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분석의 경제학
게놈은 한 생물체를 구성하는 유전자(gene)의 총합을 말합니다. 게놈을 분석하면 태생적으로 취약한 질병이나 수명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미국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60세 이전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4%"라는 예측을 들은 뒤 유방절제 및 복원수술을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졸리의 게놈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해독 기술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의 게놈을 제대로 읽으려면 수천억원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일루미나, 중국의 BGI 같은 유전자 분석 회사들은 10만원만 내면 하루 만에 게놈을 분석해주는 상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바이오·의료 산업의 반도체
게놈은 정보기술(IT) 산업의 반도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가정용 전자제품·컴퓨터 등 현대 IT산업은 반도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반도체의 핵심은 전기를 흐르게 하거나 차단하는 스위칭(switching)입니다. 정보를 읽고 쓰거나 빛을 내거나 끄는 등 IT제품의 역할은 모두 반도체의 스위치를 켜고 끄면서 이뤄집니다. 게놈은 생물체의 몸에서 반도체의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게놈은 생물의 각종 기능을 끄고 켜거나, 잠시 멈추게 하고 개선하는 스위치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불량이 생기면 병에 걸립니다. 한 사람의 게놈은 60억 쌍의 스위치로 이뤄집니다. 각각의 스위치를 염기라고 부르는데, 이 스위치의 종류에 따라 질병에 걸릴 확률이 달라집니다.
A·T·G·C 등 4가지 유전자 염기의 배열 순서는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이를 분석하는 것을 게놈 해독이라고 합니다. 게놈 해독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뤄집니다. 우선 머리카락이나 혈액·타액·입 속의 상피세포 등에서 시료를 확보합니다. 다음엔 화학 용액을 써서 유전자 분자만 추출해냅니다. 이 분자를 초음파로 분쇄하면 게놈 해독기가 읽어 들일 수 있는 적당한 길이의 분자로 나뉩니다. 여기에 빨강·노랑·초록·파란색의 염색 물질을 이용해 4가지 유전자 염기가 각기 다른 색깔로 보이도록 화학 처리합니다. 염색 처리가 끝난 유전자 염기를 고감도 사진기로 수만 장 찍어 컴퓨터에 입력하면 염기의 순서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반복해 게놈 해독이 이뤄집니다.
게놈을 분석하면 어떤 암에 걸릴 확률이 높은지, 얼마나 키가 클지 등 개인의 건강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놈을 고치거나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신 게놈에서 파생되는 독특한 단백질을 표적으로 치료약이나 예방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백질은 화학이나 생물 약품으로 비교적 쉽게 제거하거나 생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놈을 해독하면 어떤 단백질이 만들어질지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게놈 해독은 미래 신약 개발의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스트라제네카나 로슈 같은 세계적인 제약사들은 엄청난 돈을 게놈 산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신약 개발의 '열쇠'
어떤 단백질 만들어질지 알아
치료·예방약 개발 간단해지고
분석 자체가 저렴해지고 빨라져…
일상 모든 곳에서 활용될 것
◇싸고 빠른 게놈 해독 기술이 핵심
게놈 산업의 동력은 싸고 빠른 게놈 해독 기술의 개발과 응용에 있습니다. 게놈을 더 빨리 읽을 경우 의사가 쉽게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제약회사의 신약개발도 간단해집니다.
시장조사기관들은 게놈 산업 규모가 2020년이면 20조원 수준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성장률도 매년 9.9%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게놈 해독 기술을 기준으로 한 극도로 보수적인 평가입니다.
게놈 분석 기술은 급속도로 발달하고, 관련 산업도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게놈 해독 기술은 우리 생활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의료 분야에서는 게놈 해독기가 변기에 내장돼 대소변으로 건강 상태를 파악하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 중입니다. 집 안의 난방기와 에어컨에 탑재된 게놈 해독기는 실시간으로 고병원성 바이러스를 모니터링하며, 병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환자의 게놈 정보를 검사해 각종 질환을 진단하고 예방할 수 있게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게놈 분석은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가능합니다. 바이오 에너지 분야에서는 효율적으로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효소와 생물 기반 화학물질들이 게놈 공학을 통해 설계·제조되고 있습니다. 게놈 편집 기술에 기반을 둔 식물들이 등장하면 자동화된 식물공장이나 식품 공장도 가능해집니다. 게놈 기술은 기존 화학·기계·광학 기술과 융합하며 인간의 실질적 행복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한국 게놈 산업 현주소
해독 기술, 세계적 수준이지만 규제 강력해 상용화는 어려워
기계·약품 제조 주력도 방법
저장 장치 수요 급증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수혜 기대
◇일상의 모든 곳에 침투하는 게놈 산업
선진국에선 게놈 분석이 거대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선 구글의 자회사인 23앤드미가 게놈 정보와 관련된 질병과 신체 특징에 대한 정보를 약 10만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임신 8주 후부터 산모의 피만 뽑아보고 기형아를 예측하는 상품도 상용화돼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휴먼 롱제비티는 약 2500만원을 내면 자신의 게놈을 완전히 분석해, 각종 다른 의료정보와 합쳐서 건강 상태를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또 원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줄기세포를 회사에 저장하고, 의사와 상의해 향후 건강과 항노화 관리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국과 중국에선 인간의 게놈을 해독한 뒤 특정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유전자가위 기술로 조작·편집해 유전병을 예방하려는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우리나라의 게놈 해독 기술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규제가 강력하기 때문에 상용화가 어렵습니다. 새로운 게놈 산업 분야가 등장할 때마다 정부의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하고 허가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시스템에선 혁신적 상품이 나오거나 산업이 나오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놈 산업은 혁신적인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부품을 잘 만드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게놈 해독기에 들어가는 시약 중에서 제조가 까다로운 것을 울산 화학공장에서 더 싸고 정확하게 만들자는 식입니다. 첨단 의료에 필요한 약품을 더 잘 만들거나, 진단에 필요한 광학기계를 더 잘 만드는 것도 한국이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놈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게놈 정보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빅데이터입니다. 게놈 산업이 발전할 때마다 이 자료를 저장하는 컴퓨터 저장장치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게놈 산업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015년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생명공학과 제약·바이오 등을 망라한 전 세계 헬스케어 산업 규모는 1경(京)원에 이릅니다. 자동차·정보기술(IT)·조선 등 대형 산업군의 규모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큽니다. 당연히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부터 독일, 영국, 중국까지…
각국, 시장 선점 위한 산업 육성
한국도 2019년까지 만명 분석,
'울산 만명 게놈 프로젝트' 시작
특히 최근 급부상한 게놈 산업은 미래 헬스케어의 핵심으로 꼽히며 각국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대표적입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민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에게 공공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게놈 산업 육성을 주장했습니다. 게놈 정보를 이용해 개개인 스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조기진단과 맞춤치료가 가능해지면 낭비되는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오바마는 2015년 미국국립보건원(NIH)의 수장으로 게놈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를 임명했습니다. 콜린스는 2015년부터 100만명의 인간 게놈 분석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매년 2억1500만달러(약 2500억원)가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영국은 2012년부터 '10만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의 게놈을 분석해 암과 희귀병의 원인을 밝혀내겠다는 겁니다. 영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어진 연구결과를 헬스케어 산업에 활용하기 위해 지노믹스잉글랜드라는 국영기업까지 설립했습니다.
이 밖에 중국도 2030년까지 게놈 분석을 기반으로 한 정밀의료 산업 육성을 위해 2030년까지 600억위안(약 10조원)을 투입하기로 했고 프랑스와 독일도 국가 차원의 게놈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부터 울산시와 울산과학기술원·울산대·울산대병원 등이 손잡고 '울산 만명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2019년까지 만명 이상의 한국인 게놈을 분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난해 100명의 자원자가 게놈 정보를 기증했고 올해도 1600명의 정보가 추가될 예정입니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출발이 늦었고 규모도 비교적 작지만 한국인만의 게놈 정보 구축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입니다./박건형 기자 조선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