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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4일 토요일

김형석 교수님 대담

조선일보에 난 글을 옮긴다. 학교 동창 김성우의 아버님으로 중학교 시절 연희동 근처에 있는 댁에 놀라 가서 뵈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인자하셔서 아들의 친구들을 환대해 주시던 모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 살아난다. 말씀대로 가진 것을 나누며 타인의 행복을 위하셔 매진하신 고결한 품성을 다시금 감사하게 된다.



[박돈규 기자의 2시만루] 98세 老철학자의 파안대소
100세 앞두고 "행복했다" 자부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인생론
"현실은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 흑백논리 빨리 벗어나야"

노(老)교수는 이를 드러내며 소년처럼 웃었다. 도산 안창호(1878~1938) 강연을 듣고 윤동주(1917~1945) 시인과 동문수학하고 정진석(86) 추기경을 제자로 둔 그는 아흔여덟 살인데도 나무처럼 꼿꼿했다. 틀니나 보청기나 지팡이 같은 노년의 그림자는 없었다. 지난해 펴낸 책 '백년을 살아보니'는 10만부 판매됐고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강의를 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 100년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철학자다. 조선일보가 창간된 1920년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에 광복을 맞았지만 환희는 짧았다. 공산주의를 경험하다 탈북했고 서른 살에 6·25 전쟁, 40대엔 4·19 혁명을 목격했다. 지난 21일 서울 연희동 단독주택. 책상에는 200자 원고지와 펜, 국어대사전과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고령에도 일하는 데 진력나지 않느냐 묻자 철학자는 "여든 살이 될 때 좀 쉬어 봤는데 노는 게 더 힘들더라"며 덧붙였다. "내게는 일이 인생이에요. 남들은 늙어서도 그렇게 바쁜데 행복하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 못하는 행복이 뭔고 하니, 내 일 덕분에 무엇인가 받아들인 상대방이 행복해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게 제 행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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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를 바라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인생 마라톤의 마지막 구간을 어떻게 달릴지 궁리 중이다. 가수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와 같다. 그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 더 보람 있는 삶을 위해 주어진 기회라고 믿는다”고 했다. 오른쪽엔 그의 육필 원고가 있다. / 이태경 기자
'성공=행복' 등식은 깨져―그때 얼마나 쉬셨어요?

"한 1년 가까이요. 쉬니까 힘들어서 다시 일을 시작했죠. 철학자로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끝까지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책에는 '60의 성능을 타고나 70의 결실을 거두면 성공한 사람이고, 90의 가능성이 주어졌는데 70에 머무르면 실패한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행복과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사람들은 행복과 성공을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하지요. 성공한 사람은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은 성공했다고들 말해요. 그런데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제 손녀가 미국에서 MIT 졸업하고 애플에 취직했거든요. 무한 경쟁이에요. 하나 성취하면 또 다음 과제가 주어지고 또 그다음이 오고. 안 그러면 밀려난대요. 성공한 것 같지만 행복하진 않은 겁니다. 끝나지 않는 등산을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럼 언제 즐거움을 느끼죠?

"그 직장에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에 가까워요. 제가 어느 대학 교수 채용 심사에 가보니 삼성그룹 부장급 여성이 응시한 겁니다. 봉급도 많고 대우도 좋을 텐데 왜 이쪽으로 오는지 물었지요. 너무 일에 쪼들리고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라고 합디다. 일의 성취로만 행복을 가늠하면 상실감만 커지고 불행해져요."

철학을 전공했는데 일찍부터 인생 설계가 있었나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어요. 아르바이트하며 대학에 다녔고 해방 되고 자리 잡히기도 전에 무일푼으로 탈북했고 겨우 안정을 찾는가 싶었을 때 전쟁이 터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철학 교수를 하면서 글을 써서 젊은이들 인생관과 가치관을 잡아주는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철학 독자는 없지만 수필 독자는 많지요.

"밖에 나가면 수필 쓴 교수로 통했어요. 우리 철학과 교수들은 '궤도 밖 외도'라고 손가락질했지요. 나와 더불어 '철학계 삼총사'로 통하는 안병욱 숭실대 교수, 김태길 서울대 교수한테도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 철학에 대한 기대는 낮아도 인문학에 대한 기대는 확대됐잖아요. '나는 나다. 시선에 구애받지 말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나와 더불어 사회가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게 더 크지, 상아탑이 학문의 전부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내 책이나 강의에 행복해하면 그 기운이 나한테 돌아옵니다. 그러니 출간도 강연도 많아요."

100세를 바라보는 노익장이네요.

"솔직히 90 고개를 넘고 나니 내 건강, 내 노력의 한계를 자꾸 느껴요. 피곤하고 힘들고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은 요즘 인사가 '힘드시죠?'예요(웃음)."

일제강점기 겪어 보니

김형석 교수의 1930년대 말 평양 숭실학교 졸업사진
김형석 교수의 1930년대 말 평양 숭실학교 졸업사진 / 양구인문학박물관
이날 인터뷰하는 100분 동안 김 교수의 폴더폰이 두 번 울렸다. 안창호기념사업회를 비롯한 강의 요청이었다. 그는 "고맙게도 내 강연을 듣는 대상이 기업체, 금융연수원, 교회, 학교 등 아주 다양하다"고 했다.

―수입도 짭짤하시겠습니다.

"미국 사는 딸이 그래요. 아들·딸·사위 다 정년퇴직했는데 아버지 혼자 일하신다고. 그래서 난 행복해요. 재밌는 건 전에는 아들·딸들이 용돈을 갖다 줬거든요. 식사를 하면 으레 자기네가 계산하고. 그런데 요새는 '(돈 버는) 아버지가 내세요' 합니다. 하하하."

―저축이나 펀드도 하시나요?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입이 많진 않아요. 내 노력으로 얻은 건 내가 써도 괜찮고, 상금이나 기타 수입은 쓰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수입이 있으면 돈 들어갈 구멍 많아요(웃음)."

도산의 마지막 강연을 들으셨다고요?

"도산 선생이 감옥에 있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우리 시골마을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죠. 살다 보니 나를 오늘까지 키워준 분은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에요. 도산에게는 애국심을, 인촌에게선 인간관계를 배웠지요. 이승만 박사가 왜 실패했는고 하니 소인배와 아첨꾼을 썼기 때문이에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편가르기를 했어요. 내 사람, 같이 일할 사람, 영 아닌 사람으로 나눴고 아닌 사람은 당 내에서까지 내쳤죠. 그렇게 분열되면 정치 못 해요."

인촌에 대한 친일 논란은 어떻게 보시나요.

"만약 내가 인촌 선생한테 '선생님, 친일분자라는데 속상하시죠?' 물으면 '그건 괜찮아,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면 돼' 하실 분이에요. 국민 대부분은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잖아요. 내 경우인데, 숭실학교 다닐 때 갈림길에 섰어요. 신사참배하고 학교를 다니느냐 거부하고 자퇴하느냐. 같이 공부하던 윤동주 시인은 그게 싫어 중3 때 만주로 떠났지요. 저는 자퇴하고 1년 동안 학교 안 다니다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 복학했습니다. 그때 똑똑히 봤어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신사참배를 갔는데 저는 키가 작아 맨 앞줄에서 교장 선생님을 따라 들어갔어요. 나오다 그이가 돌아서는데 얼굴 주름살 위로 눈물이 죽 흘러내렸어요. 신사참배 안 해도 되는 분이 우리 때문에 하셨구나, 학교와 학생을 지키려고 십자가를 지셨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누구는 그를 친일파라 하겠지만 저는 부정합니다. 그때는 이름 있고 한자리씩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그런 일이 아주 많았어요. 정황도 모르면서 어떤 기록이 나왔으니 친일파다 하는 건 섣부르고 얕은 생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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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 원고와 국어대사전, 돋보기가 놓여 있는 김형석 교수의 책상. 이렇게 쓴 원고를 수강생인 이종옥 생명의전화 이사가 타이핑하고 교정을 해준다. / 박돈규 기자
“흑백논리 빨리 벗어나야”김 교수는 우리 민족성 가운데 시급히 고쳐야 할 단점으로 절대주의 사고 방식을 뒷받침하는 흑백논리를 꼽았다. 흑과 백은 이론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는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이 있을 뿐인데 우리 선조들은 ‘회색분자’를 나쁘게 평가했다. 그는 “흑백논리를 갖고 싸우는 동안 인간과 사회는 버림받거나 병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부분적인 단점 때문에 더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요즘 인사청문회 보셨습니까.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문제가 좀 많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반항하는 게 정의다’라는 통념이 100년 넘게 내려왔어요. 조선 말의 동학,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대한민국에서도 독재정권에 반항하는 게 정의가 됐어요. 반항은 정의, 순응은 불의인 겁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 의식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이 좌파예요. 좌파는 철학 자체가 살기 위해서 항상 적(敵)을 둬야 하거든요.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과거에 한 언행을 기준으로 보면 인준을 못 받는다는 걸 알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좌파는 목적을 설정하면 거기 도달할 때까지는 어떤 수단·방법을 써도 정의예요. 운동권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돼 목적만 있다면 자신에 대해 관대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과정은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 가진 사람들이 친일파 명단을 만들었다고 봐요. 김일성은 내 고향 사람이었어요. 김성주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지요. 우리 가족과 조반을 먹다가 ‘오래 국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내가 물었어요.”

―어떻게 답하던가요?

“첫째 친일파 숙청, 둘째 토지 국유화, 셋째 재벌과 지주 숙청…. 죽 읊는데 아, 저 사람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구나 했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말하길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했는데 남한은 포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적 이분법이죠. 공산 치하에서 저는 일제강점기보다 더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어요. 자유를 향해서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탈북했죠. 주체사상 이론가였던 황장엽씨는 말년에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에 남았다가 일생을 무의미하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책에는 ‘경험주의가 필요하다’고 쓰셨습니다.
“학문이나 사상은 합리주의가 앞설 때도 있지만 정치나 경제는 경험주의를 택해야 해요. 현실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개선해 나가는 겁니다. 실제로 경험·공리·실용의 가치를 추구한 사회가 열매를 거두고 있어요. 극성스럽게 반미(反美)를 외치던 중국도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생각이 같으면 대화보다 행동이 필요하고 생각이 다를 때는 상대방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버릴 건 버리고 고칠 건 고친 다음에 나와 네가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가야죠.”
인생 황금기는 60~75세
98세 철학자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잔다. 하루 한 시간쯤 산책하며 강의나 원고를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일주일에 세 번 수영장에 간다. 그는 “늙은 사람에겐 생활 자체가 운동을 동반하는 습관이어야 한다”며 “내 방은 2층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층층대를 오르내린다”고 했다.

―낮잠도 주무시나요?

“잠깐씩 잘 자요. 낼모레 충북 제천에 강의 갈 때는 차 안에서 계속 잘 겁니다. 나한테는 시간 버는 거예요. 일 많이 할 수 있는 습관이죠. 어떤 때는 버스에서도 졸다가 몇 정거장 지나서 내리고 그래요(웃음).”

―65세부터 노년기라고 하죠. 정신력은 여전한데 체력이 달리거나 반대로 몸은 건강한데 정신이 쇠하기 시작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생각 버린 지 오랩니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아요. 저는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라고 믿고 있어요. 요사이도 60분 정도 강연은 서서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늙은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요.”

―책에서 ‘여자 친구’라는 단어를 봤어요.

“하하하. 제가 20년 넘게 병중에 있던 아내를 떠나보냈어요. 오랫동안 혼자 지낸다는 걸 아는 제자가 많아요. 제자도 80이 넘었으니 이제 친구예요. 교정 봐주시고 지방 갈 때 운전도 해주시는 분이 있는데, 어떤 제자가 쓱 보고 묻는 겁니다. 누구시냐고. 제가 그때 머리가 빨리 돌았으면 ‘내 여자 친구다!’ 했을 텐데 그만 차가 출발해버렸어요. 그랬다면 제자가 야, 우리 선생님 최고라며 여기저기 자랑할 텐데 제가 찬스를 놓쳤어요. 하하하.”

―농담 아니고 진짜 없으세요?

“요담에 나이 들어보면 알 텐데 80대까지는 남자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안병욱 선생은 어느 호텔 커피숍 단골이었는데 하루는 거기서 일하던 아가씨가 결혼한다고 주례를 부탁하는 겁니다. 응 그래야지, 했는데 그다음부터 커피 맛이 싹 떨어지더랍니다(웃음).”

―정이 들었군요.

“네. 80대까지는 그래요. 90 고개 넘으니까 남성·여성이 전부 인간애로 바뀝니다. 부부도 처음엔 연정으로 살고 애들 키우며 애정으로 살고 늙은 다음엔 인간애예요.”

―‘한 발로 서 있는 것 같은 쓸쓸함’이라고도 표현하셨는데 빈 구멍들을 어떻게 메우나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이 방, 아내는 저 방에 있었고 전 2층을 썼어요. 어머니가 ‘다 떠나면 집이 비어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셨는데 재혼하라는 뜻인 줄 그땐 몰랐어요. 제게 어머니와 아내는 ‘집’이에요. 이젠 빈집이 됐지요. 안병욱 선생, 김태길 선생도 가니까 온 세상이 빈 것 같았어요. 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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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철학계 삼총사’로 불린 안병욱·김태길·김형석 교수(왼쪽부터). 오른쪽 사진은 김형석·김옥수 부부. 부인 김씨는 20년 넘게 투병하다 2003년 별세했다. / 양구인문학박물관
인생을 쉰 살 이전에 평가하지 말라젊어서는 10년, 20년도 설계하지만 노년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90 언덕 위에 선 뒤부터는 삶의 계획이 2~3년 단위로 짧아졌다고 했다. 한 편의 글을 그냥저냥 쓰다가도 마무리할 때가 되면 누구나 바짝 긴장한다. 육상경기를 할 때도 마지막에 기운을 왕창 쏟고 꽃도 지기 직전에 으뜸으로 화사하다.

―스마트폰 아니고 폴더폰을 쓰시네요.

“전화 걸고 받기만 하면 돼요. 문자도 안 봐요. 요즘 사람들 어딜 가나 다들 여기에 붙잡혀 있는 걸 보면 안쓰러워요. 스마트폰 샀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생각하죠.”

―자녀를 여섯이나 키우셨는데 요즘 한국 사회의 난제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어린애를 수재나 영재로 만들려고 간섭하고 고생시키는 건 볏모를 잡아 빼서 빨리 자라게 하는 것처럼 위험해요. 학교 교육이 진학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강아지도 여섯 마리 모아놓으면 저희끼리 교육이 돼요. 저희 집은 성적이 부진했던 세 아이가 나중에 다 교수가 됐어요. 성적 떨어져도 주눅들 필요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걔들은 기억력이 좋은 것이고 너희는 사고력이 좋으니 길게 보라고. 인생은 50세 이전에는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마지막 구간으로 접어드는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는데, 금년 말쯤 되면 기억력은 괜찮아도 사고력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요. 다행히 오래 살았으니 마무리하고 싶은 걸 미리 준비하자고 생각했어요.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이어 올가을엔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지 담은 책을 냅니다. 그리고 ‘백년을 살아보니’ 후속편은 아니지만 행복론에 대한 책에 착수해요. 내년 봄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생겼어요. 그럼 하고 싶은 일은 다 끝날 것 같아요.”

―돌아보면 어떤 인생을 산 것 같으세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섭리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늙은 젊은이들’에게 오래 산 지혜를 들려주고 싶으시겠죠.

60세부터 제2의 마라톤을 시작하세요. 공부도 좋고 취미도 좋아요. 90까지는 자신을 가지고 뛰십시오. 80에 끝나더라도 할 수 없고요. 나더러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고달팠지만 행복했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겠습니다. 남을 위해 살면 행복해집니다.”

혼자 사는 집은 좀 휑뎅그렁했다. ‘백세를 살아보니’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구름들을 찍고 싶다는 대목을 읽은 터라 구름 사진이 잘 나온 책을 선물로 들고 갔다. 김 교수는 “사진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며 “구름은 자꾸 변하고 보는 그때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지금도 구름 끼는 날에는 뒷산에 오른다는 철학자가 덧붙였다. “구름을 보면서 피곤을 풀죠.” 카메라를 장만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3/20170623022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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