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만에 찾아낸 6·25 전범들의 이력서
김일성 측근 4인방 수기 이력서 발견
▲ 1948년 북한 정권 초대 내각 합동사진. 김일성 수상(첫줄 가운데)을 중심으로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첫줄 왼쪽 두 번째)과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부장·첫줄 오른쪽 두 번째)이 서 있다. 김일성 오른쪽 옆은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 photo 국립중앙도서관 |
북한 김일성 집권기 때 2인자였던 최용건을 비롯 김책, 안길, 서철 등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시절 최측근 4인방의 수기(手記) 이력서가 발견됐다. 최용건은 6·25전쟁을 도발한 조선인민군 제1대 총사령관을 비롯해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지냈고, 김책은 인민군 전선사령관과 부수상, 안길은 평안남도당 책임비서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인민군의 모태) 총참모장, 서철은 주중 대사(임시)와 주북베트남 대사를 거쳐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두 차례 지낸 인물이다.
이들 빨치산 4인방은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속해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괴멸된 직후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이후 소련 원동(遠東)방면군 제88독립보병여단(88국제여단)에 입대한 뒤, 소련군 경력을 배경으로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당·정·군 요직을 장악했다. 88여단 편입 당시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의 계급은 대위였고, 서철은 중위였다. 특히 최용건·김책은 김일성과 함께 북한의 핵심세력인 ‘만주파’를 이끈 트로이카로 인민군 총사령관과 전선사령관 등의 직책을 맡았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6·25전쟁과 직접 관련된 전범(戰犯)들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가 발견된 곳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다. 해당 인사들의 이력서는 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작성한 이력서가 발견된 ‘제495 문서군, 제238 목록’에 함께 수록돼 있었다.(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이력서는 주간조선 2019년 4월 1일자 커버스토리 참조) 이들 4인방의 이력서는 ‘일본표준규격 B5’라고 적힌 누런 용지에 중국어 수기로 작성돼 있었고,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간부들이 번역한 러시아어 번역본이 함께 첨부돼 있었다. 작성 시기는 해당 인사들이 88여단에 입대하기 직전인 1940년 12월에서 이듬해인 1941년 1월 사이다.
이력서는 성명, 나이, 원적, 민족, 학력, 중국혁명 시기 활동상, 중국공산당 가입 과정과 보증인, 체포 및 수감 여부, 타 정당 가입 유무 등의 각종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해당 인사들의 수기 이력서에 적힌 필체와 표기법이 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 이력서는 자필 또는 통역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중국어 수기 이력서를 확인한 한 중국인 변호사는 “어법 등 틀린 부분이 많이 보인다”며 “중국인이 쓴 글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들 4인방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모스크바의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김일성의 빨치산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를 발견해 주간조선에 제공한 인사는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모스크바국립대 중국역사학과 교수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부자(父子)다. 이들 부자는 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중국어로 작성한 이력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직후 오간 구소련 외교전문 등을 주간조선에 공개한 바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한반도 출신 관련 이력서는 김일성을 비롯해 이들 4인방이 전부”라며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력서”라고 했다.
북한 정권 수립 초,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맡은 최용건은 이력서에서도 단연 화려한 경력이 돋보였다. 최용건은 ‘국내파’ 박헌영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에게 직접 사형판결을 내린 뒤 1976년 사망 때까지 김일성에 이은 북한 정권의 2인자로 있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최용건은 북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공화국 차수(次帥)’를 맡은 적이 있다”며 “후임 차수들은 모두 ‘인민군 차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화려한 이력의 2인자 최용건
1940년 12월 25일 작성된 그의 이력서는 또박또박한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성명 표기에서 원명은 ‘최용건(崔庸健)’, 현재 이름은 ‘최석천(崔石泉)’, 나이는 ‘39세’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이라고 적은 다른 인사들과 달리 민족과 원적을 각각 ‘고려민족’ ‘고려 평안도 용천군’이라고 적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교육 정도’라는 난에서는 1919년 사립 오산중학교(평북 정주)를 나온 사실부터 시작해 1923년 12월 중국 윈난성 강무(講武)학교에 입학해 1925년 11월 같은 학교를 졸업했음을 밝히고 있다.
경력란에서는 중국 제1차 대혁명 때 광둥성에서 군사활동에 참여했던 사실을 비롯, 1926년 북벌(北伐)전쟁 때 국민혁명군, 황포군관학교에 참여했던 일, ‘광저우코뮌’(1927) 때 특무활동, 광저우코뮌이 실패로 끝난 뒤 상하이로 파견돼 군사 조장을 맡았던 일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최용건이 ‘광저우공사(公社)’라고 이력서에 적은 ‘광저우코뮌’은 1927년 중국공산당이 광저우에서 폭동을 일으켜 소비에트해방구를 세우려 한 사건을 뜻한다.
88여단 내 조선인 최고 지위인 부참모장으로 김일성보다 군경력이 앞섰던 최용건은 6·25전쟁 개전 초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과 인천지구 방어사령관을 겸임했다. 이력서에 나오듯 군경력과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 등을 고려해 중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최용건의 자필 이력서는 다른 인사들의 이력서보다 갑절이나 내용이 길고, 표현이 장황한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일자무식’ ‘문맹’이었다는 최용건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뒤집는 내용이다.
최용건의 이력서에는 “나는 가장 충실한 레닌·스탈린주의자, 중국 볼셰비키주의자”라며 “과거 15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투쟁했고, 오늘 이후에도 나의 혁명사업을 철저히 관철하겠다”는 등의 현란한 표현이 등장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간략하게 대답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최용건은 88여단 내 조선인 중 직위가 가장 높아서 길고 자세하게 답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이 밖에 일설에는 “최용건이 김좌진 장군 암살(1930)의 배후”라는 설도 있으나, 이력서에는 관련 내용이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계책’ 잘 세운 김책은 무학
6·25전쟁 때 인민군 전선사령관과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을 지낸 김책은 ‘계책을 잘 세운다’는 뜻에서 ‘김책(金策)’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無學)’인 것으로 이력서에서 드러났다. 북한의 김책시(옛 성진시)를 비롯 김책공대, 김책제철소, 김책공군대학 등 1951년 사망 후 북한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김책은 1941년 1월 작성된 자신의 이력서에서 “나는 정식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 연길에 있는 야간학교에 몇 차례 나갔을 뿐, (작업이 없는) 겨울에 공부하고 대부분 독학을 했다”고 밝혔다.
북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만주 빨치산 시절만 해도 김책의 당내 지위는 김일성이나 최용건보다 높았다. 김일성과 최용건이 주로 군무에 종사했다면, 김책은 정치위원 등으로 당무를 맡았다. 6·25전쟁 때는 만주파 트로이카 가운데 홀로 평양 사수를 고집하다가, 1951년 평양의 지하방공호에서 가스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 때 김일성·박헌영·최용건이 직접 관을 운구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의 정치적 비중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력서와 함께 별도로 첨부된 김책의 ‘보충이력서’에는 그의 이름과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보였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보충이력서가 첨부된 것은 김책이 유일하다”고 했는데, 보충이력서에서 김책은 자신의 혼인 전 이름이 ‘김동현(金東鉉)’이며 후에 김홍계(金洪啓)로 개명했다고 밝힌다. 이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출옥 후 김홍계에서 김인으로, 국민당에 체포된 후 김인식으로, 봉천(선양)감옥 출옥 후 김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돼 있다. 또 지하공작 활동 시 중국 이름은 뤄동셴(羅東賢)이었다는 등 이름이 바뀌는 과정을 연도별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김책의 본명으로는 김홍계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김책은 1930년 만주 연길에서 천도교(동학의 후신) 원종교(元宗敎) 일파들과 충돌을 벌여 한 달 반가량 구류돼 있다가 벌금을 내고 풀려난 사실도 이력서에서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는 이 같은 일화를 밝히며 “나의 청년 시절 반(反)종교적 태도”라고 첨삭했다. 또 자신의 형인 김성(본명 김홍선)이 민생단 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민생단 사건은 만주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의 밀정으로 오인받아 빨치산에 의해 약 500명이 고문 끝에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 같은 기록은 자신이 종교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 무신론자’이며, 민생단 사건과 무관함을 소련 측에 호소하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최용건·김책 “화요파 참가했다”
이력서를 통해 북한 최고위 간부였던 최용건과 김책이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임도 확인됐다. 최용건과 김책이 ‘화요파’라는 사실은 와다 하루키 교수의 저서 ‘북조선’에서 언급된 바 있으나 이력서를 통해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창당(1925)을 주도한 ‘화요파’는 공산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따온 이름이다. 현재 북한은 화요파가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적대적 평가를 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화요파는 남조선에서 미제의 지시 밑에 당조직들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말아먹는 죄행을 저질렀다. 이들(화요파)은 공화국 북반부(북한)에 기어든 다음에도 당을 파괴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였으며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는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까지 꾸몄다”고 부정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일성 생전 북한의 2인자였던 최용건은 자신의 이력서에서 “나는 고려공산주의자 집단, 소위 ‘화요파’ 정당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김책 역시 이력서에서 “다른 정당에는 참여한 적이 없으나, 화요파에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화요파는 6·25전쟁 와중인 195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모조리 숙청됐는데, 최용건과 김책 역시 단죄 대상에 오를 뻔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1951년 일찍이 사망한 김책과 달리 최용건은 화요파 경력에도 불구하고 1976년까지 생존하며 김일성에 이은 북한 정권의 2인자 자리를 지켜내는 저력을 보였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자신의 저서 ‘북한 현대사’에서 “최용건·김책·김일성 세 사람은 88특별여단(88보병여단)의 조선인 지도자 중 최고위급”이라며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보다 거의 10살 연상이었으며 투쟁 경력이나 당력에서도 김일성보다 고참이다”고 평가한 바 있다. 심지어 최용건과 김책이 젊은 김일성을 앞세워 집권한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최용건, 김책이 화요파 출신이었음에도 숙청을 피해간 것은 김일성과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용건은 사후에 김정일 세습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강등됐다.
안길과 서철의 이력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으로 활동한 안길(安吉)과 서철(徐哲)의 이력서도 눈길을 끈다. 안길은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 시절 동료로, 88여단 입대 직후 김일성과 같은 계급(대위)이었다. 1947년 사망하기 전까지 평안남도당 책임비서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조선인민군의 전신) 총참모장을 지냈다. 반면 안길은 이번에 공개된 이력서를 통해 “1932년 이봉수가 당의 공작을 위해 나를 선발했는데, (자격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서철은 88여단 입대 시 대위였던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보다는 한 단계 급이 낮은 중위에 머물렀지만,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직계다. 최용건과 김책은 각각 2로군과 3로군에 속했다. 서철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주중 대사(임시), 주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대사, 주체코 대사 등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특히 군의관으로서 연해주 우스리스크(옛 보로실로프) 인근 남(南)야영에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 김정숙이 장남 김정일을 출산할 때 도움을 줘 김일성·김정일 2대에 걸쳐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1992년 사망한 서철은 그동안 중국 명문 하얼빈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북항일연군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공개된 이력서에는 “1930년 하얼빈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로만 적혀 있다. 자료를 본 한 중국인 변호사는 “하얼빈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반드시 명문 하얼빈의과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전범인 최용건·김책 등을 포함해 김일성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 발견은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학계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주목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종합대에 유학했던 북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문서들은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사료”라며 “북한 당국은 만주 항일 빨치산 운동의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심하게 왜곡했지만 이 문서들을 통해 연구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일성의 88여단 상관 저우바오중
국공내전 후 만주 분할통치 기도… 소련軍서 신뢰 못 받아
소련군 88여단의 총사령관(여단장)이자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의 이력서와 관련 문서도 이번에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저우바오중은 88여단에서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서철 등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던 중국인 상관이다. 1939년부터 시작된 일본 관동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관이었던 양징위(楊靖宇)가 전사한 뒤, 소련 경내로 흘러들어간 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의 지휘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2로군 사령관이었다.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저우바오중의 후한 평가가 결정적이었다. 와다 하루키 교수에 따르면,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에 대해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중국공산당 고려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 분자”로 소련 측에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소련공산당과 소련군 수뇌부는 88여단 총사령관이었던 저우바오중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적잖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저우바오중은 모스크바의 국제공산당 간부 양성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서 한 차례 출당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저우바오중은 마적단 출신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이끌던 동북군의 잔당인 왕더린(王德林)의 구국군(救國軍)에서 복무할 당시 ‘일본간첩’ 혐의로 체포됐다가 무죄석방된 적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국군은 김일성이 자신의 이력서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밝힌 부대다.
저우바오중은 동료들로부터도 그다지 후한 평가를 못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저우바오중의 이력서와 함께 발견된 ‘저우바오중에 관한 최신 정보’란 제목의 문건에 따르면, “동북민주연군(동북항일연군의 후신) 지도부는 저우바오중의 정치적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한다”고 적고 있다. 이 문건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사(니콜라예프로 적혀 있음)가 1947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은 저우바오중의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하는 근거로,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작전 기간 중 무전기 200대를 가진 부대원 6만5000명이 국민당 부대로 투항한 사실을 거론하며 “국민당이 저우바오중의 부대에 잠입했으며 저우바오중의 묵인하에 이런 일이 이뤄진 것 같다”고 기술했다. 당시 저우바오중이 만주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국민당과 내통했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저우바오중은 전쟁이 끝나면 사실상 만주를 중국 본토와 분할해 통치할 구상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은 “우리는 만주를 통치해야 한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는 남중국을 통치할 것”이란 저우바오중의 발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문건은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인 동북민주연군에 중국을 배신한 인사가 여단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거론하며, “가오강(高崗)이 적시에 개입한 덕분에 이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소련이 고평가했던 대표적 ‘친소파’였던 가오강은 후일 동북인민정부 주석으로 만주를 사실상 장악하면서 ‘동북왕’이란 칭호를 들었던 인물이다. 6·25전쟁 때는 만주에서 중공군의 후방 보급을 책임지기도 했다. 반면 저우바오중은 1949년 국공(國共)내전이 끝난 후 만주를 떠나 윈난성 부주석 등 한직을 맴돌았다.
저우바오중과 가오강의 지위가 뒤바뀐 데는 저우바오중이 중국의 소수민족인 ‘백족(白族)’ 출신이란 점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윈난성 출신 저우바오중이 백족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문건에서 스스로 밝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자필 서명 이력서에서는 자신의 민족을 ‘한족(漢族)’으로 적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들 빨치산 4인방은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속해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괴멸된 직후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이후 소련 원동(遠東)방면군 제88독립보병여단(88국제여단)에 입대한 뒤, 소련군 경력을 배경으로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당·정·군 요직을 장악했다. 88여단 편입 당시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의 계급은 대위였고, 서철은 중위였다. 특히 최용건·김책은 김일성과 함께 북한의 핵심세력인 ‘만주파’를 이끈 트로이카로 인민군 총사령관과 전선사령관 등의 직책을 맡았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6·25전쟁과 직접 관련된 전범(戰犯)들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가 발견된 곳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다. 해당 인사들의 이력서는 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작성한 이력서가 발견된 ‘제495 문서군, 제238 목록’에 함께 수록돼 있었다.(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이력서는 주간조선 2019년 4월 1일자 커버스토리 참조) 이들 4인방의 이력서는 ‘일본표준규격 B5’라고 적힌 누런 용지에 중국어 수기로 작성돼 있었고,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간부들이 번역한 러시아어 번역본이 함께 첨부돼 있었다. 작성 시기는 해당 인사들이 88여단에 입대하기 직전인 1940년 12월에서 이듬해인 1941년 1월 사이다.
이력서는 성명, 나이, 원적, 민족, 학력, 중국혁명 시기 활동상, 중국공산당 가입 과정과 보증인, 체포 및 수감 여부, 타 정당 가입 유무 등의 각종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해당 인사들의 수기 이력서에 적힌 필체와 표기법이 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 이력서는 자필 또는 통역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중국어 수기 이력서를 확인한 한 중국인 변호사는 “어법 등 틀린 부분이 많이 보인다”며 “중국인이 쓴 글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들 4인방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모스크바의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김일성의 빨치산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를 발견해 주간조선에 제공한 인사는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모스크바국립대 중국역사학과 교수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부자(父子)다. 이들 부자는 김일성의 88여단 입대 시 중국어로 작성한 이력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직후 오간 구소련 외교전문 등을 주간조선에 공개한 바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한반도 출신 관련 이력서는 김일성을 비롯해 이들 4인방이 전부”라며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력서”라고 했다.
북한 정권 수립 초,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맡은 최용건은 이력서에서도 단연 화려한 경력이 돋보였다. 최용건은 ‘국내파’ 박헌영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에게 직접 사형판결을 내린 뒤 1976년 사망 때까지 김일성에 이은 북한 정권의 2인자로 있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최용건은 북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공화국 차수(次帥)’를 맡은 적이 있다”며 “후임 차수들은 모두 ‘인민군 차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화려한 이력의 2인자 최용건
경력란에서는 중국 제1차 대혁명 때 광둥성에서 군사활동에 참여했던 사실을 비롯, 1926년 북벌(北伐)전쟁 때 국민혁명군, 황포군관학교에 참여했던 일, ‘광저우코뮌’(1927) 때 특무활동, 광저우코뮌이 실패로 끝난 뒤 상하이로 파견돼 군사 조장을 맡았던 일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최용건이 ‘광저우공사(公社)’라고 이력서에 적은 ‘광저우코뮌’은 1927년 중국공산당이 광저우에서 폭동을 일으켜 소비에트해방구를 세우려 한 사건을 뜻한다.
88여단 내 조선인 최고 지위인 부참모장으로 김일성보다 군경력이 앞섰던 최용건은 6·25전쟁 개전 초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과 인천지구 방어사령관을 겸임했다. 이력서에 나오듯 군경력과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 등을 고려해 중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최용건의 자필 이력서는 다른 인사들의 이력서보다 갑절이나 내용이 길고, 표현이 장황한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일자무식’ ‘문맹’이었다는 최용건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뒤집는 내용이다.
최용건의 이력서에는 “나는 가장 충실한 레닌·스탈린주의자, 중국 볼셰비키주의자”라며 “과거 15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투쟁했고, 오늘 이후에도 나의 혁명사업을 철저히 관철하겠다”는 등의 현란한 표현이 등장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간략하게 대답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최용건은 88여단 내 조선인 중 직위가 가장 높아서 길고 자세하게 답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이 밖에 일설에는 “최용건이 김좌진 장군 암살(1930)의 배후”라는 설도 있으나, 이력서에는 관련 내용이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계책’ 잘 세운 김책은 무학
6·25전쟁 때 인민군 전선사령관과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을 지낸 김책은 ‘계책을 잘 세운다’는 뜻에서 ‘김책(金策)’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無學)’인 것으로 이력서에서 드러났다. 북한의 김책시(옛 성진시)를 비롯 김책공대, 김책제철소, 김책공군대학 등 1951년 사망 후 북한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김책은 1941년 1월 작성된 자신의 이력서에서 “나는 정식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 연길에 있는 야간학교에 몇 차례 나갔을 뿐, (작업이 없는) 겨울에 공부하고 대부분 독학을 했다”고 밝혔다.
북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만주 빨치산 시절만 해도 김책의 당내 지위는 김일성이나 최용건보다 높았다. 김일성과 최용건이 주로 군무에 종사했다면, 김책은 정치위원 등으로 당무를 맡았다. 6·25전쟁 때는 만주파 트로이카 가운데 홀로 평양 사수를 고집하다가, 1951년 평양의 지하방공호에서 가스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 때 김일성·박헌영·최용건이 직접 관을 운구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의 정치적 비중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력서와 함께 별도로 첨부된 김책의 ‘보충이력서’에는 그의 이름과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보였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보충이력서가 첨부된 것은 김책이 유일하다”고 했는데, 보충이력서에서 김책은 자신의 혼인 전 이름이 ‘김동현(金東鉉)’이며 후에 김홍계(金洪啓)로 개명했다고 밝힌다. 이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출옥 후 김홍계에서 김인으로, 국민당에 체포된 후 김인식으로, 봉천(선양)감옥 출옥 후 김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돼 있다. 또 지하공작 활동 시 중국 이름은 뤄동셴(羅東賢)이었다는 등 이름이 바뀌는 과정을 연도별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김책의 본명으로는 김홍계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김책은 1930년 만주 연길에서 천도교(동학의 후신) 원종교(元宗敎) 일파들과 충돌을 벌여 한 달 반가량 구류돼 있다가 벌금을 내고 풀려난 사실도 이력서에서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는 이 같은 일화를 밝히며 “나의 청년 시절 반(反)종교적 태도”라고 첨삭했다. 또 자신의 형인 김성(본명 김홍선)이 민생단 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민생단 사건은 만주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의 밀정으로 오인받아 빨치산에 의해 약 500명이 고문 끝에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 같은 기록은 자신이 종교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 무신론자’이며, 민생단 사건과 무관함을 소련 측에 호소하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최용건·김책 “화요파 참가했다”
이력서를 통해 북한 최고위 간부였던 최용건과 김책이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임도 확인됐다. 최용건과 김책이 ‘화요파’라는 사실은 와다 하루키 교수의 저서 ‘북조선’에서 언급된 바 있으나 이력서를 통해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창당(1925)을 주도한 ‘화요파’는 공산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따온 이름이다. 현재 북한은 화요파가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적대적 평가를 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화요파는 남조선에서 미제의 지시 밑에 당조직들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말아먹는 죄행을 저질렀다. 이들(화요파)은 공화국 북반부(북한)에 기어든 다음에도 당을 파괴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였으며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는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까지 꾸몄다”고 부정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일성 생전 북한의 2인자였던 최용건은 자신의 이력서에서 “나는 고려공산주의자 집단, 소위 ‘화요파’ 정당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김책 역시 이력서에서 “다른 정당에는 참여한 적이 없으나, 화요파에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화요파는 6·25전쟁 와중인 195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모조리 숙청됐는데, 최용건과 김책 역시 단죄 대상에 오를 뻔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1951년 일찍이 사망한 김책과 달리 최용건은 화요파 경력에도 불구하고 1976년까지 생존하며 김일성에 이은 북한 정권의 2인자 자리를 지켜내는 저력을 보였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자신의 저서 ‘북한 현대사’에서 “최용건·김책·김일성 세 사람은 88특별여단(88보병여단)의 조선인 지도자 중 최고위급”이라며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보다 거의 10살 연상이었으며 투쟁 경력이나 당력에서도 김일성보다 고참이다”고 평가한 바 있다. 심지어 최용건과 김책이 젊은 김일성을 앞세워 집권한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최용건, 김책이 화요파 출신이었음에도 숙청을 피해간 것은 김일성과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용건은 사후에 김정일 세습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강등됐다.
안길과 서철의 이력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으로 활동한 안길(安吉)과 서철(徐哲)의 이력서도 눈길을 끈다. 안길은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 시절 동료로, 88여단 입대 직후 김일성과 같은 계급(대위)이었다. 1947년 사망하기 전까지 평안남도당 책임비서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조선인민군의 전신) 총참모장을 지냈다. 반면 안길은 이번에 공개된 이력서를 통해 “1932년 이봉수가 당의 공작을 위해 나를 선발했는데, (자격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서철은 88여단 입대 시 대위였던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보다는 한 단계 급이 낮은 중위에 머물렀지만,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직계다. 최용건과 김책은 각각 2로군과 3로군에 속했다. 서철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주중 대사(임시), 주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대사, 주체코 대사 등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특히 군의관으로서 연해주 우스리스크(옛 보로실로프) 인근 남(南)야영에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 김정숙이 장남 김정일을 출산할 때 도움을 줘 김일성·김정일 2대에 걸쳐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1992년 사망한 서철은 그동안 중국 명문 하얼빈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북항일연군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공개된 이력서에는 “1930년 하얼빈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로만 적혀 있다. 자료를 본 한 중국인 변호사는 “하얼빈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반드시 명문 하얼빈의과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전범인 최용건·김책 등을 포함해 김일성 최측근 4인방의 이력서 발견은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학계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주목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종합대에 유학했던 북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문서들은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사료”라며 “북한 당국은 만주 항일 빨치산 운동의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심하게 왜곡했지만 이 문서들을 통해 연구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일성의 88여단 상관 저우바오중
국공내전 후 만주 분할통치 기도… 소련軍서 신뢰 못 받아
소련군 88여단의 총사령관(여단장)이자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의 이력서와 관련 문서도 이번에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저우바오중은 88여단에서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서철 등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던 중국인 상관이다. 1939년부터 시작된 일본 관동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관이었던 양징위(楊靖宇)가 전사한 뒤, 소련 경내로 흘러들어간 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의 지휘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2로군 사령관이었다.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저우바오중의 후한 평가가 결정적이었다. 와다 하루키 교수에 따르면,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에 대해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중국공산당 고려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 분자”로 소련 측에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소련공산당과 소련군 수뇌부는 88여단 총사령관이었던 저우바오중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적잖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저우바오중은 모스크바의 국제공산당 간부 양성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서 한 차례 출당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저우바오중은 마적단 출신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이끌던 동북군의 잔당인 왕더린(王德林)의 구국군(救國軍)에서 복무할 당시 ‘일본간첩’ 혐의로 체포됐다가 무죄석방된 적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국군은 김일성이 자신의 이력서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밝힌 부대다.
저우바오중은 동료들로부터도 그다지 후한 평가를 못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저우바오중의 이력서와 함께 발견된 ‘저우바오중에 관한 최신 정보’란 제목의 문건에 따르면, “동북민주연군(동북항일연군의 후신) 지도부는 저우바오중의 정치적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한다”고 적고 있다. 이 문건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사(니콜라예프로 적혀 있음)가 1947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은 저우바오중의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하는 근거로,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작전 기간 중 무전기 200대를 가진 부대원 6만5000명이 국민당 부대로 투항한 사실을 거론하며 “국민당이 저우바오중의 부대에 잠입했으며 저우바오중의 묵인하에 이런 일이 이뤄진 것 같다”고 기술했다. 당시 저우바오중이 만주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국민당과 내통했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저우바오중은 전쟁이 끝나면 사실상 만주를 중국 본토와 분할해 통치할 구상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은 “우리는 만주를 통치해야 한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는 남중국을 통치할 것”이란 저우바오중의 발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문건은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인 동북민주연군에 중국을 배신한 인사가 여단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거론하며, “가오강(高崗)이 적시에 개입한 덕분에 이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소련이 고평가했던 대표적 ‘친소파’였던 가오강은 후일 동북인민정부 주석으로 만주를 사실상 장악하면서 ‘동북왕’이란 칭호를 들었던 인물이다. 6·25전쟁 때는 만주에서 중공군의 후방 보급을 책임지기도 했다. 반면 저우바오중은 1949년 국공(國共)내전이 끝난 후 만주를 떠나 윈난성 부주석 등 한직을 맴돌았다.
저우바오중과 가오강의 지위가 뒤바뀐 데는 저우바오중이 중국의 소수민족인 ‘백족(白族)’ 출신이란 점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윈난성 출신 저우바오중이 백족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문건에서 스스로 밝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자필 서명 이력서에서는 자신의 민족을 ‘한족(漢族)’으로 적고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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