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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0일 토요일

문명 선동가 이어령 "지의 최전선에서 돌격하라"

입력 : 2016.01.30 07:00 | 수정 : 2016.01.30 17:21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본격적인 3D프린터 시대가 온다”
“한국인은 스마트 젓가락과 접는 전기차 개발해야”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고물상 됐을 것”

“나의 최전선은 말이고 생의 의미야. 말이 나오면 언어의 전선이 형성되거든.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하다 보면 수억 개의 정보 중에서 우리 모두의 관심인 생명과 관계가 의미 있는 것들을 고를 수 있어.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가 모든 지식의 프로세스예요.”- ‘지의 최전선’ 중에서.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난 이어령 선생. 수술과 질병으로 예전보다 많이 늙으셨지만, 그의 정신은  변함 없이 가슴 뛰는 내일을 살고 있다./사진=오종찬 기자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난 이어령 선생. 수술과 질병으로 예전보다 많이 늙으셨지만, 그의 정신은 변함 없이 가슴 뛰는 내일을 살고 있다./사진=오종찬 기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84세)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달리는 자가 이어령이다.

이어령이라는 말은 대륙에서도 달리고 해양에서도 달린다. 반도의 사나이답게 수륙양용이다. 특히 인터넷 바다를 달릴 때는 7대의 컴퓨터라는 어마어마한 발동기까지 달고 달린다. 그는 늘 말로서 포효했기에, 그가 만들어 낸 뜨거운 말들을 두 손에 받아들면, 그 말의 ‘늙음’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의 말 속에서 과거의 주어가 미래의 술어와 만났고, 그렇게 그의 주례로 ‘아름다워진’ 현재의 화두가 탄생했다. 10년 전,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처럼 아름다운 말을 누가 또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문화부 장관 시절 가장 잘한 일이 ‘노견’을 ‘갓길’이라는 말로 바꾼 것이라고 했다.

명명에는 예언의 힘이 있기에, 이어령은 매번 명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가 이름을 얻는 데도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1956년 대학을 갓 졸업한 22살의 청년 이어령은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고발하고 젊은이들의 안일한 맹종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하루아침에 문단의 유명 인사가 됐다.

1982년에는 일본인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명명하며, 섬나라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경종을 울렸다. 그 책은 일본에서 출간 5개월 만에 12만 부가 판매되었다.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어마어마한 시를 썼다. 88올림픽 개·폐막식 행사를 연출할 때는, 잠실벌에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켜, 햇볕 내리쬐는 광장에 한 줄 정적의 시를 썼다. 무주 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개막식 때는 곡예 스키를 하는 캐나다 여성 스키어들에게 ‘바람의 옷’ 한복을 입혀 활강시켰다. ‘옷이 날개’라는 시가 눈밭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이어령을 만났다. 얼마 전 그가 ‘지의 최전선’이라는 책을 냈기에, 나는 진격 명령을 들은 군인처럼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가 홀로 지(知)의 격전을 치루는 장소는 평창동에 있는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였다.

노학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늙었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이 셌다. 듣던 데로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을 주워담느라 허덕여야 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그가 케이크를 오물거리느라, 입을 간간이 쉬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과거를 달릴 때나 미래를 달릴 때나 이어령이라는 말은 주저가 없었다. 스킵(skip)과 시프트(shift), 축지법과 공중부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가끔 서재가 ‘매트릭스’나 ‘인터스텔라’ 같은 같은 SF 영화의 세트처럼 느껴졌다.


-아드님이신 이승무 감독이 장동건 주연으로 만든 할리우드 합작 영화 ‘전사의 길(2010년)’을 봤을 때가 생각납니다. 지의 최전선에 계신 분이라, 뭔가 결정적인 논평을 하실 줄 알았어요.

“영화의 본질은 활극이에요. 둘째 아들이 흑백 영화부터 현재까지 서부 활극의 클리셰들을 뽑아서 포스트모던하게 연출을 했어요. 당시에 아들이 ‘반지의 제왕’을 했던 특수 촬영팀하고 같이 작업을 했는데, 나는 그 영화에서 고전과 현대가 만나는 풍경을 목격했어요.

80개의 고전 영화 명장면들이 흑백 필름에서 나와서 총천연색으로 재현이 된 거죠. 그런데 아들이 영화 개봉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나서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리더구먼(웃음).”

-7개의 컴퓨터로 동시 집필 작업을 하시는 거로 아는데, 그 유명한 일곱 마리 고양이(Computer Aided Thinking)가 보이질 않습니다.

“요즘은 수술해서 컴퓨터를 잘 못 해요. 젊은이를 조수로 불러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런데 세게 가르쳤더니, 막 도망을 가(웃음). 아니, 이런 ‘지혜의 최전선’이 어디 있다고(웃음). 이렇게 배우면 언어의 천하무적이 될 거예요. 나는 정확한 문장만큼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해요. ‘은, 는, 이, 가’ 조사 하나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고.”


-새해 펴내신 책 ‘지의 최전선’에서 지성의 야전사령관으로 종횡무진 활약하셨습니다. 3D 프린터, 바이러스 문명 전쟁, 무선 시프트(Shift), 생명 자본주의와 21세기 리더십까지… 예지와 예언이 가득한 선전포고문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문화와 문명을 이야기할 때는 선동가적인 기질이 보이십니다.

“이번 책은 특이한 책이에요. 내가 얘기한 걸 제 삼자가 기록하고, 그걸 또 내가 다시 고쳐서 냈으니 이인삼각을 뛴 셈이에요.”
한국 최초의 디지로그 인간 이어령. 1988년 이어령은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다. 그날 이후 컴퓨터는 이어령의 확장된 신체가 된다. 그의 작업실에는 7대의 컴퓨터가 있다. 아이패드와 킨들을 합치면 디지털 기기가 10대가 넘는다.
 한국 최초의 디지로그 인간 이어령. 1988년 이어령은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다. 그날 이후 컴퓨터는 이어령의 확장된 신체가 된다. 그의 작업실에는 7대의 컴퓨터가 있다. 아이패드와 킨들을 합치면 디지털 기기가 10대가 넘는다.
본격적으로 대담을 시작하려는 데, 사진 기자가 들이닥쳤다. 부러 포즈를 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찍겠다고 하자, 반색하며 말했다.

“사진을 찍을 때면 자꾸 웃으라고 해서 난감해. 내가 치약 광고 나왔나. 사르트르나 카뮈를 봐요. 웃지 않아.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를 보면 요한 모리츠가 유대인으로 나치로 갖은 인종 노릇을 다하다, 마침내 정체성을 찾았을 때 사진 기자가 “활짝 웃으세요!’ 그런다고. 억지로 웃는 그 장면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에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것이 현대인이지요(웃음). 2016년 한 해도 미국발 금리 인상, 차이나 쇼크 등으로 시작부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올 한해 어떻게 내다보십니까?


“올해가 참 어려운 해예요. 없다 없다 해도 있고, 어두워도 밝은 법인데… 참 어려워요. 이럴 땐 빙상, 자전거 레이스를 생각해요. 직선 코스에서 달릴 땐 차이가 없지만, 코너를 돌 때 1, 2, 3, 4등으로 순위가 벌어져요. 개인이나 국가나 지금이 바로 코너링을 할 때라고 생각해요. 불행한 일이긴 해도 거기서 진짜 자기 실력이 드러나지요.

위기를 맞으면 동시에 정신도 차리게 될 거예요. 출판이 불황이라 해도 베스트셀러는 있어요. 사람들은 불경기일 때 집중해서 책을 읽어요. 6.25 전쟁통에 피난살이 할 때도 사람들은 ‘마음의 샘터’라고 마분지에 인쇄한 춘원 이광수의 책을 읽었어요. 그게 베스트셀러였다고.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에 뉴욕에 두 개의 줄이 있었는데, 하나는 무료 급식소, 하나는 극장 앞에 줄이었어요. 그때 인기를 끌었던 영화가 ‘타잔’ ‘미키마우스’ ‘킹콩’이에요. 3개가 다 짐승이 주인공이지. 가치가 전도되고 야성이 살아나고 문명과 야만이 제대로 어울리는 내용이에요.

불황기가 돼야 진정한 변혁을 꿈꿀 수 있어요. 미국 공황기 때에 자살도 많았지만, 문화도 융성했어요. 사시사철 꽃이 피면 꿀벌도 꿀을 모으지 않아요. 경기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주식 얘기 뿐이지.”


-청년들 사이에서는 ‘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니 말이 많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얘기만 해도 그래요. “대학 나와서 택시 운전하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90% 예요. 그게 말이 안 돼요. 대학은 20%만 가야 특권이에요.

대학 나왔는데 일자리가 없으니 ‘헬조선’이다. 그건 합리적인 불평이 아니야. 유럽 난민을 보세요. 본토 사람이 이민자를 안 받는 이유는 그들이 3D 일자리를 빼았을까봐서라고. 우리나라는 3D는 일자리로 생각도 않잖아. ‘호강하면서 뭔 불평이냐?’고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지옥이든 천국이든 실상을 아는 건 중요해요. 현실 직시! 모든 풍요는 상대적인 거예요.

가난한 집에 효자 난다고, 풍요보다 빈곤이 희망이 될 수도 있어요. 난 IS와 난민들을 보면 생명의 아우성을 느껴요. 3살 먹은 아이는 필사적으로 살려고 보트를 타고 와요. IS는 필사적으로 죽으려고 폭탄을 품잖아. 생명의 치열한 현장이 그곳에 있어요.


-삶과 죽음이 대결하는 현장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요.

“우리나라 자살률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다 높아요. 그런데 6·25 때 자살을 생각했겠어요? 흥남부두에 모여 뱃전에 매달려 얼마나 살려고 아우성을 쳤어요. 한강에서 하도 자살을 많이 한다고, 생명보험회사에서 나한테 부탁해서 만들어 붙인 게 있어요.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그런데 ‘자살에서 살자’로 바뀌는 게 대단히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자살하려고 하는 그 순간, 누군가 우연히 친절을 베풀면 그걸로 맘을 고쳐먹어요. 세상이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게 아니구나. 도와주는 사람이 있구나.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다면, 나라도 청년도 생각을 바꿔야 해요. 드론을 주목해봐요. 드론을 규제하지 않으면 남의 집 안방까지 침입하겠지. 하지만 제대로 쓰면 무궁무진해요. 농촌에서 드론으로 병충해 촬영을 하면서 필요한 부분에 농약을 뿌릴 수도 있어요.

여의도 광장에 특수 구역을 만들어서 전 세계 드론 묘기 대회를 열 수도 있죠. 드론 자율 지구를 만들어 선수권 대회도 하고 관광객도 유치해요. 동계올림픽 개회식은 드론으로 촬영해서 중계하는 거예요. 지의 최전선이 여기 있어요.”
말할 때의 이어령을 쳐다 보면 그의 무서운 젊음에 기가 죽는다
 말할 때의 이어령을 쳐다 보면 그의 무서운 젊음에 기가 죽는다
이야기는 불황의 최전선에서 자살의 최전선으로 다시 지의 최전선으로 종횡무진 시프트 했다.

“군사 기술이 민간 기술로 넘어와 일대 혁명을 일으킨 게 많아요. 나폴레옹 군대가 이긴 건 휴대용 전투 식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게 통조림이에요. 컴퓨터는 미사일 탄도를 정확하게 계산하려 만든 거예요. 드론도 그렇고 3D 프린터도 마찬가지예요. 군대 기술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전향하느냐에 따라 전쟁 무기가 평화의 무기가 돼요.

기술 개발 못 하면 어때요. 이미 있는 기술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보태면 되죠. 다들 워크맨, MP3로 음악을 들을 때 스티브 잡스는 인터넷에 기반을 둔 아이튠스에 아이팟을 연결했지요. 난 그게 시인의 메타포라고 봐요. 앵두 같은 입술, 이라고 할 때 앵두와 입술을 연결하는 것과 같은 상상력.

김광균의 시에 ‘아스피린 분말 같은 흰 눈이 내려’라는 문장이 있어요. 눈발을 보고 흰 떡가루가 아니라 아스피린 가루를 상상하는 게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 인문학적 상상력이에요. 전통과 현대의 확연한 차이가 거기서 나죠.

갈릴레이와 셰익스피어는 기실 같은 부류의 사람이에요.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미지의 하늘을, 별을 들여다보려고 했고, 셰익스피어는 언어로 미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전엔 불문과 나오면 보들레르와 랭보를 읽었는데, 이제는 패션 분야로 다 가더라고(웃음).”


-우리가 갈릴레이와 셰익스피어, 스티브 잡스와 같은 상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플을 이기려면 서양이 갖지 않은 문화로 혁신을 해야 해요. 서양에 없는 게 젓가락이에요. 우리는 젓가락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어요. 칩을 내장한 스마트 젓가락과 아이폰을 연결해서 먹는 음식과 의료를 연결한 국가 보건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도 있어요. 식품 빅데이터도 나올 수 있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데서 사는 게 금수저가 아니에요. 언어 감각이나 상상력이 곧 금수저라고. 장미란 같은 역도 선수는 신체가 곧 금수저죠. 금수저 물었다고 재벌 아들이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다양한 사회가 돼야 해요. 그래야 지옥이 안돼.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귀하디귀한 금수저라고.”


-선생의 창조력 기초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디지로그 인간의 단초를 쌓았어요. 어머니는 문학을 좋아해서 글을 많이 읽어주셨어요. 아버지는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셨어요. 이과 적으로 기술 기계를 참 좋아하셨죠. 필요보다 재미로 일을 꾸미셨어요. 일제 시대에 병아리 부화기, 촉성 재배 같은 걸 시도하시고, 망할 게 뻔한 엉뚱한 고갯마루에 발동기 가져다 정미소를 짓기도 했어요.

그 덕에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어요. 상상력이라는 금수저를 물었어요. 우리나라는 창조적 상상력이 너무 부족해요.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죠. 그런데 이름 짓는 거 하나도 상상력이 너무 부족해. 더불어 안 살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새 정치 안 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김지수의 人터스텔라] 문명 선동가 이어령 "지의 최전선에서 돌격하라"
-언어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보시지요?

“기업 이름을 봐도 그래요. 현대, 삼성, 쌍용... 영어 표기도 힘든 그 이름 갖고 이만큼 세계로 나간 거 참 다행이에요. 일본의 토요타, 소니, 캐논은 이름에서부터 상상력이 앞서 갔다고. 토요타는 도요타에서 T를 앞세웠고, 소니는 작다는 애칭, 캐논은 관음보살의 ‘관음’에서 나온 말이에요.

언어는 거대한 무기가 돼요. 요즘은 우리나라 미용실 이름도 ‘깎을까? 볶을까?’ 이렇게 재밌게 짓더구만. 창조적 상상력이 늘고 있다는 증거예요.”


-선생의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내 이름 이어령에서 령은 돌림자고, 어는 제어한다, 말(馬)을 콘트롤 한다는 뜻의 어(御)예요. 왕족 이름에 쓰는 한자죠. 일본 천황이 나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났는데, 그걸 기념한다고 조선 사람들 다 동원되서 만세를 불렀어요. 타이밍 상으로는 나는, 온 국민의 만세 세례를 받으며 태어났다고, 부모님이 그렇게 지었어요. 일본 황실에서 알았으면 대역죄인이지(웃음).”


-이름의 운명대로 살고 계십니까?

“이름대로 살지요. 내 사주에 장군, 각하가 있는데, 나는 한국어, 영어, 일어, 불어 사전이라는 군대를 가진 장군이라고. 언어 총수가 돼서 많은 독자와 함께 왕국을 누리고 있죠(웃음).

내가 문화부장관 하면서 가장 잘한 게 ‘노변’을 ‘갓길’이라고 만든 거예요. 쌈지 공원도 그렇고, ‘벽을 넘어서’나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디지로그’같은 말들도 만들었어요. 

그렇게 명명의 기쁨을 누리면서 ‘언어 총수’로 사는 건 축복이예요. 사업을 했으면 실패했을 것이고, 정치를 했으면 쫓겨났을 거예요. 총장을 했어도 나가라는 말을 들었을텐데(웃음)... 문학을 해서, 언어들이 날 잘 봐줘서 여기까지 왔어요.”


-삶이 곧 집필이셨는데, 저작물 총량이 얼마나 됩니까?

“순수하게 50권이예요. 전집은 200권이 넘지. 20대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썼어요. 매년 빌딩 한 채 씩 지은 기분이야.”


-이번에 나온 ‘지의 최전선’은 선생이 쌓아온 지식과 지혜의 총정리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가장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지성과 영성’은 내가 거짓말을 하나도 안 하고 쓴 책이예요. 외손자 잃고 딸 잃고, 신을 믿는 그 순간부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닥치느냐?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욥처럼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도 아닌데, 나에게 왜 이리 많은 시련을 주시는지... 그렇게 질문을 이어갔지요. 안 믿던 사람이 믿으려고 할 때, 무신론자가 기독교의 문지방에 올라가, 회의도 하고 참회도 하는 그런 뜨거움이 녹아 있지요.”

개인적인 회고를 시작하며 감상에 젖던 그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비즈니스 얘기를 합시다. 경제지에서 필요한 말이 있을 거예요.”
그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이나 롤라코스터를 착장한듯 듯 경도와 위도를 순식 간에 넘나든다. 어디에 있는 마무리는 지의 최전선이다.
 그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이나 롤라코스터를 착장한듯 듯 경도와 위도를 순식 간에 넘나든다. 어디에 있는 마무리는 지의 최전선이다.
-로봇이 기사를 쓰는 시대입니다. 문명은 우리 힘으로 일구지만, 이제는 원치 않아도 마구 밀려옵니다. 테크놀러지의 진화 속에 한국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아까 얘기한 스마트 젓가락처럼 그들이 못하는 걸 해야 해요. 한국인은 도구와 함께 움직일 수 있어요. 방석, 이불, 보자기 같은 것들을 보세요. 쓰고 나면 쉽게 개킬 수 있거든요. 자동차도 그런 식으로 사고해야 해요. 전기차를 만들면 자동차도 사람이 내린 후 툭 세워서, 주차장에 차곡차곡 개키듯이 넣을 수 있어요. 차고 혁명이 일어나는 거죠.

관에서는 3D 프린터로 초가지붕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어서 농촌의 전원 풍경을 되살려야 해요. 청년들은 드론을 띄워야 하고, 아이들한테는 3D 프린터를 가르쳐야 해요. 인터넷으로 제품을 주문하면 3D 프린터가 작동해서 즉석에서 컵과 젓가락이 나오는 시대예요. 오바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나서서 초등학교 1,000곳에 3D 프린터를 보급할 거라고 선언했어요.

미래를 보면서 가야 합니다. 일본에는 일찍부터 옥상권이라는 법령을 만들었어요. 관에서 주도적으로 건물 옥상에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한 후에 에너지를 공유하는 거죠. 그게 스마트 그리드고 에너지 혁명이에요.”


-백남준 선생도 장대 왼쪽에 과거 천 년을, 장대 오른쪽에 미래 천 년을 쥐고 걸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어령 선생과 많은 부분 통했던 것으로 압니다.

“백남준하고는 참 가까웠어요. 내가 그랬죠. “니가 모니터 만든 거 한국에 오면 뒤주다. 사도세자를 가둔 뒤주의 앞판을 떼어내면 모니터 형태가 된다. 한국 팔도의 뒤주를 전부 가져다가 그걸로 행차도를 만들어라. 사도 세자가 죽은 다음에 정조가 수원성으로 행차하던 장면을 본떠 수원 화성에 다다익선처럼 대형 작품을 만들어 봐라

비디오 생일 케이크도 주문했어요. 엘리자베쓰 여왕의 과거 영상을 비디오 케이크로 만들어서 전자칼로 잘라보면 어떠냐? 그 작품을 못하고 뇌졸증으로 쓰러졌어요. 백남준도 한국에서 살았으면 고물상에 불과했지요(웃음).”


-백남준, 윤이상 같은 천재도 그 이상을 외국에서 펼치셨지요. 선생도 언어를 무기로 동서양을 누비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무대가 그 이상을 펼치는데 너무 좁다고 느끼지는 않는지요? 한국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십니까?

“한국은 희망이 있어요. 콘크리트처럼 굳은 나라가 아니에요. 활화산이죠. 일본, 미국, 유럽은 많이 굳었어요. 나는 한국 역사를 지나오면서, 채집시대에서 후기 산업 사회까지 거쳤어요.

이곳엔 아직 기회가 많아요. 플렉서블하죠.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는 삶인데 두려워 말고 가야지요. 예전엔 정보 가뭄시대였지만, 이제는 정보 홍수 시대에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서 앞으로 나가야 해요. 홍수에 휩쓸려 가지 말고 선별해서 필터링해서… 끼리끼리만 모여도 안 돼요. ‘목욕탕 가수’처럼 공명 현상이 생겨요. 그런 정보 버블이 특히 위험해요.”


-언어학자이면서 언론인이고, 비평가이면서 소설가, 시인이고, 행정가이면서 크리에이터로 살아오셨어요. 최종적으로 어떻게 불리길 원하십니까?

“나는 정체성이 없어요. 나는 이름도 여러 가지예요. 충청도 지방 발음으로 이의영, 이어녕, 이어령, 이어영…. 어떤 이는 내 이름이 뭐가 맞나 술값 내기도 했다고 해요(웃음). 내 글이 국정 교과서에 실리면서, ‘이어령’으로 표기하기 시작했어요.

이름처럼 나라는 존재도 다원적으로 존재해요. 언론인, 문인, 교수, 아빠, 할아버지… 평생 어느 하나에 매달려 있지 않았어요.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어요. 한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려고 했어요.

굳이 내 정체성을 얘기하자면 나는 우물 파는 인간이에요.
자신을 우물 파는 인간이라고 명명하는 이어령.
 자신을 우물 파는 인간이라고 명명하는 이어령.
-마지막으로 파는 우물은 무엇인가요?

“죽음이죠. 죽음이라는 우물을 파면 끝이죠.”


-84살이신데, 삶의 기한, 우물의 깊이를 얼마나 더 보십니까?

“죽고 난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든다면 나는 그만큼 더 사는 거예요. 작년에만 책을 5권 냈어요. ‘서재 100년’을 기획해서 앞으로 10권을 더 내야 해요.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시와 서평을 모아 낸 ‘언어로 세운 집’은, 20년 전에 썼던 글인데, 1만 부 넘게 나갔어요.

그러니까 더 마음이 급해요. 병도 생기고 수술도 했는데… 어쨌든 고전분석도 현대 문학 분석도 금년에 작업해야 해요. 신라 향가도 다뤄야 하고, 김동리의 ‘등신불’,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텍스트도 기호학적으로 정리해야죠.

나는 생사로에 있어요. 생사로가 산스크리트어로 삼사라, 윤회예요. 책을 통해 윤회하는 셈이야.

마음이 급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노학자에게는 죽음도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필연적으로 내일의 인간이었으나, 오늘과 불화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어령이라는 말(馬)이, 이어령이 하는 말(語)이 동시대의 최전선에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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