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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금요일

파란만장 이승철 씨, "데뷔 31주년,

입력 : 2016.05.07 07:00
“‘희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같은 노래 남기고 싶어"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 짓고 있는 사회사업가 ‘미스터 리'... UN NGO 대사 임명까지”

이승철은 데뷔 31주년 기념 콘서트를 태백, 정선은 물론 울릉도, 마라도, 소록도에서도 열 계획이다. 정식 콘서트장이 없는 곳에서는 공연 트럭으로 무료 공연을 하겠다고./사진=김지호 기자
▲ 이승철은 데뷔 31주년 기념 콘서트를 태백, 정선은 물론 울릉도, 마라도, 소록도에서도 열 계획이다. 정식 콘서트장이 없는 곳에서는 공연 트럭으로 무료 공연을 하겠다고./사진=김지호 기자
그가 마이크를 잡고 “희야~ 날 좀 바라봐.”라고 내지르면, 저 자신 ‘희야'로 착각한 전국의 소녀들이 월담이라도 할 듯 엉덩이를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승철은 사자 목청에서 비단실 뽑아내듯 거침없이 소리를 뽑아냈고, 한동안 선글라스를 낀 밤의 황제로, ‘부티나는’ 로커로 전성기를 보냈다.

170cm 작은 키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퍼포먼스가 웅장했고, 고음으로 압도하는 가창력은 정수리에 백만 볼트 전구를 밝히는 듯했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 이승철과 그의 노래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이승철의 얼굴에 어둠이 없고, 그의 창법에 ‘굶주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에게서 한대수나 들국화, 조용필에게 감지되는 해 질 녘 고독과 새벽녘 혁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이승철은 내게 그냥 ‘날라리 같은’ 가수였다. 그런데 그 ‘그냥 날라리같은' 가수가 한대수나 들국화 조용필이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까지 31년째 사랑받는 다는 게 신기했다.

추억이나 신화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매년 신곡을 발표하는 동시대의 가수로. 20년 넘게 후배인 빅뱅의 태양과 경쟁하며.

이승철의 노래를 제대로 듣기 시작한 건, 그가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으로 나오면서부터다. 그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발라드와 차가운 독설이라는 정확한 ‘이중 언어’를 구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노래라는 건 대중보다 앞서가서도, 뒤처져서도 안되는, 딱 바로 내 귀 옆의 ‘흥얼거림'이라는 걸 인정했다.

“대박 나는 노래는 단순해요. 내 얘기 같은 거예요. 나는 흔한 얘기 같은 그런 가사가 좋아요.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거, 흔한 거, 그 흔한 가사가 잘 붙으면 좋은 노래가 되는 거예요. 비틀스의 ‘렛잇비'처럼요.” 그가 말했다.


작곡가 ‘용감한 형제’가 헌정한 신곡 ‘일기장' 발표 후, 열심히 라디오 홍보 중인 이승철. 피아노 앞에서 맹 연습중이다./사진=김지호 기자
▲ 작곡가 ‘용감한 형제’가 헌정한 신곡 ‘일기장' 발표 후, 열심히 라디오 홍보 중인 이승철. 피아노 앞에서 맹 연습중이다./사진=김지호 기자
‘희야’ ‘마지막 콘서트’ ‘네버엔딩 스토리’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서쪽 하늘 끝에서’ ‘말리꽃’ ‘소리쳐' ‘잊었니' 등 이승철의 히트곡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똘끼'나 광기로 듣는 사람을 절벽으로 안내하는 법도 없다. 정확한 내비게이션처럼 귀에 ‘스트라이크'로 꽂히는 가사, 대중을 간파하는 우아한 신파의 메들리다.

그리고 지난 5월 7일 이승철이 아이돌 전문 작곡가인 ‘용감한 형제들'이 그에 헌정한 신곡 ‘일기장'을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 공개했다. 여전히 슬픔은 있어도 결핍은 느껴지지 않는 노래, 애절하지만 좌절의 기미는 없는 노래, 누구나 한 번쯤 일기장에 끄적였을 만한 그런 노래, 이승철다운 노래였다.

5월 21일부터는 이승철 데뷔 31주년을 맞는 대규모 전국 순회 콘서트도 이어진다.

비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던 5월의 어느 날, 삼성동에 있는 그의 녹음실을 찾았다.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하대하는(단골손님 대하는 목욕탕 아줌마 같은 말투다) 이승철식 환대가 이어졌다.

떡볶이와 소주, 와인과 드립 커피를 두서없이 섞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하다 노래도 부르고, 노래 부르다 아홉 살 딸 이원 양이 텀블링하는 재롱도 휴대전화로 감상하며, 국경을 수시로 넘나드는 그의 무용담에 아프리카로 독도로 하버드로 유엔으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까무룩 해가 졌다.

-(단도직입적으로)뭐하시는 분인가요?

“(당황하며)사업가입니다.”

-사업가라...

“노래 사업가. 장사꾼이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걸 상품으로 만들어서 사랑을 받고 있죠. 한마디로 뮤직 비즈니스맨입니다.”

-왜 가수가 됐나요?

“17살 때 그룹사운드에 놀러 갔는데 가수가 없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불렀어요. 그렇게 시작이 됐죠.”

-타고난 가수였나요?

“가수는 타고나는 거예요. 연기자와는 달라요. 노력만으론 안 되죠. 나도 태어날 때부터 잘했어요(웃음). ‘학교 종이 땡땡땡'도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서 부른 걸요. 나중에 가수가 될지는 몰랐지만, 결국 부활의 리더로 열아홉 살에 ‘희야'를 불렀죠.”

이승철의 7월 공연은 녹화 편집해서 MBC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다./사진=김지호 기자
▲ 이승철의 7월 공연은 녹화 편집해서 MBC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다./사진=김지호 기자
-젊은 날에 이미 가수로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요?

“그랬죠. 25살에 제작자로 독립했어요. ‘안녕이라고 말 하지 마' ‘마지막 콘서트' 그다음에 3집 ‘방황' 때부터 매니저 없이 25년간 혼자 제작을 했어요. 그때 안 좋은 사건으로 매니저가 이별을 통보하더군요.

감방에서 나와 6개월을 쉬었는데, 그때 어머니 말씀이 “너도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라"였어요. 바로 아침 7시부터 트럭 한 대에 LP판을 뒤에 만 장씩 싣고 다니면서 방송국, 신문사를 돌았어요. 힘들어도 일찍부터 독립하면서 자유를 누렸죠(웃음).

지금도 저는 1년에 6개월 콘서트하고 6개월은 쉬어요. 1, 2, 3월엔 스키 타고, 7, 8, 9월엔 하와이에서 휴양하고, 나머지 기간에 봉사도 하고 공연도 해요. 자유인이니까요(웃음).”

-즐거운 인생이네요.

“40살이 되기 전에 노래로 돈을 벌고, 40살 이후에는 노래로 먹고사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고 생각 했어요. 그게 가능했던 게 한참 활동을 했던 시기에는 음반 전성기라 밤무대도 많았고, 앨범 한 장 내면 70~80만 장은 나갔으니까요. 40이 되면서 결혼을 했고, 결혼하면서 돈 관리는 아내가 하면서 새는 돈이 많이 줄었어요(웃음).”

결혼하면서 그는 아내 박현정 씨의 권유로 기독교인이 됐다.

-열아홉에 데뷔해서 오십이 됐는데, 그사이 노래 부르는 목표나 삶의 목표가 많이 바뀌었습니까?

“공연을 사역이라고 생각하면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이승철 개인 콘서트였지만, 지금은 공연의 하이라이트가 아프리카 영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앵콜곡을 부르는 대신, 아프리카 아이들과 학교 짓는 모습을 보여주죠.”

그는 현재 아프리카 극빈국 차드에 6개째 학교를 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10년 간 100개의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가수도 관중도 아드레날린이 최고조에 오를 때, 극빈국의 어린이를 보여준단 얘긴가요? 앵콜곡은 관객과의 합동 마스터베이션인데…. 나에 대한 사적인 사랑을 사회적으로 시프트 시키는 건 대중가수로서 위험한 발상인데요.

“관객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여러분이 주신 공연수익금으로 이런 학교가 지어집니다.” 이전 학교와 새 학교 터를 보여주고, “6호 학교는 여러분의 돈으로 지을 거에요.” 그러면, 막 소리 지르고 좋아하세요.”

이승철은 얼마 전에 집 안에서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 사고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그 이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삶, 좋은 노래 남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사진=김지호 기자
▲ 이승철은 얼마 전에 집 안에서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 사고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그 이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삶, 좋은 노래 남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사진=김지호 기자
-‘We are the World’가 따로 없군요. 이승철의 노래가 희망의 ‘떼창'이 되는 이유를 알겠어요(웃음).

“학교를 하나 지으려면 그냥 뚝딱 건물 하나를 지어주는 게 아니에요. 진흙 벽돌 찍는 것 가르치고, 학교가 왜 필요한 지 스스로가 깨닫도록 주인의식 교육하고, 화장실 똥 치우는 것, 우물 고치는 것까지 사전에 다 가르쳐요.

그다음 부족장인 술탄의 허락을 맡아야 해요. 5~6천 명 정도의 부족민을 이끄는 술탄들은 만나보면 놀랄 만큼 기품 있고 온화해요. 그분들께 사전에 무릎 꿇고 허락을 맡아요. 존경의 마음을 보이는 거죠.

마을에 가면, 부족들이 가장 큰 느티나무 나무 아래 의자 하나 마련해 두고 모여서 ‘미스터 리(차드에서 이승철을 부르는 말)를 기다려요. 마을 원로, 청년회장까지 다 모여서 잔뜩 긴장해서 불어로 “우리에게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낭송하죠.”

-심훈의 계몽 소설 ‘상록수'가 생각나는군요.

“(웃음)그러고 나서 한국 스태프들과 차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해요. 차드의 양고기는 정말 맛있어요. 숯불에 구워 고춧가루로 볶아서 내온 양고기와 밥을 커다란 쟁반에 쌓아두고 손으로 함께 먹어요. 그날은 며칠 굶은 아이들도 실컷 먹어요.

언젠가는 차드의 교육부 장관이 군인들하고 지프 타고 왔어요. 고맙다고. 대통령도 만나자고 연락 왔는데,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못 갔어요(웃음).”

-한 부족에 새 삶을 주는 창조주가 된 느낌이겠어요.

“가보면 그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어요(웃음). 이 일을 박용하가 시작했는데, 그 친구가 학교 완성되는 걸 못 보고 죽어서 내가 받아서 하고 있어요. 학교 이름을 ‘리 앤 차드’라고 지었는데, 저는 기독교인이라, 그 연결 고리를 ‘리+차드’..., 가운데 저만 알 수 있게 십자가를 넣었어요.

거기가 이슬람권 국가지만, 술탄들은 상관 않고 아이들한테 “학교에 다니라"고 해요. 왜냐하면, 학교가 마을 센터가 돼서, 또 그걸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사 와서 모여들고 북적이고, 꽈배기 빵 파는 사람도 생기고, 이른바 상권이 형성돼요. 강남 학군이 따로 없어요(웃음).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라 닭똥 굴러다니는 흙 바닥 위 천막 하나 치고 사는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도 커튼 치고 정원 꾸미며 아기자기하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또 태양열로 전기도 끌어들이고, 학교 양호실은 병원이 되고, 아이들 급식 먹이려고 제빵 공장도 세워야 해요.”

-유지비가 꽤 많이 들 텐데요.

“학교 하나 짓는데 5억 원이 드는데, 저하고 굿네이버스, SBS 희망 TV에서 1/3씩 내고 있어요.”

대중예술가에게 ‘사회적 활동'은 득보다 실이 많다. 여전히 “제 할 일이나 잘하지"식의 까칠한 시선과 함께 혹여 실수라도 있으면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엔터테인먼트 종사자에게, 금욕적 도덕주의자 이미지는 편치 않은 굴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승철은 그런 면에선 꽤 통달한 듯 보였다. 금기를 넘어본 사람의 자유랄까. 그는 가족들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여행을 즐기다, 자오선을 넘어 먼지 바람 부는 시에라리온으로 날아간다. 힘 있는 사회사업가와 파리에서 술 한잔 하다, 뜻이 맞아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타고 현장 답사를 간다.

그렇게 해서 끌어온 복지 예산이 엄청나다. 이승철은 얼마 전 UN의 NGO 홍보 대사로 임명됐다. 세이브더칠드런, 굿네이버스, SBS 희망 TV 등 여러 단체의 해외 사업에 관여하며, 1년에 480억 원 예산을 투명하게 관리해온 것에 대한, 값없는 훈장이다. 다가오는 5월 30일, 전 세계 NGO 단체 7,000명이 최초로 UN 본부 밖인 경주에서 총회를 여는 행사의 대사인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이승철의 딸 이원 양(9세)은 이번 공연 홍보 영상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목소리 녹음으로 참여했다. 세 살 때부터 아빠 콘서트에 자주 불려나가 무대에 서는 데 겁이 없다고 했다./사진=김지호 기자
▲ 이승철의 딸 이원 양(9세)은 이번 공연 홍보 영상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목소리 녹음으로 참여했다. 세 살 때부터 아빠 콘서트에 자주 불려나가 무대에 서는 데 겁이 없다고 했다./사진=김지호 기자
-삶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요.

“그렇게 됐어요. 한 달 동안 다섯 대륙을 다 다녀본 적도 있어요. 아프리카, 유럽, 북미, 남미, 호주 등등. 내년에는 남극에 갈 것 같아요.”

-남극에는 왜?

“남극의 장보고 기지에 우리나라 과학 영재 아이들 데려가서 다큐멘터리 찍으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그 전에 탈북 청년들 데리고 독일에 가서 메르켈 총리도 만나고, 베를린 장벽에서 합창도 해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본업인 가수보다 사회사업가로 보이지 않을까요?

“알려지는 것과 알리는 것은 달라요. 나서서 알리려고 들면 대중들은 금방 눈치채요. 주와 부가 바뀌면 꼴불견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노래와 인기가 계속 유지돼야 해요.”

생의 절반이 노출된 연예인이기에, 이왕이면 자신의 삶을 매번 ‘감동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헌사하기로 작심이나 한 듯. 그는 ‘재수 없는 브루조아'라고 욕먹을 지 모르지만, ‘안티가 천 만 명이라 두렵지도 않다'고 했다. 수천 명의 아프리카 아이들 공부시키면서부터 자유를 얻은 것 같다고.

-대중에게 호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객이 전도되는 그 지점을 잘 가늠해야 할 텐데요.

“가족이 그 중심을 잘 잡아줘요. 아내가 객관적인 컨트롤러가 돼서 일산 분란하게 움직여요. 아프리카의 차드 학교는 제 의지로 시작한 거지만, 사전에 아내한테 허락을 받았어요. 굿네이버스 지사장한테 편지 쓰고, 미팅하고, 송금하고, 외국인들 상대해서 프로젝트 끌어가는 건 또 아내 몫이니까.”

-부부가 장단이 잘 맞으십니다.

“아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해요.”

-이상형인가요?

“저는 대화 통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예쁜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웃음). 제 아내는 예쁘진 않지만, 대화가 통해요(웃음).”

-2009년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의 따뜻한 독설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검은 선글라스 끼고 처음 나왔을 때는 좀, ‘뜨악 했는데', 점점 가수 지망생 청년들의 속 깊은 멘토, 냉정한 심사위원으로 시즌 6까지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기획사 사장님들이 직접 나와 심사하는 ‘K팝 스타’가 더 인기더군요. ‘슈퍼스타K’의 레전드 심사위원으로 아쉬움은 없나요?

“처음에 집사람이 슈스케를 해보라고 할 때는, 영 마뜩잖았어요. 나는 조용히 노래만 해도 되는데, 괜히 그걸 해서 ‘안티’도 생긴 거 아닌가(웃음).”

-‘슈스케'를 안 했으면, 따뜻하고 가혹한 이승철 씨의 진짜 매력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 ‘슈스케' 이후 정체된 옛날 가수가 아니라 역동적인 동시대 가수로 재인식이 됐지요.

“젊은 친구들이 노래하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함이 나한테는 큰 영감을 줬어요. 그런데 ‘K팝 스타'와 ‘슈스케'를 비교하는 건 좀 말이 안되는데요(웃음). ‘K팝 스타'는 아이돌 위주잖아요. 참가자들 실력만 봐도 그래요.

악동 뮤지션과 이하이 정도가 노래를 잘하는데, ‘슈스케'의 울랄라 세션이나 버스커버스커하고 비교하면 실력 차이가 너무 나죠. 그래서 내가 ‘슈스케'하고 ‘K팝 스타' 톱10끼리 경쟁하자고 제안했는데 그쪽에서 거절했어요(웃음).

이승철은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 났다. 과거 ‘소리쳐'라는 노래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을 때도, 해외 작곡가에게 직접 연락했다. ‘표절이 아니다'는 답변을 받고도, 공동 작곡으로 이름을 올리는 걸로 단번에 문제를 해결했다./사진=김지호 기자
▲ 이승철은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 났다. 과거 ‘소리쳐'라는 노래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을 때도, 해외 작곡가에게 직접 연락했다. ‘표절이 아니다'는 답변을 받고도, 공동 작곡으로 이름을 올리는 걸로 단번에 문제를 해결했다./사진=김지호 기자
-슈스케 참가자 중에 누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노래 실력과 상관없이 울랄라 세션하고 허각이요.”

-울랄라 세션의 리더 윤택 씨는 프로그램 촬영 중에 암이라는 게 알려졌고, 마지막까지 노래하다 나중에 저세상으로 떠났죠. 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삶이었어요. 허각 씨도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가수가 됐고. 저마다 삶의 스토리가 큰 울림을 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련한 눈빛으로)슈스케를 통해 참 많이 받았어요. 제가.”

-UN의 NGO 홍보 대사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인데, 어떤 루트로 연락이 온 건가요?

“2014년에 탈북 청년들 데리고 UN에 가서 노래했던 게 인연이 됐어요. 연합 뉴스 기자 하던 분이 탈북 청소년 출신인데, 제 아내에게 와서 북한 아이들에게 합창도 가르쳐주고 독도에 가서 노래도 부르게 해주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독도는 김장훈 형 거야. 그 형 건데 건드리면 안돼(웃음).”하고 반대를 했어요.

북한 관련 일 하면 총 맞는다, 독도 가서 일 벌이면 일본 못 간다(웃음), 뭐 그러면서 발뺌을 했는데(실제 후에 그는 일본 입국을 거부당했다.), 아내가 자꾸만 와서 졸라요. “곡만 좀 써줘요. 애들 노래 연습만 좀 시켜줘요.”

그래서 내가 “탈북자 아이들은 더 큰 세상을 먼저 봐야 한다. 당신이 빌 게이츠가 강연하고 싸이도 공연한 하버드 대학의 메모리얼 처치 같은 곳을 한번 잡아봐라. 그다음에 민주주의 꽃인 UN에서 노래하게 해주면, 나도 독도 가는 걸 생각해보겠다.” 그랬죠.

-그래서 부인이 하버드와 유엔을 섭외했나요?

“하버드 총장한테 편지 쓰고, 반기문 총장한테 이메일 보내고 그러더니…, 해내더군요(웃음). 결국, 독도, 하버드, UN 이렇게 세 곳에서 다 공연을 했어요. 개인 돈으로 비행기 값이며 비용 다 치러가면서요(웃음).”

-싸이가 국제무대에서 뛰는 만큼이나 이승철이 국제무대에 보인 퍼포먼스도 대단하네요.

“싸이가 대단하죠(웃음). 싸이는 나중에 떨어질까 봐 불안이 있겠지만, 저는 떨어질 게 없어서 다행이죠(웃음).”

-어쨌든 상처 있는 아이들한테 노래를 가르치는 건 그 치유의 힘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음악이 주는 터칭은 위대하다고 밖에 말 못해요. 처음에 적개심에 찼던 아이들 눈빛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서서히 변해요. 한없이 맑아져요. 김천 교도소 아이들한테 합창 가르치면서 제대로 느꼈어요.

김천 교도소 소년범들은 그때 존속살인, 강도, 강간, 방화… 최하 7년에서 최장 15년 형까지 굉장히 ‘센' 아이들이었어요. 그 무섭던 아이들이 3개월이 지나서 교화되는데, 그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교도소 아이 중에 싸움을 제일 잘하는 ‘대빵' 아이가 있었어요. 당시에 한 방에 소년범과 성인범이 같이 갇혀 있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 살벌했던 ‘대빵' 친구가 밤중에 라면 박스 뒤집어쓰고, 혼자 기를 쓰고 노래 연습을 하더래요.”

-교도소 아이들이 무대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나요?

“기존 노래 중에 ‘거위의 꿈'하고, 또 한 곡은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해서 그 내용을 모아서 ‘그대에게만 드립니다'라는 곡을 썼어요.

원래는 공연을 교도소 강당에서 가족들 모아 놓고 하는 거였는데, 그때 제가 또 우겼어요. 아이들한테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교도소장한테 시민회관으로 애들 좀 내보내 달라고. 당연히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승철은 또 한 번 ‘쇼생크 탈출'의 역사를 이뤄냈다. 법무부 장관을 찾아가 승인을 받아낸 것. 결국, 그날 시민회관 행사에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전국의 지검장들이 다 모였다. 안전을 위해 1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됐지만, 24명의 아이는 수의도 포승줄도 벗고, 무대에서 가장 멋진 턱시도를 갈아입었다.

2곡의 노래가 끝난 후 가족도 울고 아이들도 울고 장관도 울었다. 특별 면회가 허용됐고, 어떤 아이는 7년 만에 시민 회관 매점에서 엄마 손을 처음 잡았다고 했다. 그 뒤 교도소 합창 대회는 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탤런트 최불암과 가수 BMK가 멘토가 되어 이끌었다.



노래 한 곡 히트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합창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뿌듯하다는 이승철./사진=김지호 기자
▲ 노래 한 곡 히트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합창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뿌듯하다는 이승철./사진=김지호 기자
-아이들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축복일 테지요?

“노래 한 곡 히트하는 것보다 뿌듯해요.”

-어쩌면 돈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아내가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는 안 하니까요(웃음).”

-31년간 노래했는데,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느끼나요?

“오히려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게 단점이죠. 곡이 좋고 감정이 농익었어도 너무 많이 노출되면 감동을 주기 어려워요. 그래서 전 오히려 방송에서 예능을 하고 노래는 잘 안 하죠.”

-31년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할 수 있었던 기회는 그리고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나요?

“전 미리 계산하거나 꾸며서 살지 않았어요. 플랜을 억지로 짜지 않고,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에 반응했죠. 제 노래 중에 히트한 ‘네버엔딩스토리'이 있잖아요. 그 곡도 완전히 버려졌다가, 유재석, 송은이 덕에 우연히 떴어요.”

-가수로서 히트곡이 끊이지 않았다는 건 행운이죠. 이번에 작곡가 ‘용감한 형제들'이 선물한 발라드곡 ‘일기장'도 잘 되고 있나요?

“열심히 라디오 출연하면서 알리고 있어요(웃음). 요즘엔 6개월 공들여 준비해서 발표해도, 6시간 만에 딱 결론이 나요. 처음엔 온라인 순위권 차트에 좀 있다가 아이돌 가수한테 금방 밀려나죠. 그런 상황에서 1등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노래는요, 가만있어도 입에서 ‘흥얼흥얼' 나오는 게 노래예요. 그런데 요즘엔 저작권 때문에 거리에 ‘캐럴'도 잘 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전 라디오에 열심히 출연해요. 제주도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귀까지 노래가 닿도록 이요(웃음).”

-한대수, 들국화, 조용필 등등의 가수들과 한 시대를 살면서 노래했어요. 돌아보면 감회가 어떤가요?

“빅뱅의 태양과 함께 지금 현장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게 더 감동적이에요(웃음).”

-가요 중에 정말 사랑하는 5곡을 꼽아본다면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강승모의 ‘무정 블루스', 태양의 ‘눈코입'.

저한테 마지막으로 음악적 소원이 있다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처럼 ‘뽕 끼’ 가득한 발라드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예요.”

-이승철의 노래는 조금 더 밝고 웅장한 느낌인데요. 삶 만큼이나 노래도 스케일이 크고 구조를 제대로 갖춘 메이저 코드였어요.

“그런 노래만 부른 건 아닌데, 그런 노래가 사랑을 받았죠.”




[김지수의 人터스텔라] 파란만장 승철 씨, "데뷔 31주년, 나는 지금도 빅뱅 태양과 경쟁하는 가수"
-사회봉사를 하면서 가수로서의 촉이 무뎌졌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건 달라요. 봉사도 결혼도 음악적 재능에 영향을 주지 않아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거예요(웃음). 오히려 가정이 흔들리면 재능이 침몰할 수 있지요.”

-올해 유난히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등 팝 거장의 죽음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 이승철 씨는 창조적 혁신가가 되고 싶었나요, 아니면 소통하는 대중음악가고 싶었나요?

“나는 대중음악가예요. 단적으로 TV는 시청률, 영화는 관객 수, 가수는 음반 판매량으로 사랑을 증명받는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왜 음악을 들어야 할까요?

“음악은 혼자서도 계속 흥얼거릴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음악은 추억을, 기억을 남기니까요. 예전에는 음악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긴다'고 생각해요.”

-다시 열아홉 살로 돌아가도 가수가 되고 싶은가요?

“그러면 ‘제대로 된’ 가수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사고도 안 내고, 모든 나쁜 기억도 싹 다 지우고 말이죠(웃음).”

인터뷰가 끝나고 도심 속으로 뒤집힌 우산을 들고 걸으며, 대한민국의 가수 이승철과 차드 부족의 ‘미스터 리'를 생각했다. 파란만장 ‘미스터 리’! 내 생각엔 열아홉 살 가수로 돌아가더라도 그가 과거의 실수, 나쁜 기억을 지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덕에 교도소 아이가 마음을 열고 7년 만에 엄마 손을 잡아봤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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