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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9일 토요일

‘우리민족끼리’ 구호에 숨은 함정

이춘근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2015년 10월 10일 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 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 청년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횃불 퍼포먼스가 열렸다. 횃불 공연 참석자들이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이라는 글자를 선보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한반도 문제가 세계 정치의 고약한 문제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일이었으니 한반도 문제가 불거진 지 벌써 75년 이상이 되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미국, 영국, 중국(당시 장제스의 중국)의 수뇌들은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에 유념(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하여 ‘한국을 적당한 절차를 거쳐 자유독립국가로 만들어줄 것을 결심했다(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부, 그리고 북한의 지도층 전부와 이들의 선전에 세뇌당한 북한 주민들 다수는 김일성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사실 오늘의 한국 문제를 규정하는 분단, 전쟁, 갈등은 그 대부분이 국제정치적 원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도출해냈다는 사실이 한국의 광복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분단의 역사는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그림이 나오지만, 종북 좌파인사들 전부와 상당수의 한국 국민들은 한반도의 분단 원인에 대해 입버릇처럼 ‘미국 놈들이 잘랐다’고 말한다.
   
   한국 현대 역사상 가장 처절한 재난이었던 6·25전쟁도 국제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침략전쟁을 시작하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당시 기준 최신형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도 20개국에 이른다. 당대 세계의 강대국들이 모두 싸웠다. 처음에는 극구 부인했지만 소련 조종사들의 참전이 확인되었고 심지어 일본 자위대 병사들도 소해(掃海)작전에 참여했던 세계적 전쟁이었다. 
   
   아무튼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위한 남침 전쟁은, 중국(당시 중공)과 소련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및 소련 국제공산당이 신생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을 방치할 수 없는 미국과 자유진영은 전쟁 발발 단 일주일 만에 군사력을 한반도에 다시 배치, 공산군과 전투를 벌일 정도로 신속히 대처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 한반도는 세계 각국에서 온 군인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공산주의 침략의 예봉을 꺾은 유엔군은 한반도를 자유 통일시킬 목적으로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갔다. 북한 공산정권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진 1950년 10월 하순, 중국은 처음에는 은밀하게 그리고 곧바로 공개적으로 무려 130만명의 중공군을 한국 전역(戰域)에 투입했다. 중공은 음흉하게도 이들 군사력이 중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는 북한을 돕기 위해 스스로 파견된 군대, 즉 인민지원군(人民支援軍)이라고 불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약 3년1개월 동안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남북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 소련, 중국, 유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휴전을 끝끝내 반대했던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체결을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북한 역시 한국전쟁을 끝내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 후 65년이 지난 2018년 현재 한반도 문제는 별로 나은 방향으로 진전하지 못했다. 2018년 4월 27일 열린 문재인·김정은 판문점회담, 6월 12일 열린 트럼프·김정은 회담 이후 피상적인 측면에서 일시적인 평화무드가 형성되기는 했지만 한반도 국제정세의 저변에는 남북한 중 한 편이 붕괴되어야 끝나는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는 미·일 개입 않는 상황

   
   한반도 문제가 도무지 풀리지 않고 교착상태로 진행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 일각에 북한의 입장을 긍정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한반도 문제의 연원이 소련·중국·북한 등 사회주의 진영의 잘못이기보다는 미 제국주의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의 원인이 소련이기보다는 미국에 있다고 보는 수정주의 좌파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좌익 세력들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 방안은 제국주의 미국과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미군 철수’라는 구호가 6·25전쟁을 통해 공산주의 학정(虐政)을 경험한 한국 국민정서와 도무지 맞지 않는 과격한 구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한국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적어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는 힘든 방법과 구호를 찾아내었다. 그 구호가 바로 ‘우리민족끼리’라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논리는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열정적이다. 한민족의 고통은 분단에서 유래한 것이고, 분단을 초래하고 고착화시킨 것은 외세(外勢)이니 그 외세를 제거하면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간단하게 정리한다. 이처럼 간단한 논리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에게 쉽게 먹혀들어간다. 우파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이 같은 논리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같은 논리는 깔끔하기는 하지만 함정이 많다. 우선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외세는 오로지 미국과 일본을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 등 사회주의 성향의 나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민족끼리’란 다른 말로 미국과 일본이 개입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은 외세가 이미 빠져나가버린 ‘주체의 나라’인 반면 한국은 미군에 의해 주둔, 점령, 착취당하고 있는 ‘식민지 국가’다. 그래서 남한의 시대는 미제강점기인 것이다. 남한 지역은 일장기가 펄럭이던 일제강점기가 끝나자마자 성조기가 펄럭이는 미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들은 ‘우리민족끼리’를 집요하게 외쳤고, 이들의 선전은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반공·보수를 표방한다는 김영삼 대통령조차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민족끼리’라는 주장은 감성적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은 아니다. 우선 이들이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편협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란 동양적 개념도 아니고 더더욱 우리나라의 개념도 아니다. 근대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을 빌려온 것인데 우선 민족이란 언어, 문화, 역사, 관습, 종교, 사상 및 혈통이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이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민족의 요소는 혈통이다. 이들은 북한과 남한이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극도로 강조한다.
   
   
▲ 지난 5월 25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취소 트럼프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중민주당 당원들이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구호를 외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북한은 ‘같은 생각’을 더 중시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서양 사람들이 민족을 말할 때 가장 나중에 거론되는 요소가 ‘같은 혈통’이며 가장 강조되는 요소는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느냐 여부다. 즉 흑인과 백인이라도 역사와 언어, 관습, 종교, 사상이 같은 경우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된다. 오늘날의 미국이 그런 사례다. 서양인들은 피가 달라도 생각이 같으면 한민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도 피가 같으면 같은 민족이 될 수 있으며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북한과 남한은 피가 같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고 우리끼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왜 세상에서 한국인과 피가 제일 가까운 일본을 그토록 배척할까? 사상이 달라도 피가 같아서 함께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일본은 한국과 가장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지만 북한은 스스로를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칭하는 용어인 ‘한민족’은 ‘김일성 민족’과 같은 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피가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이 달라서다. 피가 같아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김일성 집단이 보기에 ‘반동분자’들일 뿐이다.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족속들인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김일성의 언급으로도 증명된다.
   
   남북대화가 막 시작되던 무렵인 1970년대 초반 남북회담을 위해 사상 최초로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북한 대표들은 서울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서울 사람들의 환대에 감정이 들떠 있었을 것이다. 노련한 전략가 김일성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남조선이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해서 부러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가 만반의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일단 유사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게 되면 남조선의 발전된 경제가 다 우리 것이 된다.”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 통일을 이룩하기 이전에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는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다른 한국 사람들, 즉 그들이 ‘꼴통 극우파’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지 묻고 싶다. 피가 같다는 사실이 민족의 본질이고, 그래서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북한 사람들도 다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니까 꼴통들, 자본주의자들도 포용해주기를 바란다.
   
   
   ‘한민족’과 ‘김일성 민족’은 같은가 다른가
   
   필자가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강의할 때 “우리끼리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풀면 될 문제 아니냐?”며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대체적으로 앞에서 말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들 중 오순도순 남북한이 머리를 맞대고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북한이 60년 이상 줄기차게 주장해온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체제는 사실상 하나의 체제이며 주한미군에 대해 똑같은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유는 주한미군이 없어져야 남한을 무력 점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통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좋다고 믿는 사람들인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쟁을 억제(抑制)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주한미군의 존재는 북한의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국 사회 내에서 문자 그대로 정치적 재앙을 불어올 수 있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를 끌어내리자는 촛불시위는 보통 사람들이 그냥 보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군 나가라’는 촛불시위는 태극기 부대와 충돌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촛불을 그대로 방치할 국민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반도 그 자체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민족끼리’ 주창자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주한미군의 존재를 원하는 외세가 있으니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아시아 주둔 미군, 특히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시키려 했을 때 놀란 나라는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일본도 놀라고 중국도 놀랐다. 미군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일본이 채울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그래서 주한미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이 채우는 최악의 상황에 당면하기보다는 차라리 한국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 말을 그럴듯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우리(중국)는 한반도의 안정을 원한다”고.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통일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필자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끼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듣기 싫은 말이 될 것이지만 한반도 주변 외세 중 한반도의 통일을 구조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는 나라는 단 한 나라 미국뿐이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자.
   
   국제정치학의 무서운 논리는 이웃에 힘센 나라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북한이 통일을 이룩할 경우 통일한국은 중국과 일본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을 권력정치적(Power Politics) 이유에서 찬성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나라(남·북한)가 통일을 이룩해서 강한 나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할 이웃은 없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지정학적 고려사항은 더욱 처절하다. 중국인들은 통일된 한반도를 중국의 뒤통수에 붙어 있는 망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통일된 한반도를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로 인식한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도무지 찬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남한이 통일하는 것도, 북한이 통일하는 것도 모두 원치 않는다. 통일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반도가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1950년 늦가을, 130만 대군을 파견, 이를 막았다. 한반도 통일을 막기 위해 중국은 약 20만명의 전사자, 60만명의 부상자를 감수했다. 중국군 사망자 명단에는 마오쩌둥의 아들 이름도 들어가 있다. 현재 중국과 일본은 각각 종합국력 세계 2위, 3위의 나라다.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세계 2, 3위의 국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이기보다는 환상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외세가 미국인데, 바로 미국만이 한반도 통일을 권력정치적·지정학적 측면에서 반대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솔직히 미국은 지정학적 이유에서 한반도 통일을 원하고 있다. 통일된 한반도는 남한, 북한 중 누가 통일하든 미국 편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운명이 그렇다는 말이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적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민족끼리’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원하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조선일보

2018년 9월 7일 금요일

기암괴석

[주말여행]입술부터 고릴라까지, 산 속의 산 '기암괴석' 찾아떠나다

        속리산 고릴라바위.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산에 간다. 산에 가서 다양한 모습도 본다. 각자 제각기의 시선으로 산을 바라본다. 
 
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산 속의 산이라고나 할까. 산 밖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 있다. 산 속의 모습은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하다.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산,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기암괴석이다. 갖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수천, 수만 년 세월 동안 그 자리 앉아서 만들어진 형상들이다.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도 과연 그럴까.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뭔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산 속의 산의 모습, 기암괴석을 보면 무슨 생각, 느낌이 떠오를까? 그냥 신기하고 우습게만 보일까. 정말 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수행해 열반에 이르렀다는 전설을 간직한 주왕산 연화굴이 수억 년 세월 풍화작용으로 신기한 모습을 보여 준다. 남녀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 같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 개의 버섯이 서로 버티며 자라는 듯하다.
대청도 나이테바위.
월출산 큰바위얼굴.
사람 모습을 띤 북한산 실루엣바위.
북한산 돼지바위.
속리산 황금개바위.
가야산 돌고래바위.
인왕산 뱀바위.
불곡산 악어바위.
도봉산 여성봉.
인왕산 이빨바위.
천관산 남근암. 장흥군 엄길섭 사진
북한산 입술바위.
북한산 합궁바위.
북한산 가슴바위.
백령도 무명바위. 마치 산악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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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2일 일요일

"극우 파시스트로 찍혀 좌파의 표적이 되고, 우파에서도 날 기피했다"

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 양동안씨

야당 시절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발언했다. "1948년 건국(建國)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反)역사적, 반헌법적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맞지만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일절 없다. 북한에서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창건 기념일(9월 9일)'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양동안(73)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이라는 책을 썼다. 당대의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던 인물이라, 객관적 증거와 논리를 제시해도 편향된 주장으로 비칠지 모른다.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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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안 전 교수는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도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8월 15일 같은 날에 '광복절'과 겹쳐 '건국일'은 더 묻혀 왔던 셈인데.

"광복절을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걸로 모두 잘못 알고 있다.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에 의해 해방됐는데 국경일로 만들어 축하했겠나. 1949년 법으로 제정된 국경일은 해방된 날이 아니라 독립을 이룬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그게 '광복절'이었다."

―36년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光復)'이란 표현을 쓴 것이 아닌가?

"해방 공간에서 정치 지도자나 언론기관들은 '해방'과 '광복'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군중집회의 플래카드를 보면 거의 모두 '해방'으로 되어 있었다. 해방 뒤 3년간은 미·소(美蘇) 군정의 시기였다. 이승만은 1947년 연설에서 '광복 대업을 완성하기에 민족 통일이 가장 필요하니…' '광복 사업에 협력하고자…'라고 했다. 광복은 독립, 건국과 같은 뜻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확정했다. 몇 달 뒤 국회에서 '광복절'로 명칭을 고쳐 통과시켰다."

―광복절은 당초 1948년 8·15를 기념하는 것이었다는 건가?
"그렇다. 광복절 명칭으로의 첫 기념식은 1950년 대구에서 열렸다. 전란 통이어서 대구매일신문이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제6회 광복절 기념식'이라고 유일하게 보도했다. 1년 전에 통과된 국경일법을 몰랐고, 횟수 계산도 5회를 6회로 틀리게 했다. 당시 정부의 홍보가 부족했는지 '해방 5주년 광복절 2주년 기념'이라고 쓴 조병옥 내무부 장관을 빼고는 다른 참석자들도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이라고 했다."

―그런 '광복절'이 지금처럼 일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 까닭은?

"이승만이 독재자로서 물러나면서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의 의의를 언급하던 관행마저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학계조차 '대한민국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 자체를 기피했다.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제정됐던 광복절은 해방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굳어졌다."

―8·15 국경일 명칭이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이었다. 한 우파 성향의 학자가 '건국 60주년 기념' 행사를 제기하면서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는 해방 정국에서 반탁·반공 운동을 하고 남한 단독정부에 찬성한 세력에만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며 공격했는데.

"이들의 주류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입장을 취해 온 세력이다. 1948년 건국은 나라의 생일을 정상적으로 찾아주자는 것이다.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하는 것도 해방 공간에서 다른 정파를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했을 뿐이지, '건국'이라는 말은 없었다.

"당시 정부 수립이 너무 어렵게 이뤄졌다. 이 때문에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한 것이다. 영토와 국민은 이미 확보됐고 정부 수립에 맞춰 주권을 인수받기로 돼 있어서 그때 말만 안 했지 '건국'이었던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봤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계승했기에 안 썼던 것은 아닐까?
"이듬해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이라고 했다. 주요 정당과 단체들도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했다. 가령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趙素昻)의 사회당조차 '8·15 이날은 우리 민족 해방 4주년 기념이요 우리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는 성명을 냈다."

―1948년 제헌 헌법의 전문(前文)에는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되어 있다. '민주독립국가 재건(再建)' 구절을 보면 이승만도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님을 인정한 게 아닌가?

"이승만이 어떤 생각에서 이 구절을 넣었는지는 그해 5월 31일 국회의장 취임 연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민주국을 공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정신을 계승해 민국(民國) 건립을 다시 실행하게 됐다'에서 알 수 있다. 1919년에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립 정신을 살려 재건했다는 뜻이다. 1948년 정부수립기념식에서 이승만은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 '새로 건설되는 대한민주국'이라고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이승만은 1948년에 '민국 30년'이라는 연호(年號)를 썼다. 이는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 기점으로 한 것이 아닌가?

"그 직후 국회에서 '단기(檀紀)' 연호를 쓰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왜 자신이 '민국' 연호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3·1운동의 위대한 민주주의 정신을 숭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국' 국체를 선언했으니, '건국'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선언만 했지, 실제 국가를 구성하지 않았다. 국가 조건을 규정한 '몬테비데오 협약'에 따르면 영토·국민·정부·외교 주권 4대 요소를 충족해야 한다. 임시정부는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지배하지도, 국민을 실효적으로 통치하지도 못했다. 주권(主權)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미 건국됐다면 항일독립운동은 무엇을 위해 있었느냐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건국 시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는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를 '복국기(復國期)'로, 조국에 들어가 활동할 시기를 '건국기(建國期)'로 규정했다. 건국은 미래의 사업 과제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는 성명서를 내고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다. 다시 말하면 복국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다'라고 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제는 정권이 나서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는 것 같다.

"과거 좌파 정권은 건국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에서 '건국 50년의 시점에 맞춰 제2 건국 운동을 펼쳐 나가자'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에서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내년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임시정부는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해야지, 건국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창당준비위원회를 그 정당의 창당으로, 건물건립추진위원회를 그 건물의 건립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개인적인 얘기를 할까 하는데, 선생은 1988년 발표한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로 낙인찍혔다. 5공(共) 시대가 끝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화를 되찾게 된 시점에서 왜 그런 글을 썼나?

"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부터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관심 많았다. 나는 사회 현상의 표면이 아니라 저변(低邊)을 봤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위 민주화운동의 주도 세력은 민족해방전선과 민중민주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은 민주화를 앞세워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했다. 이들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동안의 무기력과 오류, 부패를 반성하고 정신 차리라는 취지였다."

―글의 목적이 이뤄졌나?
"나는 극우 지식인의 대표로 좌파 진영의 표적만 된 것이 아니었다. 우파 진영에서도 나를 기피했다. 공론(公論) 시장에서는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선생의 이념적 성향과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글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좌익 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엔 완전한 좌익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라는 대목은 상당히 들어맞는 것 같다.

"유치한 예견이었는데…, 나는 사실에 근거해 주장을 펴왔다. 나라는 인간을 '어용 교수' '반동 지식인'이라고 매도하지만 말고 나의 글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달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히 왕따가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런 글을 괜히 썼다는 생각은?
"내가 시원찮은 사람이라 그때 참아봐야 내 인생 크게 바뀌지도 않았겠지. 지식인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옳다고 해도 자기 판단에 옳지 않으면 질러야지, 수적 두려움으로 가만있으면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5년 전부터 파킨슨병(신경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손발을 심하게 떨었고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데는 불편이 없다"고 했다

2018년 7월 4일 수요일

아름다운 순간들

Not many people know that the phrase, “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 was coined by an American by the name of Fredrick R. Barnard to commend the effectiveness of graphics in advertising. However, there’s a Chinese proverb which states that “one picture is worth ten thousand words,” and when it comes to the following pictures, we tend to think that the latter is more appropriate. We’re sure that you’ll ag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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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idcow 

2018년 6월 23일 토요일

“정부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나눠 줘 경제가 성장한다? 있을 수 없는 일” - 趙淳 전 부총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保守는 나라의 뼈대이자 아이덴티티

⊙ 부총리로 재직 시, 자택에서 관악산 넘어 과천청사로 출근… ‘산신령’ 별명 생겨
⊙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원론》 1974년 간행… 지금까지 전면개정 10판 찍어. 저자도 조순·정운찬·전성인·김영식 등 4인 共著
⊙ “조순 후보의 눈썹이 희고 강직하니 포청천으로 하는 게 어때요?”
⊙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에 최저임금 강요하면 해를 못 넘겨. 좋지 않은 정책은 아무리 기다려도 더욱더 나빠져”
⊙ “기본적으로 북한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해”
⊙ “보수 기치를 든 사람, 보이지 않아”
서울 관악구 행운동(봉천동) 자택에서 만난 조순 전 부총리. 포청천 상(像)을 곁에 두고 웃고 있다.
  외국서점에 가면 신간서적 코너에 예외 없이 전기(傳記)물이 있다.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간 위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길 좋아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인은 얼마나 전기를 좋아할까.
 
  조순(趙淳) 전 부총리가 10여 년 전에 쓴 〈율곡전서라는 책〉이라는 짧은 글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그 글 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전기는 소설보다 재미있다는 말이 있는데, 인간의 머리가 꾸며내는 스토리가 재미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소설은 조화(造花)지만 전기는 생화(生花)이다.…〉
 
  조순은 인간의 삶이 소설보다 더 위대하고 극적이라는 믿음을 분명 갖고 있는 듯하다. 기자는 이 전설적인 ‘생화’를 만나러 지난 6월 8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으로 향했다.
 
  이 ‘생화’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1967~1988년)와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초대 학장(1975~19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88~1990년), 한국은행 총재(1992~1993년), 서울시 초대 민선 시장(1995~1997년), 한나라당 1대와 2대 총재(1997~1998년), 국회의원(강릉 을구·1998~2000년) 등을 거쳤다.
 
  한때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혔다. 때 묻지 않은 청렴한 이미지가 기성 정치권에 식상한 국민을 설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정글 같은 정치권을 뒤로하고 2000년 이후 정치권과 멀어져 갔다.
 
  조순 전 부총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봉천동에서 살았다. 지금은 행운동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선생의 아호 중 하나는 ‘봉천학인(奉天學人)’이다. ‘하늘을 받드는 학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봉천동에 사는 학자’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집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소나무 두 그루가 대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그가 부총리로 재직할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자택인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청사로 출근했다. 새벽의 산 정기를 받으며 산을 넘었는데, 부총리 시절 경제기획원 직원들이 그런 그에게 ‘산신령’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이 별명에는 그의 눈썹이 하얀 점도 작용했으리라.
 
  기자와 만난 그의 눈썹은 여전히 백미(白眉)였다. 1928년 2월 1일생이니 올해로 꼭 90년을 살았다. 백미의 모습이 인생을 달관한 듯 보였다. 건강해 보였다.
 
 
  奉天學人과 산신령, 골프채 이야기
  
서울 관악구 행운동 조순 부총리의 자택에 걸려 있는 문패.
  — 점심때 뭘 드셨나요.
 
  “점심? 어… 밥하고 (하하하) 된장찌개하고, 또… 구운 갈치 한 토막하고, 그리고 김치 다소하고 야채 절인 것하고 그렇게 먹었습니다.”
 
  — 아침 식단하고 달랐습니까.
 
  “아침 식사는 내가 해 먹고요, 해줄 사람도 없고… 옛날부터 내가 해 먹었어요. 야채하고… 떡 몇 조각, 계란하고… 그렇게 먹습니다. 그러카구(그렇게 하고) 요구르트라든지 두유랑….”
 
  — 골프는 치십니까.
 
  “골프 칠 기회가 있었는데요, 부총리 할 때 어떤 분이 좋은 골프채를 보내왔어요. 내가 그걸 가만히 보관해 놨다가 얼마 후 다시 보냈습니다. 비서에게 ‘그 사람이 잘 받아들이더냐’ 하고 물으니 ‘아주 좋아합디다’ 그래요. (하하하) ‘왜 그리 좋아하더냐’고 하니 ‘좋은 골프채가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했다는 겁니다.
 
  또 한 번 누가 골프채를 보내왔어요. 그렇게 고급은 아니더구먼. 한참 (집에) 오래 두었어요. 한번은 셋째 아이 녀석이 ‘저를 주십시오’ 그런단 말이에요. ‘글쎄, 내가 쓸지 안 쓸지 모르겠네’라고 하니까 ‘안 쓸 것 같으니 저를 주시죠’ 그래요. 가만히 생각하니 또 보낸다는 것은…, 그래서 아들을 줬습니다. 그래서 골프채를 만져본 적이 없어요.”
 
  — 저도 골프채를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바람, 잔디, 하늘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골프라는 운동이 부럽습니다.
 
  “아, 그럼요. (골프는) 좋은 운동입니다. 다만, 내가 보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골프) 배우는 시간도 많이 걸려요. 어떻게 보면 학자가 치기에는 사치스럽고… 그래서 안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풀브라이트 한국 위원입니다. (조순 전 부총리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어떤 분이 ‘선생님 저를 풀브라이트에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그래요.
 
  풀브라이트 위원회에다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괜찮은 학교에 보내줄 수 없느냐’고 청을 했더니 ‘프린스턴’에 보냈어요. 이분이 미국에서 전공 교수에게 ‘제가 골프를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제의를 했나 봐요. 그 교수가 깜짝 놀라며 ‘한국에선 교수가 골프를 치느냐’고 묻더래요. 부끄럽고 난처했다고 하더군요. 몰라… 요새는 다르겠지요.”
 
  — 미국에서 골프는 대중화되고 값도 싸다고 하던데요.
 
  “아마… (미국 교수들은) 지금도 안 할 겁니다.”
 
 
  자서전과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원론》
  
조순 부총리 서재 책장에 꽂혀 있는 《경제학원론》. 1974년 첫 발간 때는 저자가 조순이었지만 지금은 조순·정운찬·전성인·김영식 등 4인 공저가 됐다.
  —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 내지 두 잔을 마십니다. 많이 안 마시는 편이지요. 음식을 특별히 가리지 않아요. 많이 안 먹어서 그렇지. 뭐… 건강을 위해 특별히 조심하기보다 무리한 짓은 안 합니다. 옛날엔 술도 많이 먹었지만 쉰이 안 돼 아주 줄였습니다. 담배도 완전히 끊었고요. 에… 또… 일찍 자요.
 
  서울시장 후보 할 적에도 저녁 9시가 넘으면 잤어요. 후보가 빨리 잔다고 걱정하던 분이 있었는데 ‘일찍 자야 캠페인도 잘 할 게 아니냐’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건강에 좋다고 하면 잘 따라요.”
 
  — 운동은 안 하시나요.
 
  “젊었을 때 가정 요가를 배웠는데 지금도 해요. 이부자리 위에서 해요.”
 
  — 침대에서 안 주무시고요.
 
  “침대가 있지요. 침대 밑에 요를 하나 깔아 놓고 요가를 합니다. 오래는 안 해요. 한 40~50분 합니다. 덕분에 몸이 유연해요.
 
  한때는 등산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전국 유명 산은 몇 번씩 다 가봤으니까요. 나처럼 등산 많이 한 사람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소용이 없더구먼. 하하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그는 관악산·북한산·화악산·설악산의 만개한 봄꽃,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의 화려한 단풍 아래서 제자들과 함께 보냈다. 누구보다 등산을 좋아했다. 그의 제자인 한국외국어대 김승진(金勝鎭) 교수는 “산에서 선생님과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며 들었던 강론(講論)은 우리에게 일종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었다. 자택에서 벌어진 바둑시합 때도 제자들은 둘러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기자는 전기를 예찬한 선생의 글이 떠올라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 직접 자서전을 쓰지는 않으셨나요.
 
  “자서전… 안 썼어요. 없어요.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선배인 데이비드 흄이라는 분이 있어요. 18세기 철학의 대가지요. 흄의 말씀이 항상 생각납니다. ‘날 보고 자꾸 자서전 쓰라는데 (자서전은) 결국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짓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내 저서에 다 나와 있는데 뭐 또 자서전을 쓰나’ 했다고 합니다. 물론 난 데이비드 흄보다 못하지만….”
  
조순 부총리. 지난 2014년 《경제학원론》 발간 4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순 부총리는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는데 그중에서도 1974년 간행된 《경제학원론》은 세월이 흘러도 경제학 교과서로 읽힌다. 당시만 해도 경제학 교재가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 1판(版)이 나왔을 때의 목차는 이랬다.
 
  제1편 경제학과 그 방법론
  제2편 수요, 공급의 이론
  제3편 소비자 이론
  제4편 생산이론
  제5편 시장형태와 산업지식
  제6편 분배이론
  제7편 경쟁시장의 공과와 미시경제정책
  제8편 국민소득 결정이론
  제9편 화폐금융 이론과 정책
  제10편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관한 이론
  제11편 국제경제이론
  제12편 성장 및 발전이론

 
  미국 최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사무엘슨이 쓴 《경제학원론》을 모델로 집필한 모범적인 교재인 《경제학원론》은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생의 필독서가 된 것은 물론이다. 동시에 각종 국가공무원 시험의 필수·선택 과목인 ‘경제원론’의 교과서가 됐다. 조순 부총리가 관계로 정계로 진출한 1990년 제4차 전면개정판 이후 그의 제자인 정운찬(鄭雲燦) 전 국무총리와 공저로 출판했다.
 
  지금은 10판(2013년 8월 간행)이 나왔고 저자도 조순·정운찬에 더해 홍익대 전성인(全聖寅) 교수, 서울대 김영식(金永植) 교수가 참여해 4인 공저가 됐다. 800쪽에 이르고 제1~10편, 25장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 《경제학원론》은 출간한 지 4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입니다.
 
  “많이 찍었어요. 얼마나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책이 나올 때 한 제자가 ‘선생님, 이 책이 팔리겠습니까’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왜냐? 그런 책을 본 적이 없거든.”
 
  — 그때 제자에게 뭐라고 답하셨나요.
 
  “‘아마 팔릴 거야’라고 했지요. 솔직히 말해 대학교수가 가난하고 그렇잖아요.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생이 다 봤으니까요. 저도 ‘경제학개론’ 수업을 그 책으로 공부했어요.
 
  “책이 나올 때 정운찬 교수가 그 책을 위해 참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부탁도 안 했는데 스터디 가이드를 만들고, 문제집도 만들고, 경우에 따라 문장 표현도 고치고…. 내가 말했죠. ‘보게! 자네하고 나하고 공저를 해야 되겠네’ ‘아이고, 별말씀 다 하십니다’ ‘아니야. 자네가 정성을 그만큼 들였잖아. 공저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겠네’ 해서 공저를 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에 정운찬이가 (서울대) 총장이 되고 바빠져서 제자 전성인이라고, 지금은 홍익대 교수를 하고 있는데 매사추세츠공과대(MIT)를 나오고 똑똑해요. 이후 서울대 김영식 교수가 공동저자로 이름이 올랐어요.”
  
趙淳과 케인스
 
  케인스는 巨視경제학을 창안… 대학 시절, 케인스의 ‘케’도 듣지 못해
 
  조순 전 부총리 하면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가 떠오른다.
 
  조 부총리는 케인스 이론을 열심히 공부해 ‘한국의 케인스’가 되길 꿈꾸었다. 또 1982년 자신이 직접 《J.M.케인즈》(유풍출판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케인스는 경기침체나 불황이 일어날 경우 정부의 적극적인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경제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불황이 찾아왔을 때 특별한 대책 없이 기다리다 보면 경기가 순환된다고 소극적으로 생각했다. 조 부총리의 말이다.
 
  “내가 다녔던 서울대 상과대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래요. 그냥 고등상업학교였어요. ‘경제학원론’이란 과목이 있긴 했어도 전부 마르크스였어요. 좌익 학생이 다 퇴출된 후에도 교재는 마르크스 경제학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케인스 이론이란 학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케인스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 상대 시절, 조순은 경제학 공부 대신 영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한 토머스 하디나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원서로 읽으며 경제학의 지평을 넓혔다.
 
  ― 케인스라는 이름은 언제 들었나요. 유학 가셔서 처음 들어보셨군요.
 
  “그렇지.”
 
  ― 케인스 이론을 책으로 배우니 어떻던가요.
 
  “뭐… (마음에) 와 닿았지요. 야, 그 참! 멋 떨어지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나중 케인스 책을 번역도 했어요.”
 
  ― 케인스 경제학의 요체를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경제학에 소위 미시경제학이 있고 거시경제학이 있거든요. 케인스 이전에는 거시경제학이란 게 없었습니다. 케인스가 만들어 낸 거예요. 케인스 경제학이란, 숲의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숲 전체를 바라보자는 것이죠. 미시경제학이 나무를 보는 것이라면 거시경제학은 숲을 보는 것이지요. 이 숲이 아주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생각을 케인스가 한 것이죠.”
 
  아버지 조정재와 숙부 조평재
 
  조순은 1928년 2월 1일 강원도 강릉시 구정(邱井)면 학산(鶴山)리에서 태어났다. 오대산이 병풍처럼 뒤를 감싸고 쪽빛 동해를 마주한 마을이었다. 부친 조정재(趙正載)는 아들이 이율곡(李栗谷), 김시습(金時習), 심언광(沈彦光), 최치운(崔致雲) 등 강원도가 낳은 명신(名臣)이나 대학자로 대성하기를 바랐다.
 
  — 아버님한테 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을 배운 거죠.
 
  “아뇨. 안 가르치셨어요. 아버지는 한문을 시스템으로 가르치시기보다 닥치는 대로 책에 나오는 한자를 골라 가르치셨어요. 이를테면, 일본의 《수신(修身)》 책에 어려운 한자가 나오면 그걸 가르치셨어요. 한번은 《비서삼종(秘書三種)》이란 책을 사서 책 서문에 나오는 한자를 가르치셨어요.”
 
  — 일본 책인가요.
 
  “한국 책이지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음부경(陰符經), 제갈량심서(諸葛亮心書) 등 3가지로 구성됐는데 지금도 많이 기억을 합니다. 서문이 꽤 길어요.”
 
  그러면서 조순 부총리는 책 서문을 빠르게 외기 시작했다.
 
  “황석공소서 육편은 안전한열전에 황석공이, 비교소수 자방소서니, 세인이 다이삼략으로, 위시나 개전지자 오야라….”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황석공소서’의 여섯 편은 전한 열전(前漢 列傳)에 황석공이 비교(橋)에서 자방(子房)에게 가르친 것이 소서(素書)이니, 세상 사람이 흔히 삼략(三略)을 이것이라고 하나 대체로 전해진 것이 잘못된 것이다.(黃石公素書六篇 按前漢列傳黃石公 橋所授子房素書 世人多以三略爲是 蓋傳之者誤也)
 
  조순 부총리의 말이다.
 
  “아주 글이 좋아요. 서문을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배웠어요. 아버지는 글 읽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한자만 가르치셨어요. 그 양반(아버지)은 공부는 안 하셨어요. 성질이 활달하고 남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선비였지요.”
 
  — 유학자는 아니셨네요.
 
  “유학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억지로 분류한다면 뭐 그렇지요.”
 
  조정재의 동생인 평재(趙平載)는 당시 강릉 지방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해안 시골에서는 드물게 경성제대에 입학했고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판사, 변호사를 거쳤고 훗날 국제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숙부(조평재)께서 (강릉서) 서울로 오셨을 때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어요. 내가 듣기로 배재중학 3학년에 편입했는데 숙부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아무런 배경도 없었는데 어떻게 3학년에 들어갔냐’고요. 또 ‘영어는 알아듣겠던가요’라고 물었지요.
 
  숙부 말씀이 ‘처음에는 몰랐지. 난 그래도 한문을 잘했잖아. 한문을 잘하니까 별문제가 없었어’ 그랬어요. 속으로 ‘그럴 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양반이 배재를 나오자마자,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들어갔어요. 수재 아니면 못 들어가는 곳이잖아요. 제1고보인 경기중학도 한 해 2~3명이 들어갈까 말까인데 난 참 믿기지 않았어요. 고등고시도 패스하고 판사가 됐는데 일찍 그만두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셨어요. 나는 그 양반 따라 다니며 기식(寄食)을 했어요. 하하하!”
 
  — 따라 다닌다는 의미는.
 
  “그 양반 가시는 곳마다 갔습니다. 하하하!”
 
  — 의뢰인을 만난다거나 어떤 행사가 있을 때 가셨다는 의미입니까.
 
  “아니요, 그 양반이 밥을 먹여주니까….”
 
  — 외람된 표현입니다만, 집안이 다 머리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율곡전서》와 육사 영어교관, 그리고 한자교육
  
조순 부총리의 서재에서 바라본 앞마당 모습. 제법 초여름 녹음이 우거졌다.
  조순은 경기중학교에 다녔는데 숙부 조평재처럼 한학을 공부한 덕에 영어 공부를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문 구조를 영문법에 대입(代入), 나름 영문 체계를 쉽게 익혔다. 그는 “영어를 쉽게 배우기 위해서라도 한문을 알아야 한다. 언어란 구조를 알면 배우기가 훨씬 쉽다”고 했다. 그 덕에 육사 교관으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미국 유학 시절 현지인 중에서도 최고 수준(King’s English)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문 교육을 유난히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어린 시절, 존경하던 스승은 누군가요.
 
  “보통학교(초등) 때는 일정(日政) 시절이라 일본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았어요. 학교 낭하에 옛날 분들의 초상화를 놓았는데 예컨대 토머스 에디슨 같은 이의 사진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 사진은 안 걸어놨어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퇴계와 율곡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당시 교과서에도 그분들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퇴계·율곡을 자연히 존경하게 됐고 책도 다 읽었습니다. 《율곡전서》는 부총리 시절, 몇 번씩 읽었습니다. 참 도움이 됐습니다.
 
  율곡은 대단한 충신이자 애국자였습니다. 대천재였으나 겸손하고 티 없이 맑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를 좋게 만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지도자의 리더십, 역사, 도덕, 교육, 지방자치, 국방, 그리고 시국에 대해 많은 저서와 기록을 남겼는데 지금 읽어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애는 48세로 막을 내렸고 그가 바랐던 경장(更張·정치적 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은 못 이루었지만 할 일은 다했다는 의미에서 유감없는 일생이었습니다.”
 
  —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1952~1957년) 영어를 직접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육사 11기생들을 만난 것이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그 양반들하고 아주 친했습니다. 잘 지냈습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었어요. 4년 정도 차이였으니까 형제나 비슷했지요.”
 
  당시 육사 11기, 12기 생도들은 대체로 1932년생이 많았다. 조순 부총리는 1928년생이니 4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셈이다. 육사 11기생들은 첫 정규 육사 졸업생이었다. 이 기수는 2명의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을 포함, 6명의 장관(정호용·이상훈·이기·김식·김성진·김영균), 다수의 고위 장성(김복동·최성택·최연식 등)을 배출했다.
 
  — 11기생 중 가장 특출한 학생은 누구였나요.
 
  “아주 머리 좋은 이가 한 명 있었어요. 김성진(金聖鎭)이라고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고 학생부대장도 했지요. 전두환 대통령도 나한테 그랬어요. ‘(김)성진이는 보통 대우를 해선 안 됩니다. 육사의 심벌(상징) 아닙니까’ 그랬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전두환 장군이 1979년 12·12를 일으키던 날 저녁, 김성진이하고 식사를 같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육사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던 김성진은 5공 당시 안기부 차장과 체신부 장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 육사 시절에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서로 친했습니까.
 
  “지역별로는 전두환이는 합천 출신이고 노태우는 대구니까 그렇게 가깝다고 볼 수는 없었지. 전두환 대통령은 학생 때 뭘 했냐면 골키퍼를 했어요.”
 
  — 노태우 대통령은요.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당시에도 인상적이었나요.
 
  “그때는 잘 몰랐지요.”
 
  — 부총리께서는 영어를 가르치셨지만 한자 교육도 강조해 오셨어요.
 
  “우선 한자를 배우고 쓸 수 있어야 동북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한자를 모르면 문화적으로 (동북아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중국어도, 일본어도 못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또 (한자를 몰라) 옛 신문을 못 읽으니 사람의 지식과 지능이 성숙해지나요. 아주 완전히 우민정책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일본과 중국 틈에서 우리가 문명국이라 자랑할 수 있습니까. 난 그것 생각하면 정말 참… 아주… 몸이 떨립니다. 딴 뜻은 하나도 없어요.
 
  말이 부족하면 좋은 생각을 안출(案出)하고 정리하며 표현하고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한글만으로는 말의 수가 부족해요. 어휘가 부족합니다. 이를테면 전문어가 하나도 없어요. 추상어, 기술어도 없습니다. 중요한 대목의 어휘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한글로 풀어 쓴다? 어떻게 풀어요. 못 풀어요. 풀어서 쓸 수 있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국어 어휘 중에는 한자어가 74%나 됩니다. 한자를 안 쓰고는 뜻을 몰라요. 한자를 하지 않고서는 과학도 할 수 없습니다. 한글 전용으로 인문학은 불가능합니다.”
 
 
  1995년 지방선거와 6·13지방선거
  
1995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젊은 세대들이 많이 모이는 여의도, 명동, 대학로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유세 때 포청천 시장의 이미지를 살리려 포청천 모델을 등장시켰다.
  1995년 6월 조순은 ‘산신령’ ‘포청천’의 이미지로 서울시 초대 민선 시장에 당선됐다. 선거를 치르기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여론조사는 불리했다. 박찬종 32%, 조순 18%, 정원식 10% 순이었다. 당선은 고사하고 2위 자리마저 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시 선거에서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TV 토론과 연설 덕분이었다. TV 훈련은 마포 케이블 TV 스튜디오를 빌려 타 후보와 패널리스트까지 선정해 놓고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실시됐다. 카메라 적응훈련도 이 과정에서 이뤄졌다.
 
  — 어떻게 출마를 결심하셨나요.
 
  “난 선거에 나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인간이란, 운명이란 아무리 싫어하거나 생각지 않았다고 해도 닥쳐오면 하는 거예요. 대중연설, 정치연설도 처음엔 못 하겠던데 여성 두 명이 와서 ‘좀 봐주겠습니다’고 하더군요.”
 
  — 평생 강단에 섰는데 연설을 잘하셨겠지요.
 
  “아뇨. 강단에 서는 것과는 달라요. (여성 두 명이)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해도 안 돼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연습할 때보다 나아요. 그래서 ‘저 양반은 실전에 강해’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 그때 그 여성이 정미홍씨, 아닌가요.
 
  “맞아요. 정미홍씨가 기여를 많이 했어요.”
 
  KBS 뉴스 앵커 출신의 그녀는 당시 조순 캠프의 부대변인을 맡아 미디어 선거를 지휘했었다. 또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민석, 훗날 강원도지사가 된 이광재 등이 있었고 캠프 본부장은 이해찬 전 총리였다. 이해찬 본부장과 배기선 비서실장을 빼고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로 캠프가 꾸려졌다.
 
  — ‘포청천’ 이미지는 캠프에서 구상한 것인가요.
 
  “아마 캠프였겠지요. 정직하고 강직해서 포청천과 같다…. (몸을 뒤로 돌리며) 저기, 포청천이 있어요.”
 
  부총리의 서재 뒤편 쇠로 만들어진 포청천 상(像)이 눈에 띄었다. 직접 만져 보았는데 꽤 무거웠다.
 
  “경기고 총동창회장을 지내신 김집(金潗·체육부 장관 역임) 선배가 중국 카이펑(封)에 직접 가셔서 포청천 상을 가지고 오셨어요. 쇠로 만들어 상당히 무거웠는데 ‘포청천처럼 돼라’는 뜻이었어요. 정말로 감격했습니다.”
 
  포청천 캐릭터의 등장은 캠프 내 한 자원봉사자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조순 후보의 눈썹이 희고 강직하니 포청천으로 하는 게 어때요?”라며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30대들 사이에 제일 많이 보는 드라마가 〈포청천〉이었다. 그래서 ‘서울 포청천 조순’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만들어졌다.
 
  조순 부총리와는 6·13지방선거 전에 만났기에 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물론 결과를 미리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선거 분위기는 일방적이었다.
 
  — 며칠 후 6·13지방선거가 있습니다. 후보를 정하셨나요.
 
  “아뇨, 안 정했습니다. 선거 홍보물이 저기 있는데 봐야지요.”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참… 우리나라 정치 수준이 너무 떨어졌어요. 거기다가 최근에는 사법부까지 저렇게 대법원장이 서로 싸우고… 그 참,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조순 부총리는 “남은 힘이 있다면 (적폐청산을) 해도 좋은데 지금 정부가 당면한 문제는 항상 미래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고 했다.
 
  “박근혜씨가 잘못하고, 이명박씨가 잘못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처리하는 데가 있잖아요. 그것보다 미래를 어떻게 하느냐, 거기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계를 떠나신 뒤 계속 여의도를 관망하고 계신지요.
 
  “관망은 했지만… 한나라당이란 당명을 내가 만들었잖습니까. 처음에는 ‘한겨레’로 (당명을) 정할 생각도 있었고 ‘한나라21’도 고민했어요. ‘21세기를 바라보는 한나라당’이란 의미죠. 그런데 당시 김태호 사무총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더군요. 얼마 후 김 총장이 찾아와 ‘한나라당으로 그냥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기에 ‘좋아!’ 그랬지요.”
 
  — 한나라당 당명이 사라질 때 섭섭하셨습니까.
 
  “박근혜씨가 그렇게 했는데…, 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많이 섭섭하셨나 봐요.
 
  “하하하!”
 
  — 지방선거 이후 자유한국당 운명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수가 당선되더라도 정말로 심기일전해 우리나라 보수가 제 역할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든, 선진국이든 그 나라 기둥은 보수당입니다. 그게 옳은 일이에요. 왜냐? 보수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 전통과 정체성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나라의 뼈대지요.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보수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어요. 한 적이 글쎄… 별로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보수는 결코 재벌을 위한 당도 아니고, (재벌은) 보수와도 관계없어요.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위한 당도 아닙니다. 나라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그것을 좋게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는 게 보수당입니다.”
 
  — 제대로 된 보수의 정체성을 내건 정당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물론이죠. 그것 없이는 국가가 제대로 잘 안 됩니다. 그게 있어야 해요. 모든 나라에서 그 나라의 뼈대입니다. 글쎄, 보수의 기치를 들고, 보수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소득주도형 성장정책과 ‘중소벤처기업부’
  
2012년 6월 1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강당에서 조순 부총리의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가 동반성장연구소를 창립하자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오른쪽부터 조순, 정운찬, 정 총리 부인 최선주씨, 김영환·김성태 의원.
  — 문재인 정부는 ‘분배, 공정, 일자리 경제’를 내세운 정부입니다. 그러나 집권 1년 동안 소득격차가 더 심화됐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소득주도형 성장이란 이론은 경제이론이 아니거든요. 저는 경제이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득이라는 것은 생산이 있어야 소득이 나오는 거예요. 정부가 얘기하는 소득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 돈을 말합니다. 돈을 쓰면, 소비자들에게 (돈을) 주면, 소비자가 돈을 쓸 것 아니냐, 소득이 거기서 생기는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소득이라기보다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전지출’이거든요. 정부가 돈을 가난한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경제성장이 이뤄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봅니다.”
 
  — 그래도 소득주도 성장론은 ‘분배’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 갈래가 아닌가요.
 
  “분배라는 것은요, 어떤 소득이 나오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극단적으로 표현해 재벌에게 돈을 얻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준다? 그것은 진정한 분배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일을 하고 물건을 팔아 생기는 게 소득이지, 이런 식의 이전지출로 돈을 받는 것은 소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얘기입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지난 4월 13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때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 해임을 요구했다. 홍 수석을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꼭 집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일련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우리 경제를 되레 악화시키고 소득격차마저 심화시키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홍장표 수석은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을 가장 일선에서 지휘하고 있는데, 그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따르는 학문집단인 ‘학현학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학현(學峴)은 변형윤 교수의 아호. 학현학파는 서강학파, 조순학파와 더불어 한국경제학의 ‘빅3 학파’ 중의 하나다.
 
  —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의 생각들이 변형윤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그쪽에서 많은 연구를 한 토대에서 소득주도 성장론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글쎄, 난….”
 
  — 집권 1년 차인데 분배상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성급하다는 견해도 있어요. 좀 기다리면 달라질까요.
 
  “좋은 정책을 쓰면서 기다리면 좋지만, 좋지 않은 정책을 가지고 아무리 기다려 봐도 좋지 않을 겁니다. 내가 보기엔 소득주도형 정책이 좋은 정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몰라… 반박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난 그렇게 안 봅니다. 좋지 않은 정책은 아무리 기다려도 더욱더 나빠집니다.”
 
  — 빨리 폐기해야 되겠네요.
 
  “내가 보기에는 달리 생각해야 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제에이일(제일) 필요한 것은 이 나라 창업이 이뤄져야 돼요. 중소기업과 창업이…. 그냥 있는 중소기업을 자꾸 도와주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게 나와야 하는데 이 나라는 너무나 너무나 부족합니다.
 
  2014년 중국에서 하루 1만 개 업체가 창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루 1만 개씩이면 1년에 365만 개 아닙니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현재 베이징대, 칭화대는 그런 창업 육성을 대학의 임무로 삼고 있어요. 2016년인가 17년 자료를 보니 하루 1만5000개씩 창업한다더군요.”
 
  — 중국의 창업정책에 대해 배울 점은 무얼까요.
 
  “정부만이 아니라 학교, 기업이 동시에 창업에 적극 나서니 아이디어가 나오지요.”
 
  — 현 정부가 ‘중소벤처기업부’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재벌 없는 경제가 잘되는 경제는 얼마든지 있지만 중소기업 없는 경제는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정부도 중소기업에 대한 얘기는 없더구먼. 단지 중소벤처기업부를 만든 것은 봤습니다만, 부(部)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왜 그런가? 부를 만든다고 중소기업이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중소기업을 방해합니다. 왜냐? 이런저런 기준을 세운단 말이야.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돼! 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옳은 방법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안 따라온 것이죠”
  
국정감사 마지막 날인 1989년 10월 7일 경과위의 경제기획원 감사가 끝난 뒤 조순 부총리와 유준상 경제과학위원장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저소득층의 고용과 소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경제학자들도 예측하기 어렵나 봅니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한테 최저임금 강요를 하면 해를 못 넘겨요. (임금을) 줄 능력이 없으니 해고를 하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내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정부는 기업에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요. 기업이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 오늘 자(6월 8일) 《조선일보》를 보니 주52시간 근로시간과 관련, 기업들이 말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이고… 기업들이 부담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하게끔 해야지 자꾸자꾸 조건을 만들어서 따라오라, 오라… 안 따라갑니다.”
 
  — 그동안 너무 안 따라와서 강제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요.
 
  “옳은 방법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안 따라온 것이죠.”
 
  — 현 정부가 추진했던 소득주도 성장정책 과제(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재벌개혁 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 기업들이 부담을 느낀 것은 아닌가요? 하나씩 하나씩 한다면….
 
  “하나씩 할 필요도 없고 그런 것은 기업에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용을 할 수 있는 벤처기업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 부총리 시절, 경제 기사를 읽어 봤습니다. 그때 강조하셨던 게 내수 진작, 일자리, 고용, 중소기업 지원 등 강조하셨는데 지금도 유효한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도 유효해요. 단지 정부가 직접 그런 것에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이죠. 당사자들한테 맡겨야 합니다. 당사자들이 그런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 북핵 문제만 여쭙고 물러나겠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국민들은 지금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합니다. 6·12 미북회담에서 큰 틀의 비핵화 타결을 이루더라도 비핵화는 불투명하다고 봅니다.
 
  “난 기본적으로 북한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그 외에 살아날 방법이 없어요. 그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봅니다.
 
  그리고 북한의 장래는 지금 노선만 잘 추진하면 기본적으로 밝다고 봅니다. 이미 북한의 기술 수준은 상당해요. 또 국민의 질(質)도… 한국인의 질이야 어떻습니까. 시장도 중국이 가까이 있고, 압록강을 넘으면 조선 사람 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