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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5일 화요일

한국전에 종군한 유일한 외국 여기자 히긴스

입력 : 2014.06.25 21:53 | 수정 : 2014.06.25 22:4



"이브닝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또 6월 25일이 돌아왔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내가 꼭 만나러 가는 여자가 있다.

만나는 장소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내가 만나는 여자는 마게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66년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예쁘고 당찬 여자. 그녀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300여명의 외국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64주년 기념일을 앞둔 지난 토요일(6월21일) 나는 집사람과 함께 히긴스의 비석 앞에 서서 그녀의 명복을 또 빌었다.

내가 히긴스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67년 풋내기 조선일보 기자 시절 “대사건과 대기자”라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이 책은 언론인들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받은 기자들과 그들의 대표적 기사들을 모은 것인데, 나는 이 책에서 히긴스의 간단한 약력과 그녀의 대표적 기사인 인천상륙작전 종군기를 번역해 실었었다.

히긴스는 북한 김일성이 남침을 시작하기 나흘 전인 1950년 6월21일 The New York Herald Tribune 신문의 토오쿄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녀는 30세였으나 LIFE 잡지의 유명한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을 보면, 여대생 정도의 귀여운 금발 아가씨로 보였다. 미군 전투복에 전투모를 눌러쓴 그녀는 과연 “이브닝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1950년 10월2일자 LIFE잡지에 실린 히긴스 기자 모습이다.


1950년 10월2일자 LIFE잡지에 실린 히긴스 기자 모습이다.


히긴스는 1920년 아일랜드계 미국인 국제무역인과 프랑스 여자를 부모로 하여 홍콩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중학교까지의 교육을 어머니의 모국 프랑스에서 받았기 때문에 12세까지는 영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잘했고, 중국어에도 능숙했다. 1930년대 초, 그녀는 아버지의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UC버클리)을 다녔다. 대학졸업 후 잠시 캘리포니아의 한 지방 도시의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뉴우욕으로 옮겨가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저널리즘 대학원 석사과정에 등록했다. 재학 중 그녀는 당시 뉴욕 타임즈의 경쟁지였던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의 캠퍼스 통신원으로 일하다가 석사학위 취득과 동시에 정식기자로 채용되었다. 그 때가 마침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라 신문사는 1944년 프랑스어에 능통한 그녀를 유럽특파원으로 보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독일을 향해 진격할 때 히긴스는 종군기자로 처음 군인들을 따라나섰다. 그녀는 미군사령부에서 브립휭 해주는 전황을 받아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최전방을 병사들과 함께 뛰면서 발로 기사를 썼다. 1945년 봄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 그녀는 미군 신문 The Stars & Stripes의 기자인 미군상사(남자) 한 명과 Jeep를 몰고 독일 남부의 다카우 유태인 수용소에 미군보다 먼저 도달했다. 수용소장(독일군 준장)은 그 두 기자를 미군 선발대로 오인하고 백기를 들고 나와 항복하려고 했는데, 이 일화는 미국 언론계의 한 전설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히긴스는 뉴우욕 여기자클럽으로부터 최우수 해외특파원상을 받았고 1948년에는 베를린 공수 작전(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미군이 베를린 시민들에게 생필품을 비행기로 실어나른 사건)을 취재했다. 1949년 중국에 마오저둥(모택동)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신문사는 중국어에 능통한 그녀를 아시아에 파견키로 결정, 1950년 히긴스는 30세의 나이로 토오쿄 특파원 겸 지국장에 임명되었고, 그녀가 일본에 도착한 지 나흘 만인 6월25일 새벽 한국전쟁이 터졌다.

6월27일 히긴스는 일본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 3명(뉴우욕 타임즈의 버튼 크레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즈 비이취, 타임(주간지)의 후랭크 기브니 등 모두 남성)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김포비행장으로 날아왔다. 이 비행기는 서울에 사는 미국 민간인들을 일본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온 특별기였다. 남자 기자들은 히긴스에게 한국전선은 위험하니 일본에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는 여성 기자 한 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태평양 전쟁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친 호머 비가트를 한국전선에 추가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비가트 기자가 히긴스를 몹시 싫어했다. 같은 신문사의 기자,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여기자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가트로서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히긴스가 일본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본사에다 그녀의 파면을 권고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했으나, 히긴스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나중에 출판한 “War in Korea”(한국전쟁)라는 책에서 “나는 여자도 훌륭한 종군기자가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로 결심했다”고 썼다.

히긴스 등 4명의 미국 기자들이 6월27일 오후 김포비행장에 내렸을 때 미군 수송기가 북한 야크기의 공습을 받고 불타고 있었고 미국 군사고문단 장병들은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서울은 아직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자들은 지이프 한 대를 얻어 비가 내리는 김포가도를 달려 서울로 진입했다. 도로는 피난민들의 물결로 가득찼다. 등에 어린애를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인 한국 아낙네들을 히긴스는 처음 보았다. 서울 시내에 들어가 한국 육군본부와 미국 군사고문단이 함께 쓰고 있는 건물에 도착하니 스털링 라이트 대령이 초조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본국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장 대리 역을 맡고 있었던 라이트 대령 자신도 일본서 휴가 중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날아온 직후였다. 히긴스 등 미국 기자들은 마침 그들 앞을 지나가는 채병덕 소장(한국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뚱뚱한 체구의 채소장은 “사태가 우리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장담하면서 급히 자기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날 밤 기자들은 군사고문단 본부 건물 안에서 잠을 청했다. 남자 셋은 따로 한 방에서 자고 히긴스만 사무실 구석에 놓인 군용 침대 위에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이 때만 해도 그녀는 푸른색 스커트와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미군 장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일어나시오! 후퇴 명령이오!”하고 소리쳤다. 히긴스는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 일행과 함께 한강인도교 쪽으로 지프를 몰았다. 다른 3명의 남자 기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름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로 향하는 피난민과 군인들로 도로는 꽉 찼다.

한강다리 폭파 때 NYT와 TIME 기자도 부상

28일 새벽 2시 반쯤 그들이 한강 인도교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오렌지색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히긴스 일행은 적기의 폭격이거나 간첩에 의한 인도교 폭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국군 공병대가 인도교를 예고도 없이 폭파해 버린 것이다.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들과 피난민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이다. 히긴스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 일행보다 앞서 가던 세 기자 중 두 명─ 뉴우욕 타임즈의 버튼 크레인 특파원과 타임의 후랭크 기브니 특파원─은 부상을 당했다. 기브니 기자는 “우리가 탄 지이프 바로 앞에는 한국군을 잔뜩 태운 트럭이 한 대 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트럭 앞에서 다리가 폭파되면서 그 트럭이 우리를 막아주어 우리는 부상만 당하고 목숨은 건졌다”고 나중에 타임에 썼다.

폭파 당시 인도교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히긴스 일행은 무사했으나 한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북한 침략군은 서울로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데 퇴로가 차단당한 수많은 한국군과 미 군사고문단원들, 그리고 피난민들은 어떻게든 한강을 건너려고 백사장으로 몰려갔다. 날이 밝자 한강에 나룻배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 나룻배들을 타고 강을 건넜다. 히긴스는 라이트 대령 일행을 따라 수원 쪽으로 걸어갔다. 비가 와서 진창이 된 논길과 산길을 몇 시간 걸어 수원농대(미군사고문단 임시본부로 쓰고 있었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행방을 몰라 궁금해 했던 다른 세 기자들을 만났다. 두 명은 피묻은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었다. 물론 한강 인도교 폭파 때 구사일생한 크레인 기자와 기브니 기자였다.

히긴스는 한강 인도교 폭파에 관한 기사를 썼으나 뉴우욕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수원에서는 국제전화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뉴우욕 타임스의 크레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즈 비이취 등 두 명의 남자 특파원들과 함께 기사 송고를 위해 미군기를 얻어타고 토오쿄로 날아갔다. 일본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운이 좋았음을 알았다. 28일 아침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프랑스의 AFP통신 특파원과 프랑스 대사관, 영국 대사관 직원들이 붙잡힌 사실을 전해들었던 것이다.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로 첫 기사를 보낸 히긴스는 다음 날(29일)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매카앗서 장군과 단독회견


같은 날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인 5성 장군 Douglas MacArthur(다글러스 매카앗서) 원수도 그의 전용기를 타고 토오쿄로부터 수원으로 날아왔다. (※MacArthur를 ‘맥아더’라 발음하면 미국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매카앗서’가 비교적 정확한 표기다.) 매카앗서 장군은 수원에서 지이프를 타고 흑석동 고갯마루까지 다가가 한강과 서울을 내려다보며 반격 구상을 했다. 수원으로 되돌아간 장군은 임시수도 대전에서 날아온 이승만 한국 대통령과 만나 회담했다. 李대통령은 수원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 북한 야크기의 추격을 받고 하마터면 비행기가 추락할 뻔했다.


29일 오후 늦게 매카앗서 장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수원비행장으로 나왔을 때 히긴스는 비행장 활주로 끝에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장군의 전선 시찰 기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군은 그녀에게 다가가 “토오쿄에 갈테면 내 비행기를 타도 좋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잖아도 송고를 위해 일본으로 가야했던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비행기에 오르자 장군을 수행해온 AP, UP, INS, Reuters 등 주요 통신 토오쿄 지국장들이 히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매카앗서 장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네 지국장들 뿐이었는데, 젊은 기자, 그것도 여성인 히긴스가 장군 전용기에 오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들은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행기 안에서 장군과 단독 회견한 것이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에 특종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히긴스는 감히 장군과 회견할 생각도 못하고 비행기를 얻어 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었는데, 장군의 측근 참모인 휘트니 소장이 그녀에게 먼저 “장군께서 지금 특실에 혼자 계시니 인터뷰할 생각이 있으면 들어가 보시오”라고 귀띔을 해줘서 단독회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70세였던 역전의 노장 매카앗서도 30세 미모의 여기자 히긴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단독 인터뷰에서 장군은 “토오쿄에 도착하는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지상군 파견을 건의할 생각이나 대통령이 내 건의를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토오쿄 도착 즉시 히긴스는 단독회견 기사를 뉴우욕 본사로 송고, scoop(단독보도)를 했다. 같은 신문사 동료 특파원 호머 비가트가 그녀를 더욱 시기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비가트의 끈질긴 불평에도 불구하고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는 히긴스의 한국전쟁 종군을 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기자를 경쟁시킴으로써 더 좋은 기사를 얻어 보도하려고 했다.


6월30일 히긴스는 다시 수원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탄약 수송기에 편승했다. 수원비행장에 내리자 무뚝뚝하게 생긴 미군 대령 하나가 “아가씨, 일본으로 돌아가시오. 여기는 위험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히긴스는 “I wouldn’t be here if there were no trouble. Trouble is news, and the gathering of news is my job!”(위험한 사태가 없으면 나는 여기 오지도 않을 것이오. 위험한 사태는 곧 뉴스며, 뉴스 수집은 나의 임무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워커 장군이 싫어해 전선서 쫓겨나기도

미 8군사령관 Walton Walker(월튼 워커) 중장은 미군이 여성용 화장실과 침실을 따로 만들어줄 만큼 여유가 없으므로 여성 종군기자는 사양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히긴스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해달라고 요청한 일도 없고 요청할 생각도 없다. 나는 옷을 입은 채 아무 데서나 자며,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덤불 숲 뒤에서 볼 일을 본다. 다행히 한국에는 덤불숲이 많아 좋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구의 8군사령부로 워커 장군을 만나러 갔다가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강제로 미군수송기에 실려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히긴스와 그녀의 소속 신문사는 유엔군 총사령관 매카앗서 장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그녀와 개인적으로 친해진 장군은 그녀의 한국전선 종군을 허락했다.<계속>


워커 장군이 히긴스를 한때나마 추방했던 진짜 이유는 그녀가 7월5일의 오산 죽미령 전투(미군 선발대 400여 명이 북한군과 가진 최초의 접전)에 직접 참가, 미군의 참담한 패배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워커 장군은 히긴스의 지나치게 상세한 취재 보도가 일종의 이적행위이며, 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위라면서 특히 그녀를 싫어했다. 그는 또 히긴스가 여성이므로 혹시 전투 중 포로가 되거나 죽으면, 그녀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미군이 뒤집어쓸까봐 염려했었다. 그러나 히긴스의 종군 취재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죽미령 전투 때부터 여성복장을 벗어던지고 미군 사병과 똑같은 복장을 했다(신발만은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그녀는 어깨까지 덮었던 긴 금발머리를 짧게 깎아 전투모 속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뒤에서 보면 그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립스틱만 입술에 살짝 발랐다. 립스틱을 잃어버릴 때는 그나마 바르지 못했다. 전선의 먼지와 연기, 그리고 장마철 한국의 진흙이 튄 그녀의 얼굴은 그래도 매력적이었다. 한 미군 일선 지휘관은 “히긴스는 화장품보다 먼지와 진흙이 더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했다.

히긴스는 최전방 미군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미모도 미모지만 남자 뺨치는 그녀의 담력에 GI(미군)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 서른 살이던 그녀는 스무 살 전후의 사병들에겐 누나 같은 존재였다. 사병들은 전선에서 아름다운 들꽃을 보면 그것을 꺾어 그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휴식 중인 군인들을 취재하고 있는 히긴스(맨 왼쪽).

8월 초 대구 근방 낙동강 전선에서 미 27보병연대가 북한군과 4시간 동안 혈투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때 히긴스는 날아오는 총탄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생병 역할을 자청,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그녀는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위생병들이 많은 부상병들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한 종군기자는 수혈하는 방법을 즉석에서 배워 위생병들을 도왔다”고 썼다. 그러자 27연대장 마이캘리스 대령(나중에 주한 미군사령관이 됨)은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신문에 보낸 독자투고에서 “우리 연대 전투를 보도한 히긴스 기자의 기사에는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히긴스 기자의 그날 행동은 가히 영웅적이었다”고 썼다.

인천상륙, 장진호 후퇴에도 종군, 퓰리처상 받아

히긴스는 9월15일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해병들과 함께 상륙정을 타고 인천 해안에 상륙했다. 이 때의 체험을 그대로 써서 보도한 것이 이듬해(1951년) 그녀가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해병 30명과 기자 2명이 탄 우리의 상륙정이 방파제에 부딪쳤다. 적의 소총 탄환은 계속해서 날아와 우리 주위에 물을 튕겼다. 우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배를 방패 삼아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방파제에 뚫린 큰 구멍으로 들어갔다”라고 썼다. 이 와중에서 한 해병이 실수로 그녀를 군화발로 짓밟고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해병이 내가 여자임을 알아보고 당혹해 하던 모습이란…”이라고 썼다.

히긴스는 함경남도 장진호 지역으로부터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미 해병들도 종군 취재하는 등 항상 최전방 전선을 누볐다. 그리고 그녀가 써보낸 생생한 기사들은 당시 뉴우욕 타임즈의 경쟁지였던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덕분에 그녀는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같은 해 앞서 인용한 “War in Korea”란 책도 출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히긴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10년 더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기자로 활약했다. 이혼남인 공군 장성과 결혼도 했다. 그녀는 1963년 뉴우욕의 일간 신문 Newsday로 자리를 옮기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무렵인 1965년 초 인도차이나 반도 취재를 떠난다. 월남에서 그녀는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 암살 배후에 미국 CIA가 있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미국 정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1965년말 라오스에서 취재 중 급성 풍토병(기생충에 의해 발병)에 걸려 귀국,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1966년 1월, 4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군인이 아니었지만 종군기자로 활약한 업적을 고려해 국립묘지 안장이 허용된 것 같다. 훨씬 나중에 죽은 남편(윌리엄 호올 공군중장)도 먼저 간 아내와 함께 한 평도 될까 말까한 작은 땅에 합장되어있다. 작은 묘비 한쪽에는 남편의 계급, 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이 새겨져 있고, 다른 쪽에는 히긴스의 성명,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그리고 His Wife라는 글 외에 그녀의 화려한 언론인 경력은 한마디도 없다. 미국에서는 사회적 평판이 높은 사람일수록 비석은 더 검소한 것 같다.


히긴스가 1951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 책 표지.
1951년 그녀가 저술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표지.



                                                                                                     조화유   재미(在美)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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