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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5일 목요일

“‘헬조선’? 니들이 지옥을 알아?”라는 글을 쓴 이화여대생 인터뷰


⊙ 북한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면서, 남포에서 컨테이너 박스로 소금 사다가 동해안에 파는 사업 해…
투자한 돈의 3배 이익 내
⊙ “‘언론에 나가지 말고, 조용히 실력 키우자’는 젊은 탈북자들 많아”
⊙ “북한의 가족 데려오기보다는, 통일되면 북한에 들어가 먹여 살리고 싶어”

취재지원 : 문지은 月刊朝鮮 인턴기자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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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21일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헬조선’? 니들이 지옥을 알아?”라는 글이었다. “시리아 난민, 북한 주민들이 진정한 지옥이니 그걸 경험해 보지 못한 너희는 헬조선이라고 잠꼬대나 투정을 부리지 마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화여대 인문학부 1학년에 다니는 김다혜라는 학생이 쓴 이 글은 이틀 만에 4만 건이 넘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 글을 ‘오늘의 유머’ 등 여러 인터넷 사이트도 전재했다.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필자에 대한 신상 털기가 시작됐다. 논란이 심해지자 자유경제원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이 글을 내렸다. 기자는 인터넷에서 이 글에 대한 댓글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 글 쓰신 분 부모님, 최소한 사회지도층 인사일 것임.” “글 수준을 떠나서 빚내서 학교 다니는 학생보다는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움이 엿보이는 글이네요.”
  
  기자가 쓴웃음을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쓴 여학생은 사회지도층 인사의 딸도,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운 삶을 사는 철부지 여대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 여학생은 올해 34세의 탈북자(脫北者)였다.
  
  10월 7일,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김다혜씨를 만났다. 키가 150cm가 조금 넘을 듯한 단구(短軀)였지만, 야무지고 밝은 인상이었다.
    
  “시골에선 나물이라도 뜯어 먹지…”
  
  김다혜씨의 고향은 강원도 원산. 2010년 여름에 중국으로 탈북, 미얀마-라오스-태국을 거쳐 1년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탈북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요.
  
  “2년제 전문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후, 함흥시에 있는 상업관리소(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주는 국가기관)에서 9년간 근무했어요.”
  
  ―부모님은 무슨 일을 했나요.
  
  “아버지는 노동당원에, 공무원이었어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소위 ‘고난의 행군’ 때 청소년기를 보냈겠네요.
  
  “그렇죠. 1992년경부터 조금씩 식량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때부터 어머니가 항상 쌀을 조금씩 덜어 모아두면서 먹을 거 걱정을 하곤 했어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보름에 한 번씩 배급을 해주었는데,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배급제가 거의 무너졌어요. 1995년부터는 아사자(餓死者)가 나오기 시작했고….”
  
  ―원산이면 그래도 북한에서는 손꼽히는 대도시인데, 그런 곳에서도 아사자가 나왔나요.
  
  “오히려 시골에서는 산에 가서 나물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지요. 대도시가 더 어려워요. 인심은 더 박하고…. 우리 집은 그래도 아버지가 당원이고 현직 공무원이어서 배급이 조금 나왔어요.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밥을 굶거나, 옷이나 신발이 없어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어요. 배가 고프다고 길가에서 아무 풀이나 뜯어 먹다가 잘못해서 독초(毒草)를 먹고 풀독이 올라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도 많았어요.”
  
  ―주변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나왔나요.
  
  “너무 많았죠.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네 집에서 아무개가 죽었다’는 얘기가 거의 매일같이 들려왔어요. 거기에다 1995, 96년도에는 장티푸스와 파라티푸스가 돌아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어요. 자고 깨면 저쪽 골목에서 사람들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짐승이 우는 소리 같았어요. 15, 16세 어린 나이에 그런 죽음들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이게 당연히 우리가 겪어야 되는 숙명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지금도 북한은 흐린 날이나 컴컴한 밤중 같은 어두운 이미지로만 기억이 나요.” 
  
  ―부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빨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든지, 누가 죽든지 간에 빨리 일이 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당원이고 공무원이어서 그랬는지 ‘이게 다 미국놈들 탓이다. 몇 해 지나가면 고생이 끝나고 괜찮아질 거다’라고 달랬어요. 사실 북한에서는 누구든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일이 안 풀리면, ‘이게 다 미국놈 때문이지. 미국놈이 원쑤(원수)지’라고 해요.”
  
  ―식량 사정이 나아진 것은 언제쯤부터였나요.
  
  “북한 식량 사정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건 실정을 모르는 얘기예요.”
  
  ―적어도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상황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는 2005년쯤부터 조금 나아지긴 했지요. 하지만 그건 국가가 무엇을 해주어서 상황이 나아진 게 아니에요. 근 10년 동안 굶어 죽을 사람들은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내가 바보처럼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땅을 파든지, 장사를 하든지, 내가 움직여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면서 그런 거예요. 그래도 굶어 죽는 아이들, 꽃제비들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기억하세요.
  
  “저는 그때 통일이 다 된 줄 알았어요. 김정일이 세계 모든 사람이 다 존경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남조선 대통령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것이라고 가르쳤죠.”
    
  “救護물자, 간부들 손으로 들어가”
  
지난 2007년 8월 20일 인천항에서 열린 북한 수해돕기 구호물품 출항식. 하지만 북한으로 간 구호물자들은 간부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한이나 국제사회에서 식량 등을 지원해 준 것을 보거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면서 유니세프(UNICEF) 등 유엔기구에서 보내오는 물자들은 많이 보았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낸 물자는 전혀 못 봤어요. 대한민국에서 쌀이나 물자를 보내와도 그걸 담은 부대나 포장을 다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요.”
  
  ―그럼 유엔 등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들이 상업관리소를 통해 인민들에게 분배가 되기는 하는 건가요.
  
  “그렇게 들어온 물자들은 재난을 당한 주민들에게 공급해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재난 피해자들한테 돌아가지 않아요. 10개가 들어온다면 1개는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9개는 간부들이 가져가요. 국정가격으로. 시장(장마당)에서 100원쯤 하는데 국정가격이 1원이라면 상업관리소에 1원을 지불하고 물건을 가져가는 거죠. 좋은 물건은 다 이런 식으로 간부들 손으로 들어가고, 주민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아요.”
  
  김다혜씨는 2004년 독일에서 유니세프를 통해 쇠고기를 보내왔을 때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유엔에서 분배상황을 모니터링하러 나왔는데, 저희(당국)는 주민들에게 ‘1인당 500g씩 쇠고기 공급을 하니, 몇 월 며칠 9시부터 상업관리소 앞에 나와 줄을 서서 기다리라’고 공지했어요. 그렇게 물자를 분배하는 모습을 하루만 보여줘요. 그날 못 받은 사람은 못 받는 거죠. 실제로 주민들에게 배급이 되었는지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의 집을 방문할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몇몇 집을 지정해 놔요. 다른 사람들에게 500g씩 고기를 주었다면, 그들에게는 3kg을 줍니다. 그리고 끝나면, 다시 가져오라고 하죠. 정말 치사해요.”
    
  “국정가격으로 사서 장마당에 내다 팔아”
  
  김다혜씨는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서 비리가 만연했다”고 말했다.
  
  “한 부서의 책임자는 자기 부서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해요. 우리 부기장(簿記長·회계과장)도 마찬가지였고요. 예를 들어 물건을 100개 가져다가 국정가격에 공급한 것으로 서류작업을 한 후, 장마당에 팔죠. 그렇게 해서 번 돈의 50%는 자기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스물한두 살 때 처음 그런 서류작업을 할 때에는 깜짝 놀랐는데, 나중에 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먹고살더군요.”
  
  ―내게 김다혜씨를 소개해 준 분의 말을 들으니, 북한에서 단순히 장마당에서 물건 파는 수준을 넘는 ‘사업’을 했다고 하더군요.
  
  “평남 온천군에 있는 광양만제염소(製鹽所)에서 소금을 사다가 양강도나 동해안의 대도시에 내다 파는 일을 했어요. 일제(日帝)시대에 만들어진 광양만제염소는 북한의 소금을 전부 공급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북한은 교통이 불편해서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보니, 내륙이나 동해안 지역에서는 쌀이나 소금 등의 가격이 서해안보다 훨씬 비싸요. 소금의 경우, 서해안 쪽보다 20배 정도 비싸죠.
  
  제가 있던 상업관리소에서 물자를 빼돌려 팔아서 직원들이 먹고살았듯이, 제염소도 마찬가지예요. 국가에서 배급은 주지 않는데, 직원들을 부려서 소금을 생산해야 하니까, 공장지배인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몰래 소금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것이죠.”
    
  소금장사
  
  ―얼마나 남나요.
  
  “예를 들어 1000달러를 투자했다면, 5000달러 정도 벌 수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면 3000달러 정도 남았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업을 했습니까.
  
  “저희 상업관리소에서 올해 주민들에게 공급해야 할 소금을 실어오기 위해 철도성에서 컨테이너를 10개 정도 배정을 받을 때, 철도성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컨테이너를 1~2개 더 배정받아요. 여기에 80t, 혹은 160t씩 소금을 실어 와서 파는 거죠.”
  
  ―컨테이너 트럭을 임차하는 건가요.
  
  “트럭이 아니라 철도 화차(貨車)에 싣는 컨테이너 박스를 사는(개념상으로는 빌리는 거지만, 김다혜씨는 ‘산다’고 표현-기자주) 거죠. 북한은 도로 인프라가 안 되어 있어서 그런 큰 짐은 트럭으로는 나르지 못해요. 철도를 이용해도 평안남도에서 강원도나 함남, 함북, 양강도 같은 데까지 오는 데는 주문한 때부터 한 달쯤 걸려요. 김장철이 시작되기 한 달 전쯤 일을 시작해서, 김장철에 소금을 내다 팔면 엄청난 이윤이 떨어져요.”
  
  ―돈은 얼마나 들어갑니까.
  
  “아까 1000달러 얘기한 것은 예를 그렇게 든 거고요. 컨테이너 박스 하나 사는 데 500달러, 소금 사는 데 800달러가 들어갔어요.”
  
  ―인건비는 안 드나요.
  
  “인건비는 별로 안 들어요. ‘쏘운반’(‘쏘아서 보내준다’는 뜻), 즉 제염소에서 역(驛)까지 소금을 실어다 주는 운전사들, 역에서 소금을 화차에 싣거나 내리는 노동자들, 안전원들에게 줄 돈 같은 걸 합쳐서 200달러 정도 들어가요. 이들의 경우 대개 ‘고양이 담배’라고 하는 외제 담배를 몇 갑 주면 됐기 때문에 그리 큰돈이 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2010년경부터는 이들에게도 달러를 집어주어야 했어요.”
  
  ―컨테이너 박스나 소금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적은 돈이 아닐 텐데….
  
  “부모님께 얘기를 해서 거의 전 재산을 팔다시피 해서 돈을 마련했어요. 300달러 정도는 그렇게 마련하고, 모자라는 200달러는 친척들에게 긁어서 마련했죠. 북한도 사채업(私債業)이 꽤 발전해 있기는 하지만, 한 달에 이율이 20%나 돼요. 이자를 갚으면서 장사를 하면 남는 게 없어요. 적은 돈이라도 자기 돈으로 하든지, 친척들 돈을 빌려서 해야 해요. 친척들에게 빌린 돈은 조금만 얹어서 주면 되니까…. 일단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 돈을 가지고 계속할 수 있었죠.”
  
  ―단순히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수준이 아닌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겠군요.
  
  “그렇죠. 본인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자리에 있거나, 철도성을 비롯해 곳곳에 네트워크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뇌물도 줘야 할 텐데….
  
  “조금 높은 사람에게는 대개 50kg짜리 석청(꿀) 같은 토산품을 주면 됐고, 낮은 사람들에게는 ‘고양이 담배’면 됐어요.”
    
  번 돈 모두 ‘무상몰수’ 당하고 脫北
  
2009년 8월 보통강상점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김정일이 행차할 경우, 해당 기관에서는 미리 문을 닫고 김정일을 맞이하기 위한 연습을 한다고 한다.
  ―몇 년이나 했어요?
  
  “24세 때부터 29세까지 했으니까 5년 정도? 22세 때 다른 사람 따라다니면서 배우기 시작해서 2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했죠. 처음에는 3t이나 5t 하는 식으로 작게 하다가 나중에는 80t, 160t으로 규모를 키웠지요.”
  
  ―담이 컸나 봐요.
  
  “항상 도전정신이 강했어요. 어머니는 늘 ‘얘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여자로 태어났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혹시 사업이 꼬여서 탈북한 건가요.
  
  “고발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보안서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죠. ‘장사는 비(非)사회주의적인 것입니다’라는 김정일의 방침을 어겼다고 하더군요. ‘배급도 안 주고, 장사도 못 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대들다가 맞기도 했어요. 결국 그동안 번 돈을 몽땅 ‘무상(無償)몰수’당하고 말았죠. 정말 죽고 싶었어요. 그러다 친구들이랑 탈북한 거죠.”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친구들하고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대장금〉 〈풀하우스〉 〈가을동화〉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올인〉…. 〈대장금〉을 제일 재미있게 봤어요.”
  
  ―어떻게 봤나요.
  
  “함흥 등 동해안 지방에는 회령이나 나진·선봉에서 들어온 CD알(CD)이 많이 돌아다녀요. 평양이나 남포로 출장을 가서 보면, 남한TV가 잡히는데 북한 조선중앙TV보다 화질이 훨씬 더 좋아요.
  
  2005년 아리랑축전을 할 때 평양에 갔었는데, 제가 묵었던 집 대학생 남매는 컴퓨터에 〈낙랑 18세〉 CD를 넣고 보더군요. 신기했어요. ‘지방에 사는 우리는 종이에다가 컴퓨터 자판(키보드)을 그려놓고 연습을 했는데, 평양에 사는 얘들은 컴퓨터로 드라마를 다 보는구나’ 싶어 무척 부러웠어요.”
  
  ―남한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게 남한의 실제 모습으로 여겨지던가요.
  
  “‘이런 별세상이 있구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다 선전이야’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북한은 모든 게 보여주기 식이잖아요, 선전용. 저도 연습이지만, 그런 촬영을 한 번 해봤어요.”
  
  ―언제요.
  
  “상업관리소에서 일할 때인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 번 다녀간 곳은 김정일도 언젠가는 꼭 다녀가요. 때문에 김정일이 온다는 소문이 돌면, 김일성이 다녀간 적이 있는 기관에서는 김정일이 올 때를 대비해요. 제가 일했던 상업관리소의 경우, 3일 동안 상점을 폐쇄하고 직원들에게 준비를 시켰어요. 인사말이나 TV인터뷰 등을 할 때, 전투적·혁명적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연습을 해야 했죠.”
    
  뗏목 타고 탈북한 25세 청년
  
  ―북에 있을 적에 혹시 남한에서 보낸 삐라를 보거나 라디오 방송을 들은 적이 있나요.
  
  “삐라는 못 봤어요. 남한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많다고 들었어요. 남한에 와서 만난 25세짜리 남자애는 남한 라디오를 듣고 뗏목을 타고 서해바다로 탈출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뗏목을 타고 넘어왔다고요?
  
  “3박 4일 걸렸대요. ‘밤에 망망대해에서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밤에는 오히려 편안했다. 낮이 혹시라도 북한 해군경비정에 발각될까 무서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북한에서 라디오로 서초 세 모녀 자살사건, 서울시 탈북자 공무원 간첩사건 뉴스도 들었대요. 라디오가 좋은 게, 우리 사회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나쁜 뉴스를 듣고도 왜 넘어왔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북한보다는 낫잖아요’라고 하더군요.”
  
  김다혜씨는 “저보다 나이는 어려도 정말 멘탈이 강한 친구들이 많다”면서 “이제 탈북자들도 물갈이가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저도 이대에서 공부 좀 한다고 하지만(김다혜씨는 이번 학기에 6과목을 수강, 그중 5과목에서 A+를, 나머지 한 과목은 A를 받았다고 한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에도 실력이 짱짱한 애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커뮤니티 모임 등에서 ‘우리는 언론에 나가거나 하지 말고, 조용히 실력을 키우자’고 얘기해요. 의대에 다니는 친구는 나중에 북한에 가서 병원을 세우고, 교육학을 공부하는 친구는 대학을 세우겠다 얘기하죠.
  
  디스(Diss・누군가를 무시한다, 비판한다, 깔아뭉갠다는 의미의 유행어. ‘Disrespect’ 등에서 유래-기자주)하는 건 아니고, 20여 년 전에 넘어온 기존의 탈북자 중에는 실력은 부족한데 남한에서 롤모델로 너무 띄워주다 보니 뻥튀기가 된 분도 있다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길을 가면서 먼저 간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내가 줍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브로커 비용 300만원 내주면서 현실 깨닫게 돼”
  
2010년 7월 8일 하나원 개원 11주년 기념행사에서 탈북청소년들이 비보이 춤을 추고 있다.
  ‘멘탈이 강하다’ ‘짱짱하다’ ‘디스한다’ 같은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생각하는 것도 ‘신세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해가면서 자신을 과장하는 일부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참신하고, 건강해 보였다.
  
  “저는 사실은 아직 신생아나 같아요. 이 사회의 문제를 보며 단 거는 달다, 쓴 거는 쓰다고 표현하는데, 그걸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는 몰라요. 그래서 자유경제원에도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쓴 건데, 너무 이슈화되는 바람에 자아반성을 많이 하고 있어요.”
  
  여기서 기자와 동행한 인턴기자 문지은(이화여대 심리학과 3학년 휴학)씨가 질문을 던졌다.
  
  ―북한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기성세대는 평생 남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교육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고정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20~30대 청년들은 달라요. 일찍부터 한국 드라마, 한류(韓流)를 접한 세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통일이 되면 우리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다시 기자가 물었다.
  
  ―막상 와서 보니까 북에서 생각하던 남한의 모습하고 비교해서 어떻던가요.
  
  “남한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들은, 남한에 가기만 하면 그런 멋있는 집에서 살면서 멋있는 남자 만나서 연애하는 환상을 품기도 하겠죠. 하지만 하나원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상으로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죠. 하나원에서 나오면 바로 그날 저녁에 탈북브로커가 찾아와요. 정착금으로 받은 300만원을 주고 나면 라면 사먹을 돈도 없게 돼요. 그러면 ‘아, 이게 현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죠.”
    
  대학생활
  
  ―탈북 이후 언제가 제일 어려웠나요.
  
  “북한에서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저희가 여기서 고생하는 건 고생도 아니죠. 저희는 지옥에서 살아봤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이 땅이 너무 좋고, 대한민국이 천국 같아요. 이런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문지은 인턴기자가 물었다.
  
  ―대학 와보니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 같나요.
  
  “저는 좋은 걸 배우든 나쁜 걸 배우든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기와는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여기서는 어린 아기 같죠. 머리가 텅텅 비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사회적으로 약자로, 소외 계층으로 취급받고, 무식하다는 소리 들어야 해요. 이게 탈북자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저는 대학에 와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고, 또 강의를 들을 수 있어요. 그거는 학생만의 혜택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대학에 온 걸 좋게 생각해요.”
  
  김다혜씨는 “처음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버렸다”고 말했다.
  
  “저도 영어, 논술 시험 보고, 면접시험도 치르고 들어왔지만, 불과 2년 정도 준비를 해가지고 들어왔으니까요. 남들은 10년 넘게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왔는데, 혜택을 받고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미안했어요.
  
  지금은 그 생각을 접었어요. 원래 이대는 여자 고아 한 명으로 문을 연 대학이잖아요? 그렇다면 북한 여성들처럼 정말 불쌍한 사람들도 당연히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의 이 빚진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면, 저는 북한에 온 이대 출신들이 사업을 하겠다거나 할 때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이 사회에 몇 배, 몇백 배로 갚을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문지은씨가 “혹시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드라마를 아느냐?”고 물었다. 〈두 번째 스무 살〉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가정주부의 대학생활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인기 드라마. 문지은씨의 질문에 김다혜씨가 반색을 했다.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참 짠했어요. 단톡방(단체카카오톡방)에서 애들이 말하는 걸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절절매는 주인공의 모습이 꼭 저 같아요. ‘나는 노력한다고 하고 있지만, 내가 하는 말과 행동도 친구들한테는 어색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오히려 걱정”
  
  ―1994년에 김일성 죽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때는 하늘이 훅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는 고아가 되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죠.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신(神)이, 절대적인 신이 죽은 거잖아요? 삼복더위에 매일같이 40리 길을 걸어가 꽃을 따다가 김일성 빈소에 바치면서 엄청 울었죠.”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어땠나요.
  
  “하나원에 있으면서 음성 꽃동네에 봉사활동하러 갔을 때, 그 소식을 들었어요. 만세를 불렀죠.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제가 ‘장사꾼’이잖아요? ‘나는 이제 막 대한민국에 왔는데, 무엇이든 배우거나 돈을 벌어서 북한에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도 전에 통일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드는 거예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정은이 나와서 아직 통일이 안 되고 있지만….”
  
  ―북한의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연락이 되나요.
  
  “아직 그러지 않고 있어요. 제가 그들을 도울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능력이 없잖아요.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김다혜씨는 “여기에서 돈을 벌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는 탈북자들도 많지만, 저는 고통스럽더라도 그러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돈을 벌어서 가족들 다 데려오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통일을 내다본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능력을 갖춰서 통일이 된 후 북한에 들어가서 부모, 형제들을 먹여 살리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족들이 다 남한으로 내려오면, 제 뿌리를 다 뽑아오는 거잖아요? 여기에도 뿌리가 없고, 북한에도 뿌리가 없는 사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이건 가족들을 데려올 능력이 없는 데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에선 상벌 시스템이 무너져”
  
  ―앞으로 무슨 공부를 더 하고 싶나요.
  
  “국어국문이나 중어중문을 하고 싶어요. 중국어는 조금 할 줄 아는데, 중문학을 하면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외교 교섭 같은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면 통일 후에 북한 주민들한테 남북한 언어 차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하면 석·박사까지 공부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뭐든지 제가 하는 만큼 얻는 게 가장 좋아요. 북한에서는 시스템이 무너지다 보니 상벌(賞罰) 시스템도 무너졌어요. 여기 와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5개월 동안에 회계1·2급 자격증, 세무2급 자격증을 땄어요. 세무 자격증은, 세법 같은 건 처음 공부하는 거라서 남들이 다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함께 시험 치러 간 11명 중에서 저만 붙었어요.
  
  추석 때 탈북한 동생들(남한에 와서 만난 나이 어린 탈북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모두들 그랬어요. ‘여기서는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만큼, 나쁘게 살면 나쁘게 사는 대로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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