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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일 화요일

북한 보위사령부 여전사에서 고려대 학생이 되기까지

by 주성하기자   2014-03-21 7:25 am


편집자 주: 이 수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강원도에서의 어린 시절

나는 1987년 3월 강원도에서 태어나 9세까지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우리가족은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아버지 부대의 사택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어렸을 적 만난 사람들은 군인과 군인가족들뿐이었다.

6살에는 군부대 유치원에 다녔다. 북한에서 유치원 1년은 11년제 의무교육에 포함된다. 7살에 소학교에 가게 되자 학교가 멀어서 도시락을 싸서 10리길을 걸어 다녔다.

등교할 때는 늦지 않으려 급하게 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친구들과 이리저리 살길에서 뛰어 노느라 두세 시간이 넘게 걸리곤 하였다. 산에서 꽃도 따고 산나물도 뜯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산길에는 남한에서 날아온 삐라가 많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삐라를 발견하면 읽거나 하지말고 학교로 가져오라고 했지만, 나와 동무들은 그것들을 주워 내가 귀찮아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다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삐라의 종이 질이 너무 좋았고, 북에서는 보기 힘든 칼라 사진이 많았다는 점이다. 잘 찢어지지도 않고 강기슭에 떨어져 있어도 물에 불지도, 불에 잘 타지도 않는 종이라 신기했다. 이제 겨우 소학교 1-2학년 이었었던 나는 학교에서 시킨대로 웬만해서는 글은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억에 남는 만화 한컷이 있다.

배가 튀어나온 못생긴 남자 그림 옆에 ‘당신도 지도자인가?’ 라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북에서 ‘지도자’는 김정일을 의미하므로, ‘김정일 지도자님을 이렇게 욕하는 것인가?’ 학교에서 교육 받은 대로 나쁜 남한 놈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고 한다고만 생각했다. 삐라는 지천이었지만 나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북한에서 군인이 좀 잘사는 줄 알겠지만 사실 북에서 군인이 제일 못사는 축에 속한다. 왜냐하면 민간인들은 자신의 직분 외에도 장사를 하다던가, 다른 일을 하면서 살 궁리를 할 수 있지만 군인은 사회에서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군인은 배급받은 대로만 살고 배급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당신이 처녀 적에 잘 모르고 그저 별이 멋있어 보여서(별은 군인을 의미한다) 시집오셨지만, 내 자식은 절대로 군인에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군인가족은 부대소속으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엄마는 가족소대원으로 그때그때 부대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맡겨진 일을 하셨다. 나는 삼남매 중 맏딸로 아래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 하나, 여섯 살 밑으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강원도에서 소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우리가족은 청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함경북도 청진에 9군단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건이 있었던 거 같다. 군단장이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강원도에 있는 아버지 부대였던 5군단과 청진의 9군단이 통째로 교체가 되면서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따라 청진으로 가게되었다.

늘 배가 고팠던 9살 시절

강원도는 시골이고 주위에 이웃들이 오래도록 함께 지낸 사람들이어서 우리들은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오가는 정이 있었다. 하지만 청진으로 옮겼을 때는 아버지 연대가 아예 해산되어버려서 다들 어디로 갈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뿔뿔이 흩어질 임시의 관계들이어서 서로 간에 인색하고 각박했다.

청진은 강원도와는 달리 도시였고 또 당시는 배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여서 사람들이 더욱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이웃 간에 서로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고 나는 시골에 비해 도시 인심이 이렇듯 인색함에 놀랐다. 그나마 강원도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배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95년 이전) 그 이후 청진에서는 배급이 없어서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식량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비상으로 미숫가루를 주기는 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인 나와 동생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1년 정도 군인들에게 배급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는 너무 당황하고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 갈 때 일부러 가방에 책은 딱 한 권만 넣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남의 밭에서 무, 배추, 파 등을 훔쳐 가방에 넣어오기 위해서였다.

길가에 있는 무, 배추 등을 닥치는 대로 뜯어서 훔쳐왔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는 훔친 것들과 산에 가서 뜯어온 산나물을 쌀, 강냉이 등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던 것 같다. 산나물을 뜯으러 가느라 학교를 못 갔던 적도 있다. 그것이 95, 96연도니까 내가 9-10살 때 일이다. 나도 어린 나이 이었지만 내가 그나마 철이 들어서 먹을 것을 구해올 궁리를 했다.

앙상한 밭에 무, 배추가 몇 개 밖에 없기 때문에 훔치다 걸리는 일이 많았다. 주인이 따라오면 도망가다가 배춧잎을 한 장씩 떼어내 이리저리 떨어뜨리면서 도망갔다. 어차피 잡히면 다 빼앗기니까 양이 적어지더라도 농장원의 추격을 따돌리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두고 가면 뒷사람이 가져갈 것이므로 주인은 따라오면서도 떨어진 배춧잎 낱장들을 주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잡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다.내가 이렇게라도 먹을 것을 마련해서 가져가야 6살, 3살 동생들과 내가 먹고 산다는 생각으로 도둑질을 했다.

아버지가 대대장이셨는데 대대장 딸이 농작물을 훔쳤다고 소란이 나면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을 가더라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농장원을 따돌리고서도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을 강기슭의 버드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당시 어머니는 위궤양에 자궁까지 들어내셔서 몸이 많이 쇠약하셨고, 대대장의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상 어머니가 직접 먹을 것을 훔치러 다니실 수는 없었다. 나는 장녀로서 생계에 책임감도 있었다. 엄마도 당신이 아프신 상황에 우리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세상이 너무나 힘든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지 다른 때에는 절대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도 엄마에게 ‘나는 남의 것이 예쁘고 보기 좋아서 훔치는 사람 아니다. 학교에서 절대로 친구 물건을 훔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애썼다.

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때의 그런 행동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함일 뿐이었다. 낮에는 같이 훔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밤이 가장 안전하고 목표한 먹을거리를 구하기에도 가장 쉬웠기 때문에 주로 밤에 혼자서 많이 했다. 아버지가 한번은 “9살짜리 여자애가 겁이 없다”고 하시면서 ‘넌 커서 뭐가 되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청진 내 송평구역에서 포항구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96년) 원래 포항에 있던 전임 대대장이 집을 내어 주어야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집을 비워주지 않아 우리는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다른 대대의 빈집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는 완전 도심한가운데라 주위에 농장이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살길이 막막했지만, 다행히 96년부터 끊겼던 배급이 한 달에 보름정도씩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대에서 어느 정도의 땅을 주어서 거기서 나오는 농작물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나아져서 그때부터는 나도 도둑질을 하러 다니지 않고 학교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군에도 사회에도 배급이 끊기었던 일 년 동안 군인 가족이었던 우리는 훔쳐 먹으며 연명했지만, 호항으로 나오니 주변의 사회인들은 이미 천장사, 떡장사 등으로 자신들이 살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인들은 군인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았고 군인들이 제일 못 먹고, 못 입고, 군인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내라는 돈도 다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창시절

학교에서는 늘 내라는 것이 많았다. 고철 파지 등 할당량을 모두 돈으로 내어야 했다. 어디서 훔칠만한 곳도 없고 주변의 어느 곳에서 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돈을 못낸 사람 일어나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안 일어나다가 선생님이 직접 이름을 불러야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애들도 있고, 학급 친구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와서 엄마의 등껍질까지 다 벗겨서라도 학교에 바칠 돈을 마련하고서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집에서는 ‘너는 집안 사정은 안 보이느냐’ ‘너는 너만 생각하느냐’고 하셨다. 동생들은 그저 창피를 당하고 고초를 당하고 돈은 끝까지 안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말이지 나는 학교에 바치는 세외부담을 꼭 내려고 애썼다.

나의 부모님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대로 학교는 꼭 보내주셨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의 정규과정까지 모두 다 마칠 수 있었다. 주위에는 부모님들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이나 장사를 돕도록 시키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이정도로 어려운 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나마 행복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더 행복해지려고 학교에다 갖다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다. 늘 선생님께 ‘성은이 정도만 하라’는 말을 듣고 지냈다. 노래면 노래, 체육이면 체육. 학교에서 하라는 것은 뭐든지 다 잘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하는 것은 웬만큼은 나도 다하려고 하였다. 공부도 반에서 1등은 아니었지만 2~3등은 하였다. 그래서 다방면(팔방미인)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학교에서 너무나 모범생이고 싶은 마음에 (내 기준에 모범생이 돈을 안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셔도 나는 안방에서 쫓으면 바깥문에 서있고 거기서 더 쫓으면 대문 앞에 서있고, 어떻게 해서든 집을 쥐어짜서도 내야할 돈을 다 내었다. 그래서 학급이 올라가면서 나는 간부표시를 달고 다녔다.

내 기억에 선생님들은 좋으셨다. 다만 그 때 당시 교원들에게 배급이 안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돕는 것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에 대한 배급이 없고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선생님들은 바로 그만두고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았다. 남아있는 교사들은 교편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학급에는 모자위원장(학부형대표-학급장 엄마가 주로 맡음)이 주축이 되어 ‘선생님 돕기’란 것이 있었다. 돈을 모아서 선생님들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들이 교육자적 양심이 없이 도움 받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편애하고 돈을 못내는 아이들은 구박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급에서 ‘선생님 돕기’ 돈을 못낸 아이가 두 명 이었는데, 둘 다 군인가정의 아이들이었다. 2대대장 딸인 나와 5대대장 딸인 다른 친구였다. 그 선생님의 남편은 군인이셔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우리 집 사정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셨다.

그런데 돈을 안낸다고 우리를 아이들 앞에서 욕하면서 큰 망신을 주었다. 같은 군인가족끼리 너무 심하게 하였다. 엄마도 아시고 하니, 엄마와 따로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주지 않았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마 선생님들도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러신 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일 이외에는 나는 대체적으로 학창시절과 선생님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28명 정도의 학급친구들 중 고정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아이들이 10명 정도 있었고 18명 정도만 출석하였다. 의무교육제이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더라도 등록만 되어있으면 졸업은 할 수 있다. 먹고 살기 바빠서 학교에 못나오는 아이들 말고도 학교에 나올 수 있는 사정은 되는데 결석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아이들이 학교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직접 집안 형편을 확인하시는데, 극도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외하고 결석을 하면 집으로 찾아가서 학교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나는 출석하지 못하는 아이들보다는 경제적으로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지만 출석하는 아이들치고는 형편이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우리 집은 겨우겨우 허덕이며 따라갈 정도로 어려웠다. 나는 기왕이면 우리 집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내내 싫었다.

수학시간은 기억이 안 난다. 선생님이 혼자 칠판에 풀이과정을 써놓으셨던 것 같다. 수학은 어느 순간 기초를 놓쳐서 잘 못하게 되었다. 학급에서는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옷도 못 입고 학교에도 이따금씩 잘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 중에 공부를 비상하게 잘하는 수재가 있었다.

반에서는 그룹을 지어 다녔는데 공부는 못해도 파워가 있는 그룹이 있었다. 주로 돈이 있는 집 아이들로 된 그룹이었다. 나는 돈은 없었지만 공부도 좀 잘하고, 아버지가 사회와는 별개인 군인 집단에 있다는 것으로 이 파워 있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수학 숙제를 이런 수재들에게 빌려서, 가난하고 파워도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 두 권을 더 넘겨주면서 베끼는 것까지 시켰다. 수학 숙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하였다.

소학교 역사는 재미없었다. 그저 김일성 혁명사를 외우는 것이 일이었다. 한국사, 세계사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거의 배우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고 시험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알지만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대강 가르치고 대강 배우는 과목이었다.

내가 모범생인데도 이 정도인 것을 보면 역사 교육의 질이 낮았던 것 같다. 영어는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단어나 문장을 다 베껴 쓰는 것이 전부였다. 늘 네 번째 문장과 다선 번째 문장을 외우는 것이 숙제였다. 내가 무엇을 배우는지 잘 모르는 채 쉬는 시간에 매번 그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숙제를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2년을 배우는 동안 참 배운 것이 없었단 생각이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순화 지역에서 다니다가 중3때 포항 구역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 지역은 워낙에 시내인데다가 생활수준도 높은 지역이었다. 아이들도 공부를 잘하였고 특히 우리 학급 친구들은 영어를 너무 잘하였다. 모두 본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중학교 3년간 배운 단어를 처음부터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전학을 가서는 영어시간에 입 뻥긋도 못하게 되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반에서 2 ~ 3등 이었다가 전학 온 학교에서는 중간 정도로 성적이 떨어졌다. 우리 학급도 여학생들이 46명이나 되어서 경쟁도 치열했던 것 같다. 우리 학급에는 부모들이 외화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트여서 돈벌이를 잘하고 회사 같은 것도 세우고 하는 부자들이 많았다.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입고 먹고 하였다.

 학급 내 권력을 잡고 있는 그룹이 있었는데 나는 순수한 내 능력으로는 빠지는 것이 없었지만 경제적인 배경이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가 힘에 부쳤다. 잘사는 파워그룹에 속하게 된 나는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빠져나오는 등 꾀를 부려 돈이 없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님들도 너무 힘들었던지 우리는 다시 전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나는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갑자기 전교 1등으로 되어있었다. 두 학교의 교육수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곳에서 조금 공부하고 되돌아오니 난 특별히 따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실력이 쌓여 시험에서 전교1등을 한 것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전 시간과 다음시간의 숙제를 차근차근하는 스타일이다.

집에서는 공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 물 긷고 마당 청소하고 심부름 다녀오고 동생들 밥해주는 등 엄마대신 가사를 돌보았다. 엄마는 외출하시면서 내게 할 일을 조목조목 적은 쪽지를 남겨놓으셨다. ‘전기가 들어오면 국수 삶아놓고, 짐승먹이 해놓고, 동생 옷들 빨고 다림질 해놓아라.’ 이렇게 집에서 일만 하고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학교의 수준이 너무 한심했던 것 같다

학교 졸업 후 군대에 가게 된 사연

고등학교 졸업 전 진로 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엄마는 결혼을 제안하기도 하고, 나는 의사나 교사는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계로 나서고 싶었다. 당시 우리 집안사정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일반 중·고등학교를 나왔던 나는 일반대학에는 갈수 없었고 전문대학교만 갈 수 있었다.

일반대학은 제1고등학교에 다닌 사람들만 갈 수 있으며 이런 특수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수재들만을 대상으로 따로 있다. 일반 고등학교를 나와 전문대학에 가는 것도 교장선생님 추천을 받아 대입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아버지는 내게 대학 갈 궁리는 절대 하지 못하게 미리 못 박아 두셨다. 내가 수재도 아니고, 과학자가 될 것이 아닌 이상 대학을 나와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셨다. “돈 안들이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군대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엄마 아빠는 너 시집갈 준비를 해두마”라고 하셨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여자가 군대 6년 후 사회에 나오면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게 된다며 평생 군대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전문대학을 가던지, 그도 아닐 바엔 빨리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진로를 두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북에서는 대학입학시험인 ‘정무원 시험’이 끝난 후에는 바로 부모들이 ‘뒷공작’에 들어간다. 학생들이 일단 응시를 하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부모들의 수완으로 대학을 갈지 말지가 결정된다. 우리 반에서는 단 3명만 대학진학 시험에 응시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시험을 안보겠다고 하였지만 담임선생님이 권하셔서 그저 시험장에 가서 문제만이라도 보기로 하고 시험을 치르러 갔다.

시험 중이었는데 중간에 어느 학생이 들어왔다. 지각했는데도 시험장에 들어온 것이며, 차림새로 보아 왠지 잘사는 집 아이 같았다. 바로 내 옆자리였기 때문에 그 학생이 백지에 가까운 시험지를 내는 것을 보았고 시험지를 낼 때 그 여학생의 이름을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 근데 결국 그 아이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북에서 학생은 대입시험에 응시만 했으면 된 것이고, 그 응시 이후에는 부모들의 ‘경주’가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교육청에 손쓰는 작업을 의미한다. 우리 아버지는 장교였기 때문에 예비역들 중에 교육청에 계시는 분들을 아는 분도 많아서 아버지는 나의 뒤를 봐줄 능력이 있었지만 나의 요청을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네가 대단한 수재도 아니고 머리가 비상한 애라면 이 집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군대를 가라”고 계속 주장하셨다. 그래도 시험인지라 아무리 뒷거래가 많더라도 1등부터 10등까지 상위권에 드는 학생들의 당락 여부는 건들이지 못하는 면도 있다.

결국 실력이 뛰어나지도 수를 쓰지도 않은 나는 낙방을 하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를 군대에 보내려고 하였던 이유는 나의 고모부님께서 함경북도 징집부 고위직에 계셔서 나를 좋은 곳으로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북도에서 징집되어 군대에 가는 모든 아이들은 고모부의 손을 거쳐 배치된다고 보면 된다.

나는 모두의 선망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갈 수 있었다. 보통 군대 가는 여자들은 해안포, 고사포로 많이 배치되고 포격을 하고 기계를 다루는 부대로 많이 배치되지만, 나는 일반 무력부의 군인이 아니라 멋진 제복을 입고 잘 먹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복무 기간 중 기술을 배워 제대 후에도 자격증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간호부대로 가는 것은 어떨까 싶었지만, 장교이셨던 아버지는 자랑을 하고 싶으셨던지 선망의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가라고 하셨다.

2004년 4월 19일 나는 18살의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였다. 북한군대는 누구나 다 가는 것이지만 배치를 받을 때 역시 누구나 청탁을 한다. 고모부는 함경북도에서 군대 가는 아이들 90%가 다 청탁을 하여 친척이 있는 곳, 편안한 곳 등등으로 여기저기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셨다.

군대에 배치되면 그 곳에서 10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은 이상 부모들은 집안 살림을 팔아서라도 뇌물 공작을 한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제대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가산을 팔아서라도 뇌물을 준비한다.

배치를 운명에 맡기는 집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남자는 무조건 징집 후 10년을, 여자는 키가 157센티미터 이상이면 6년을 의무적으로 군대에 보내야 했다. 하지만 키가 157이 넘지 않는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157이 넘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군대징집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은 평양에서 3개월간 이루어진다. 징집된 모든 사람들은 시간표대로 훈련을 받는다. 이 신병훈련기간이 가장 힘들었다. 북한 내에서도 가장 힘든 신병교육이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이라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일단 배치되고 나면 힘들지 않으면 군인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절대 봐주지 않았고, 여자애들은 이 기간 중 생리도 멈출 정도로 힘들어하고 행군하면서도 반수면 상태로 걷게 된다. 일반 무력부의 신병교육기간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배식은 아침과 점심에 백미를 주고 저녁은 국수를 먹었다. 보위사령부에는 보통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와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들이 많아 조금만 힘들어도 울었다. 북에서도 함경북도 출신인 나는 ‘저런 것으로 왜 우나’ 생각 하면서 씩씩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여자 250명 정도가 함께 신병훈련을 받았고, 훈련 마지막 즈음에 여성장교 2명이 신병을 뽑으로 왔다. 인물과 체격을 보고 20명 정도를 뽑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면접에서 자기 장기를 말하라고 하였다. 그 중 4~5명만 평양의 중앙본부 내의 통신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국가 보위사령부 본부 교환수가 되었다. 여기는 여자들만의 부대였다. 뽑혀 들어온 애들이 4-5명 이외에 나머지 15명 정도는 전부 고위직 부잣집 평양출신 아이들이었다. 교환 근무일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6개월은 근무하는 방법을 배우기만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외출할 때 외제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돈이 많았다. 나는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엄마에게 사정사정해서 일 년에 만 오천원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려 지냈었다. 하지만 이곳 애들은 한 달에 4-5만원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경제 수준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부대원들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고 사랑받고 지냈지만, 집이 평양인 특권층의 자제만이 배치되어 온 이 곳에서 나는 돈이 부족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기가 세고 교양이 없어서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였다. 내가 단독 근무 1차 시험에서 6명을 뽑을 때 합격하고 심부름도 자주 나가게 되자 질투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빚을 많이 지게 되고 그래서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또래 친구에게 심부름 나갈 외출복을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너의 아버지는 딸이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갈 외투도 없는데 머하고 자빠져있냐?”고 하였다.

이날 그 친구를 지하실에 데리고 가서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나의 아버지가 당과 수령에 충성하는 덕분에 너의 아버지가 무역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었던 거다”라고 하면서. 이날 윗사람들에게 가서 이럴 바에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켜주던가, 차라리 제대를 시켜 달라고 하였다. 윗분들은 오히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다면서 어려운 애가 여기는 왜 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계속 말씀드려왔었고 그곳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군 복무를 이곳에서 했다고 해서 제대 후 우대 받는 일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돈 없는 내가 힘들게 그곳에서 지낼 이유는 없었다. 부잣집 고위 간부 아이들이 돈으로 편하게 군대생활을 하는 곳이지 나 같은 애가 있을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1년을 보낸 후 나는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사령부로 옭겨가게 되었다. 보위사령부이면서도 지방까지 내려온 아이들은 좀 못사는 축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제적 수준의 큰 차이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평양에서는 보위부사령부 전화교환수를 하였다. 다른 동기들은 이런 저런 파티를 한다면서 돈을 많이 썼다. 부대 안에서는 군복을 입어도 외출복으로는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다 외제 옷을 입는 상황에서 나는 싸구려 옷도 못 입는 상황이었다. 샴푸라는 것이 있는지도 여기서 처음 알았다. 군에서 주는 돌 같은 비누를 쓰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껴 쓰는 한이 있더라도 향내 나는 샴푸 하나 정도는 거의 모두가 사용하고 있었다. 나 혼자 비린내 나는 비누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다 사정을 이야기해서 만 오천 원을 보내달라고 해서 일 년치 용돈으로 겨우 받았는데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고 나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에 배치된 동료들은 정말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한 달에 평균 사오만원(당시 북한에서 쌀1Kg에 1400원 정도 하였다)을 쓰고 있었고 소대에 필요한 것들도 그 부모들이 다 대주었다. 이들의 부모들은 주로 보위부 고위직이었는데 권력으로 받은 뇌물로 그렇게 잘 사는 것이다.

북한은 뇌물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다. 북한에서는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라 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가 훨씬 심할 것으로 상상했지만 이곳은 북한에 비하면 너무나 깨끗한 사회이다. 남한에 온 후 나는 TV 뉴스를 보면서 놀라곤 한다. 북에서는 당연한 비리와 부정부패가 남한에서는 큰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부대 내 동료들은 대부분 돈이 많으면 안하무인이거나 교양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돈이 있으면서도 인품이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다.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돈을 빌려주면서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나는 자연스럽게 발언권이 없어지고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평양의 보위사령부로 배치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나의 실상은 부잣집 고위직 아이들 사이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사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로 재배치 받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부사령부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원으로 올 즈음 아버지는 제대를 하시고 구청직원으로 일하고 계셨다. 북한은 군인이 제대하면 사회에서 다른 곳으로 배치가 되고 만 60세가 될 때 까지는 의무적으로 근무하여야 한다.

이때는 배급이나 월급은 전혀 없이 즉 노동에 대한 대가없이 일해야 한다. 우리 집은 아무런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이원의 보위사령부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배치 받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만큼 어려운 집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평양에서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이제는 엄마가 장사를 하시던지 하여 두 동생들을 위해 생계를 꾸리셔야 하는데, 엄마는 그럴 재주가 없으셨다. 북한에서 여권을 받아 중국에 친척방문을 하여 돈을 벌어오는 등 친척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엄마도 중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돈을 벌기 위해 친척방문을 계획하셨다.

여권을 발급받아 다녀오는 공식적인 여행을 위해서는 뇌물 등 돈이 많이 들었다. 여권 서류절차에서 이래저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첫 중국 방문에서 벌어온 돈을 이런 사람들에게 주느라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번 중국을 다녀오신 후, 다음에는 그냥 비공식으로 강을 건너 다녀오겠노라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밖에서 드시고 들어오셔도 또 집에서 자시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엄마와 점점 술만 드시는 아버지는 이제 매일 싸우셨다. 우리 집에도 가정불화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다투시고 엄마는 홀로 중국으로 도강을 하셨다.

원래는 돈을 벌어 오시려던 것이었는데, 중국에 가셔서 친척들을 통해 한국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도 북한에서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시다가 중국에 가셔서 한국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셨단다. 엄마가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 후에 엄마는 돈을 보내 여동생도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오셨다. 나는 군대에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원에서 부대의 꽃처럼 지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이상했는데 동생은 엄마가 강원도 회령에 갔다며 곧 돌아올 거라고 변명만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동생은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한국행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고이고이 자라 군대까지 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국행은 절대 상상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딸을 보위부사령부 교환수로 앉혀놓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치고 우리가문을 망치면서 어떻게 혼자 저럴 수 있느냐, 저는 ’엄마는 엄마도 아니다‘라고 원망했다. 조선여자들이 다 같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 혼자 나약하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며 엄마를 원망했다. 이 일이 조회되면 나의 사회생활은 끝나는 것이었다.

이원에서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평양에서 김책공업 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나보다 6살 위였다. 보위부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후 김정일 측근의 엘리트 라인으로 갈 수 있는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남한사회에 와서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연애라고 해봐야 너무나 수줍고 은근한 것이었다.

부대 내에서는 비밀연애였기 때문에 애정표현도 못하였다. 아침에 근무할 때 윙크를 날린다던가, 먹을 것을 따로 챙겨준다던가 하는 것뿐이었다. 연애하는 것이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생활도 너무나 통제된 상황이기 때문에 한 부대에서 둘만 따로 만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고 인물 체격도 좋고 집안도 좋은 이 남자와 제대 후 결혼할 생각에 나는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었다.

엄마가 탈북한 상황을 알게 된 후,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조치가 취해진다. 나와의 결혼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출셋길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남자친구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고 하다가 3일후에는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하더라. 나는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탈북으로 인해 나는 사랑도 망치게 되고 사회에서도 언제 매장될지 모르게 되었다. 슬프고 황망하였던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보위사령부의 추천을 받아 청년동맹비서양성소(청년동맹비서를 교육시키고 조직책임자를 양성하는 기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 집은 돈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을 나는 추천을 받아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너무나 슬펐다. 추천되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30만원을 받아와서 옷도 새로 장만하고 겨우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공부도 더하고 우선적으로 당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겼다. 한편 검덕(광산으로 유명한 지역)의 보위부사령부에서 정치부장이 어디선가 내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검덕 지역으로 와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우리 부대로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나에 대한 조회가 들어가게 되었나 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같았다.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 부대원들에게 정치부장님께 물어볼까 싶다고 했더니 평소 같으면 말릴 일인데 어서 올라가보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정치부장님께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3일전에 강제제대명령서가 왔는데 나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대 사람들도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아무도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제대명령서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청춘을 바쳐서 군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내 잘못도 아닌 엄마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다니 나의 충성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배신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김일성 동상 앞에 가서 군복에 진창을 묻히며 엉엉 울었다. ‘이것이 네가 말한 정치냐’ 이틀 동안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부장이 나를 병원에 데려가 안정을 시키고, ‘네가 전장에서 엄마를 만나면 엄마에게 총을 겨누고 쏠 수 있겠느냐’ ‘이곳이 무력부가 아니라 정보기관이어서 그렇다’며 나를 달랬다. 나 때문에 부대전체가 침울해졌다. 나는 이렇듯 황당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짐을 싸서 아버지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아빠는 제대를 하셨고 그 후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평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매일 술을 드시며 돈을 벌지 않으시는 무능력한 아빠와 자주 다투며 늘 속상해하셨다.

가정불화는 점점 심해졌고 엄마는 중국 친척집으로 돈을 벌러 가셨다가 그 길로 바로 한국행을 결정하셨다. 여동생은 엄마가 태국에 있을 당시 바로 돈으로 빼내어서 동생도 곧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다른 탈북자들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큰 고생 없이 탈북과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엄마와 여동생의 탈북을 이유로 군에서 강제제대를 당한 후, 아빠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회에서는 성분을 문제 삼아 나를 받아주려는 직장이 없었다. 북한에서는 보통 17, 18세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군에서 만기제대도 못하고 사회 경험도 없는, 나이만 먹은 25살의 처자가 되어 있었다.

‘장사를 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가난한 우리 집 사정에 밑천도 노하우도 없었고, 사무직은 사회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곳이어서 내가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셔서 새엄마와 새 여동생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내가 한순간에 이렇게 되자, 나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고 북한에서의 삶에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는 고립되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나는, 제일 천하고 험한 일로 치부되었던 배 위에서의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나는 뱃사람들에게 배 안에서 밥을 해주는 일을 하기로 하고 배에 올랐다. 배에서는 한 번 시동을 걸고 바다에 나가면 기름이 아까워서라도 한동안은 바다 위에 머무르며 쉽게 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전 처음 타보는 배 위에서 나는 격심한 뱃멀미를 하게 되었는데, 무려 열흘 동안이나 배 위에서 멀미를 하였다.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해주는 밥도 먹지 못한 채 열흘 동안 토하고 굶으며 반은 죽다 살아났다. 미안한 마음에 고기 잡는 일이라도 도와보려 했지만, 처음해보는 일이라 날카로운 바늘에 살이 찢기고 짠물이 들어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기에게 잡혀갈 것만 같았다. 뱃일이 고된 일임을 깨달았고, 이런 내 신세가 너무도 서러웠다. 한국에 도착한 엄마는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아 어렵게 소식을 넣으셨다. 나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있었고, 내가 보위부 직원이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나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엄마와 여동생은 나의 걱정을 듣고는 ‘아무것도 아닌 너를 뭐라고 해코지 하겠냐.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를 믿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서 살고 있는데, 엄마가 설마 나를 사지(死地)로 인도하겠나 싶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식당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버신 돈으로, 나를 빼오는 모든 길목의 사람들을 사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 그리고 나의 라오스를 거치는 태국으로의 후송길, 그리고 태국에서 한국으로의 비행기까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있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에서 중국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강에는 건널만한 곳이 많고, 보통 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은 북한 경비병이나 중국 쪽 사람들과 이미 다 짜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강을 건너다가 경비병에게 걸리는 날에는 북으로 다시 잡혀가거나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리 되는 것은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노릇이기에 강을 건너는 것은 정녕 목숨을 건 사투였다.

나에게도 역시, 강을 건너는 일은 오롯이 내가 치루어 야 할 운명을 건 도전이었다. 강 건너편에는 엄마가 사주한 남자가 자꾸만 물살에 휩쓸려가는 나를 따라오며 안타까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물살이 너무 세어서 강 중간까지 왔는데 나는 벌써 기력을 다하였다. ‘이제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 여기서 나는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강을 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여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머저리야! 이것만 건너면 너는 살 수 있는데! 여기서 못 건너면 너는 죽는데! 요 앞까지만 오면 너는 사는데! 이걸 못하고 죽으려 하냐!’ 내가 평소에 욕하던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온갖 욕을 해가며 다시 힘을 내었다. 기적처럼 상류에서 흘러오는 통나무가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 나는 겨우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건너편 남자가 기력을 다해 실신할 듯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고, 그 후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천사들이 나머지 나의 여정을 인도해주었다.

보통 탈북자들은 도강한 후, 국경지대 중국공안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야산으로 며칠씩 나무에 찔려가며 걸어가, 경비가 삼엄한 국경지대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는 중국 내 조선족 사람들에게 중국 사람에게 팔려가도록 부탁해서 팔려간 곳에서 일하면서 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

팔려가서 사는 삶이 비참하기는 하지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려가 지내더라도 중국공안에게 잡히면 바로 북송되어 교화소로, 혹은 한국행 중에 잡히면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때문에 탈북자들은 매순간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내가 잡히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나를 빼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엄마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무사히 한국땅으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며 권유하셨다. 교회에 가본적도 없었고, 기도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엄마말대로 틈틈이 기도했다. 엄마는 나를 북한에서 빼내오기 위해 한국에서 몸을 돌보지 못한 채 식당 허드렛일을 하시며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

몸이 아파도 병원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탓에 장이 썩어서 지금은 장 절제수술까지 받으신 상태다. 이렇게 내가 북한을 빠져나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 중국에서 떠돌며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엄마의 희생으로 희망의 땅인 남한으로 온 나는, 고통 받는 수많은 북한 아이들 중 선택받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숙연해질 따름이다.

북에서 교통수단을 많이 타보지 않았던 탓에 차를 아주 잠깐만 타도 멀미를 하는데,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도 극심한 멀미를 하였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을 때 그 감격이 크다던데, 나는 엄마가 이미 모든 길을 인도해준다는 믿음에 두려움과 고생이 덜했고 그래서인지 그러한 감개무량도 덜했던 것 같다. 나는 비행기에서 하도 심하게 멀미를 해서, 한국 땅을 밟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비행기에서 내려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은 바로 하나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하나원을 감옥 같은 곳으로 상상했다가 시설이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건물이 으리으리하고 삼시 세끼를 먹여주고, 옷도 주고 약도 주고 보살펴주니 세상에 이런 데가 있나 싶었다. 내가 여태껏 지내온 어느 곳보다 좋았다.

그때부터 차츰 대한민국에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악한 상황에 있다가 갑자기 좋은 데로 오니 황홀하다 못해 꿈만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이 소중할 텐데, 탈북자들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런 하나원을 마련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앞으로 내가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학업을 위한 과외교육도 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어느 곳으로 지원할까 고민하던 중 탈북자 전형이 있는 대학교를 세군데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뿌연 물체가 고려대학교 입학지원서를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싶어 하루 종일 기도를 했다. 혼자서 횡설수설하면서 내가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를 기도했다.

고려대학교에 너무나 합격하고 싶었으나, 이곳의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게 느껴졌고, 주위 탈북자 선배나 친구들도 올해는 원서나 한번 넣어보란 식으로 말했다. 합격자 발표 날, 팝업창에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소식을 알게 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다. 엄마는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집에 불이 나거나 내가 감전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안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부족한 내가 수백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에서는 단 한 명만 뽑았는데, 내가 바로 그 한 명이었던 것이다.

주위 탈북자 친구, 선후배들이 선발기준이 뭐냐며 반발과 의심이 많았다. 북한에서 대학입학 전형이 비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다.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은 학력시험이 아니었고, 단지 에세이 한편으로만 당락이 결정되는 전형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왜 대학에 가야하는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회 선생님께 글을 첨삭받아 다듬어가면서 자기소개서를 두 달 동안이나 준비하였다. 그리고 북한인권시민연합 김영자 국장님께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추천서를 너무 잘 써주셔서 이것 역시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나는 고대에서 4년 내내 탈북학생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만하면 된다.

너무나 감사하고 이런 조건에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큰 죄악이란 생각이다. 여동생도 열심히 해서 이화여대 탈북자 전형에 합격했다. 이화여대는 탈북자 전형에서도 공부실력도 입학전형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동생은 나보다 먼저 남한에 와서 2년 동안이나 코피 쏟아가며 독하게 공부해 합격한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이 도우신 것 같다. 두 딸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온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시던 엄마는 우리가 고대, 이대에 합격하여서 너무나 좋아하신다.

이제 나는 곧 있을 나의 대학생활의 단 꿈에 부풀어 있다. 희망의 땅인 대한민국에서 나는 나와 탈북후배들,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정책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위한 공부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싶다.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나의 경황없는 이 수기를 마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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