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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일 토요일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 씨는 '흉노인'

[질풍노도와 같이 등장한 기마군단]
흉노 왕족, 중국 거쳐 한반도에서 신라를 건국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의 후예

1.세계사와 문화사를 바꾸는 홍산문화의 대발굴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중국의 황허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북방알타이 문화권은 한반도, 만주, 몽골 및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터키, 동부유럽 등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기마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부에서는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오스만튀크르 등이, 동부에서는 선비, 유연, 수-당(선비), 요(거란), 금-후금(여진·청), 원-티무르-무굴(몽골) 등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내몽골 자치구의 요령성 접경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최근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데, 그 유물들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고대 문명공동체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특히 1983~85년 홍산지역의 「우하량」에서 BC 3500~3000년경 초기 중앙집권국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옥기 등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초기문명 유물들은 계급이 완전분화되고, 사회적분업이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발견이었다.

의문의 이 문명은 중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동안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이나 문화라고 주장한바 없었던 지역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문명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이다. 중국 역시 자국 영토내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고대문명이 출현한데 대해 놀라고 있는데, 역사공정은 바로 이 토대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만주(79만㎢)와 내몽골(148만㎢), 신장위구르(166만㎢), 티벳(127만㎢)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황허 문명과 확연히 구분되는 또다른 문명 지역이며, 현재 동북·서북·서남공정 등의 이름으로 역사공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인근 하가점이란 촌락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는 BC 2400~1500년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난하-요하 사이의 요서지방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화 역시 중국의 황허문명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권이다. 따라서 이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한민족 고대국가인 배달국·고조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한민족의 유래와 고대역사가 밝혀지는 무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전율의 드라마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혜안과 수고에 의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홍산문화 유적-유물.
홍산문화 유적-유물.
2. 4세기말 혜성과 같이 서양사에 등장한
 「흉노-훈」과
20세기 기적의 경제사를 쓴 「한민족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수만년 전 알타이·몽골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왔으며 현대 한민족은 신석기시대(BC 5000~1000)와 청동기시대(BC 1000~300)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던 몽골계 민족의 후손으로 추정… 중앙아시아와 우랄 인근, 알타이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이 시작된 장소”(러시아 유가이 교수)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서 …”(단재 신채호 선생)
이렇듯 한민족 시원지를 바이칼호·몽골지방 또는 파미르고원·천산지역으로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한국 고대문명은 한반도 북부와 시베리아·만주·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북방기마민족과 연결되며, 한민족은 흉노·선비·돌궐·거란·몽골·여진 등 북방 기마유목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많은 연구가 있다.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최초의 스텝제국이며 기마군단의 전형인 흉노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BC 4세기경이다. 그러나 흉노는 고대로부터 중국 역사와 같이 존재했었다. 몽골고원을 본거지로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방까지 방대한 영역을 장악한 거대국가였다. 그러나 AD 155년 선비·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 후 잔존세력들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2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 돌풍같이 등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로마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훈 제국은 바로 이들이 세운 국가다. 훈족은 기마전술·생활관습·문화 등에서 흉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흉노의 후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흉노-훈과 우리 한민족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①학계에서는 북방 유목민 일부가 한반도 남부 신라에 정착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1990~92년 김해 대성동에서 많은 고분과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적석목곽묘·토기·투구·철제갑옷·마구·동물문양장식·오르도스형 동복 등이다. 이는 흉노·선비·부여·고구려 등 북방기마유목민족의 한반도 진출을 말해준다. 흉노의 무덤은 직사각형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무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아 올린 적석목곽분인데 신라무덤(천마총, 황남대총 등)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흉노와 신라의 친연관계는 무덤은 물론, 편두풍습과 제철기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②고대 북방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민족의 상징이었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전세계 발굴 금관의 2/3가 우리 것이다. 신라 금관을 보면 윗부분의 나무와 사슴뿔 형상, 잎새 모양 장식, 곡옥 등 북방 알타이계통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신라 금관
신라 금관

③가야·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나타난다. 이는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에게는 씨름·언어·습속·의복·풍습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한국어에는 북방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어휘가 나타난다. 간(干)·각간(角干) 등 왕을 뜻하는 단어는 물론, 백제·신라·고구려의 관직명에서 많은 알타이계 어휘가 보이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 한다.

④흉노가 신라·가야를 건국했다는 연구도 있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도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원래 김망이라 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⑤논란이 있지만,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 3세 단군때 삭정을 약수지방(감숙성)에 유배시켰다가 그 땅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하며, 30대 및 37대 단군시절에는 흉노가 고조선에 조공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我의 동족이었다. … 我에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라고 하여 흉노가 우리에게서 분리된 점을 갈파하고 있다.
현재 몽골인들은 흉노를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교과서에서도 몽골 최초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또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의 교과서는 튀르크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헝가리에서는 훈족의 후예가 유럽에서 건설한 나라가 헝가리이며, 헝가리인들은 훈족의 통치자 아틸라를 자신의 위대한 선조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 국경의 역사가 아닌 민족과 흐름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역사를 뒤바꾼 흉노-훈제국, 세계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홍산문화, 현대 세계경제사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대한민국. 그 흐름의 역사를 보다 열린 마음과 시각으로 이해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신채호 "2200년전 세계를 뒤흔든 유라시아 대초원의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1. 흉노는 어떤 나라인가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기마유목민의 국가로 BC 4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BC 3세기말 몽골고원을 통일,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유목 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흉노제국은 그들만의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런 흉노의 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오늘날 국력을 말할 때 국민소득(GDP) 개념을 흔히 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2012년 GDP는 15조7천억달러다. 중국 8조 2천억달러, 일본 6조달러, 독일 3조 4천억달러 등이다. 그리고 프랑스·영국·브라질·러시아·이탈리아가 2조 달러대, 인도·캐나다·호주·스페인·멕시코·한국이 1조 달러대 국가다. 한국은 지난 60년간 경제개발을 통해 세계 240개 국가 중 15위의 대형 국가를 건설했다. 우리 앞의 14개국 중 우리보다 면적이 작은 나라는 없다. 우리 땅의 최소 2.4배(영국)에서 최대 170배(러시아)까지다. 인구가 우리보다 적은 나라도 호주 정도이며 중국은 우리의 27배, 인도는 25배다. 여하튼 한마디로 말해 한국은 세계 경제의 기적을 일구었다.



신채호 "2200년전 세계를 뒤흔든 유라시아 대초원의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역사를 보면 과거 강대국들은 우선 면적에서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땅이 넓어야 강대국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최대 영토가 600㎢ 안팎이며, 로마제국의 최대영토는 기원후 2세기 초 스페인·터키·북아프리카를 포함해 650만㎢에 달했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무제 시대 최대영토는 720만㎢였다. 흉노제국의 지배면적이 620만㎢에 달했다하니 어느 정도 강대국이었는지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흉노는 면적뿐 아니라 영향력면에서도 그에 걸맞게 막강해 유라시아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다. 흉노는 진시황, 한고조, 한무제 등 최강의 중국 왕조와 당당히 맞섰고, 이러한 흉노의 기마군단에 대한 공포는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더 나아가 흉노의 서진은 유라시아 역사를 바꿔 놓았고, 서진 과정에서 새로이 형성된 흉노의 후예 훈족 또한 그랬다. 이처럼 흉노는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

터키 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
터키 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

2. 흉노에 대한 역사 기록


기마유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그 삶의 특성상 역사기록이 취약하다. 흉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 자신이 기록한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그들의 삶을 추측해 볼 정도다. 사기의 흉노열전(권110)이 흉노에 관한 최초의 역사기록이다.

“흉노는 하후씨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종족을 포함한다. 그들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목축·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했는데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스키타이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을 연상시킨다.

흉노의 王은 선우라 불렸는데 최전성기는 ‘두만’과 그의 아들 ‘묵특’시대이다. 두만은 태자 묵특을 폐하고 이복동생을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알타이지역 동서교역로의 강국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묵특을 제거하기 위해 월지를 공격하지만 묵특은 흉노를 탈출하여 만 명을 거느리는 기병장군이 된다.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명적)을 만들어 자기가 먼저 명적을 쏘면 군사들이 그곳을 따라 쏘도록 명령했다. 묵특은 부하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사냥터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잡아 죽였다. 다음은 자신의 애마, 그리고 애첩에게 차례로 명적을 쏘았고, 차마 따르지 못한 자는 죽였다. 그런 후 두만이 타고 있는 말에 명적을 쏘았을 때 부하들은 다 따라 쏘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에 명적을 날려 그의 부하들이 두만을 죽이게 하고 묵특은 흉노의 왕이 됐다(BC 209).

당시 흉노와 더불어 세력을 떨치던 동호가 묵특에게 흉노의 보배 천리마를 달라고 청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천리마를 보냈다. 동호는 다시 선우의 연지(후비) 중 한 사람을 보내라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연지를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이천여리의 버려진 황무지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간언했으나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참수한 후 동호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이어 월지·연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흉노의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했다.

BC 202년 황제로 즉위한 한고조 유방도 바로 이 흉노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유방은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때는 겨울이라 몽골지역에는 매서운 추위와 눈이 엄습했다. 영특한 묵특은 패배를 가장해 한나라군을 계속 유인했고, 한나라 보병 32만은 전군이 모두 추격에 가담했다. 이때 묵특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이 평성에서 유방을 포위했다. 보급과 구원병이 끊긴 절대절명의 순간, 유방은 몰래 묵특의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구명운동을 했다. 이에 연지가 묵특에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해도 선우께서 가서 살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흉노군이 포위를 풀게 되었고,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흉노와 한 사이에는 ①한 황실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②매년 한이 비단·솜·식량 등을 바친다 ③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친한다는 내용의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그만큼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는 우리와도 연계관계가 있다. 흉노는 진나라·한나라/선비/고조선·고구려와 시차를 두고 직간접 관계를 가졌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흉노·선비·몽골은 아(我)에서 분리…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썼다. 윤치도의 「민족정사」는 “3대 가륵단군시절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고 했다. 또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발견된 수많은 유물로 미루어 보아 흉노계가 건국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 중국을 비롯한 스텝지역 일대의 고대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중국 25사를 비롯한 고대문헌에 대한 전문적인 번역작업이 조속히 이루어져 한민족 고대사 연구에 하나의 의미있는 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로소 세계무대에 등장해 기적을 일구어 낸 오늘날의 우리 한민족, 그 기개와 DNA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동아시아 최강국 고조선, 이어지는 기마유목국가의 건설과 세계 제패 등과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


1. 사라진 흉노, 훈제국으로 부활해 유럽 중심부 강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지역을 투르키스탄이라 한다. 이는 튀르크인의 땅이란 뜻이며 동·서로 나누어진다. 몽골고원에서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한 기마군단 흉노는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하고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를 장악해 강대국이 되었다. 한나라와 쟁패하던 흉노는 그러나 몇차례 내분으로 약화되면서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중국에 빼앗기고 동·서 흉노로 분열된다. 그 후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는 몽골 지역으로부터 서투르키스탄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랄해와 발하쉬 북부초원까지 진군했던 서흉노는 그러나 BC 36년 질지가 한나라의 진탕에 잡혀죽자 갑자기 역사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4백년이 지난 4세기말(370~375경) 흉노의 후예들이 이번에는 로마인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랄해 북부 초원에 거주하던 흉노 후예들은 374년경 발라미르의 지휘 하에 유럽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 옛날 조상들과 매우 흡사한 방식, 즉 말·나무안장·등자·복합곡궁·삼각철화살 등으로 중무장한 기마군단의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전술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징벌’이라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알란인을 격파하고, 동고트를 붕괴시켰으며, 드네프르를 건너 서고트를 패퇴시켰다. 쫓긴 고트족은 훈족을 피해 다뉴브를 건너 로마영토로 들어가 마침내 서로마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데, 이것이 ‘게르만민족 대이동’의 시작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역사가들은 훈족에 대한 기록을 무엇보다 극도의 공포와 증오로 생생하게 가득 채웠다. 6세기에 건설된 베니스는 훈족의 침입에 놀란 피난민들이 말을 막기위해 물위에 건설한 수상 도시다.

이후 400년경 다시 발라미르의 아들 울딘이 동유럽 평원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놀란 고트족이 헝가리,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하면서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그 세력은 더욱 막강해져 동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훈족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로마제국도 아틸라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다. 436년 2만의 부르군드군이 아틸라군에 전멸당한 전쟁이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다. 그만큼 훈족은 유럽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틸라는 441년 동로마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다뉴브강을 건너 주요 도시를 초토화하고 448년 동로마제국을 복속시켰다. 451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공격하여 메츠를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하는 등 공포의 진군을 계속했다. 45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서로마황제는 도주하고 로마대주교 레오는 화해를 간곡히 요청해 서로마의 복속으로 보고 본거지 판노니아(헝가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453년 유럽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게르만 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한 첫날밤 죽었다. 의문의 사망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훈제국은 분열을 일으켜 454년 판노니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초원으로 후퇴했다. 468년 훈은 전력을 가다듬어 동로마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잔존세력은 흑해 북부로 밀려나 세력을 잃게 된다.


아틸라의 최대판도(434~453년)
아틸라의 최대판도(434~453년)

2. 훈제국 흥망성쇠의 열쇠는?

훈제국은 면적이 370만㎢를 넘는 유럽최강 국가였으나 아틸라 사후 급격히 혼란에 빠지고 분열하면서 불과 십수년만에 붕괴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① 먼저 훈제국의 세계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유럽인들에게 훈족은 혜성과 같이 세계사에 등장하여 질풍노도를 일으키다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흉폭한 야만세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훈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침략 당한 쪽에서만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기루와 같은 국가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흉노의 후예(다른 학설도 있음)로 무장·편제·전술 등에서 몽골초원 기마군단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놀라운 기동력과 가공할 전투력은 과거 스키타이, 흉노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중심부에서 전쟁을 벌인 최초의 아시아 기마유목군단으로, 그들의 유럽 침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에 엄청난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교과서는 흉노제국을 세운 흉노인들이 유럽에서 아틸라의 훈제국(AD 434~453)을 세워 드네프르강에서 다뉴브강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틸라는 나아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데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국가가 로마제국에서 해방되어 독립국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② 그러면 훈제국의 급격한 성장배경은 무엇인가.

아랄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 잔존세력은 발라미르·아틸라로 이어지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난다. 초원제국의 역사를 보면 흉노(두만·묵특), 돌궐(부민카간), 선비(단석괴), 유연(사륜카간), 거란(야율아보기), 몽골(징기스칸), 티무르제국(티무르), 청(누르하치) 등에서 보듯이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날 때 거대제국을 건설했다. 아틸라는 검소하면서 공정한데다 담대함과 지략에서도 뛰어나 기마군단 최고 지도자의 하나로 꼽힌다. 다음, 훈제국은 스스로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활용했다. 유목민 기마군단으로부터 이어받은 기동성과 전투력·전술을 통해 단시간 내에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여기에 포용력도 한 몫을 했다. 훈제국은 훈족이 중심이었으나 우랄·라인강 사이의 사르마트·알란·오스트로고트·게피대 등 여러 민족도 유연하게 통합하여 세력을 급속히 키울 수 있었다.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91호

② 그런데 훈제국은 왜 역사에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먼저 아틸라의 영도 아래 통합되었던 민족들이 아틸라 사후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기초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마디로 훈제국은 전성기와 달리 이민족과의 협력·교류·연대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훈 내부적으로도 형제들 간의 세력분열과 다툼이 겹쳐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훈제국은 초원제국의 방식으로 급속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흉노와 우리와의 관계는 흉노-훈과 연결고리를 두면 추정해 볼 수 있다. 훈족의 몽골반점, 복합곡궁, 편두·순장 등 관습, 이동경로의 많은 유물 등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민족과 친연관계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훈족이 파괴한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시의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훈족 기병이 활 쏘는 모습은 고구려 무용총벽화와 그야말로 흡사하다. 독일 ZDF TV는 다큐멘터리(1994)에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의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좀 더 시야를 넓게 열고 우리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현대경제사에서 불과 50년 남짓 만에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대한민국. 세계 GDP가 7배 증가하는 사이 35배의 GDP 성장을 이룬 괴력의 국가 대한민국. 그런 대한민국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과거 초원제국의 역사와 다른 역사를 써가려면 과연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까?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

2500년전 몽골고원에서 흉노-몽고-무굴-여진-거란 민족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아시아와 동부유럽 지역에 걸쳐 광활한 초원지대가 존재한다. 유라시아 스텝 대초원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몽골 동쪽에 있는 천산·알타이 산맥과 동서 투르키스탄 가운데의 파미르고원 두 곳의 높은 고원지대가 있으며, 이들 고원 지대를 제외하고는 동서 8000㎞에 달하는 매우 평탄한 대초원과 사막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이 초원지역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남시베리아~우크라이나~헝가리 등지까지 이어진다. 이 지역은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부 초원지대로 나누어지며, 양쪽 다 지형이 완만하고 이동이 용이하여 일찍부터 기마유목민이 가축과 함께 가족이나 소규모 집단으로 이동하면서 유목생활을 영위했던 광활한 땅이다. 지금도 이 지역을 여행해보면 대부분의 지역이 우리 생각보다 평탄해서 이들의 유목생활과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마군단의 활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마유목민의 진원지는 대체로 몽골 고원으로 추정되는데, 몽골고원은 서쪽에 알타이 산맥, 동쪽에 대흥안령산맥, 남쪽에 고비사막으로 둘러싸인 면적 272만㎢, 평균해발높이 1㎞의 고원지대이다. 이곳이 바로 지난 2500년간 세계사의 주인공의 역할을 해냈던 기마군단의 발원지로 보여진다. 몽골고원은 겨울에는 영하 40℃ 이하, 여름에는 영상 40℃ 이상으로 비가 매우 적은 지역으로 굉장히 엄격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용감하고 유능’해야 하는 독특한 인간유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광활한 지역에서 유목활동을 하면서 가축을 사육할 초지가 부족하게 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서 기마유목민인 스키타이인은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집을 직접 끌고 다닌다’라고 표현하고 있고, 지금도 ‘게르’라고 불리우는 이동식 주택을 몽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초원에서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사회 전체로서도 풍부한 자립심을 갖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력화하거나 외부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서 기마군단을 이루어 강한 결속력을 유감없이 과시하면서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


2500년전 몽골고원에서 흉노-몽고-무굴-여진-거란 민족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기마군단은 대체로 BC 8세기경 출현하여 17~18세기까지 동서양에 걸친 대스텝지역과 광활한 주변지역을 지배하면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마군단의 전투력 비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동성이다. 이들은 말에 익숙하다. 유목민들은 4살 경부터 말을 타며 말을 생활의 기초로 하여 이동하고 생활한다. 이들은 나무안장과 등자를 발명하여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전시 몽골기병의 예를 들면 병사 1인이 7~8기의 말을 보유하고 이동·전투를 하면서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했다.

둘째, 복합곡궁이라는 강력한 활에 삼각철화살을 장착하여 전투 주무기로 활용했다. 이 활은 150m의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무기로 당시 기동력과 융합하여 강력한 병기로 등장했다.

셋째, 갑옷은 철그물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강하게 제작되었으며 몽골 박물관에 보관된 철갑옷은 무게가 7kg 에 지나지 않아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넷째, 소·말 등 육류는 건조시키고 마유 등은 분말로 병사 각자가 보관·운반하면서 전투식량으로 활용했다. 쉽게 말해서 전투식량을 자체적으로 보급·수송하는 병참체제였다 할 수 있다.

다섯째, 기마군단은 일찌기 10진법의 효율적인 군대조직과 엄격한 기강으로 대규모 군단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었다.

여섯째, 기동성을 바탕으로 가공할 속도전과 현실적인 후퇴 전술 등 광활한 지역에서 전투력을 극대화하여 유라시아의 대초원은 물론 중국·유럽·중동지역 등 주변지역에서 공포의 존재로 인식되게 된다.

이와같이 기마군단은 총포·화기의 등장으로 전쟁의 근본을 변화시켰던 근대 이전의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기동군단으로서 전투력을 과시했다. 증기기관 발명 이전에는 말을 대체할 에너지 기관이 없었고 기마군단은 말의 기동력을 토대로 농업정착민 군대를 압도하고 동·서·중앙 아시아 대초원 및 유럽을 무대로 역사적 최강 국가를 건설했다.

기마유목민족들은 스키타이 이래로 만주·몽골·북중국·남시베리아·중앙아시아·아나톨리아지역·동유럽 등지의 스텝지역에서 수많은 강국을 건설했다. 서쪽으로 진출한 나라들이 흉노·훈·돌궐·위구르·토번·서하·셀주크튀르크·오스만튀르크로 이어지고 동쪽에서는 선비·5호16국·수-당·요(거란)·금(여진)·원(몽골)·티무르·무굴·후금(청) 등이 건국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몽골고원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튀르크계 국가의 조상 뻘이 되는 흉노가 3천년 전에는 우리와 형제동족이며 동쪽으로 진출하여 수많은 강국을 건설한 여진·선비·몽골도 아(我)의 동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BC 8세기 무렵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들 기마군단국가들은 지역·인종·기질·문화·정서·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BC 2333년 건국된 고조선의 분파과정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2500년전 몽골고원에서 흉노-몽고-무굴-여진-거란 민족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민족은 단일민족·단일국가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오히려 광활한 대륙에서 엄격한 자연조건을 이겨내면서 수많은 외부세력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투쟁하면서 살아왔다. 여기에서 한민족의 DNA가 형성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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