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8.29 09:00 | 수정 2020.08.29 09:29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20>
“편가르기”는 정치투쟁의 기본이다. 위기에 봉착하면 위정자들은 흔히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을 붙인다.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진부한 꼼수지만, 정치투쟁에서 그보다 더 효율적인 대중동원의 수단은 없다. 국민의 분열을 위해 그들은 어김없이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 거짓선동과 흑색선전임에도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생업에 바쁜 군중은 쉽게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트릭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 전체주의 정권의 이분법과 흑백논리
1949년 건국 이후 중공정부는 바이러스 퇴치하듯 인민의 의식을 소독해왔다. 인민의 의식에서 부르주아 잔재, 자유주의의 유혹, 자산계급의 유습을 도려내 세척한다는 발상이었다. 의식의 세척과 소독을 위해서도 역시 이분법과 흑백논리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혁명/반혁명, 무산계급/자산계급,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친일/반일, 친미/반미, 반제국주의/친제국주의, 친수정주의/반수정주의 등등.
“편가르기”는 정치투쟁의 기본이다. 위기에 봉착하면 위정자들은 흔히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을 붙인다.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진부한 꼼수지만, 정치투쟁에서 그보다 더 효율적인 대중동원의 수단은 없다. 국민의 분열을 위해 그들은 어김없이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 거짓선동과 흑색선전임에도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생업에 바쁜 군중은 쉽게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트릭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 전체주의 정권의 이분법과 흑백논리
1949년 건국 이후 중공정부는 바이러스 퇴치하듯 인민의 의식을 소독해왔다. 인민의 의식에서 부르주아 잔재, 자유주의의 유혹, 자산계급의 유습을 도려내 세척한다는 발상이었다. 의식의 세척과 소독을 위해서도 역시 이분법과 흑백논리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혁명/반혁명, 무산계급/자산계급,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친일/반일, 친미/반미, 반제국주의/친제국주의, 친수정주의/반수정주의 등등.
1953년 마오쩌둥은 전체 인구를 95% 인민과 5%의 적인(敵人)을 나눈 바 있다. 문혁 당시에도 총인구의 5% 정도가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이라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분법은 소수에 대한 다수독재의 논리를 깔고 있었다. 다수의 혁명대중이 소수의 반당·반사회주의 세력을 독초 뽑듯 제거해야 한다는 이른바 “인민민주독재”의 발상이었다.
자유와 권리의 주장은 “제국주의자의 음모”로, 전통적 가치의 표출은 “착취계급의 봉건적 유습”으로, 동정심 따위 감정은 불순한 “부르주아 인도주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세뇌된 “혁명군중”이 없었다면, 문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 인민일보 “우귀사신(牛鬼蛇神)을 모두 쓸어버려라!”
1966년 5월 26일 베이징 대학에 마오쩌둥이 극찬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가 나붙은 후, 중국의 대학가 및 중고교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1966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1면 톱에 실린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폄칭)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제명의 사설은 문혁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고조(高潮)가 이제 세계 인구 4분의 1의 사회주의 중국에서 흥기하고 있다!”는 격앙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사설은 공·농·병 “수억 명의 혁명적 군중을” 향해 “마오쩌둥 사상을 무기삼아 사상문화의 진지에 똬리 튼 다수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릴 것”을 촉구한다. “혁명의 근본 문제는 정권의 문제”이며, “이데올로기, 종교, 예술, 법률, 정권” 등 이른바 상부구조에서 핵심은 바로 정권(政權)이라 규정하면서 사설은 “정권을 얻으면 일체를 얻고, 정권을 잃으면 일체를 상실한다”며 혁명군중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1965년 겨울까지만 해도 ‘인민일보’의 편집진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을 부르짖으며 사상의 다양성과 학술논쟁의 중립성을 옹호하던 베이징 시장 펑전의 지휘를 따르고 있었다. 그해 봄 펑전이 축출된 후 ‘인민일보’의 편집권은 마오쩌둥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다. 날마다 모든 지면엔 마오쩌둥을 보위하고 칭송하고 절대시하는 인격숭배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인민일보’는 마오의, 마오를 위한, 마오의 기관지로 변질되었다. 1966년 6월 2일자부터 매일같이 ‘인민일보’ 제1면 우측 맨 위의 작은 박스에 “마오쩌둥 어록”이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하루도 끊임없이 마오 사후 1년 반이나 지난 1978년 3월 25일까지 지속됐을 정도였다.
류샤오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혁명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마오쩌둥사상을 보위하는 대규모의계급투쟁이며 체제전쟁임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50일 동안 류샤오치는 국가원수로서 문화혁명을 총지휘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베이징을 떠나 있던 마오쩌둥은 비밀 채널을 통해 날마다 베이징의 상황을 보고 받고만 있었다. 게릴라 전술의 마스터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등 당권파를 몰아내기 위해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의 전술을 구사한다.
◇ 류사오치, 폭력 행위에 강경 대처
1966년 6월 초, 베이징의 대학가와 중고교는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자산계급 반혁명세력과 일대의 계급투쟁을 치러야만 하는 전시상황이 펼쳐졌다.
6월 중순, 중공중앙은 “문화혁명의 철저한 이행과 교육제도의 철저한 개혁을 위해 마오쩌둥의 지시와 군중의 요구에 따라” 신입생의 선발을 반년 늦추는 조치까지 취한다. 정규 과정이 마비된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는 혁명의 “난투난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서 과격분자들의 폭력행위가 터져 나왔다.
류샤오치는 한시바삐 문혁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개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미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생산량은 목표치 미달이었고, 산업재해는 증가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대규모 공작조의 파견밖엔 없었다. 당시 중공중앙의 당권파들은 1957-59 반우파투쟁 때처럼 중공중앙이 대규모의 정치 캠페인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공작조는 캠퍼스에서 자행되는 “난투난동”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른바 반간요(反干擾, 소요행위 반대)가 공작조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 마오 “류사오치가 혁명 군중을 억압했다”
1966년 6월 9일, 류샤오치의 지시에 따라 513명의 공작조가 칭화대학 캠퍼스에 진입했다. 당시 칭화대학엔 이미 문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캠퍼스는 온통 대자보 홍수였다. 주로 칭화대학 당위(黨委, 공산당위원회)의 부패를 폭로하고 교수들의 죄행을 지적하는 내용이 주였다. 베이징 시위원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도 있었으며, 그해 봄 파면되고 추락한 펑·루·뤄·양(彭陸羅楊) 네 명의 반혁명분자들을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베이징대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칭화대학의 당서기 겸 총장 장난상(蔣南翔, 1913-1988)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칭화대학의 당위원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비판을 제약했고, 격분한 학생들은 공격의 수위를 높여만 갔다.
1966넌 6-7월 류샤오치의 특명을 받은 공작조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1957-59년의 “반우파투쟁”을 재현한다. 공작조는 교수 및 학생 중에서 과격분자들을 색출해서 반혁명 우파의 멍에를 씌웠다. 공작조는 질서를 어기지 않는 합법적 권력투쟁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과격분자들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그해 6-7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공작조는 무려 700여 명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했다. 공작조의 취조에 못이긴 자공과(自控科)의 젊은 교수 스밍위안(史明遠)은 압박을 못 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칭화대학의 학생들은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한다. 마침내 공작조와 과격분자들의 갈등은 격렬한 내부의 투쟁으로 비화되는데….
7월 중순 마침내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곧 바로 “혁명 군중을 억압한” 류샤오치를 문책하기 시작한다. 류샤오치는 혁명군중을 억압한 반동분자로 몰릴 위기에 봉착했다. 당권파와 혁명군중을 분열시킨 후, 순식간에 공수를 뒤바꾸는 마오의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 전술이었다.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9/20200829004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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