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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5일 수요일

100년 전 한국기록 사진들



ㅡ(100년 전 한국기록 사진들)-

두시간짜리를 한시간짜리로 편집한 자료.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신부인,

1925년에 한국을 두번째 방문하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을 영상에 담아낸 기록영화로
 흑백 무성영화.(100년전 우리의 생활상입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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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Culture/사진 2013/07/22 03:09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고백
"내가 그렇게도 빨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는'한국'이였다."

1925년 2월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일행은 독일을 출발해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배을 타고
 스웨즈 운하, 실론, 싱카폴, 필리핀, 일본 오사카와 고베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1914년에 발간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는 한국에 대한 첫 느낌을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새벽어둠속에 바닥위에떠도는 안개를 해치고 파도위에 육지가 나타나면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낸다.
 육지는 점점 또렷해져서 아침식사시간 무렵 벌써 부산항의 벌거벋은 바위산이
우리를 환영하기위해 팔을뻗는다."


노르베르트 베버 (대수도원장) 1870~1956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독일인 선교사로 1911년 처음 한국을 방문해 400 페이지가 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방대한 책을 집필했고 , 그로부터 14년뒤인 1925년 다시 방문해
이 책을 기반으로 약1만5천 미터 분량의 35 mm 필림에 당시 한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년뒤 '고요한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독일 전역에 상영되  많은 인기을 끌었습니다.



2차 한국방문 1925년 5월14일 ~ 10월2일

베버 신부는 한국에 대해 "내가 그렇게도 빨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1925년 촬영된 영화 '고요한 아침에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한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기록입니다.
베버 신부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당시 영화를 보는 독일인 관객들을 위해 칠판에
지도을 그려가며 한국을 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비교해서 묘사 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수도 서울 시가지의 모습
혜화문(동소문) 태조 1397년 건립, 일제강점기 전차공사중 헐렸다.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서울 도성 성곽 모습

베버 신부는 서울이 오목한 분지이고 희고 단단한 성곽이 능선을 따라서 산으로
기오 올라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을 구름속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울의 마을들이 주로 산 및에 모여있는 것을 주목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좀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서 넓고 좋은 땅은 농토로 삼았고
집은 비좁은 산 비탈에 잡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루종일 자연과 함께하다가 석양을
 뒤로 하고 말은 미소를 머금은체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고,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
그 찬란함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문화를 존경 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아직 숲에서 뛰어 다닐때 
한국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국 '문화'
그 중에 하나는 '효도' 입니다.천년 이상 지속된 유교전통에 따라 복종과 순종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인정은 한국인들이 때어나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조상과 어른을 대한 감사와 존경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베베 신부는 한국의 농경 문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품앗이 라는 노동 형태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어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성숙된 공동체문화' 이는 카톨릭 공동체에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버 신부는 인본의 신민지 폭력성 앞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6·25 전쟁때 완정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승려들의 모습

1925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
베버 신부일행은 1925년 6월초 약 열흔간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여행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장안사의 가람의 배치와 명칭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마치 마법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우아한 지붕, 그것은 수없이 많은 붉은 나무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력적으로 짜 맞춘것입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사찰 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한국이 유교 국가였지만 민중의 삶에는 불교 문화가 훨신 강력한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역사와 민중의 편에
가까이있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는 "1911년에는 내가 그리도 빨이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술가 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과 연민의 기록은 먼 세월을 돌아 우리의 곁에 와 있습니다.

<사진출처> KBS 역사스페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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