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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5일 화요일

마지막 10년 삶의 질

-영국이 제시한 '좋은 죽음'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존엄 유지하며, 고통 없이… 생애 말기 치료프로그램 가동

호스피스 예산 66%가 기부…실·정부·민간단체 함께 '편안한 죽음'에 대한 준비 호소


영국 런던 해머스미스 지역에 있는 매기 센터(Maggie's Centre) 런던. 아담한 빨간색 2층 건물에 들어서자 커다란 식탁이 나타났다. 버니 바이른 센터장은 "암 환자들이 편히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기쁨'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고 했다. '식탁'은 '함께하는 죽음'의 상징이었다. 이곳의 모토는 '평온(calmness), 명료(clarity), 그리고 한 잔의 차(a cup of tea)'이다.

매기 센터는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영국 내에서 주목받는 비영리 암 힐링 센터이다. 영국 내 14개 센터가 있다. 치료 기관이 아니라 암 환자와 가족들이 무료로 와서 쉬는 '커뮤니티 센터'다. 그런데 연간 10만명 이상이 찾는다. 2008년부터 찰스 왕세자의 부인 커밀라 콘월 공작부인이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이들의 '함께하는 죽음'은 화제다.



'죽음의 질'을 따질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얼마나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느냐'다.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는 '편안한 죽음'을 맞기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다. 영국은 인구 6300만명에 호스피스 병상이 3175개다. 한국은 인구가 5000만명인데 호스피스 병상은 880개뿐이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전 세계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영국이 1등, 우리가 32등에 머문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죽음의 질' 강국이다. 1967년 현대적 호스피스의 시초인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가 런던에 설립됐다. 영국의 관심은 이제 '생애 말기에 대한 사회의 인식 바꾸기'다.

영국 특유의 '나눔' '기부' 전통도 영국인의 마지막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고 있다. 지난 8월 30일 'BBC 라디오 4'의 인기 프로그램 '여성시간(Woman's Hour)'에 피오나 헨드리라는 청취자가 출연했다. "암 투병으로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남편을 지켜보며 '죽음 준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그녀는 '죽음 준비' 전도사를 자청했다. 슬퍼하는 대신 그는 방송에서 "미리 생애 말기를 준비할 수 있는 '장례식 박람회'"를 제안했다.

영국 '호스피스돕기연합(Help the Hospices)'에 따르면 133개(2008년 현재)에 이르는 영국 내 민간 호스피스의 연간 예산은 5억파운드(약 8500억원). 이 중 정부 지원은 34%이고 나머지는 개인이나 단체의 기부로 운영된다. 그만큼 죽음을 위한 기부도 일반화돼 있다.



'죽음' 알리는 사회

처음부터 영국이 죽음에 호의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신사의 나라'인 만큼 죽음 얘기를 꺼리는 문화가 있었다. 사회 분위기를 바꾼 건 정부였다. 2008년 영국 정부는 고령화는 심각해지는데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부족함을 직시하고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생애 말기 치료 전략(The End of Life Care Strategy)' 보고서였다.
죽음의 질 지수 순위.
이때 나온 개념이 '좋은 죽음(Good Death)'.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친구와 함께' '고통 없이' 죽어 가는 것. 이 4가지로 좋은 죽음은 정의됐다. 보고서를 기점으로 정부는 2009년 '생애 말기 치료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비영리단체들도 동참했다. 2009년 출범한 민관합동기구 '다잉 매터스(Dying Matters: 중요한 죽음)'는 영국 보건부와 전국완화치료위원회(National Council for Palliative Care·NCPC)가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바꾸자"는 취지로 2009년 만든 단체다. 해마다 5월이면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 행사를 연다. 이브 리처드슨 '다잉 매터스' 대표는 "거리낌 없이 생의 마지막을 얘기하고 직시하는 사회에서 '잘 살고 잘 죽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죽음의 질' 1위라는 명성은 '의료 인프라(practice)' '정책(policy)' '사회 인식(public)' 삼박자 위에 얻어진 것이다.




  • 10년 새 壽命(수명) 3년 

    더 늘었지만… 

    그중에 2년은 질병 안고 

    사는 기간



  • 개개인의 의료 기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봐도 누가, 언제, 어떤 병에, 왜 걸렸는지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다. 변수(變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천만명의 의료 기록을 끈질기게 분석하면 질병별·지역별·세대별로 독특한 패턴이 드러난다. 고려대 박유성·김기환 교수팀이 국내 최초로 2002~2010년 건강보험 전 국민 진료 기록을 분석해보니, 한국인은 같은 노인이라도 의료 인프라, 경제적 수준, 생활문화에 따라 지역별로 생로병사(生老病死) 패턴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질병 패턴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인의 목숨을 주로 빼앗는 9가지 질병은 ①결핵 ②암 ③당뇨병 ④고혈압성 질환 ⑤심장 질환 ⑥뇌혈관 질환 ⑦폐렴 ⑧만성 하기도 질환(호흡기병) ⑨간 질환이다.

    고려대 연구팀이 빅데이터를 연령별로 쪼개서 들여다보니, 전 국민이 끙끙 앓으면서 오래 살게 된 현실이 실감 나게 드러났다. 암·당뇨, 심장·뇌혈관 질환 등에서 '환자는 늘고 사망자는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현재 남녀 공히 사망 원인 1위는 암(癌)이다. 맨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2002년)와 비교하면, 60세를 기점으로 환자 수가 급속히 치솟다가 70대 후반에 정점에 이른다. 반면 사망률은 과거 노인들보다 낮아졌다.

    질병 별 죽기 전에 앓는 기간 그래프


    암 이외 다른 질병 가운데 남자는 상대적으로 간 질환 사망률이 높고, 여자는 심·뇌혈관 질환 사망률이 높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뇌경색이나 뇌출혈 등 뇌혈관 질환에서 나타났다. 과거보다 노년기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그래픽 참조〉. 처음 발병하는 나이도 앞당겨져서 50세부터 환자가 확연히 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망자는 도리어 예전보다 줄었다. 치료 기술의 발달과 조기 약물 투여의 효과로 보인다. 그만큼 뇌혈관 질환 후유증을 안고 말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이 부쩍 늘고 있다는 의미다.

    심장병도 유사한 형태다. 환자는 늘고, 사망률은 그대로다. 노년에 심장병 치료로 활동 반경이 줄어든 환자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당뇨병 환자는 30대 후반부터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고 있다. 조기 발병 추세가 확연하다. 70대가 되면 3명 중 한 명이 당뇨병 환자로 나온다. 조사 시작 시점에는 같은 연령대 한국인 10명 중 1명만 당뇨병 환자였다. 이 병도 사망률은 과거보다 감소했다. 이 추세라면 인생 후반 40년을 당뇨병과 살아가는 사람이 주변에 부지기수로 보인다.

    간 질환은 발생자 변화가 없으나 사망률은 확 줄었다. 간염 백신 보급으로 젊은 층에서 환자가 줄고, 간염 바이러스 치료제의 확산으로 사망자는 줄어든 결과다. 간 질환이 40~50대에 많은 것은 여전하다.

    고혈압은 30세부터 조기 발생하고 있다. 60대 후반에는 절반이 고혈압이다. 비만 인구가 늘었고, 외식(外食)의 증가로 짜게 먹는 계층이 많아진 탓이다. 폐렴 발생과 사망은 노년으로 갈수록 꾸준히 늘고 있다.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됐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오래 앓게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수명에 관한 한 한국인은 체력도 없는데 멋모르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멋진 돌을 욕심껏 배낭에 쟁여 넣었다가,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려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비유했다.

    현대 의학의 발전이 기정사실이라면, 그것이 개인과 국가에 다 같이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려대 연구팀은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 수명 연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번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분명해졌다"면서 "빠른 속도로 노인이 늘고 있는 대한민국이 고령화의 파도를 어떻게 넘을지 국가 차원의 큰 그림과 개인 차원의 작은 그림을 둘 다 서둘러 그려야 한다"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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