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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4일 일요일

1950년 12월 24일 성탄절 직전 10만명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기적!



1950연 12월 24일의 성공적인 흥남부두의 피난민 철수작전을....! !

2014. 12. 23. 조선일보에서…

<성탄절 직전 10만명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기적!>

6·25때 중공군에 밀린 국군·유엔군 함경도 흥남 항구에서 대규모 철수 12월 24일 마지막 배 '온양호'까지 피란민 10만명도 함께 태워 구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려요

지난주 개봉한 '국제시장'이라는 우리 영화에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제목만 보면 부산의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요? 예상과 달리 이 영화는 한 인물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요. 1950년 12월 6·25전쟁 때의 흥남 철수, 1960년대 광부·간호사 서독 파견과 베트남 파병, 1983년 이산가족 상봉 등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죽 보여주지요. 그 중 이 영화의 시작 장면인 '흥남 철수'는 64년 전 딱 이맘때 일어난 사건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었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요?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 바뀐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우리나라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북한군은 단숨에 서울을 점령하며 여름까지는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갔지요. 그러나 8월 16일부터 벌어진 미군 전투기의 대규모 폭격과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펼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어요. 9월 28일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서울을 되찾고,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하였어요.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열흘 뒤에는 압록강까지 이르렀지요. 미군 제10군단은 두만강 일대에 이르기도 했대요. 6·25전쟁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전세를 뒤바꾸는 일이 벌어졌어요. 10월 25일 중공군(中共軍·중국 공산당에 딸린 군대)이 북한을 지원하며 전쟁에 뛰어든 것이에요.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물밀듯 밀려오자 국군과 유엔군은 전선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흥남항에서 벌어진 대규모 철수 작전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이 불리해졌다. 작전상 철수한다!"
결국 11월 28일 유엔군 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어요. 12월 4일 미국 제8군이 평양을 중공군과 북한군에 내어주며 임진강까지 후퇴하였지요. 하지만 동부 전선에서는 원산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해 육로를 통한 후퇴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12월 11일에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어요.

"동부 전선에 남아 있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해상으로 철수한다!"
군함을 타고 바다를 통해 철수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철수 병력을 태울 군함이 정박할 곳은 함경남도 흥남 항구였고요. 그로부터 며칠 뒤인 12월 15일에 유엔군의 흥남철수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흥남에서 철수할 병력은 국군 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을 포함해 10만명이 훨씬 넘었고, 차량도 1만7000여대나 되었어요. 이들을 수송하고자 우리 해군과 미국 해군은 투입 가능한 모든 함정을 흥남으로 보냈지요.

◇10만명 피란민까지 철수한 기적 같은 작전

그런데 흥남 항구에서 큰 문제가 생겼어요. 유엔군과 국군의 철수 소식을 듣고 10만명이나 되는 피란민이 흥남 항구로 몰려온 것이에요. 하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피란민을 배에 태울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배에 피란민을 태울 자리도 부족한 데다 10만명이나 되는 피란민을 태우다가는 출항 시간이 늦어져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였지요. 게다가 피란민 속에 간첩이 섞여 들어와 파괴 공작을 펼 위험도 있었고요.

그러자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 제10군단 사령관인 알몬드 장군의 고문관을 지내던 현봉학 의학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어요.

"우리가 이들을 버리고 간다면 이들은 적에게 몰살당할 겁니다."
"피란민을 버리고 가야 한다면 국군이 걸어서 철수하겠습니다."
이들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요청에 알몬드 장군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란민도 태운다."

이때부터 피란민은 여러 대의 수송선에 나누어 타고 흥남항을 떠나 남쪽 부산항으로 향했어요. 12월 23일, 미국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배에 실었던 물자를 내리고 피란민 1만4000여 명을 태웠습니다. 흥남항을 출발해 26일 거제도에 도착하여 피란민을 안전하게 내려 주었지요. 그 안에는 배에서 태어난 5명의 새 생명도 있었답니다. 12월 24일, 온양호를 마지막으로 흥남항에서 모든 수송선과 구조선이 철수 작전을 마쳤어요. 이때 동원된 선박은 총 193척에 달했습니다. 10만명의 피란민까지 무사히 철수한 후, 배에 미처 싣지 못한 물자는 항구 시설과 함께 폭파하였어요.

이렇게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철수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흥남은 다음 날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긴박한 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 같은 철수 작전이었지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감수=조규태 교수(한성대 역사문화학부)


우리국민들은 6.25전쟁의 긴박한 상황속에서 
북한의 함경남도 흥남부두에서 있었듣 10여만여명의 성공적인
피난민 대 철수작전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자유를 찾아 탈북하려는 10만여명의 피란민들을
12월25일 월드피스자유연합(이사장 안재철)이 부산역광장에서
 "휴머니즘의 회상 : 흥남철수작전. 장진호전투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 전시는 6.25전쟁 당시인 흥남철수와 장진호전투 사진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한 세계 67개국의 국기를 관람할 수 있다. 
6.25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24일,
한반도 북동부에서 있었던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을 기억하게 하는
이번 사진전은 2014년 1월 13일까지 진행되며,
 당시에 북한피란민이 몰려온 부산진역 인근의 부산역광장에서 진행하여,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철수하는 장진호전투부대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피란민들이 흥남부두로 몰려 오고 있다

피난민들을 수송하기 위해 수많은 군수물자를 하역 야적하고 있다(군수품은 부두 철수시 폭파시켜 사용불능케 했다)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유엔군들의 영결장면이다(이들은 고국으로 가지 못했을것이다)

운 좋게 배에 승선한 피난민들(그들의 미래는 암담했다)

전선에서 용케 살아남은 유엔군들이 승선하기 위해 부두로 집결하고 있다

피난민 철수를 위해 하역 야적한 군수물자와 부두시설을 폭파하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며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피난민의 인파

두사람의 피난민이 필사적으로 그물사다리를 오르고 있다(오르다가 떨어 사망한 사람들 많았다고 함)


 신속한 북진으로 통일의 부픈 꿈에 부플었던 유엔군은 예상치 못했던
 100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에 따라 북동부 전선의 장진호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뿐 아니라 영국 해병 41특공대, 한국인 카투사 병사들과,
대한민국 경찰들은 중공군의 게리라전법에 의한 포위공격으로
험한 산악지역의 눈덮힌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느라 막대한 병력의
손실과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자: 1950년 12월 9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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