亂飛)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滿冠蓋媚城春輝)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誰遺危言出布衣)’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로지 광해군만이 불같이 화를 냈지요.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던 그의 아버지 선조가 오래전부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도 왕을 화나게 했습니다. 결국 권필은 좌의정 이항복과 영의정 이덕형의 만류에도 불행한 종말을 맞습니다. 왕 앞에서 심하게 얻어맞고 해남으로 유배가기 전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친구들이 따라준 한잔 술을 마신 후 그는 마흔셋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광해군은 이렇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그를 살려내지 못한 이항복도 한마디 했지요.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권필의 호)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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