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소설가 백영옥
줄리언 반즈는 소설가가 되기 전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자로 일했고, 옵서버의 방송 비평가와 뉴요커의 런던 특파원으로 일했다. 1980년 첫 소설 '메트로랜드'를 출간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는 이언 매큐언과 함께 영국 최고 작가로 손꼽혔다. 그런 그가 2008년 아내 팻 카바나를 잃었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쓰러졌고 37일 만에 죽었다. 뇌종양이었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었지만 영국의 전설적 문학 에이전트였다. 줄리언 반즈는 인터뷰를 거부했고 5년이나 침묵했다. 아내가 죽은 뒤 그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로 맨부커상을 받았다. 이 책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그가 아내에 대해 쓴 거의 유일한 글이다. 이 책은 모두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문장은 모두 같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 것들을 하나로 합쳐보라. 그때 세상은 변한다."
어떤 사람은(부모나 형제는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결혼해 다시 태어난다. 조셉 캠벨의 말대로 '나'와 '너'가 만나 '우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결혼이라면, 이 부부는 완벽한 팀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비탄을 이겨내게 돼 있을 뿐 아니라 더 강한 인간이 되며,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말로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나에게 그 말은 언어도단에 자화자찬(더불어 지나치게 섣부른 속단)으로 보였다. 아내가 없어진 지금, 내가 무슨 수로 아내와 함께할 때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나는 그가 다만 니체가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 말을 흉내 낸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로선 특히나 허울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한 지 꽤 오래된 경구였다."
심장이 조여왔다. 살면서 나 역시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내 책을 들고 오는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써준 말이기도 했다. 이 말은 곧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그의 말처럼 우리를 죽이지는 못해도 영영 허약하게 만드는 것들은 있다. 나는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상담 전문가를 통해 그런 예를 무수히 보았다. 그들을 '피해 생존자'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책을 덮고 두 시간 가까이 작업실 근처 공원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열고, 절망 속에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하나의 죽음은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죽음에는 한 줄기 빛조차 비추지 못한다"는 E M 포스터의 말이었다.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 눈에는 과거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다른 것이 유령처럼 부유한다. 짝을 잃고 걸음을 멈춘 채 울먹이는 사람들, 자식을 잃은 후 다리를 절게 된 사람들, 로드킬 당한 고양이 시신 앞에서 자신의 현재를 보게 된 사람들 말이다.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별로 잃은 기억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세계를 잃게 된 사람들의 혼잣말이, 결국 혼잣말이 아닌 잃어버린 그 사람과의 대화라는 걸 말이다. 행복했던 기억만 남은 채, 대체 어떤 행복이 가능한가. 행복이 함께 나눌 때라야 가능한 것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내의 죽음으로 그가 얻게 된 고통의 세상 속에는 새로운 기념일들이 다시 기록된다. 아내가 처음으로 쓰러진 날, 아내가 병원에 간 날, 아내가 퇴원한 날, 아내가 죽은 날, 아내를 묻은 날….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내가 죽은 후, 매일 아내에게 들려줄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들인 소설가 포드 매덕스에 대해 얘기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 내가 자살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자살하면 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욕조의 물이 붉게 변하면서 그녀에 대한 나의 빛나는 기억들이 희미해져 갈 때, 그녀는 두 번째로 죽게 될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아직 그것을 잊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줄리언 반즈의 말처럼 고통은 어쩌면 기억에 풍미를 더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사랑의 뼈아픈 증거이다. 그러나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걸 아는 법이 없다. 다만 그 반대의 것만을 너무나 절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위로받는 법이 결코 없다.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은 죽은 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은유는 영영 사라졌으며, 저승 대신 지하철이 생겼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책 속에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과연 애도에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공은 기억하는 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잊어버리는 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내가 당신에게 바랐을 법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능력인가?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환자의 마음가짐이 임상 의학적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암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암이 우리에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싸워 이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암은 다만 재정비를 하러 잠시 떠나 있을 뿐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사별의 아픔과 싸웠고, 끝내 그것을 극복했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구름이 먼 서쪽으로 밀려나듯 비탄이 스스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갔을 때뿐이다. 줄리언 반즈가 위로받았던 문장 단 하나를 적어둔다. 이 말을 건넨 사람 역시 남편을 잃었다.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어떤 사람은(부모나 형제는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결혼해 다시 태어난다. 조셉 캠벨의 말대로 '나'와 '너'가 만나 '우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결혼이라면, 이 부부는 완벽한 팀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비탄을 이겨내게 돼 있을 뿐 아니라 더 강한 인간이 되며,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말로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나에게 그 말은 언어도단에 자화자찬(더불어 지나치게 섣부른 속단)으로 보였다. 아내가 없어진 지금, 내가 무슨 수로 아내와 함께할 때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나는 그가 다만 니체가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 말을 흉내 낸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로선 특히나 허울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한 지 꽤 오래된 경구였다."
심장이 조여왔다. 살면서 나 역시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내 책을 들고 오는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써준 말이기도 했다. 이 말은 곧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그의 말처럼 우리를 죽이지는 못해도 영영 허약하게 만드는 것들은 있다. 나는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상담 전문가를 통해 그런 예를 무수히 보았다. 그들을 '피해 생존자'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책을 덮고 두 시간 가까이 작업실 근처 공원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열고, 절망 속에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하나의 죽음은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죽음에는 한 줄기 빛조차 비추지 못한다"는 E M 포스터의 말이었다.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 눈에는 과거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다른 것이 유령처럼 부유한다. 짝을 잃고 걸음을 멈춘 채 울먹이는 사람들, 자식을 잃은 후 다리를 절게 된 사람들, 로드킬 당한 고양이 시신 앞에서 자신의 현재를 보게 된 사람들 말이다.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별로 잃은 기억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세계를 잃게 된 사람들의 혼잣말이, 결국 혼잣말이 아닌 잃어버린 그 사람과의 대화라는 걸 말이다. 행복했던 기억만 남은 채, 대체 어떤 행복이 가능한가. 행복이 함께 나눌 때라야 가능한 것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내의 죽음으로 그가 얻게 된 고통의 세상 속에는 새로운 기념일들이 다시 기록된다. 아내가 처음으로 쓰러진 날, 아내가 병원에 간 날, 아내가 퇴원한 날, 아내가 죽은 날, 아내를 묻은 날….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내가 죽은 후, 매일 아내에게 들려줄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들인 소설가 포드 매덕스에 대해 얘기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 내가 자살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자살하면 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욕조의 물이 붉게 변하면서 그녀에 대한 나의 빛나는 기억들이 희미해져 갈 때, 그녀는 두 번째로 죽게 될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아직 그것을 잊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줄리언 반즈의 말처럼 고통은 어쩌면 기억에 풍미를 더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사랑의 뼈아픈 증거이다. 그러나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걸 아는 법이 없다. 다만 그 반대의 것만을 너무나 절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위로받는 법이 결코 없다.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은 죽은 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은유는 영영 사라졌으며, 저승 대신 지하철이 생겼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책 속에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과연 애도에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공은 기억하는 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잊어버리는 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내가 당신에게 바랐을 법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능력인가?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환자의 마음가짐이 임상 의학적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암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암이 우리에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싸워 이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암은 다만 재정비를 하러 잠시 떠나 있을 뿐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사별의 아픔과 싸웠고, 끝내 그것을 극복했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구름이 먼 서쪽으로 밀려나듯 비탄이 스스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갔을 때뿐이다. 줄리언 반즈가 위로받았던 문장 단 하나를 적어둔다. 이 말을 건넨 사람 역시 남편을 잃었다.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 줄리언 반즈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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