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적, 돌고 돕니다
누군가 미리 낸 순댓국 먹고 집에 돌아온 가출 아들…
그의 어머니도 식당 찾아가 "한 그릇 값 더 내고 갑니다"
서양 '맡겨놓은 커피'가 원조
100여년前 이탈리아서 시작… 美·英·캐나다·호주로 번져
한국선 커피뿐 아니라 칼국수·족발 등 음식까지
나눔도 즐겁게, 유쾌하게
"솔로 남자 드세요" "노래 한곡 부르면 누구나"
캠퍼스선 동아리 선후배 간 情 나누는 방식으로 인기
지난 3월 서울 성북구 안암동 '신의주찹쌀순대'에 한 고등학생이 들어와 물었다. 식당 밖 '미리내 현황판'에 적힌 '순댓국 6그릇'이란 글씨를 본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돈을 낸 거란다. 이리 앉으렴." 최철수 사장이 따끈한 순댓국을 내왔다. 배가 고픈 듯한 학생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웠다. 학생이 방문한 이후 식당 밖 현황판은 '순댓국 5그릇'으로 바뀌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40대 여자 세 명이 식사를 했는데, 계산을 하던 아주머니가 "한 그릇 값 미리 내고 갈게요"라고 했다. 친구들이 "왜 돈을 더 내느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얼마 전 가출한 아들이 여기서 다른 사람이 미리 돈을 낸 걸로 밥을 먹었대. 그걸 먹고 집에 돌아올 맘을 먹었다고 하더라고."
일주일 전 찾아온 학생의 어머니였다. 최 사장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값을 미리 내주는 '미리내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100년 전통 '맡겨놓은 커피'가 단초
'미리내'는 돈을 미리 낸다는 뜻. 미리내 운동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미리 음식이나 음료 값 등을 지불해놓는 일종의 기부 운동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맡겨놓은 커피(Suspended Coffee) 운동'의 한국판인 셈이다.
맡겨놓은 커피 운동은 100여 년 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한 잔 혹은 여러 잔 값을 추가로 지불하고 맡겨두면 나중에 누군가 원하는 사람이 찾아와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한때 자취를 감추는 듯하던 맡겨놓은 커피 운동은 2010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 즈음에 이탈리아에서 '서스펜디드 커피 네트워크'라는 조직이 결성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어려운 지역 주민을 도울 수 있다는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유럽은 물론,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으로 번졌다. 캐나다에서는 '맡겨놓은 식사(Suspended Meal)'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판 맡겨놓은 커피 운동인 '미리내 운동'은 지난해 3월 시작됐다. 경남 산청의 작은 카페 '후후커피숍'이 미리내 가게로 운영된 이후 전국 220여곳으로 늘었다. 참여하는 가게가 많아지면서 미리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음식도 커피에 국한되지 않고 칼국수·족발·떡 등으로 다양해졌다.
미리내 가게 1호점인 후후커피숍은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23㎡(약 7평) 남짓한 가게에서 1년 동안 200여명이 다른 사람을 위한 커피 값을 내고 미리내 운동에 참여했다. 최호림 사장도 매일 아침 첫 잔을 팔면 커피 한 잔을 미리내로 기부한다. 그는 "워낙 시골동네이다 보니 어르신들이 '이게 되겠나?' 하셨는데 요즘에는 어르신들이 먼저 '내가 여기 한 잔 사놓고 갈게' 하신다"고 했다. "둘째(1급 뇌병변장애)가 몸이 불편하다 보니 사람들과 함께 나눔이나 기부 활동을 할 수 있는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나눔'이 익숙해지면 우리 아들이 살기에 좀 더 편한 세상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러던 중 미리내 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김준호 동서울대 교수를 알게 돼 동참했습니다."
김 교수는 외국에서 맡겨놓은 커피 운동이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 미리내 운동을 추진했다고 한다.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홍보하고, 동참할 가게를 찾았다. 후후커피숍을 시작으로 강원도 원주 락복싱클럽, 서울 낙성대 라멘남, 경기 광명 광명왕족발 등 1년 만에 참여 가게가 200곳을 넘겼다.
이들 가게에는 미리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은 간판과 손님들이 음식값을 미리 지불하면서 메시지를 적을 수 있는 미리내 카드 등이 비치된다. 처음에는 김 교수가 이끄는 운동본부가 이들 물품을 지원했으나, 참여가게가 150개를 넘기면서 물품 지원비도 부담이 됐다. 그러자 미리내 운동에 참여한 가게들이 다음 참여 가게에 필요한 물품 비용을 내겠다고 나섰다. 손님들이 음식값을 미리 내는 만큼 미리내 가게 사장들도 다음 가게를 위해 미리 비용을 내겠다는 것. 지금까지 40여개의 미리내 가게가 물품 비용을 기부했다.
◇재미있는 조건 붙은 미리내도 등장
'오므라이스 한 그릇 팀플(팀으로 하는 과제) 스트레스 극심한 분 드세요.' '교문을 향해 절한 사람 고로케 하나 먹어!' '솔로 남자 드세요.'
지난해 10월부터 미리내 운동을 펼친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의 고로케·떡볶이 전문점 '몬스터 고떡'에는 이 운동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 적어놓은 기발한 미션들이 벽에 가득 붙어 있다. 처음에 '명덕남고 고3 학생 먹어라' '아무나 와서 드세요'라고 적혀 있던 미리내 카드에 특별한 행동이나 임무가 조건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 '영·호남 화합을 생각하며 화개장터 노래를 부르고 떡볶이 하나 드세요' '내가 낸 퀴즈 맞힌 사람 고로케 하나 드세요' 등이다. 지금까지 780개의 고로케와 300개의 컵 떡볶이가 이 과정을 거쳐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몬스터 고떡 임상진 사장은 "학생들은 미리내 운동을 친구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재미있는 나눔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요즘은 부모님들의 미리내가 유행이다. '내 딸 남자친구 ○○○, 떡볶이 미리 내고 간다' '사랑하는 딸들, 엄마가 5000원 내고 감'이라고 적힌 카드가 많아졌다. 임 사장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직접 용돈을 줄 수도 있지만 미리내를 해주면 자녀와 대화할 거리가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학가에서는 동아리 선·후배들 간에 미리내 경쟁이 붙기도 했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음식점 '주유소'의 미리내 현판에는 이미 값을 치른 돈가스·오므라이스·회덮밥 숫자 밑에 '광피' '매스켓' 등 동아리 이름과 남은 금액이 적혀 있다. 지난해 회사에 취직한 선배가 오랜만에 학교 앞에 왔다가 동아리 후배들을 위해 20만원을 내고 가면서 경쟁이 붙었다. 고재일 사장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동아리 선배들도 앞다투어 후배를 위해 밥을 사러 왔다"며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술을 사준 적은 많아도 정작 따뜻한 밥 한 끼를 사준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고 했다.
김준호 교수(미리내 운동본부 대표)는 "기존에는 기부가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한 것에 한정돼 있었다면, 미리내 운동은 큰돈 들이거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친구들과 간식 나눠 먹고 선배가 후배의 밥을 사는 형식으로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돌고 도는 나눔' 확산되기를
부작용도 일부 나타났다. '누구나' '공짜로' '다른 사람이 미리 낸 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미리내 운동 참가자의 호의(好意)를 돈을 아끼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고대 앞 카페 '빈트리 이백이십오'는 공짜 커피를 독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 전부터 미리내 운동으로 모인 음료를 인근 사회복지시설인 '승가원'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주유소'는 미리내를 통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밥'으로 한정했다. 미리내로 모인 돈을 여러 명이 몰려와 술값으로 한 번에 탕진해버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신의주찹쌀순대 최철수 사장은 "형편이 괜찮은데도 공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좀 더 어려운 사람에게 양보하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한다"고 했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의 인도카레 전문점 '오샬'은 미리내로 모인 돈으로 한 달에 한 번 인근 결식아동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이영섭 사장은 "가게가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 이용하기 어렵다"며 "미리내로 모인 금액에 돈을 좀 더 보태서 30만~40만원어치의 음식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미리내 운동에 참여한 직장인 정상훈(31)씨는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예전에 미리 낸 게 돌아온 거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나눔은 돌고 도니까요"라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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