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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7일 목요일

장가와 시집살이의 역사

1. 시집살이는 중국 주자가례의 지침으로 조선 개국세력이 받아들여

정도전, 조준, 배극렴, 권근 등 조선 개국세력은 주자학과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중요시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여인은 혼인하면 음이 양을 따르듯이 남자의 집(시집)으로 따라가서 남자 부모를 받들고 자녀를 양육해야 함은 물론 정절을 지키고 시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조선 개국세력은 고대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혼인관습인 장가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인해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중국 주자가례의 친영과 시집살이를 전 백성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백성은 물론 사대부들도 친영과 시집살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야 시집살이는 정착되나 신랑 집에서 혼례식 하는 친영은 조선말까지도 자리를 못 잡았다.

조선 3대 왕 태종도 왕이 되기 전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장남 양녕대군이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와서야 세종의 이복 여동생 숙순옹주(태종의 13녀) 결혼 때 처음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신랑 윤평이 신부 숙순옹주를 시집으로 데려가 결혼하는 친영을 했다.

세종은 사대부들에게도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과 시집살이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사대부들도 잘 수용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후인 17세기가 지나 18세기경에야 일반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시집살이 역사는 약 300여 년 정도로 추정되고 신사임당도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 혼례 행렬 중 왕후 행렬,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 혼례 행렬 중 왕후 행렬,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2. 남자는 “머슴애”, 여자는 “계집애”란 말은 장가가는 것에서 유래하여

우리말에 남자 아이를 머슴애라고 하고 여자 아이를 계집애라 한다. 요즘 여인들은 계집 애라 하면 여자 아이를 비하하는 말로 듣고 화를 내는데 그 본뜻은 그렇지 않았다. 계집애의 원뜻은 제집 애이다. 혼인을 해도 제집에서 산다고 해서 여자를 제집 애라 불렀고 발음이 변화되어 제집이 계집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혼인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하였다. 이는 장인의 집(장가, 丈家)에 가서 산다는 뜻인데 머슴애는 신랑이 처가에서 마치 머슴처럼 일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부를 “가시버시”라 하는데 가시는 각시 즉 처(妻)이고 남편은 버시라고 했다. 버시 발음이 머시로 변화되고 머시에 애가 붙어 머시애 즉 머시(남편)가 될 아이를 머슴애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남자가 장가가서 사는 것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또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 하는데 신랑이 장인 집에 가서 처가 식구가 되고 열심히 일을 했다. 장인 집에 가 혼례식을 치르고 나서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애걸하면 신부 측 친척들과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밧줄로 묶은 다음 발바닥 등을 때렸다.

한창 매를 맞은 후 겨우 신부와 감격스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눌 수 있었다. 신부와 첫 날밤을 즐기기 위한 대가가 혹독했다. 매 맞지 않는 요즘 신랑들은 정말 행운아들인 것 같다. 남편은 신부와 합방 후 장인 집에서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다가 본가로 돌아갔다. 처가살이는 시집살이가 정착된 조선후기부터는 못난 남자들이 처가에 가 푸대접받으며 생활하는 뜻으로 바뀌었다.


신사임당의 친정(제집) 강릉 오죽헌(왼쪽),친정서 그림그리는 신사임당/박연옥 그림.
신사임당의 친정(제집) 강릉 오죽헌(왼쪽),친정서 그림그리는 신사임당/박연옥 그림.




3. 과거 중국에선 여인이 개에게 시집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중국식 혼인인 육례(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는 신랑 될 남자 측에서 신부 될 여자의 집으로 가서 중매쟁이를 통해 구혼을 시작하는데 주로 사회적 신분과 재산이 비슷한 집안에 혼인을 청한다. 양쪽 집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좋은 날을 정해 혼례식을 한다.

혼인하는 날 신랑이 예물을 갖고 신부 집으로 가서 예물을 신부 집에 주고 신부를 신랑 집에 데려오는데 신랑이 문밖에 먼저 가 있다가 신부를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여 예식인 친영을 한다. 이 친영 절차가 끝나면 혼례식이 완료된다.

중국의 과거 혼인 풍습에선 남녀 연애는 절대 금지이고 처벌의 대상이었다. 혼인 전에 남녀가 얼굴을 본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고 혼인하는 날에야 겨우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시집은 남편 가족들이 사는 집을 뜻하는데 중국 혼인 관습에 따르면 여자는 시집 즉 남편의 집에 가 살면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남편이 죽어도 재혼은 절대 불가능했다.

과거 중국에선 여자가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한국의 시집살이는 중국의 관습과 비슷했으나 친영만은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충혜왕, 아버지 부인 몽골귀족 경화공주 성폭행하고 외숙모까지 능욕

4.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만들기 위한 중국 여인들의 전족

과거 중국은 여인들에게 잔혹하였다. 시집살이만 시키는 것이 아니고 여인들의 발을 묶는 전족(纏足)을 행해 여인들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 성 노리개로 삼았다. 전족은 북송 시대인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행해진 악습이었다.

전족은 3세 정도 여자 아이의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접어 헝겊으로 단단히 감은 다음 아주 작은 신발에 신겨 발이 더는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전족을 할 때 어린 여아들의 고통은 말도 못하게 심하였다.

아래 사진과 같이 성숙한 여인이 되어도 발길이가 10~15 cm 정도밖에 안 되었고 당시 중국 남자들은 10cm 정도 길이의 여인 발을 가장 좋아했다. 전족은 귀족이나 부잣집에서 시작해 일반가정에도 번졌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여인들이 노동해야 하기 때문에 전족하지 않았다. 차라리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여인들이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전족을 한 여인들은 발이 너무 작아 뛰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다. 일상적인 보행도 발끝으로 서서 궁둥이가 뒤로 나오게 하여 좌우를 흔들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이 궁둥이를 좌우로 실룩거리며 걷는 여인의 모습이 중국 남성들에게 성적 자극을 주었다.

전족을 한 여인들은 발끝으로 서서 뒤뚱뒤뚱 오리처럼 걸어 항문 괄약근과 질의 근육이 강해졌다고 한다. 즉 전족은 여성들의 성적 능력 향상을 위해 필요했다. 또한 전족을 하면 뛸 수가 없고 걸음걸이가 매우 느려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도 힘들어 여인들이 도망 못 가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에서 이 전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다행한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도 전족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인들이 버선을 작게 만들어 신었고 발이 작은 여인을 귀인이라 했다.


전족을 한 발과 정상적인 발(왼쪽), 전족을 한 발과 신발.
전족을 한 발과 정상적인 발(왼쪽), 전족을 한 발과 신발.



5. 고려 성종 왕비는 딸 있는 과부, 충선왕은 부왕 죽자 부왕 여인과 결혼해

고려 때는 중국과 전혀 달라 남녀 간의 연애는 물론 이혼과 과부의 재혼도 허용되었는데 귀족과 왕족 사회도 그러했다. 재산상속은 남녀 구분없었고 남녀가 벌거벗고 개울에서 함께 목욕했다.

고려 6대 성종은 딸 하나를 출생한 과부 유씨(4대 광종의 딸, 왕건의 3왕후인 친할머니 유씨 성을 따름)를 첫째 왕비로 맞아 결혼했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는 첫째 부인 정씨가 죽자 남편이 전투 중 전사한 과부 대씨(상장군 대집성의 딸)가 미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녀와 즉시 재혼했다.

당시 대씨는 전남편과 사이에 장성한 아들 오승적이 있었다. 고려시대 여인의 결혼에는 과부든 이혼녀 등 크게 상관없었고 미모가 중요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의 제약이 없어 부인이 여러 명 있어도 첩의 개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에는 후궁제도가 없었고 왕의 부인들을 모두 비라 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남편이 일찍 죽어 젊은 과부가 된 김씨와 1297년 재혼해 숙창원비로 봉했다. 그런데 이 숙창원비 김씨는 남편 충렬왕이 1308년에 죽었는데 제사 지내는 아들 충선왕과 눈이 맞아 성관계를 갖고 곧 재혼해 숙비가 되었다.

미모의 숙비 김씨는 남편 아들인 충선왕에게 온갖 교태와 아양을 떨어 왕을 사로잡은 관능적인 여인이었다. 또한 충선왕의 다른 부인 순비 허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 시 3남 4녀의 어머니였는데 애교와 방중술에 능란한 숙비 김씨와 경쟁에서 밀렸다.

충선왕의 아들 27대 충숙왕은 남편과 이혼한 권씨를 맞아 1335년 수비로 책봉했다.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아들 28대 충혜왕이 아버지의 부인인 몽골귀족 경화 공주와 수비 권씨를 강간했고 외숙모도 능욕했다. 남편 아들한테 강간당한 수비는 다음해인 1340년 죽었다.

어머니격인 경화 공주를 겁탈한 죄로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간 후 경화 공주는 1년 뒤 죽었다. 고려 말 왕들이 대를 이어 개 같이 난잡한 성생활을 했으니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왕 부인과 결혼한 충선왕(왼쪽), 부왕 여인들을 강간한 충혜왕.
부왕 부인과 결혼한 충선왕(왼쪽), 부왕 여인들을 강간한 충혜왕.



6. 고려와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 연구해 한국적 가족시스템 창조해야

고려는 과부와 이혼녀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던 세계 유일의 문명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에 아직도 중국관습인 시집살이의 잔재가 남아 일부 여성들이 명절 스트레스 등 고통을 받고 있다. 시집이 갑이 되어 을이 된 며느리를 압박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한국 사회 선진화의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가는 서구식 핵가족 시스템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핵가족의 강조로 노부모들의 부양을 무시하게 되면 증가하는 노인들의 의료와 복지 문제를 국가가 모두 부담하게 되어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한국은 시집살이를 없애고 장단점들이 서로 많이 다른 고려,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함께 연구하여 글로벌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한국적 가족 시스템을 창조해야 한다. 그러면 노인문제와 육아문제, 여성 사회진출 등에 관련된 문제 등을 해결하며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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