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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6일 목요일

[이인호 칼럼] 반역인가 무지인가?

일제로부터의 해방 75주년, 대한민국 건국 72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이제 여드레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감사의 묵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정치권력은 이미 우리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독립국가로 출범했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기념하기는 고사하고 그 역사적 사실과 함께 자유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실체를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세력에게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과 북한주민들 앞에서 자기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남측 대통령’이라 불렀고 북한이 마치 자기 나라 인 듯 착각하는 듯한 그의 골수 측근들이 이제 행정부는 물론 입법, 사법까지 3부를 모두 독점했다. 국정원, 검찰, 경찰, 군대 등 권력기구 모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길 드리고 있는데 이 나라가 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은 이미 ‘촛불혁명’으로 자유민주 공화국으로서의 국가적 기반을 파괴당한 것인데 70년간 굴러온 관성 때문에 이직까지도 국민은 그 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가 주권자로서 법 앞에 평등을 누리는 자유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이 우대 대상으로 지정하는 집단이나 개인들 만이 법의 단속도 받지 않을 수 있는 특권층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들 집단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지령과 변덕스런 해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피지배집단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법을 마구 무시해도 상관없는 선거는 이제 요식행위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 국민은 이미 민주국가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며 대응하지 않고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함을 넘쳐 공포심까지 자아내는 정치, 문화, 사회 현상들을 결코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숨쉬기 조차 어렵게 바짝 조여오는 불안과 압박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은 물론이다.

70년 넘게 피와 땀으로 쌓아온 민주주의의 토대가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지는 원인이 이전의 반체제, 현재의 집권세력의 반역인가 무지인가? 아마도 그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목매게 외쳤지만 민주주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현실적 뒷 바침이 필요한가, 어떨 때 그것이 실패하게 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뿐인 몰이해에 더해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권력에 대한 욕구를 오래 억제 당해 왔던 사람들 특유의 탐욕과 증오, 그리고 자기기만으로 까지 치닫는 도덕적 선민의식과 오만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자기는 오랫동안 약자와 피해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주장은 모두 옳은 것일 수 밖에 없고 자기의 행동은 항상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일종의 역선민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현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소위 “진보” 이념이란 100년도 더 넘게 낡았고 이미 역사의 심판에서 판정패를 받은 레닌주의적 혁명이론의 훨씬 더 거친 아류에 불과하다. 조금만 역사와 현실정치에 관해 공부를 했으면 그런 이념을 현실에 옮기려 했던 시도들이 어떻게 철저하게 실패했는가를 알고 더구나 그 세력 내에서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종말은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로 옮겨진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란 정치경제 도덕 모든 면에서 파탄을 맞게 된다는 것은 러시아나 동유럽, 쿠바 등 사례를 통해 역사가 거듭 증명하고도 남으며 인기영합주의의 위험은 남미에서 특히 두드러진 사례를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재인 집권 3년차부터는 이미 소득주도성장을 비롯한 파격적인 이른바 친서민 정책의 역효과가 애꿎은 서민층의 곤욕으로 들어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친북, 친중, 친 서민적 인기영합주의란 결국 권력갈취와 독점을 위한 수단일 뿐 어떤 심오한 정치철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 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세우며 정 정권 실세들에 대해 가혹한 토벌행위를 자행했던 신 정권이 각종의 심각한 정치, 경제 관련 부정에 휘말리면서 도덕적 권위는 급속히 실추되었다. 특히 조국과 윤미향 사건, 그에 뒤이어 자살한 박원순 시장에 대한 서울특별시장 집행 등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서민층에게 까지도 이 정권의 반역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런 모든 일을 겪고도 4.15 선거에서 문재인 세력은 압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선거부정 가능성을 열어둔다 하더라도 국민이 단호하게 부정적 심판을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대한민국 몰락의 단서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 반 대한민국 세력이 대한민국의 전복을 통한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 목숨 밖에 잃을 것이 없다는 결기로 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상적 좌우 대립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반대한민국적 체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국민가운데 극히 소수일 수 밖에 없었다. 기대치를 넘은 빠른 경제성장의 성과는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흔적마저 지울 수 있을 듯 했다. 더구나 유럽과 러시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은 북한에 대해 판정승을 거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몰락의 시작이 될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의 이기주의와 안일함, 정신적 나태와 비굴함은 반체제 좌익 세력의 탐욕과 분노와 무지 못지 않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헛개비처럼 무너져 내리는데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의 현 세대는 그 들의 선대들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자유와 안정과 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소중하다함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식도 없었다. 대한민국 독립과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독재자”, 심지어는 “친일파”로 몰아도,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삭제 한다 해도, “제헌절”을 국경일에서 제외한다 해도 어떤 반국가적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은가를 의심 할 줄 몰랐고 항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마치 평화통일이나 서민의 권익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체제인양 좌파의 “민중, 민주, 민주, 평화” 의 구호 앞에 주눅이 들어 뒷거름 치기를 거듭했고 심지어는 인류보편의 인도주의, 민주주의 가치들이 소위 “진보” 좌파의 선동적 구호 앞에서 마구 짓밟혀도 제어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역사라는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가며 변화에 적응 못하는 존재는 모두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원칙들도 있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들도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나라가 그렇지 않은 개인이나 사회보다는 더 번영하고 또 열심히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 문재인 정권의 경제사회 정책에서는 그 원칙이 배격 당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절약하여 제대로 된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한 사람은 죄인취급을 받는다. 국가 보조금을 받는 것, 곧 남의 노력덕분에 내가 혜택을 받는 일이 고마워 해야 할 일이 아니고 당연한 권리요 자랑으로 여기는 풍조가 복지국가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팽배해 가고 있다. 이러고도 나라가 온전 할 수 있을까. 주택정책의 실패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드디어 반정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민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당장 느낄 수 있는 경제적 권익 문제뿐 아니라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여객선 침몰사고의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추모에 소모되는 국민의 혈세가 전사한 국군장병들을 위해 쓰이는 예산과 비교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러도,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평화롭게 이루어 지는 나라에서 대중시위로 대통령을 몰아내는 일이 참여 “민주주의”로 포장되어도, 대통령이 자기의 조수격이었던 여자와 “경제공동체”를 이룬다는 기상천외의 법이론이 나와도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항의를 하지 않았고 드디어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돌아갈 돈을 갈취한 혐의를 받는 사람이 그 “공로”로 국회의원이 되어도 속수 무책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나 경제만이 아니다. 이성적 사고의 능력, 도덕적 판단의 기준, 사회 기강, 국민 의식, 민족적 자긍심이 모두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이 집권세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이 무엇보다도 큰 비극이다. 죽음 앞에 사람은 모두가 평등해지고 죽은 자 앞에서 산 자는 무한히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다. 고 박원순 시장의 불의의 사망에 대해 애도하고 가족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자살을 한 사람을 위해 명예장례식을 치뤄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게 방지하자는 취지에서 동서고금 거의 모든 문화권이 자살을 죄악시 하는 데 우리는 자살을 격려하는 듯한 관행으로 지금 치닫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자살이 단순히 자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살을 당했다”는 표현까지 돌고 있는 마당에서 저명인들의 자살을 부검도 없이 신속하게 처리한다는 것을 좌우, 여야 구분을 떠나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자살한 서울시장에 대한 처우와 대조되는 것이 고 백선엽장군에 대한 홀대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국립묘지를 만드는데 주역을 한 인물을 청년기에 일본군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아, 심지어는 어떤 여 교수처럼 우리민족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모시기에 부적절하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다면 어떤 궤변도 어떤 거짓도 횡포도 통용될 수 있다. 설사 일제치하 20대 초반의 우리 청년이 우리독립군과 싸우는 부대에 편입되었던 일이 있었다 가정하더라도 그는 평생 친일파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하는가? 운동권 학생이 반체제 시위로 처벌받은 일이 있었다 해서 그가 평생 반역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합리적, 도적적 사유가 결여되면 결국 결국 대화는 통하지 않고 폭력 밖에 기댈 곳이 없어지는 사회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까지 오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데 대한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현 집권세력뿐 아니라 이제 정치권력은 완전히 상실했지만 사회적 책임은 면제 받을 수는 없는 대한민국 기득권세력에게도 있지 않은가 한다. 스스로 반성해서 뒤늦게나마 속죄하는 의미에서 사태를 바로 잡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다가 반성을 강요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비극의 규모는 그 만큼 더 커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73주년 광복절을 맞으면서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번영을 위해 혼신투구 하셨던 선열들 앞에서 아무리 깊히 고개를 숙여 사죄해도 모자라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이념적 토대가 건실했고 그 때문에 잘 나가던 나라를 지켜내기 조차 못하는 못난 후진들을 위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실 것을 간절히 빌어야 할 것이다.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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