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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8일 토요일

'힘든 선택들', 힐러리 클린턴

입력 : 2015.04.18 08:40
[신간 화보] 힐러리 클린턴 '힘든 선택들'
힘든 선택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 지음|김규태 이형욱 옮김|김영사|860쪽|2만9000원

“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힘든 선택들과 마주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지도자들과 국가의 선택은 전쟁과 평화, 빈곤과 번영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한다. 내가 워싱턴의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아칸소로 가서 빌(빌 클린턴)과 결혼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겠다는 선택을 했을 때 친구들은 ‘제정신이니?’라고 물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건강보험 개혁을 맡았을 때, 공직에 출마했을 때, 국무장관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해달라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자서전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지난 12일 대선 도전을 선언하면서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8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에게 패한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될 경우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남편 빌 클린턴을 뒤이은 사상 첫 부부 대통령을 기록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지난 4년간 국무장관으로 112개국 160만킬로미터를 여행하며 겪은 다양한 일과 소회를 풀어놓았다. 주요 장면과 인물에 대한 소묘, 일화를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2008년 대선 직후 ‘적’에서 ‘동지’로

선팅이 된 파란색 미니밴 뒷좌석에 누워 있다니, 대체 어찌된 영문이냐고? 좋은 질문이다! 나는 워싱턴 D.C.의 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집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었다.

때는 2008년 6월5일 저녁이었다. 나는 버락 오바마와 비밀 회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만남을 갖게 되리라곤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조차 못 했다. 나는 패배했고 그는 승리한 터였다. 아직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대처할 만한 경황이 없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이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버락이 흑인이고 내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경합이었지만 힘들고 치열하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긴 접전이기도 했다. 나는 낙담했고 진이 다 빠져버렸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버락이 승리했고 이제는 그를 지지해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색한 첫 데이트에 나온 10대들처럼 샤도네이를 마시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버락이 우리가 맞붙었던 힘든 선거전에 관해 친근한 농담을 하며 서먹한 분위기를 깼다. 그런 뒤 버락은 우리 당의 단결과 대통령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오바마와 나는 힘겨운 경선을 벌였지만, 2008년 6월 뉴햄프셔 주 유니티에서 열린 첫 번째 통합연설을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편안하게 대화했다. 유니티를 첫 번째 연설 장소로 정한 이유는 마을 이름이 ‘통합’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곳에서 버락과 내가 대통령 후보 지명투표에서 똑같이 득표했기 때문이다.”/김영사 제공, ⓒBarbara Kinney
 “오바마와 나는 힘겨운 경선을 벌였지만, 2008년 6월 뉴햄프셔 주 유니티에서 열린 첫 번째 통합연설을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편안하게 대화했다. 유니티를 첫 번째 연설 장소로 정한 이유는 마을 이름이 ‘통합’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곳에서 버락과 내가 대통령 후보 지명투표에서 똑같이 득표했기 때문이다.”/김영사 제공, ⓒBarbara Kinney
11월 13일 목요일 아침, 나는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후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시카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도착한 뒤 나는 의자 몇 개와 접이식 탁자 하나가 놓인, 벽에 나무판자가 덧대어진 큰 방으로 안내를 받아 거기서 대통령 당선자와 단둘만 만났다.

2009년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Pete Souza
 2009년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Pete Souza
그는 지난 몇 달 동안보다 더 여유롭고 건강해 보였다. 아무리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자신 있어 보였다. 나중에도 여러 번 목격한 대로, 그는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는 나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안했다. 나를 그 자리에 이미 내정해 놓았으며, 미국이 나라 안팎으로 유례없는 난관들에 직면해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최고 적임자(그의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인물)가 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동안 이 제안에 관한 온갖 암시와 소문, 그리고 노골적인 질문까지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겨우 몇 달 전만 해도 나와 버락 오바마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대선후보 경선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나에게 자신의 행정부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각에서 가장 높은 직위, 유고 시 대통령직 승계서열 4위인 요직에 말이다.

 “나와 미셸은 대중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과제를 맡았다는 점에서 서로 유대감을 느꼈다.” /김영사 제공, REUTERS by Jason Reed
 “나와 미셸은 대중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과제를 맡았다는 점에서 서로 유대감을 느꼈다.” /김영사 제공, REUTERS by Jason Reed
◆판문점 창너머의 북한 병사

우리는 1953년부터 한국과 북한을 갈라놓은 비무장지대 내 판문점으로 갔다. 로버트 게이츠와 나는 한국 측 장관들과 함께 근처의 유엔군 본부로 가서 군사 브리핑을 받았다. 또한 우리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반은 남쪽에, 반은 북쪽에 반듯하게 자리 잡은 사각형의 군사정전위원회 건물도 돌아보았다. 휴전협정에 따라 양측의 협상을 위해 이렇게 설계된 것이었다. 긴 회의 탁자도 정확히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한 모습. 북한 군인이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다./김영사 제공, Photo by Cherie Cullen, DOD via Getty Images
 힐러리 클린턴이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한 모습. 북한 군인이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다./김영사 제공, Photo by Cherie Cullen, DOD via Getty Images
우리가 걸어다니는 동안 북한 병사 한 명이 창문 바로 너머에 서서 냉담한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그는 그저 호기심을 느꼈을 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를 겁주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했다. 나는 브리핑에 계속 집중했고, 게이츠는 즐겁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얀마의 ‘투사’ 아웅산 수치를 만난 날

가냘프고 연약하기까지 한 모습이지만 그녀에게선 분명한 내면의 힘이 느껴진다. 기품이 넘치며, 오랜 연금생활 속에서도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강하고 활기찬 정신이 전해진다. 그녀는 내가 넬슨 만델라나 바츨라프 하벨 등 다른 정치범들에게서 봤던 품성을 보여주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어깨에 한 나라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

2011년 12월 1일 내가 아웅산 수치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흰옷을 입고 있었다. 이 우연의 일치가 좋은 조짐으로 느껴졌다. 나는 오랜 세월 버마의 이 유명한 반체제 인사에 관해 읽고 생각해왔다. 마침내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다. 수치는 가택연금에서 풀려났고, 나는 독재국가인 그녀의 조국의 민주 개혁 전망을 논의하려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갔다. 우리는 양곤에 있는 미국 외교대표 관저의 테라스에서 비공개로 저녁을 먹었다. 인야 호숫가에 자리 잡은 식민지풍의 오래되고 예쁜 집이었다. 이제 막 만났음에도 나는 우리가 평생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2011년 12월 버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와 만난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AP Photo, Saul Loeb, Pool
 2011년 12월 버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와 만난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AP Photo, Saul Loeb, Pool
◆사르코지는 ‘나의 왕자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연단에 섰을 때보다 실제로 만났을 때 더 조용한 편이다. 그런데 사르코지는 달랐다. 그는 실제 모습이 훨씬 활기차고 유쾌했다. 그와 마주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늘 신나는 모험이었다. 자기주장을 펼칠 때 그는 펄쩍 뛰거나 과장된 몸짓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여성 통역사는 그를 따라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대개는 억양을 비롯한 모든 특징을 나무랄 데 없이 재현해냈다. 독백하듯 의식의 흐름을 속사포처럼 내뱉는 사르코지와 대외정책 전반을 논하다보면, 가끔은 끼어들 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잡담을 할 때 다른 국가지도자들을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쳤다거나 물러터졌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지도자는 “약쟁이”라고 하고, 다른 한 지도자의 군대는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으며, 또 어떤 지도자는 “야만인”의 후예로 묘사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외교관들은 왜 하나같이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백발의 남성인지 늘 궁금해했다. 

2010년 1월 파리 엘리제궁에서 계단을 오르다 구두가 벗겨진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KCSPPress, Splash News, Newscom
 2010년 1월 파리 엘리제궁에서 계단을 오르다 구두가 벗겨진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KCSPPress, Splash News, Newscom
2010년 1월의 쌀쌀한 어느 날, 나는 사르코지에게 인사하려고 파리의 엘리제 궁 계단을 올라가다 그만 기자단 앞에서 신발이 벗겨지고 말았다. 그러자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맨발 사진을 찍어댔다. 사르코지는 점잖게 내 손을 잡고는 내가 신발을 신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나중에 사진 복사본에 메모를 적어 그에게 보냈다. “나는 신데렐라가 아닐지 몰라도 당신은 언제나 나의 왕자님이에요.”

◆박식으로 압도했던 메르켈

하지만 가장 강력한 유럽 지도자는 사르코지와 기질이 거의 반대인 여성, 바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였다. 나는 국무장관을 지내는 동안 앙겔라에게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그녀는 단호하고 통찰력 있고 직선적이며, 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나에게 말했다. 물리학을 공부하고 양자화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한 앙겔라는 특히 기후변화나 원자력 같은 기술적 문제들에 정통했다. 그녀는 토론을 할 때마다 사건이나 인물, 사상 등에 관한 온갖 질문들로 무장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펼쳐놓았다.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다른 지도자들은 그런 식으로 토론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반겼다.

사진 왼쪽부터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Brendan Smialowski, Getty Images
 사진 왼쪽부터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김영사 제공, Brendan Smialowski, Getty Images
2011년 6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워싱턴을 공식 방문했을 때, 국무부 오찬에 그녀를 초대해 따뜻하게 맞이했다. 앙겔라는 답례로 내가 최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기사와 사진이 실린 신문을 액자에 끼워 선물해주었다. 나는 액자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1면에 우리 둘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는데, 머리는 잘려나가고 없었다. 손을 맞잡고 비슷한 바지정장을 입은 두 사람이 똑같은 포즈로 서 있었다. 이 신문사는 독자들에게 둘 중 누가 앙겔라 메르켈이고 누가 나인지 맞혀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나는 신문을 넣은 그 액자를 남은 장관 임기 동안 집무실 벽에 걸어두었다. 

◆푸틴의 ‘시베리아 호랑이 브리핑’

나는 몇 년 동안 푸틴을 이해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다. 2010년 3월에는 모스크바에 있는 푸틴의 별장을 방문해 그와 무역 및 WTO에 대해 격한 논쟁을 벌였지만 계속 제자리만 맴돌았다. 푸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을 뿐더러 내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화가 났지만 다른 방식을 시도했다. 그가 나만큼이나 야생동물 보호에 열정을 쏟는다는 걸 아는지라, 냉랭한 분위기를 깨고 이렇게 말했다. “푸틴 총리님,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호랑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보호하고 계시는지 말씀 좀 해주시죠.” 그는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2010년 3월 모스크바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동 /김영사 제공, AP Photo, RIA-Novosti, Alexei Nikolsky, Pool
 2010년 3월 모스크바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동 /김영사 제공, AP Photo, RIA-Novosti, Alexei Nikolsky, Pool
푸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라고 했다. 보좌관들은 남겨두었다. 그는 긴 복도를 지나 개인용 집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나타나자, 주변을 어슬렁대던 살집 좋은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곧바로 차려 자세를 취했다. 방호문을 열고 책상 쪽으로 가니, 벽에 커다란 러시아 지도가 붙어 있었다. 푸틴은 동쪽의 호랑이와 북쪽의 북극곰, 그 밖의 위험에 처한 동물들의 운명에 대해 영어로 생기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교적으로 변한 그의 태도를 보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그는 몇 주 후에 빌과 함께 북극곰들에게 식별표지를 부착하러 제믈랴 프란차 이오시파 제도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단 남편에게 물어보겠다고 하고, 만약 빌이 못 간다면 내 일정을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렸다.(결국 우리 둘 다 못갔다.)

◆‘정복되지 않는 영혼’ 만델라

2012년 방문 때는 남아공의 한 실력파 대중가수 덕분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 내리는 밤에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회동  /김영사 제공, ⓒHuma ABedin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회동 /김영사 제공, ⓒHuma ABedin
그 일정에서 오랜 친구 만델라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남아프리카 이스턴케이프 주의 쿠누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그의 자서전에는 그때가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완만한 구릉지대에 자리한 아담한 그의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언제나처럼 만델라의 인상적인 미소와 남다른 품위에 매료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만델라는 여전히 존엄과 고결의 상징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 ‘불굴의 영혼’에 묘사된 대로 “정복할 수 없는 영혼”의 선장이었다. 

 “2013년 12월 만델라 추도식 후, 친구 보노(U2의 리더)와 함께 만델라의 삶과 그가 남긴 값진 유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피아노 건반을 몇 번 두드리자 빌이 재미있어했다.” /김영사 제공, ⓒ Sahra Latham
 “2013년 12월 만델라 추도식 후, 친구 보노(U2의 리더)와 함께 만델라의 삶과 그가 남긴 값진 유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피아노 건반을 몇 번 두드리자 빌이 재미있어했다.” /김영사 제공, ⓒ Sahra Latham
2013년 12월 5일, 넬슨 만델라가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셸과 조지 W 부시 부부와 함께 우리 가족에게 장례식 참석을 권했다. 추도식이 끝난 뒤 나와 빌, 첼시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만델라의 집을 개인적으로 방문해 그라사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 측근들을 만났다. 우리는 만델라를 기린 책에 서명을 하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회상했다. 추도식에는 록스타이면서 활동가인 또 한 명의 친구 보노도 참석했다. 보노는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 와 커다란 흰색 피아노 앞에 앉아 만델라를 추모하는 곡을 연주했다. 나는 콘돌리자 라이스처럼 피아노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보노는 친절하게도 내가 그의 옆에 앉아서 잠깐 연주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러자 나보다 음악에 더 조예가 깊은 남편이 즐거워했다. 


◆압둘라 국왕 사막 야영장의 황금빛 욕실

80대인 압둘라 국왕이 시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사막 야영장으로 나를 초대했다. 우리는 곧 그 사막 ‘야영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궁전 한편에 마련된, 냉난방 시설이 갖춰진 거대한 텐트였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욕실은 황금빛이었으며, 외부는 트레일러들과 헬리콥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검정색의 긴 예복을 입은 군주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일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몇몇 미국 동료들과 달리, 나는 보통 존중과 친교의 의미로 가벼운 잡담을 하면서 공식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그래서 낙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폐하, 여기 계신 왕자님은 낙타가 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내가 알파이살 왕자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국왕은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왕자가 낙타 보는 눈이 없는 것 같소.” 

 2010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때 외무장관 사우드 알파이살 왕자와 함께 2010년/김영사 제공, AP Photo, Hassan Ammar
 2010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때 외무장관 사우드 알파이살 왕자와 함께 2010년/김영사 제공, AP Photo, Hassan Ammar
우리는 한동안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뒤, 초대된 손님들을 만났다. 정성들여 만든 오찬을 함께 할 사람들이 기자단을 포함해 40명 정도 모여 있었다. 국왕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푸짐하게 차려진 뷔페 음식 쪽으로 나를 안내했고, 두 명의 웨이터가 쟁반을 들고 우리 뒤를 따랐다. 

음식의 종류는 양고기와 쌀밥처럼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부터 바닷가재와 파에야까지 수십 가지나 되었다. 길에서 대충 끼니를 때울 때가 많은 기자들과 수행원들은 마치 죽어서 음식천국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웨이터들은 손님들 주위를 돌아다니며 접시에 음식을 채워주었다. 나는 기다란 U자 모양의 식탁 상석에 국왕과 함께 앉았다. 식탁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평면 텔레비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어서, 국왕은 식사를 하며 축구나 오프로드 자동차경주를 볼 수 있었다. 그가 텔레비전 음량을 아주 크게 키워놓아서 연회장 안에 북적거리는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나의 충직한 보좌관이자 무슬림인 후마 애버딘의 어머니 살레하 애버딘 박사는 제다에 위치한 다크 알헤크마 여자대학의 부학장인데, 그곳에서 나는 학생들과 직접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히잡을 머리에 두르거나 얼굴 전체를 가린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질의응답이 오고가는 동안, 두 눈만 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감싼 한 여자 경비원은 그곳에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남성 수행원들이나 기자들이 학생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토론회를 마무리 짓고 있을 때쯤 그녀는 후마에게 다가와서 아랍어로 “클린턴과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라고 속삭였다. 토론회가 끝나자, 후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온몸을 가린 이 여성을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러워하는 그녀를 배려해서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라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는 일단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베일을 벗더니 활짝 웃었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자 곧장 다시 베일을 썼다. 이곳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다. 

◆오만 술탄의 궁전에서 오찬

오만의 술탄은 상황을 극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2011년 10월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술탄 카보스와 함께. 술탄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은밀한 외교 채널을 열어주었다. /김영사 제공, KEVIN LAMARQUE, AFP, Getty Images
 2011년 10월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술탄 카보스와 함께. 술탄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은밀한 외교 채널을 열어주었다. /김영사 제공, KEVIN LAMARQUE, AFP, Getty Images
우리는 아라비아 반도 끝에 위치한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술탄이 직접 설계한 궁전에서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존 필립 수자가 작곡한 자유의 종 행진곡의 귀에 익은 선율이 들려왔다. 길게 늘어진 로브에 허리춤에는 의식용 단도를 차고, 화려한 터번을 머리에 두른 카보스 술탄이 미소를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는 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위층 발코니에서 오만 왕립교향악단이 연주하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음악을 사랑하며 40여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절대권력으로 오만을 근대화하는 데 힘쓴 기민하고 자애로운 지도자다운 연출이었다. 

◆아름다운 릴레이: 내 어머니와 내 딸 첼시

일찍이 나는 미국 외교정책 업무를 릴레이 경주에 빗댄 적이 있다. 지도자는 배턴을 넘겨받아 가능한 한 훌륭하게 다리를 움직여 다음 주자가 이어달리기에 가장 좋게 만들어준다. 리틀록의 병원에서 첼시를 처음 팔에 안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의 목표가 딸아이가 잘 자랄 수 있게끔 많은 기회를 안겨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이가 자라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에 나가면서 내 책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 딸아이도 곧 엄마가 되는 지금, 나는 몇 년 동안 고대해온 할머니라는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후에도 나와 내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어머니에게 배운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2009년 2월 2일 국무장관 취임 선서식. 남편 빌과 딸 첼시, 어머니 도로시가 함께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있다. /김영사 제공, Alex Wong, Getty Images
 2009년 2월 2일 국무장관 취임 선서식. 남편 빌과 딸 첼시, 어머니 도로시가 함께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있다. /김영사 제공, Alex Wong, Getty Images
내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막 90세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어머니는 워싱턴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코네티컷 애비뉴의 동물원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건 더 이상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내 세대 많은 미국인들처럼 나 또한 연로한 부모와 여생을 보내게 되어 축복이라 생각했고,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파크리지에서의 유년 시절, 어머니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원을 주었다. 이제 내가 어머니를 돌볼 차례였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어머니가 절대 듣지 못하게 했다. 내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은 지독하리만치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은 참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곁에서 지낸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위안이 되었고, 특히 2008년 대선이 끝난 후의 힘겨운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나는 상원이나 국무부에서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 주방 한쪽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 옆으로 슬며시 다가가 하루 일을 시시콜콜 털어놓곤 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다짐

나는 2013년과 2014년 초에 걸쳐 이 책을 썼다. 대부분 뉴욕 주 차파콰에 있는 우리 집 3층의 아늑하고 햇빛이 잘 드는 서재에서 집필했다. 이 서재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고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다. 창밖으로는 나무 꼭대기들이 내다보인다. 나는 드디어 책을 읽고, 밀린 잠을 자고, 남편과 개들과 함께 오래 산책을 하고, 가족들을 더 많이 만나고, 미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얻었다.

2010년 1월31일 뉴욕 라인벡, 딸 첼시와 사위 마크의 결혼식. 사진 왼쪽부터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어머니 도로시, 첼시, 마크 /김영사 제공, ⓒ Genevieve de Manio
 2010년 1월31일 뉴욕 라인벡, 딸 첼시와 사위 마크의 결혼식. 사진 왼쪽부터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어머니 도로시, 첼시, 마크 /김영사 제공, ⓒ Genevieve de Manio
2014년 초에 빌과 나는 고대하던 멋진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첼시와 마크 덕분에 더없이 행복했고 손주 볼 생각에 들떴다. 첼시가 태어났을 때 나는 잔뜩 긴장했었다. 많은 책을 읽고 예일 대학교 아동연구센터에서 공부까지 했지만 이 더없이 기적적인 존재와 부모로서의 책임에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작가 엘리자베스 스톤이 말한 대로 아이를 낳는 것은 “내 심장을 몸 밖에 꺼내놓는 것”임을 곧 실감하게 되었다. 경이로운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세월을 겪은 뒤 손주를 기다리는 지금은 흥분과 기대감밖에 들지 않는다. 마거릿 미드의 말도 떠오른다. 아이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생기 있게 유지시키고 마음을 젊게 해주며,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게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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