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이브닝 월드’ 세계특파원, 조선 왕궁에서 명성황후도 만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4년 12월3일 뉴욕의 이브닝 월드는 ‘세기의 인터뷰’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 조선의 왕궁에 들어가 고종(1852∼1919)을 알현하고 인터뷰한 것이다. 뉴시스가 단독 입수한 이 기사의 톱 제목은 ‘조선의 왕이 말하다(Korea's King Talks)’이다. 고종만이 아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1820∼1898)과도 만나 별도의 인터뷰를 했다. 이 대단한 ‘인터뷰어’는 이브닝 월드의 ‘세계특파원(world correspondent)’ 제임스 크레블맨이었다. 그는 고종을 인터뷰하는 내내 왕의 뒤에서 병풍 너머로 바라보던 명성황후(1851∼1895)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또한 고종 옆에 왕세자(crown price)가 배석했다고 기술했다. 당시 20살의 이척(순종 1874∼1926)으로 추정된다. 이 기사엔 고종과 왕자, 명성황후, 대원군의 이미지와 고종을 알현한 근정전과 일본 공사관, 그리고 자신과 일본인 통역관 및 조선인 하인을 그린 것 등 총 7개의 삽화가 함께 게재됐다. 이브닝 월드의 보도는 고종과 실질적인 지배자 대원군의 흥미진진한 인터뷰 내용은 물론, 경복궁 등 서울과 왕궁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궁중의 음모와 암투,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의 4대 강국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상황을 기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목들만 일별해도 당시 조선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국가적인 존망의 위기 속에 직면해 있음이 잘 드러난다. 영어매체사료 연구가인 워싱턴의 문기성씨는 “당시 조선에 대해 보도한 수많은 신문 사료들이 있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조선에서 권력의 최고 핵심부와 생생한 인터뷰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소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 조선의 왕 “美국민이 도와달라” 간절한 호소 삽화 속의 크레블맨 기자는 덥수룩한 수염의 당당한 체구로 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국인 특파원이라고 소개됐다. 함께 있는 일본옷 차림의 사나이는 통역관, 삿갓을 쓴 흰 옷 차림은 조선인 하인으로 명시했다. 기사의 첫머리는 “왕국을 뒤덮은 위기와 생명을 위협받는 와중에 조선의 왕은 오늘 미국 국민들에게 도움을 직접 호소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장차는 대한제국의 첫 황제가 미국의 기자에게 호소해야 할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고종은 미국과 조선 간에 (1882년)조인한 우호협약에 따라 미국이 전쟁 등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호해 주기로 한 내용을 환기시켰다. 그는 “조선은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니다. 개화로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조선이 3000년 이상 독립된 나라로 있었다고 미국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가 고종을 알현할 때 헨리 알렌 미대표단 단장과 동행했으며 “멋진 가마를 타고 입궐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그는 “궁 안에는 4000∼500채의 주택들이 방사형으로 위치했고 3000명 정도 살고 있다”면서 “적청황백색의 지붕과 연못, 커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을 지났다. 엄청나게 큰 홀(근정전)의 700∼800년은 된 듯한 나무로 된 문을 통해 들어가자 시종들에 둘러싸인 왕을 볼 수 있었다”고 묘사했다. “유럽식 의자에 앉은 한국의 통치자와 대면했을 때 그는 행복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불안한 듯 손을 허리띠에 모은 작고 갸날픈 사나이는 친절한 입 모양과 여성처럼 깊고 그윽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수를 하지 않았다. 왕의 몸에 손을 대면 죽음이 선언된다. 사람들은 길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도 안 된다.” 존엄한 왕은 그러나 미국 기자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겠다는듯 절박한 호소를 이어나갔다. “짐은 물론, 백성들도 완전히 독립된 문명국의 일원으로 나갈 것이오. 미국과의 우정을 믿고 있소. 당신의 나라는 항상 우리와 우정을 나누기로 약속했소. 미국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두 번째 임기 2년차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외교를 책임진 그레샴 국무장관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고종이 미국의 기자를 만나 미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일종의 정공법이었다. 국민이 주인인 미국식 민주주의를 고종이나 측근들이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고종에게 “미국은 자주권을 가진 나라를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갖고 있다. 그런 미국이 어떻게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돌발적인 질문도 던졌다. “왕은 당황한 듯 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아서 속삭이는것 같았다. 보필하는 신하들 앞에서 행동이 부자유스러워 보였다. 마침내 그의 입에선 ‘미국이 약간의 군인들만 보내서 우리 왕궁만 지켜줘도 상황은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미국의 군인들을 원한다고?(Want a Yankee Guard?) 왕의 요청에서 일본이 얼마나 그에게 압박을 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종은 “이미 미국의 장관에게도 말을 전했다. 우리는 미국이 조선에 진심어린 우정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실질적인 희망의 증거들을 기대한다. 미국 대통령이 조선의 독립을 보호해주길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다.
▲ 명성황후 암살 위기, 젖가슴 드러내 평민 위장?
인터뷰하면서 크레블맨 특파원은 자신을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을 느꼈다. 명성황후였다. “왕이 이야기하는 동안 반짝이는 눈을 한 왕비가 병풍 뒤에 난 공간 사이로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녀였다. 10년 전 적들을 속이기 위해 젖가슴을 드러낸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보아라. 조선의 왕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그러느니 차라리 죽을 것이다’라고 속였다.” 크레블맨 특파원이 거론한 이 에피소드는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암살 음모를 알아채고, 변장한 채 궁궐을 벗어나 여주에서 한동안 은신한 사건을 시사한다. 당시 명성황후는 발각될 위기에서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명성황후가 왕비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평민 여성처럼 가슴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크레블맨 특파원의 기사를 통해 처음 등장한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명성황후의 대담함과 임기응변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왕비는 위험에 처한 요즘 왕을 자기 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대원군과 그의 일파들이 왕을 퇴위시키고 손자를 대신 올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왕세자는 유럽의 신사와도 같은 똑똑한 청년이었다”고 덧붙였다. 왕과의 알현을 마치고 나온 크레블맨 특파원은 자신을 기다리던 또 한 명의 통치자를 만난다. 회색 지붕 별채에서 회동한 대원군 역시 미국 특파원의 힘을 알고 있었다. 조선의 실질적인 군주인 그는 미국 언론을 통해 자신이 섭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 애썼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대원군이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트럼펫처럼 우렁찼고 웃음도 호탕했다고 묘사했다. “조선은 세계에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소. 더 이상 외국인에게 빗장을 걸지 않을 거요. 다만 이변이 너무 급격하면 혼란이 생기지요. 수천 년 간 유지한 문화와 관습은 하루에 바뀔 수 없소. 변화는 점진적이어야 하고 백성들이 질서를 회복하고 법령을 준수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임무요.” 크레블맨 특파원은 대원군이 중간중간 농담을 하는 모습에서 “저 사람이 30년 전 서양의 야만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고한 기독교인들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대원군이 “일본 정부가 자신에게 선물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시계를 보여주며 값이 얼마나 될 것 같냐고 묻기도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고종은 크레블맨 특파원 일행이 궁을 빠져나올 때 사람을 보내 “미국의 우정을 믿는다. 꼭 도와달라”는 전갈을 다시 한 번 보내왔다. 실로 고종의 미국에 대한 신뢰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그는 이듬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일체의 음식을 거부했다. 독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궁 밖에서 미국의 선교사들이 봉인한 채 보내온 음식만이 그의 수라로 전해졌다.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 여사도 고종의 미국에 대한 믿음을 증언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이해경 여사는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의친왕비)를 통해 고종 황제가 ‘미국이 도와줄 거야, 꼭 도와줄 거야’ 하고 되뇌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종의 간절한 믿음에도 미국은 1905년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강대국의 논리 앞에 약소국을 위한 정의는 없었던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이준 열사 등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강제 퇴위된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경운궁에서 돌연 붕어(崩御)한다. 그가 즐기던 커피 혹은 식혜에 누군가 독을 탔다는 소문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비운의 왕은 24년 전 일본 낭인배의 무참한 칼에 스러진 명성황후를 따라 그렇게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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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중앙일보
[명성황후 119주기]뉴욕 타임스의 대특종과 대오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첫날 기사 송고…1882년엔 명성황후 피살 오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첫날 기사 송고…1882년엔 명성황후 피살 오보
[뉴시스] 기사입력 2014/10/09 21:31
훗날 죽음의 과정을 증언한 여러 보고서는 차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였지만 ‘칼로 살해해 시신에 석유를 부어 불태웠다’는 당시 언론 보도만으로도 세계는 경악했다. 120년 전 세계 모든 유력 언론은 물론, 작은 도시의 마이너 매체에 이르기까지 조선 황후의 시해사건에 대한 속보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이유다. 그중에서도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이번 시리즈 1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뉴욕 타임스는 1895년 10월12일자로 시해 사실을 보도했다. 송고일 10월11일은 명성황후 시해 사흘만의 일이었다. 며칠씩 걸리는 전보에 의존하거나 국제 증기선에 실린 현지 신문을 통해 몇 달 뒤에 소식을 접하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언론치고는 전광석화같은 보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 당일에도 관련 기사를 뉴욕 타임스가 송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1895년 10월8일 뉴욕 타임스는 일본 요코하마 발로 ‘한국의 반개혁 폭도들’ 이라는 짧은 기사를 긴급 타전한다. 뉴요커들이 10월9일 보게 된 이 기사는 작은 제목으로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 달려 있었다. 내용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있는 기자가 알려왔다. 왕의 아버지이자 반개혁파 지도자인 대원군이 무장세력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했다. 왕비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다”는 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며 왕비 신상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팩트’를 정확히 보도한 것이었다. 일본의 낭인배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한동안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날의 1보는 사실상 뉴욕 타임스의 대특종이라고 볼 수 있다. ▲ ‘고종과 명성황후 피살’ 뉴욕타임스의 대오보 흥미로운 것은 뉴욕 타임스가 명성황후와 고종이 시해됐다는 엄청난 오보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을미시해가 일어나기 13년 전인 1882년 8월18일 런던의 한 신문을 인용한 보도였다. 다음은 기사 전문. “런던에서 8월17일 수신된 팰맬 가제트에 따르면 조선에서 전면적인 반란 사태가 일어나 왕과 왕비가 살해됐다. 일본 공사관은 반외국파들과 관련된 조선인들의 공격으로 불에 탔다. 일본 군인들이 서울의 한강에 급파됐다. 프레스 어소시에이션 기자에 따르면 조선의 반란은 공식 확인됐으며, 사망자 가운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장교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866년 15살의 나이에 왕비로 간택된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섭정을 저지하기 위해 1873년부터 반대 세력을 규합,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대원군을 축출한 후 민씨 척족과 개화파를 대거 중용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 권력 암투가 계속됐다. 1882년 7월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 교관이 살해됐다. 이때 명성황후는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다. 대원군의 밀명을 받은 난군이 궐내로 난입, 자신을 찾아 나서자 궁녀의 옷으로 갈아 입고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을 얻어 피신한 것이다. 이 같은 오보는 명성황후가 그해 여름 50여일 간 도피한 사이 국상이 선포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국상이었지만 궁궐 피습 등 극도의 혼란 속에 고종까지 죽은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영국 매체를 인용했다가 뉴욕 타임스까지 덩달아 오보를 한 셈이다. 명성황후가 보란 듯 생환하고 대원군과의 권력 암투가 계속되면서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더욱 주목하게 된다. 1889년 6월4일 ‘왕비는 허수아비가 아니다’라는 기사에서 “왕비는 조선의 가장 힘센 권력층의 하나이고 왕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공공연히 전달한다. 궁안에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다”고 전했다. 명성황후가 애연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왕비는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다이아가 달린 비단옷을 입는다. 역시 다이아가 박힌 허리띠 장식을 하고 미국산 담배를 즐겨 피운다.” 비록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그녀를 싫어 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이 앞장선 무뢰배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됐다는 사실에 조선의 민심은 들끓었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기치 하에 의병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백범 김구(1876∼1949)가 20살 때 한 일본인을 척살한 것도,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해 세계를 놀라게 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쾌거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배경이 있었다. 명성황후는 살아서 청일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죽어서 동북아의 역사를 바꾼 존재였다. ▲ ‘러시아 킬러’ 헤트로바, 일본 긴장 1896년 1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은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한다.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한 러시아인 킬러 때문에 일본이 바짝 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디트로이트 출신 유지 F H 클라크 박사의 증언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직접 듣고 전한 스토리였다. ‘음모자 헤트로바(Hetrova, The Intriguer)’라는 기사는 클라크 박사의 삽화를 곁들인 가운데 “킬러이자 외교관인 러시아인은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몇 건의 살인 등 여러 나라의 사건들과 관련 있다. 그는 왕비의 죽음 이후 지금 일본에서 몇 가지 의문의 목적을 갖고 체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위험 인물인 그를 일본 형사들이 뒤쫒도록 러시아가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크 박사는 “그가 요코하마 시내에 나가면 일본 형사들이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따라붙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전쟁의 빌미를 주는 일이 그로 인해 발생할 것을 두려워 했다. 그의 이름은 헤트로바이고 불가리아 등 많은 지역의 살인에 얽혀 있다. 헤트로바는 한국의 정치 혁명에 영향을 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명성황후 시해 2년 뒤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일본과의 파워게 임을 위해 복잡한 정치·외교적 음모에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는 대목이다 당시 헤트로바는 189㎝의 신장에 몸무게가 약 120㎏이나 되는 거구로 묘사됐다. 한편 클라크 박사는 “미국에선 믿지 않지만 조선 왕비는 확실히 죽었다. 조선에 가서 사실을 확인한 도쿄 주재 미국 공사 스테픈 보우살로부터 들은 것이다. 궁궐이 피습됐을 때 네 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포함해 3명이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기어서 빠져나왔다”고 전했다. 그는 “조선의 왕은 다시 그녀에게 왕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녀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정치 외교는 물론, 막후 조종에도 능했지만 결국 생명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 명성황후 시해범, 일본서 피살 1904년 3월24일 노스다코다의 윌리스톤 그래픽지가 ‘시해범 피살’이라는 기사를 올려 독자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일본 낭인배들을 위해 궁궐에서 인도한 우범선이 피살된 사건이었다. 우범선은 당시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로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한 그는 암살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살았으나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조선의 열혈청년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보도에선 조선에서 온 두 명의 남성이 우범선을 살해했으나 무려 5개월이 지나서야 알려졌다고 전한다. 이 사건이 조선의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일본이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우범선이 일본으로 피신한 후 조선은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시해 가담이 정치적 행위이기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래서 일단의 조선인들이 우범선 처단을 맹세하게 된 것이다. 앞서 밝힌대로 우범선은 정체를 감춘 채 은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903년 10월 어느날 두 사람이 우범선의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일본에서 공부하며 여행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범선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았고 함께 술을 먹고 카드게임도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친하게 되었고 3∼4일을 우범선의 집에서 머물렀다. 10월25일 저녁, 술을 먹으며 우범선과 대화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칼을 빼내 찔렀다. 다른 한 사람은 철퇴로 머리를 가격했다. 우범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신문에 따르면 칼로 찌른 사람은 고영근이었고, 철퇴를 휘두른 사람은 노원명이었다. “이들은 살인 혐의로 수감됐으며 주머니 안에선 ‘왕비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에 가는 것이 위임됐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이들에게 엄한 처벌을 내릴 것으로 믿지 않고 있다.” 실제로 고영근은 만민공동회 사건 등으로 조선에 돌아갈 경우 체포될 수 있었으나 ‘국모 시해범’을 처단한 공적으로 고종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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