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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9일 토요일

5번째 역사 시리즈물 펴낸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

“최상, 최대, 최고는 순간일 뿐 인생은 최적을 지향해야”

5번째 역사 시리즈물 펴낸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



이중근 회장은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 유명하지만 사회사업가로도 유명하다. 거기에 그는 역사학자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역사 시리즈물을 발간하고 있다. 역사 시리즈물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호를 딴 ‘우정체’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학자로서도 유명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젊은 시절 실패의 경험이 있다. 그를 만나 그가 역사 시리즈물을 내는 이유와 젊은이들을 위한 그의 성공과 실패담을 들어봤다.
이중근 회장. 민간기업 기준 국내 서열 10위권 안팎인 대기업 부영그룹의 총수다. 약속이 없는 날 그가 자신의 점심 한 끼를 위해 지불하는 금액은 8000원 내외다. 단순히 검소함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이런 생활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

이 회장은 ‘교육재화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1991년 순천 부영초등학교를 신축해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국 170여 곳의 대학과 초·중·고에 기숙사, 도서관, 체육시설 등 교육·복지 시설을 기증했다. 2003년부터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및 아프리카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 17개국에 학교 600여 개교, 피아노 6만여 대, 칠판 60만여 개 등을 기부했다. 이 회장이 한 해에 이런 식으로 기부하는 액수는 300억~5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위해 기부한 총액은 5000억원이 넘는다. 한때 부영의 기부금은 국내 대기업 가운데 매출액 대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 기부에 앞장서는 사회사업가로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정작 이중근이라는 이름을 더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펴내고 있는 역사 시리즈물 때문이다. 2013년부터 학계 특히 역사학계에서 그는 유명 인사로 부각됐다. 그는 2013년 9월 첫 번째 역사서 《6·25전쟁 1129일》을 시작으로 《광복 1775일》, 《미명 36년 12768일》, 《여명 135년 48701일》을 펴냈다. 최근에는 그 다섯 번째 역사 시리즈물인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을 발간했다. 그는 이 역사 시리즈물을 발간하는 데 500억원이 넘는 돈을 썼다. 순전히 개인 부담이다.

특히 6·25전쟁의 실상을 바로 알리기 위해 《6·25전쟁 1129일》은 요약본만 약 1000만 부를 제작했다. 이 책은 무료로 국방부, 대한노인회 등의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배포했다. 1000만 부 무료 보급은 우리 출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1000만 부 이상 팔린 책은 운전면허시험문제집과 성경뿐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전에 펴낸 역사 시리즈물과 표지 제목에서 눈에 띄게 차이 나는 점은 ‘우정체로 쓴’이라는 수식어가 큼지막하게 들어갔다는 점이다.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나흘 뒤인 6월 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소문에 있는 부영그룹 사옥 14층 회장실에서 이중근 회장을 만났다. 손님을 맞는 회장실 응접세트에는 손님 대신 표지에 ‘1교’ ‘2교’ ‘3교’ …라고 쓰인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 교정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회장이 직접 역사 시리즈물의 교정과 교열을 봤다는 흔적이었다.


변하지 않는 회장님의 방

우리는 응접 의자 대신 회장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회의용 탁자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1년여 전에도 기자는 그 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교정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 외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기업 회장 방 치고는 검소함을 넘어 지나치게 소박하다는 느낌 그대로였다. 일종의 데자뷔 같은 느낌. 그때도 휴일이었는데 이 회장은 나와 있었고 이 회장이 쓰는 책상 쪽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산수화도 그대로였다. 그 산수화는 김포공항에 갔다가 계곡의 물이 흐르는 풍경이 시원해서 그냥 샀다는 무명작가의 저렴한(?) 산수화였다.

물론 그 방의 주인도 그대로였다. 차분한 어투와 인터뷰 도중 간간이 보여주는 웃음과 역사 시리즈물을 왜 내는가에 대한 자기 확신 등등. 결국 인터뷰가 끝난 후의 느낌도 같은 것이었는데 ‘고즈넉한 산사에서 만난 어느 노승의 지혜’를 만난 후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산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식이 넘치는 어른은 흔하지만 지혜를 지닌 어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기자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지혜가 넘치는 어른’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출간한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 중 ‘우정체’를 이야기의 출발로 삼았다.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날부터 영조가 승하한 날까지의 385년, 14만 140일간 벌어진 조선왕조의 창업과 중흥, 민간사회의 생업, 일상과 풍습, 예술과 과학기술 등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나열하는 방식의 우정체로 기술한 역사서다. 우정은 이 회장의 호다. 이 회장이 우정체의 창시자인 셈이다.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인 우정체의 창시자인데요.

이중근 회장 “창시자라고까지 하기는 제가 좀 쑥스럽고요(웃음). 세계 어디에도 없는 형식이라는 건 맞지요. 인터넷에 올라 있는 우정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우정체는 세계사의 중심을 한국에 두고 사실 그대로를 일지 형태로 집필한 역사 기술방식’이라고 돼 있는데, 있었던 사실만 나열하고 거기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게 우정체의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사실에 대한 언급을 하면 거기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니까 우리는 사실의 나열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도 우정체를 사용하는 곳이 곧 생기겠네요.

함께 배석했던 김명호 부영 고문이 대신 답했다.

“회장님이 쑥스러워서 말씀 안 하시는데 얼마 전에 한 대학교에서 자기 학교 60년사인가 70년사인가를 만드는데 사학과 교수들과 원로 교수들이 《6·25전쟁 1129일》을 보고 나서 ‘아, 이런 식의 역사 기술이 있구나. 역사 기술을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겠구나’ 해서 자기들도 이런 기술 방식을 활용하겠다고 연락이 온 일이 있습니다. 자기들도 우정체를 사용하겠다는 거죠.”

이러다가 우정체가 역사 기술의 한 정형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중근 회장 “그렇죠. 이게 우리의 역사만 기록하는 게 아니고 동 시간대에 다른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함께 기록을 하거든요. 물론 치중하는 것은 우리 국내에서 벌어진 일이 될 수밖에 없지만 말이죠.”

이번 역사서를 낼 때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를 많이 참고했겠습니다.

이중근 회장 “네 그것 외에도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조선시대의 자료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 자료들을 일일이 다 봤습니까.

이중근 회장 “전부 다를 봤다면 그렇고 흐름만 아는 거죠.”

사업가가 아니라 역사학자가 되시겠습니다.

이중근 회장 “제 욕심이 두 개 다 하려고 하죠(웃음).”

역사 시리즈물을 내면서 요즘을 사는 우리들이 역사를 통해서 무슨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요.

이중근 회장 “과거는 반드시 알아야 해요. 과거를 알아야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 것도 가능해요. 미래를 관조하는 일도 가능하고요. 역사를 일부러 왜곡해서는 안 되지만 사실은 알아야 해요. 역사에 대한 시각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사실은 하나 아닙니까. 제가 그동안 다섯 편의 역사서를 출간하면서 깨닫게 된 생각이 ‘역사는 모방의 연속이며, 세월은 관용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도 역사적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우정체 기술에 시비를 못 거는 이유
5월 30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중근 회장.
이 회장은 역사 시리즈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6·25전쟁, 일제 36년 등을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참 좋은 시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배운 역사 과정에서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 같습니다. 배고픈 시절에 태어나서 그런지 지금은 배고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예로 들면, 이 말 이전의 아침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밥을 못 먹으니까 밥을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가 첫 인사였던 거죠. ‘안녕하십니까’가 인사말로 보편화된 게 제 생각으로는 수십 년 안 돼요. 요즘 ‘진지 잡수셨습니까’를 인사말로 쓰는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이어지는 말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라는 말이 어떻게 성립이 되었겠습니까. 양반 따로, 천민 따로, 노비가 따로였는데 쌍놈이 양반한테 가서 우리끼리 어쩌구 했다가는 맞아죽었겠죠. ‘우리’라는 말을 자유롭게 쓰고 ‘안녕하십니까’가 보편적인 인사말이 된 세상, 분명 과거와는 다른 살기 좋은 세상이죠.”

원래 지난해 5월 《여명 135년 48701일》을 낸 후에 이번에 출간한 《우정체로 쓴 조선개국 385년》이 아니라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의 현대사를 쓸 계획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순서를 바꾼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중근 회장 “현대사를 기획하다가 의견이 엇갈려서 먼저 조선개국을 내기로 한 겁니다. 가제를 ‘번영 60년’ 이런식으로 정해놨었죠.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일인데, 현재 정전협정 이후 64, 65년까지 10년 정도는 정리를 해놓은 상태입니다. 우정체 기술 방식이라 큰 논란의 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현대사는 조심스러운 부분이라서 좀 더 검토할 생각입니다.”

그럼 다음 역사 시리즈는 고려사 쪽으로 가는 겁니까.

이중근 회장 “고려사로 갈 수도 있고 생각 중이에요. 조선까지는 몰라도 고려는 완전한 국가가 아닙니다. 호족 연합체였던 셈이죠.”

혹시 역사 시리즈물을 발간해오면서 역사관이 다른 사학자들도 많은데 그런 차이 때문에 시비를 걸어오는 학자는 없었습니까.

이중근 회장 “저는 사실을 나열만 하고 해석은 하지 않았습니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했는데 제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죠. 역사 해석은 각각일 수 있어도 그 기록은 바뀔 수 없는 겁니다.” 

인터뷰 도중 간혹 이 회장은 조선시대와 관련한 수치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하는 수치는 자료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주 구체적이었다. “조선조 성립 당시 문반이라는 게 820명, 무반 4000명 해서 500만 백성 중에서 5000명이 안 돼요. 0.1%밖에 안 돼요. 그런데 노비는 관노비 26만에 사노비가 100만 그렇게 126만이 되니까 500만 중에 3분의 1이 노비란 말입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누가 이 회장의 나이를 희수(77세)라고 믿고 싶겠는가. 당연히 이 회장은 회사 경영에서도 아직 최일선을 지키고 있다. 젊을 때와 많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회공헌에 대한 열의의 크기다.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 분야에 대한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회장이 최근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 중 하나가 아파트 어린이집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부터 부영이 건설한 아파트 내에 건립한 어린이집의 임대료를 받지 않고 있다. 그런 어린이집이 60곳 가까이 된다.

부영 아파트 내 어린이집 임대료는 여전히 안 받는 거죠.

이중근 회장 “안 받는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받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과거에는 그걸 몰랐습니다. 몰라서 임대료를 받았던 거죠. 공동주택 의무사항에 노인정하고 어린이집이 다 있어요. 그런데 노인정은 임대료를 안 받았거든요. 노인정 임대료를 안 받았으면 어린이집도 안 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안 받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건설사들이 지은 아파트도 어린이집 임대료를 안 받나요? 

이중근 회장 “제가 알기로는 아직 없습니다.”

다른 건설사들도 따라할 만한 일인데요.

이중근 회장 “아마 다른 건설사들의 경우는 의사 결정을 마음대로 못 하니까 그럴 거예요. 주총 같은 데서 의결을 받아야 하니까요. 특히 기부 같은 문제는 더 그렇습니다.”

지난해까지 사회에 기부한 금액이 5000억원이 넘는데 처음에 기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이중근 회장 “순천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학교가 아파트에서 너무 멀었습니다. 마침 거기에 학교 부지가 있어서 교육청을 찾아가서 그 부지를 주면 학교를 지어드릴 용의가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왜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아파트에 학교가 없어서 안 팔립니다. 우리가 학교를 짓겠습니다’ 했죠 (웃음). 그래서 학교를 지어서 기부한 겁니다. 그런데 학교를 짓고 나니까 집이 잘 팔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 이해를 위해서 지었던 거죠(웃음). 사실은 그게 계기가 돼서 학교 시설을 지어주게 된 겁니다.”

왜 하필이면 교육사업 지원에 주력하십니까.

이중근 회장 “장사로 시작했다니까요. 집 잘 팔려고(웃음).”

출발이야 그렇게 됐다 쳐도 어쨌든 기부 활동이 주로 교육 분야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중근 회장 “교육이라는 게 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은 미래로 이어지잖습니까. 순천에서 열린 정원박람회를 후원한 적이 있는데 그 박람회가 크게 성공했죠. 나무는 자꾸 자란단 말입니다. 다른 박람회는 건물 지었다가 감가상각만 발생하는데 정원박람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 나무가 계속 자라니까요. 교육도 마찬가지죠. 시간이 갈수록 장대해지는 겁니다. 장래에 대한 기대인 겁니다.”

기부를 하면 기부를 하는 당사자도 만족감이 크다고 하던데요.

이중근 회장 “상대가 좋아하는 걸 보면 당연히 저도 좋죠. 그런데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기부를 받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순간으로 고마움이 끝납니다. 그런데 기부를 해주지 않아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안 잊어먹고 시비를 걸죠(웃음).”

학교 시설 기부 활동을 하기 전에 소년·소녀 가장 돕기를 먼저 하지 않았나요?

이중근 회장 “아니, 같이 했어요. 순천에도 집을 짓고 여수에도 집을 지었는데 거기에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순천, 여수, 광양 이 세 군데 위주로 소년·소녀 가장 돕기를 했죠. 나중에 화순도 몇 사람 해줬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기부할 때 기준이 따로 있습니까.

이중근 회장 “교육 계통은 계속 하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교육 분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기부 요청이 오면 제가 이쪽(교육)을 하고 있어서 다른 곳도 다 하기는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죠. 그러면 이해를 합니다.”


세발자전거 이론과 젊은이
르완다 초등학교에 교육 기자재를 기증하고 있는 이 회장.
이 회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가 ‘세발자전거 이론’이다. 세발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인 자전거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여간해선 넘어지지 않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기업 경영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듯 내실을 다지며 안전하게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회장님의 경영철학 중 ‘세발자전거 이론’을 지금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한테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요즘 젊은이들은 빨리 가고 싶어하는데요.

이중근 회장 “본인의 판단이 되겠죠. 가다가 넘어지고 하면 ‘아 이거 넘어지는 것도 진력난다. 천천히 가도 안전하게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세발자전거를 골라 타겠죠. 그거는 따르라 마라가 아니라 본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젊은이들에게 실패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회장께서는 1970년대 후반 우진건설을 설립했다가 부도가 나는 경험도 했습니다. 무슨 교훈을 얻었습니까.

이중근 회장 “교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때는 너무 자신 있어 했거든요. 인생에서 ‘이만하면 됐다’는 없는 건데 말이죠. 그 이후 제가 최고, 최대, 최상이라는 말은 안 써요. 제가 행정학을 했는데 행정학에서도 최적모형은 있지만 최고모형은 없습니다. 최고, 최대, 최상이 항상 유지될 수 있는 건가요? 순간일 뿐입니다. 순간적으로 맛보고 사라지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는 거죠. 인생에는 최적이 있을 뿐입니다. 등산에 비유한다면 산에 오를 때는 최고봉이 있지만 인생에는 최고봉이 없습니다. 언제나 오를 뿐이죠.” 

우진건설의 실패가 지금 성공에 밑거름이 됐습니까.

이중근 회장 “밑거름이 됐을까요? 밑거름이라기보다는 기준이 됐습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기준, 기준이 됐습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요.

이중근 회장 “글쎄요. 저도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 창업을 하게 됐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죠.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누구나 성공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사관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서 누구나 참모총장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참모총장 임기가 2년이니까 적어도 2기수에나 한 명의 참모총장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무턱대고 창업에 뛰어들 게 아니라 현재의 각 분야에서 그 분야의 전문화를 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창업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인서를 써주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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