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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3일 화요일

“문재인 정부는 자유민주라는 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길로 가고 있다!”

정홍원 전 국무총리

“문재인 정부는 자유민주라는 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길로 가고 있다!”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 대통령은 ‘헌법정신과 국가 정체성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하겠다’고 국민 앞에 천명하라
⊙ 文 대통령 당선은 혁명의 산물 아냐… 왜 헌법대통령 아닌 ‘촛불대통령’ 자칭하나? 국민은 불안하다
⊙ 총리로서 탄핵과 보수 몰락이라는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 데 반성과 사죄의 마음 갖고 있어
⊙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나 “최순실과의 관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라” 요구했지만…
⊙ “전직 대통령이 무슨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계속 구속해 놓나”

鄭烘原
1944년 출생. 진주사범학교,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1972년 제14회 사법시험 합격 / 前 대검찰청 감찰부장, 광주지검·부산지검 검사장, 제27대 법무연수원장, 제9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 제42대 국무총리 역임
사진=조현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불러온 ‘국정농단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도 보수 세력 사이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대체 탄핵할 만큼 잘못한 것이 뭐냐”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의혹만으로 탄핵을 하고 탄핵부터 한 후 나중에 재판이 열리는 박 전 대통령의 상황은 사법정신에 위배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입장을 정확하게 얘기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 전 대통령과 정치 역경을 함께한 주변 인물들, 이른바 친박의 이야기는 ‘편들기’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침묵을 지켜온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였던 정홍원(鄭烘原·75) 전 총리가 입을 열었다.
 
  검사 외길을 걷던 정홍원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시절인 2012년 19대 총선 당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됐다. 정 전 총리를 서초동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 요즘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독서도 하고 사람들 만나 이야기 듣고 지내고 있습니다. 원래 공직생활을 마치면서 취미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라가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라 걱정에 잠도 잘 안 오고 그래서 취미생활은 못 하고 있어요. 자서전은 원래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준비를 해 내려고 했던 건데 최순실 사태가 터져서 자서전을 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다시 마무리 작업을 했고 다음달쯤 나올 겁니다.”
  
  ― 전반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요즘 젊은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흙수저라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나야말로 최고의 흙수저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거든요. 경남 하동 가난한 집 12남매의 10째로 태어나서 집에서는 존재감이 없었고 형편이 어려워 공부도 어렵게 해야 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물론 정부가 희망을 주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지만 스스로 자기 환경과 여건을 개척하고 뛰어넘으려는 용기와 의지가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내 공직생활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집필했습니다.”
  
  ― 출판기념회는 언제 합니까. 얼마 전 황교안 전 총리의 출판기념회가 이슈가 됐습니다.
 
 
  “출판기념회를 하면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할 거 아닙니까. 안 할 겁니다.” 
  
  
  세금으로 인심 쓰는 현 정부
  
  ― 청년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는데, 현재 청년의 가장 큰 고민은 고용과 취업입니다. 
  
  “현 정부는 일자리를 국가가 늘리겠다며 소득주도성장을 지향하고 있잖아요. 소득을 늘리면 그게 소비로 연결되고 경제가 활성화돼서 또 소득을 창출한다는 말인데, 소득을 어떻게 늘려줍니까. 현 정부는 국가가 나서서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을 높여주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공직자를 많이 뽑는다든가. 그런데 이런 방식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증명이 된 적이 없어요. 공직자를 늘리면 일단 취업률은 높아질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는 숫자고 공직자에게 들어가는 세금이라든가 그들이 퇴임했을 때 연금까지 생각해 보면 국가에 엄청난 부담을 지우는 겁니다. 현 정부는 부작용을 겪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차기, 차차기 정부에 갈수록 부담이 되고 결국 부담을 차세대에 미루는 것밖에 안 됩니다. 현 정부는 세금으로 인심 쓰고 부담은 차세대가 지는 이런 행태는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 국가가 나서서 소득을 늘린다는 데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 건 기업입니다. 기업이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사기를 북돋워 기업 규모가 확장되면 일자리가 늘어나는 거죠. 이게 상식이고 국민들의 세금 부담 없이 국가적으로도 전체적인 부가 늘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국가가 일자리 확대를 주도하겠다고 하고 1년여 실험을 했지만 안 되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고집하고 있는 정부가 안타깝습니다.”
  
  ― 정부가 왜 그런다고 보십니까.
 
 
  “철학의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죠. 근데 분배란 분배할 거리가 만들어져야 하는 거지 분배를 위해 경제활동 하는 건 아니잖아요. 분배부터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다 같이 못사는 평준화, 하향 평준화로 가는 길이고 나라 망치는 길입니다.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겁니다.”
  
  
  경제보다 심각한 건 국가 정체성 훼손
 

 
―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우려가 큰데 그 밖에 정부가 잘못하는 점을 지적하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경제는 나아질 수도 있지만, 정부가 이 나라를 해체하는 길로 가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제일 큽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어요. 헌법상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자유민주주의인데 자유를 뺀다는 얘기가 나오고, 우리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남측 대통령’이라고 자칭하기도 했죠. 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알 수가 없어요.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번 공개적으로 묻고 싶어요.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지키는 게 첫째 임무 아닙니까? 국민들이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대통령의 의지를 볼 수 있다면 우리 국민들이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지금 그런 모습은 전혀 안 보입니다. 안전하게 살려면 북핵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 게 상식인데 대통령이 북핵을 없애겠다는 건지, 현상유지를 하겠다는 건지 애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가 문제군요.
 
 
  “전 세계는 물론 우리 국민들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대통령은 자기 소신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외신에서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말이나 듣고 있으니 북핵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우리 국민 사이에서 생기고 있습니다.”
  
  ―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명확하게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헌법과 정체성을 지키고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는 게 내 사명이며 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길 바랍니다. 기자회견이든 대국민선언이든 공식적인 방법으로요. 그래야 국민이 안심하고 지지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대통령이 헌법정신 준수를 굳이 천명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헌법에 의해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촛불에 의해 당선됐다’고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크게 잘못됐어요. 혁명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게 아니란 말입니다. 헌법에 의해서 통치를 하는 게 아니라 촛불정신으로 통치를 하겠다는 겁니까. 특히 외국에 가서 촛불 운운하는 것은 정통성을 해치는 발언이라고 봐요.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마치 반체제적인 지도자 같잖아요? 당당하게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란 얘기를 왜 못합니까. 촛불을 강조하는 건 대한민국 법질서를 해치고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현 정부 대북정책은 정권만 살찌우는 일
  
지난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입장해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북핵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겠죠.
 
 
  “물론입니다. 북핵의 완전한 폐기를 지향하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사실 경제는 당분간 잘 안 되더라도 우리 기업과 국민의 저력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또 회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은 훼손되면 위험합니다. 국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정신 차리고 지켜봐야 합니다.”
  
  ― 남북관계가 평화무드인데 북핵 폐기를 강조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남북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물론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안전을 해치면서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독일과 달리 전쟁을 겪었고 계속 도발을 당했습니다. 북한이 말을 바꾸는 일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가 북한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인데 마치 평화가 다 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위장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걱정되는 건 평화가 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모든 게 북쪽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일 수 있어요. 불안감과 회의와 불신이 있기 때문에 국민은 불안한 겁니다. 그 불안감을 없애줘야 하지 않습니까.”
  
  ― 박근혜 정부도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통일은 필요하고 또 통일을 위해 남북관계가 진전이 돼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해요. 하지만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통해 확실한 평화로 가야지 위장된 평화는 위험하다는 겁니다. 악의를 숨기고 있는 그 미소에 속아 박수를 치면 안 된다는 거죠. 문 대통령이 완전한 핵 폐기, 확실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혀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 전 총리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위험하다”고 평가했다.
  
  ― 현 정권은 대북평화정책으로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핵을 없앤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우리만 박수를 치고 있는 이 모습 뒤에 어떤 결과가 올까요. 북한에 퍼 주는 걸 그냥 두고 볼 게 아니라 그게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부담으로 갈 건지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고 봐요. 이 역할을 언론이 해줘야 하는데….”
  
  ― 퍼 주기식 원조는 안 된다는 말이죠.
  
  “김정은이 굶주린 백성을 위해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백성을 먹여 살리고 그래도 모자라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나도 한동안 북한 어린이 돕는 재단에 기부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끊었어요. 지도자는 돈을 핵무기 만드는 데 쓰고 백성은 다른 사람이 먹여 살리는 꼴이잖아요.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있나, 정권만 살찌우는 일이다 싶어서 그랬습니다. 우리가 북한 도와주는 게 결국 핵무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니 돕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한’ 일이네요.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당신(남한)들이 북한 정권을 살찌우는 바람에 우리는 더 고통받았고 더 오래 고생했다’고.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길 할 수 있겠습니까.”
  
  
  “공정한 공천에 만전 기했다”
  
2012년 2월 2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홍원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검사 외길을 걸어온 정 전 총리가 정치권에 입문한 건 19대 총선(2012년 4월) 당시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으면서였다. 새누리당은 18대 총선 공천 당시 ‘친박 학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친이계가 공천권을 장악했다. 공천에 탈락한 친박계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어 총선에 나서는 기상천외한 일도 벌어졌다. 19대 공천위원장을 맡은 정 전 총리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정치권과 연관이 거의 없었는데 어떻게 공천심사위원장을 맡게 됐습니까.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주변에서 추천을 받았다면서 연락을 했어요. 나는 정치를 잘 몰라서 자격이 안 된다고 했는데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꼭 부탁드린다고 하더라고요.”
  
  ― 18대에 이른바 ‘친박 학살’이 있었는데 그다음을 맡게 돼서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번(19대)에 분명히 보복이 있을 거라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친박이 친이를 칠 것이라고 다들 이야기했죠. 그래서 공천위원 임명식이 끝나고 나서 박근혜 위원장에게 독대를 좀 하자고 했어요. 단둘이 앉아서 이번에 ‘친이 학살’이 이뤄진다면 끝장이다, 당이 당장 쪼개질 거라고 얘기하고 그걸 원하시면 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죠, 당선 위주로 해야죠’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그때 박근혜 위원장이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만약 그때 그분 입에서 ‘그래도…’라거나 ‘지난번 일이 있는데…’라는 말이 나왔으면 나는 못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 당시 새누리당이 100석도 못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152석을 얻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힘이었고, 두 번째는 공천이 잘 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천위원장을 맡으면서 공천위원들에게 ‘우리 모두 사심 없이 하자,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 ‘친박 공천’ 얘기도 나왔습니다. 
  
  “나는 친박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1차로 21명 공천 명단을 발표할 때 포함돼 있던 사람이 이재오 의원입니다. 친이계의 상징 같은 분 아닙니까. 그분은 내가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사실 공천위원들은 물론 비대위원들도 이재오 공천에 반대를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공천위원들이 명단을 작성하면 비대위원회에서 의결 후 공천이 이뤄지는 건데, 이재오 의원이 포함된 명단을 들고 비대위원 회의에 갔더니 역시나 반대가 시작되더군요. 밖에 기자들이 쫙 깔려 있는데 이재오 의원이 탈락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당 쪼개지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이었습니다.”
  
  ― 그때 공천위원장이 비대위 의결도 하기 전에 명단 발표를 해서 논란이 됐죠.
  
  “비대위원회에서 이재오 반대 의견이 많아지면서 내가 나가는 게 낫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왔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내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비대위원들이 이재오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킬 거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기자회견을 자처하고 21명 공천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 비대위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발표라니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니 회의 중이었던 비대위원들은 문자로 소식 듣고 얼마나 난리가 났겠어요. 정홍원 성토장이 된 거죠. 그런데 그 사건은 공천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공천심사위원이 당 기득권자들인 비대위원들한테 휘둘리면 외부인을 영입한 의미가 없잖아요.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 어쨌든 친이계에서는 친박 공천이라고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기에 당 사무처에 통계를 가져와 보라고 했어요. 보니까 친이 탈락자가 많은 거예요. 근데 그 당시 당내 친이가 친박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니 친이 탈락자가 친박 탈락자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들을 다 언론에 설명했습니다. 결국 잘 된 공천이라는 사실은 선거 결과가 말해줬다고 봅니다.”
  
  
  청와대 입성 후
  
2015년 1월 20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3회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정홍원 국무총리,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선전한 새누리당은 기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대권 도전에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대선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초대 국무총리로 정홍원 총리를 지명했다.
 
  야당 비대위원장 시절 강력한 리더십과 원칙주의를 보여줬던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 후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였을 때는 ‘선거의 여왕’ 별명을 듣기도 하고 남의 얘기를 잘 들으며 주변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청와대 입성 후에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 ‘불통(不通)’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죠. 내가 ‘불통 얘기가 자꾸 나오니 소통하는 노력을 많이 하시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장관이든 정당이든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런 모습을 언론에 노출이 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요.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보이는 모습이 없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사실 당 관계자니 외빈이니 사람들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걸 좀 보여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보이기 위한 활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소통은 지금도 좀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 박근혜 정부가 잘했던 일들이 많은데 대부분 폄하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건전재정을 확보한 것도 중요한 성과입니다. 임기 초반 세수(稅收)를 조사해 보니 결함이 수조원에 달하는 겁니다. 적자예산이 될 수밖에 없어서 야당에서 공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국가기관 비용절감 등 노력으로 3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그때 노력한 것들이 이제 나타나서 지금은 세금이 수요보다 많이 걷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정부의 노력들은 전부 그냥 밟아버리니 안타깝죠.”
  
  
  박 대통령 ‘무뇌아 취급’에 참을 수 없어
  
2014년 6월 27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유임 후 첫 일정으로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아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정홍원 전 총리는 촛불과 탄핵 정국인 2016년 11월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글을 통해 “참으로 답답하고 암담한 심정”이라며 “진실 규명도 되기 전에 대통령에게 무한 책임을 지라는 요구와 주장은 법 앞의 평등이 아니라 일시적 분풀이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또 “대통령은 외부 조력 없이 판단을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추궁을 할 것이 아니라 냉정을 되찾고 이성적, 합리적인 판단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 그때는 이른바 마녀사냥과 각종 추문 등 비이성적인 일들이 있었는데 글을 발표할 때 피해가 두렵진 않았습니까.
  
  “이럴 때 침묵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돌 맞을 생각을 하고 발표했는데 돌도 좀 맞았지만 훨씬 더 많은 박수를 받았어요. 해외 교포들 사이에서도 그 글을 돌려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 글을 발표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박 대통령을 비난만 하면 최고의 성직자가 되는 분위기에서 다들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종편에서 한 패널이 얘기하는데, 박 대통령은 마치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뒤에서 코치를 안 하면 아무 의사 결정도 못하는 무뇌아처럼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게 정말 막장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이 횡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가 무슨 잘못이 있으면 사법적 절차를 거쳐서 판결을 해야지 이런 식으로 마녀사냥을 하면 되겠습니까?”
  
  ― 글의 주제가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같습니다만. 
  
  “2년간 총리로서 수많은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한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여러 차례 실제로 경험을 했어요. 예를 들면 어느 날은 회의를 하는데 원래 회의 주제와 상관없이 사물인터넷 얘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나는 무슨 얘긴지 잘 몰라서 조용히 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그게 뭔지, 앞으로 전망이 어떤지, 우리 경제에 어떤 역할을 할 건지 쭉 얘기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외에도 대통령이 오래 공부를 해서 아는 게 많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됐습니다.”
  
  ― (박 대통령이) 정치를 오래 하고 지도자 역할도 하다 보니 배운 게 많았겠지요.
  
  “그래서 그때는 대통령이 너무 많은 분야에 많은 걸 알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각 분야에서 장관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일해 나갈 텐데 대통령이 일일이 간섭을 하면 어쩌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무뇌아 취급을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요.”
  
  
  “박 전 대통령은 사리사욕 없는 인물”
  
2014년 7월 25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정부서울청사에서 공무원 조직 내 혁신을 위한 국무총리 소속 ‘부패척결 추진단’ 공식 출범을 알리는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박근혜 정부 총리로서 어찌 보면 편을 들어주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쓸데없이 흥분하지 말고 이성을 되찾아 법적인 결론을 기다리자라는 마음이 컸지요. 예전에 광우병 소고기 사건에서도 봤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방 흥분하지 않습니까. 광우병 사건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들 잘못했다는 사과 한 번 없이 그냥 넘어갔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 재판도 그런 거라고 봤습니다. 박 대통령이 뇌물을 받았다는데 박 대통령 호주머니에 돈이 있었습니까? 이런 의문으로 진실을 찾아갔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 ‘재판보다 탄핵 먼저’가 문제라고도 언급했습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려면 뭘 잘못했는지 법적으로 판명이 된 다음에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재판은 나중에 한다며 먼저 쫓아내고 구속해 놓고 그다음에 재판해서 뭘 잘못했는지 가린다니… 순서가 잘못된 거죠.”
  
  ― 박 전 대통령 구속에 대해서도 지적했는데요. 
  
  “처음부터 구속하는 게 참… 대통령이 무슨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구속을 합니까. 국사범이나 반역이나 이적이나 나라 말아먹을 죄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구속까지 해야 됩니까. 또 구속을 했다 하더라도 구속기간이 만료가 되면 석방해야지 그걸 또 영장을 다시 발부해 구속을 연장하고 하는 모습은 사법정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사법정의를 세워 석방하고 재판하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 박 대통령이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박 대통령은 아버지 영향 때문인지 부정부패에 대한 거부감이 큰 사람입니다. 한번은 내가 ‘아무리 정부가 잘 해도 부패사건 한번 터지면 도루묵이 되니 처음부터 부패문제는 철저하게 관리를 해봅시다’라고 했더니 나보다 한술 더 떠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하더군요. 총리실에 부패척결단을 만든 게 그때입니다. (총리를) 그만두기 1년여 전에 만든 건데 1년 동안 잡아낸 누수 금액이 6000억원에 달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만 잡아내도 복지든 뭐든 더 할 수 있어요. 이런 의식을 가진 대통령이 자기가 돈 챙기려고 뭘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려 때문에 동생들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말이죠.”
  
  정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 부녀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100돌(2017년 11월 17일)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을 맡아 특별기획전, 학술대회, 기념회와 음악회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사업을 맡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한 인물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경제가 6.6배 성장했는데, 우리나라 경제는 350배 성장했습니다. 그 기반을 박 전 대통령이 마련한 거죠. 총리로서 외국을 방문해 보면 우리나라를 대하는 태도에서 엄청난 경외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총리 시절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했는데 대통령이 “우리의 롤모델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더군요. 어느 나라를 방문해도, 어떤 국제회의에 가도 다들 저에게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럽니다. 새마을운동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새마을운동만 하면 잘살게 될 것처럼 기대하는데,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지도자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고, 지도자가 청렴해야 한다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요. 지금 세계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때부터 만들어진 겁니다. 국력이 강해지고 세계경제 10위권 나라가 됐기 때문에 한류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 아니겠어요. 가난한 나라는 그런 시선을 받기 어렵습니다. 이런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계속 잘돼야 하는 겁니다.”
  
  
  최순실 전혀 몰랐다
  
사진=조현호
  ― 그런데 총리님은 최순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까. 정치권 친박들은 박 전 대통령 곁을 지켜왔던 최순실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질문 종종 받는데요. 사실 총리가 굉장히 바쁩니다. 세종시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다 보니 예전 총리보다 20%는 더 업무 부담이 있어요. 또 여자 대통령이 밤에 뭘 하는지 총리가 들여다볼 여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만약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무슨 부탁을 하거나 연락을 하거나 했다면 알았겠지만 전혀 그런 일이 없어서 몰랐어요. 정윤회라는 이름도 ‘십상시 문건’ 사건 때 알았습니다.”
  
  ― 탄핵 정국에 박 대통령을 만났죠. 
  
  “변호인을 해달라고 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호는 할 수 없지만 자문은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얘기하고, 다른 얘길 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최순실과 어떤 관계이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고, 그게 가장 문제가 되고 있으니 나서서 밝히라고요.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두 차례 사과를 했는데,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다음 기회에’라고 얘기했으니 이제 국민들 앞에 나와서 밝히라고 했습니다. 세간에서 온갖 얘기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스스로 국민을 설득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요.”
  
  ― 거절하던가요.
  
  “분명하게 대답은 안 하더군요. 사실 내가 인간적으로 이해는 가는 게 몇십 년간 자기 수발을 들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해 일일이 얘기해야 하고 자칫 나쁜 얘기가 나오면 누워서 침 뱉기 아닙니까. 또 자기 사람을 쳐내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싫었을 겁니다. 그래도 나는 그때 사태를 수습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고 보는데, 하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자기 사익을 위해 그런 게 아닌데 그걸 왜 국민을 이해시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죠.”
  
  
  총리대세론엔 관심 없어
  
2016년 9월 19일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서울역 일대에서 청소 자원봉사에 나선 노숙인들과 함께 쓰레기를 줍고 있다. 사진=조선DB
  ― 요즘 황교안 전 총리와 이낙연 총리를 중심으로 총리 출신들이 대선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총리대세론’이 나옵니다. 본인도 생각이 있으신지,
  
  “정치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나이가 70대 중반인데 욕심부리면 노욕(老慾)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저 국정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나라에 좋은 일 있으면 박수 치고 나쁜 일 있으면 지적하고 충고하는 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격려하고 힘 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어요.”
  
  ― 주변에 나라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그럼요. 나도 나라 걱정에 자다가 깰 때가 많습니다.”
  
  ― 정권을 견제하고 잘못을 지적해야 할 보수야당은 지지율이 낮은데요. 
  
  “이런 사태까지 온 데 대한 책임감과 반성을 국민에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여당과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첫 번째 절차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지 않는 겁니다. 진정성을 국민에게 보여준다면 민심이 돌아오리라 봅니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다. 따라서 보수층에서는 보수정당이 정권을 뺏긴 데 대해 정 총리도 일말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시선도 있다.
  
  ― 국가 걱정하는 사람도 많지만 문재인 정부 지지율은 여전히 높은 상태입니다. 사실상 전 정권에 대한 반감 때문인데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지 않습니까. 
  
  “소위 보수라고 하는 정치 세력이나 그런 데 몸담았던 사람들은 다 같이 깊이 반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보수가 잘못한 건 아닙니다만. 
  
  “보수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개개인의 능력은 다 다르고 같은 재료를 줘도 결과물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격차가 생기지만 보수에서 격차를 해결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방법도 충분히 있습니다. 시장경제 자율에 맡긴 후 화합하고 통합하는 게 보수의 가치입니다. 이 정의로운 가치를 왜 국민들이 불신하고 외면했을까요. 서로 고집부리고 권력다툼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한다면 보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들은 첨수통(첨단수사통) 검사
  
  한편 최근 드루킹 여론 조작 사건 특검에 정 전 총리의 아들 정우준 검사가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정 전 총리는 아들 관련 질문에 눈을 반짝이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 공대를 졸업하고 공학박사 수료까지 한 검사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남들은 한 가지 하기도 어려운데 교육 비법이 있습니까. 
  
  “아들 의사를 존중한 거죠. 내가 검사생활을 하면서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 아들이 초등학교만 5군데를 다녔어요. 고등학교 갈 때는 강남으로 가야겠다 해서 이사를 갔는데 배정에 필요한 개월 수가 모자라 용산고등학교로 배정받은 겁니다. 강남에서 용산까지 실어나르면서 곧 전학을 준비하려 했는데 1년 지나니까 전교 수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강남으로 안 가고 계속 다녔는데 학교에 이공계 선배들 중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쪽으로 관심을 갖더군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연세대 의대 두 군데 합격했는데 공대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졸업하고 대학원 수료할 때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대가 뜨고 이공계가 홀대받는 상황이 왔습니다. 본인이 전문직에 도전하고 싶다기에 2년만 두고 보자고 하고 기다렸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검사가 되고 나서 공대 출신이라고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사이버범죄도 많이 일어나고 하니 그 분야에선 나름 인정받는 것 같아요.”⊙

2018년 9월 29일 토요일

‘우리민족끼리’ 구호에 숨은 함정

이춘근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2015년 10월 10일 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 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 청년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횃불 퍼포먼스가 열렸다. 횃불 공연 참석자들이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이라는 글자를 선보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한반도 문제가 세계 정치의 고약한 문제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일이었으니 한반도 문제가 불거진 지 벌써 75년 이상이 되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미국, 영국, 중국(당시 장제스의 중국)의 수뇌들은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에 유념(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하여 ‘한국을 적당한 절차를 거쳐 자유독립국가로 만들어줄 것을 결심했다(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부, 그리고 북한의 지도층 전부와 이들의 선전에 세뇌당한 북한 주민들 다수는 김일성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사실 오늘의 한국 문제를 규정하는 분단, 전쟁, 갈등은 그 대부분이 국제정치적 원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도출해냈다는 사실이 한국의 광복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분단의 역사는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그림이 나오지만, 종북 좌파인사들 전부와 상당수의 한국 국민들은 한반도의 분단 원인에 대해 입버릇처럼 ‘미국 놈들이 잘랐다’고 말한다.
   
   한국 현대 역사상 가장 처절한 재난이었던 6·25전쟁도 국제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침략전쟁을 시작하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당시 기준 최신형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도 20개국에 이른다. 당대 세계의 강대국들이 모두 싸웠다. 처음에는 극구 부인했지만 소련 조종사들의 참전이 확인되었고 심지어 일본 자위대 병사들도 소해(掃海)작전에 참여했던 세계적 전쟁이었다. 
   
   아무튼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위한 남침 전쟁은, 중국(당시 중공)과 소련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및 소련 국제공산당이 신생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을 방치할 수 없는 미국과 자유진영은 전쟁 발발 단 일주일 만에 군사력을 한반도에 다시 배치, 공산군과 전투를 벌일 정도로 신속히 대처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 한반도는 세계 각국에서 온 군인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공산주의 침략의 예봉을 꺾은 유엔군은 한반도를 자유 통일시킬 목적으로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갔다. 북한 공산정권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진 1950년 10월 하순, 중국은 처음에는 은밀하게 그리고 곧바로 공개적으로 무려 130만명의 중공군을 한국 전역(戰域)에 투입했다. 중공은 음흉하게도 이들 군사력이 중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는 북한을 돕기 위해 스스로 파견된 군대, 즉 인민지원군(人民支援軍)이라고 불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약 3년1개월 동안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남북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 소련, 중국, 유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휴전을 끝끝내 반대했던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체결을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북한 역시 한국전쟁을 끝내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 후 65년이 지난 2018년 현재 한반도 문제는 별로 나은 방향으로 진전하지 못했다. 2018년 4월 27일 열린 문재인·김정은 판문점회담, 6월 12일 열린 트럼프·김정은 회담 이후 피상적인 측면에서 일시적인 평화무드가 형성되기는 했지만 한반도 국제정세의 저변에는 남북한 중 한 편이 붕괴되어야 끝나는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는 미·일 개입 않는 상황

   
   한반도 문제가 도무지 풀리지 않고 교착상태로 진행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 일각에 북한의 입장을 긍정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한반도 문제의 연원이 소련·중국·북한 등 사회주의 진영의 잘못이기보다는 미 제국주의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의 원인이 소련이기보다는 미국에 있다고 보는 수정주의 좌파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좌익 세력들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 방안은 제국주의 미국과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미군 철수’라는 구호가 6·25전쟁을 통해 공산주의 학정(虐政)을 경험한 한국 국민정서와 도무지 맞지 않는 과격한 구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한국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적어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는 힘든 방법과 구호를 찾아내었다. 그 구호가 바로 ‘우리민족끼리’라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논리는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열정적이다. 한민족의 고통은 분단에서 유래한 것이고, 분단을 초래하고 고착화시킨 것은 외세(外勢)이니 그 외세를 제거하면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간단하게 정리한다. 이처럼 간단한 논리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에게 쉽게 먹혀들어간다. 우파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이 같은 논리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같은 논리는 깔끔하기는 하지만 함정이 많다. 우선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외세는 오로지 미국과 일본을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 등 사회주의 성향의 나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민족끼리’란 다른 말로 미국과 일본이 개입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은 외세가 이미 빠져나가버린 ‘주체의 나라’인 반면 한국은 미군에 의해 주둔, 점령, 착취당하고 있는 ‘식민지 국가’다. 그래서 남한의 시대는 미제강점기인 것이다. 남한 지역은 일장기가 펄럭이던 일제강점기가 끝나자마자 성조기가 펄럭이는 미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들은 ‘우리민족끼리’를 집요하게 외쳤고, 이들의 선전은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반공·보수를 표방한다는 김영삼 대통령조차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민족끼리’라는 주장은 감성적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은 아니다. 우선 이들이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편협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란 동양적 개념도 아니고 더더욱 우리나라의 개념도 아니다. 근대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을 빌려온 것인데 우선 민족이란 언어, 문화, 역사, 관습, 종교, 사상 및 혈통이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이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민족의 요소는 혈통이다. 이들은 북한과 남한이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극도로 강조한다.
   
   
▲ 지난 5월 25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취소 트럼프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중민주당 당원들이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구호를 외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북한은 ‘같은 생각’을 더 중시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서양 사람들이 민족을 말할 때 가장 나중에 거론되는 요소가 ‘같은 혈통’이며 가장 강조되는 요소는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느냐 여부다. 즉 흑인과 백인이라도 역사와 언어, 관습, 종교, 사상이 같은 경우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된다. 오늘날의 미국이 그런 사례다. 서양인들은 피가 달라도 생각이 같으면 한민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도 피가 같으면 같은 민족이 될 수 있으며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북한과 남한은 피가 같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고 우리끼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왜 세상에서 한국인과 피가 제일 가까운 일본을 그토록 배척할까? 사상이 달라도 피가 같아서 함께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일본은 한국과 가장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지만 북한은 스스로를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칭하는 용어인 ‘한민족’은 ‘김일성 민족’과 같은 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피가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이 달라서다. 피가 같아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김일성 집단이 보기에 ‘반동분자’들일 뿐이다.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족속들인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김일성의 언급으로도 증명된다.
   
   남북대화가 막 시작되던 무렵인 1970년대 초반 남북회담을 위해 사상 최초로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북한 대표들은 서울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서울 사람들의 환대에 감정이 들떠 있었을 것이다. 노련한 전략가 김일성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남조선이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해서 부러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가 만반의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일단 유사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게 되면 남조선의 발전된 경제가 다 우리 것이 된다.”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 통일을 이룩하기 이전에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는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다른 한국 사람들, 즉 그들이 ‘꼴통 극우파’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지 묻고 싶다. 피가 같다는 사실이 민족의 본질이고, 그래서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북한 사람들도 다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니까 꼴통들, 자본주의자들도 포용해주기를 바란다.
   
   
   ‘한민족’과 ‘김일성 민족’은 같은가 다른가
   
   필자가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강의할 때 “우리끼리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풀면 될 문제 아니냐?”며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대체적으로 앞에서 말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들 중 오순도순 남북한이 머리를 맞대고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북한이 60년 이상 줄기차게 주장해온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체제는 사실상 하나의 체제이며 주한미군에 대해 똑같은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유는 주한미군이 없어져야 남한을 무력 점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통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좋다고 믿는 사람들인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쟁을 억제(抑制)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주한미군의 존재는 북한의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국 사회 내에서 문자 그대로 정치적 재앙을 불어올 수 있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를 끌어내리자는 촛불시위는 보통 사람들이 그냥 보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군 나가라’는 촛불시위는 태극기 부대와 충돌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촛불을 그대로 방치할 국민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반도 그 자체의 문제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민족끼리’ 주창자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주한미군의 존재를 원하는 외세가 있으니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아시아 주둔 미군, 특히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시키려 했을 때 놀란 나라는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일본도 놀라고 중국도 놀랐다. 미군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일본이 채울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그래서 주한미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이 채우는 최악의 상황에 당면하기보다는 차라리 한국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 말을 그럴듯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우리(중국)는 한반도의 안정을 원한다”고.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통일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필자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끼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듣기 싫은 말이 될 것이지만 한반도 주변 외세 중 한반도의 통일을 구조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는 나라는 단 한 나라 미국뿐이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자.
   
   국제정치학의 무서운 논리는 이웃에 힘센 나라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북한이 통일을 이룩할 경우 통일한국은 중국과 일본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을 권력정치적(Power Politics) 이유에서 찬성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나라(남·북한)가 통일을 이룩해서 강한 나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할 이웃은 없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지정학적 고려사항은 더욱 처절하다. 중국인들은 통일된 한반도를 중국의 뒤통수에 붙어 있는 망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통일된 한반도를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로 인식한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도무지 찬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남한이 통일하는 것도, 북한이 통일하는 것도 모두 원치 않는다. 통일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반도가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1950년 늦가을, 130만 대군을 파견, 이를 막았다. 한반도 통일을 막기 위해 중국은 약 20만명의 전사자, 60만명의 부상자를 감수했다. 중국군 사망자 명단에는 마오쩌둥의 아들 이름도 들어가 있다. 현재 중국과 일본은 각각 종합국력 세계 2위, 3위의 나라다.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세계 2, 3위의 국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이기보다는 환상이다.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외세가 미국인데, 바로 미국만이 한반도 통일을 권력정치적·지정학적 측면에서 반대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솔직히 미국은 지정학적 이유에서 한반도 통일을 원하고 있다. 통일된 한반도는 남한, 북한 중 누가 통일하든 미국 편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운명이 그렇다는 말이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적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민족끼리’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원하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조선일보

2018년 9월 7일 금요일

기암괴석

[주말여행]입술부터 고릴라까지, 산 속의 산 '기암괴석' 찾아떠나다

        속리산 고릴라바위.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산에 간다. 산에 가서 다양한 모습도 본다. 각자 제각기의 시선으로 산을 바라본다. 
 
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산 속의 산이라고나 할까. 산 밖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 있다. 산 속의 모습은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하다.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산,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기암괴석이다. 갖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수천, 수만 년 세월 동안 그 자리 앉아서 만들어진 형상들이다.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도 과연 그럴까.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뭔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산 속의 산의 모습, 기암괴석을 보면 무슨 생각, 느낌이 떠오를까? 그냥 신기하고 우습게만 보일까. 정말 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수행해 열반에 이르렀다는 전설을 간직한 주왕산 연화굴이 수억 년 세월 풍화작용으로 신기한 모습을 보여 준다. 남녀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 같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 개의 버섯이 서로 버티며 자라는 듯하다.
대청도 나이테바위.
월출산 큰바위얼굴.
사람 모습을 띤 북한산 실루엣바위.
북한산 돼지바위.
속리산 황금개바위.
가야산 돌고래바위.
인왕산 뱀바위.
불곡산 악어바위.
도봉산 여성봉.
인왕산 이빨바위.
천관산 남근암. 장흥군 엄길섭 사진
북한산 입술바위.
북한산 합궁바위.
북한산 가슴바위.
백령도 무명바위. 마치 산악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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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2일 일요일

"극우 파시스트로 찍혀 좌파의 표적이 되고, 우파에서도 날 기피했다"

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 양동안씨

야당 시절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발언했다. "1948년 건국(建國)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反)역사적, 반헌법적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맞지만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일절 없다. 북한에서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창건 기념일(9월 9일)'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양동안(73)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이라는 책을 썼다. 당대의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던 인물이라, 객관적 증거와 논리를 제시해도 편향된 주장으로 비칠지 모른다.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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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안 전 교수는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도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8월 15일 같은 날에 '광복절'과 겹쳐 '건국일'은 더 묻혀 왔던 셈인데.

"광복절을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걸로 모두 잘못 알고 있다.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에 의해 해방됐는데 국경일로 만들어 축하했겠나. 1949년 법으로 제정된 국경일은 해방된 날이 아니라 독립을 이룬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그게 '광복절'이었다."

―36년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光復)'이란 표현을 쓴 것이 아닌가?

"해방 공간에서 정치 지도자나 언론기관들은 '해방'과 '광복'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군중집회의 플래카드를 보면 거의 모두 '해방'으로 되어 있었다. 해방 뒤 3년간은 미·소(美蘇) 군정의 시기였다. 이승만은 1947년 연설에서 '광복 대업을 완성하기에 민족 통일이 가장 필요하니…' '광복 사업에 협력하고자…'라고 했다. 광복은 독립, 건국과 같은 뜻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확정했다. 몇 달 뒤 국회에서 '광복절'로 명칭을 고쳐 통과시켰다."

―광복절은 당초 1948년 8·15를 기념하는 것이었다는 건가?
"그렇다. 광복절 명칭으로의 첫 기념식은 1950년 대구에서 열렸다. 전란 통이어서 대구매일신문이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제6회 광복절 기념식'이라고 유일하게 보도했다. 1년 전에 통과된 국경일법을 몰랐고, 횟수 계산도 5회를 6회로 틀리게 했다. 당시 정부의 홍보가 부족했는지 '해방 5주년 광복절 2주년 기념'이라고 쓴 조병옥 내무부 장관을 빼고는 다른 참석자들도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이라고 했다."

―그런 '광복절'이 지금처럼 일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 까닭은?

"이승만이 독재자로서 물러나면서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의 의의를 언급하던 관행마저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학계조차 '대한민국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 자체를 기피했다.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제정됐던 광복절은 해방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굳어졌다."

―8·15 국경일 명칭이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이었다. 한 우파 성향의 학자가 '건국 60주년 기념' 행사를 제기하면서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는 해방 정국에서 반탁·반공 운동을 하고 남한 단독정부에 찬성한 세력에만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며 공격했는데.

"이들의 주류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입장을 취해 온 세력이다. 1948년 건국은 나라의 생일을 정상적으로 찾아주자는 것이다.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하는 것도 해방 공간에서 다른 정파를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했을 뿐이지, '건국'이라는 말은 없었다.

"당시 정부 수립이 너무 어렵게 이뤄졌다. 이 때문에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한 것이다. 영토와 국민은 이미 확보됐고 정부 수립에 맞춰 주권을 인수받기로 돼 있어서 그때 말만 안 했지 '건국'이었던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봤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계승했기에 안 썼던 것은 아닐까?
"이듬해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이라고 했다. 주요 정당과 단체들도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했다. 가령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趙素昻)의 사회당조차 '8·15 이날은 우리 민족 해방 4주년 기념이요 우리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는 성명을 냈다."

―1948년 제헌 헌법의 전문(前文)에는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되어 있다. '민주독립국가 재건(再建)' 구절을 보면 이승만도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님을 인정한 게 아닌가?

"이승만이 어떤 생각에서 이 구절을 넣었는지는 그해 5월 31일 국회의장 취임 연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민주국을 공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정신을 계승해 민국(民國) 건립을 다시 실행하게 됐다'에서 알 수 있다. 1919년에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립 정신을 살려 재건했다는 뜻이다. 1948년 정부수립기념식에서 이승만은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 '새로 건설되는 대한민주국'이라고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이승만은 1948년에 '민국 30년'이라는 연호(年號)를 썼다. 이는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 기점으로 한 것이 아닌가?

"그 직후 국회에서 '단기(檀紀)' 연호를 쓰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왜 자신이 '민국' 연호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3·1운동의 위대한 민주주의 정신을 숭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국' 국체를 선언했으니, '건국'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선언만 했지, 실제 국가를 구성하지 않았다. 국가 조건을 규정한 '몬테비데오 협약'에 따르면 영토·국민·정부·외교 주권 4대 요소를 충족해야 한다. 임시정부는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지배하지도, 국민을 실효적으로 통치하지도 못했다. 주권(主權)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미 건국됐다면 항일독립운동은 무엇을 위해 있었느냐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건국 시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는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를 '복국기(復國期)'로, 조국에 들어가 활동할 시기를 '건국기(建國期)'로 규정했다. 건국은 미래의 사업 과제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는 성명서를 내고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다. 다시 말하면 복국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다'라고 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제는 정권이 나서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는 것 같다.

"과거 좌파 정권은 건국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에서 '건국 50년의 시점에 맞춰 제2 건국 운동을 펼쳐 나가자'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에서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내년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임시정부는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해야지, 건국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창당준비위원회를 그 정당의 창당으로, 건물건립추진위원회를 그 건물의 건립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개인적인 얘기를 할까 하는데, 선생은 1988년 발표한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로 낙인찍혔다. 5공(共) 시대가 끝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화를 되찾게 된 시점에서 왜 그런 글을 썼나?

"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부터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관심 많았다. 나는 사회 현상의 표면이 아니라 저변(低邊)을 봤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위 민주화운동의 주도 세력은 민족해방전선과 민중민주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은 민주화를 앞세워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했다. 이들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동안의 무기력과 오류, 부패를 반성하고 정신 차리라는 취지였다."

―글의 목적이 이뤄졌나?
"나는 극우 지식인의 대표로 좌파 진영의 표적만 된 것이 아니었다. 우파 진영에서도 나를 기피했다. 공론(公論) 시장에서는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선생의 이념적 성향과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글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좌익 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엔 완전한 좌익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라는 대목은 상당히 들어맞는 것 같다.

"유치한 예견이었는데…, 나는 사실에 근거해 주장을 펴왔다. 나라는 인간을 '어용 교수' '반동 지식인'이라고 매도하지만 말고 나의 글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달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히 왕따가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런 글을 괜히 썼다는 생각은?
"내가 시원찮은 사람이라 그때 참아봐야 내 인생 크게 바뀌지도 않았겠지. 지식인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옳다고 해도 자기 판단에 옳지 않으면 질러야지, 수적 두려움으로 가만있으면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5년 전부터 파킨슨병(신경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손발을 심하게 떨었고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데는 불편이 없다"고 했다

2018년 7월 4일 수요일

아름다운 순간들

Not many people know that the phrase, “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 was coined by an American by the name of Fredrick R. Barnard to commend the effectiveness of graphics in advertising. However, there’s a Chinese proverb which states that “one picture is worth ten thousand words,” and when it comes to the following pictures, we tend to think that the latter is more appropriate. We’re sure that you’ll agree!

Photos That Say a Thousand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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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idc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