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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1일 화요일

86세의 낭만 논객 김동길 박사...

최고령 시사프로 고정 출연자 김동길

“말솜씨가 좋다고요?… 청중들 얼굴에 쓰인 원고 읽을뿐이에요”
"감성 20세, 지식 200세 賢者"

유머로 버무린 지혜가 술술… NG 안내는 출연자로 유명
지금도 詩 300수 줄줄 암송

난, 자유민주주의 파수꾼
19년간 매일 아침 강연하고… '프리덤 워치'란 글도 쓰지
왜? 뭔가 공헌하고 싶어
결혼 안했을뿐 사랑하며 살아
여성 곁 떠나본 적 없어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
이젠 많이 떠나갔지만… 가슴 속에 살아있어
사후 준비도 끝내
삶이 끝나면 그냥 가는 것… 장례식은 안할거예요
육신은 세브란스병원에… 재산은 대학에 기증해야죠

링컨의 위대한 용서 배워야
인혁당 사건 피해자 등
맺힌 응어리 풀어줘야…

從北도 용서? 안될말이야… 대한민국 생존 위협하잖아

정치 입문, 후회 안한다
대통령 나가란 말 이끌려… 시작은 어리석었지
그래도 국민과 소통하는게… 정치판 덕분이란 생각들어

통일 위해 종교가 할 일은
北 주민 쏟아져 내려오면… '얼마나 고생 많았소' 하며
각자 집으로 데리고 가… 먹여살릴 사랑을 가꿔줘야


지난 18일 TV조선 뉴스쇼 ‘판’의 스튜디오에 김동길 박사가 들어와 스태프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종합편성채널 최고의 뉴스 시청률을 보이는 ‘판’의 시청률은 그가 나오면 늘 급상승 반전된다.

이명원 기자 종합편성채널 뉴스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TV조선 뉴스쇼 ‘판’.
이 뉴스쇼의 월요일 밤 분(分)당 시청률 곡선은 특이하다. 주요 뉴스 때 정점을 찍고 서서히 꺾어지다가 막판 15분 다시 꿈틀대면서 가파르게 치솟는다. 일관된 흐름이다.

대선 직전인 작년 12월 10일 밤 11시 7분
4.14%로 정점을 찍은 시청률은 40분 후 2.09%로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해 밤 12시 3.8%까지 올라갔다.
지난 4일엔 밤 11시 4분에 기록한 시청률이 그날의 최고였다.
이 시간이 되면 많은 시청자가 채널을 19번에 맞추는 것이다.

시청률 곡선이 이상 현상을 보이는 월요일 막판 15분 시사토크.
그때 TV조선 화면에 얼굴을 가득 채우는 인물이 김동길(金東吉) 박사다. 1928년생, 올해 여든여섯.

김박사는 종합편성채널, 지상파는 물론 일반 케이블방송을 통틀어 최고령 시사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다. 보청기도 끼지 않은 김 박사는 NG를 내지 않는다. 그의 정확한 언변은 지난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팬들이 방송국을 찾는 시사토크 출연자도 그가 유일하다. 방송국 스태프들에게 떡과 커피를 가져다주는 후덕한 할머니·아줌마 팬들이다.

20년 동안 멀리 있던 그를 작년 9월 17일 카메라 앞에 모셨을 때 스태프들은 걱정했다. 하지만 시사토크 '판'을 공동 진행하는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은 "방송 한두 번 만에 기우임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김 박사에 대해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지식은 이백 살 현자"라고 말한다.

김동길 박사는 TV에 나가기에 나이론 실격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시청률은 언제나 합격이다.그의 주장이 시청자의 기호에 맞기 때문일까? 그렇다. 말을 잘하고 논리가 정연하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지만 남들에게 없는 한 가지가 그에겐 더 있다. 늙지 않는 '유머력(力)'이다.
지난 18일 시사토크 '판' 287회. 안철수와 링컨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화제가 '관상'으로 튀었다.

"대한민국도 잘되려면 다른 건 묻지 않아도 '내 관상이 어떻소?' 하고 나에게 물어봐야 해. " 김 박사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박은주 부장이 자폭성 돌발 질문을 던졌다.

(박은주) "박사님, 저는 제 얼굴에 책임지려면, 지금 성형외과 가야 합니까?"
(김동길) "야~, 어떻게 그런 아주 몹~쓸 말을 왜 해요? 부모님이 낳아주시고 그동안 애쓰고, 방송에서 키운 그 얼굴은 아주 좋은 작품이에요."
(박) "그냥 갖고 있어도 됩니까?"
(김) "갖고 있지만 말고 앞으로도 더욱 가꾸어야지. 참 편안한 느낌을 누구한테나 주는 좋은 관상이니까, 두 사람 다 이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요~"

여든여섯 노인에게서 전광석화처럼 애드리브가 튀어나오자 젊은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오후 서울 연세대 후문에 있는 김동길 박사의 자택을 찾았다.
김옥길-김동길 두 개의 문패가 붙어 있던 20여년 전 대문은 재건축으로 변했지만, 항상 문이 열려 있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대문 자체가 없어졌다.

◇원고가 아니라 마음을 읽는다

―방송 원고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나요?
"준비는 무슨…."

―말솜씨와 유머력은 늙지 않으시네요.
"한평생 말을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열여덟에 초등학교 교사부터 했으니까요. 유머력은 다소 타고나야 해요.
코미디언들도 노력을 많이 하지만, 노력만으론 안 되잖아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지식을 얻어도 기질을 타고난 사람의 귀에는 유머러스한 얘기만 남는단 말이에요."

―유머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교황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1세가 '나를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잖아요. 거기에 넘치는 유머가 있어요. 나를 뽑은 것은 잘못이니까 하느님께 사과해야 한다는 뜻도 있고, 당신들 때문에 괜히 고생하게 생겼다는 뜻도 있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기 전에 누군가 물어봤대요. '외국어를 여럿 하신다는데 어떤 말을 잘하십니까?'
 영어, 불어, 라틴어, 이런 대답을 기대했겠죠.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내가 제일 잘하는 말은 거짓말이야.'
이런 유머가 감동을 주거든요.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하거든요."

―유머는 같은 말의 느낌을 다르게 하지요.
"상대의 가슴을 콱 찌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찔러서 느끼게 하면 되지요.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셨지요.
'생각이 죽어 말이 되고, 말이 죽어 글이 된다'고. 가장 중요한 건 생각이지요. 거기서부터 번져나가는 거니까.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좋은 말이 아니에요. 좋은 말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상대의 마음을 읽으세요?
"청중을 보면 얼굴에 나타나 있어요. 청중들 얼굴에 내 원고가 있는 거예요.
나는 따로 원고를 준비하는 대신 청중의 얼굴에 쓰인 원고를 읽어요. 그런 센스가 없어지면요? 나와서 얘기하는 거 그만둬야지요."

―청중이 원하는 말만 한다는 뜻은 아니지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가 원칙이지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요만큼이라도 공헌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에 늙어도 나오는 거예요."

―연세가 높으신데 방송에 응하셨네요?
“나이로는 실격이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순발력이나 유머는 남아 있으니까. 한 시대를 살면서 말할 기회가 많이 주어졌어요.
대중 강연도 만 번은 넘게 했을 거예요. 인생의 마지막 페이스, 생애가 끝나려는 이때, 마지막 몇 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현실 이야기도 있지만, 이제 가는 문제, 이거 하나가 내게 남았어요. Thus I come and thus I go(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간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많은 청중, 적은 청중을 상관하지 않아요. 똑같은 의욕을 가지고 열성을 다하지요.”

―시(詩) 300수를 외우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그러세요.
“공자님이 ‘시삼백(詩三百)’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도 시 삼백 수를 외워보겠다’ 그런 거지요.
어린 시절엔 시조 백 수를 외웠고. 일제시대에 살아서 그때 외운 일본 시도 남아있고.”
김동길 박사는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첫사랑’,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차례로 암송했다.
“어느 분위기에 어울리는 절절한 시가 있거든요. 키를 누르면 원하는 시가 튀어나와야지요. 눌렀는데, 안 나온다? 그럼 강연을 그만둬야지요. 그때가 끝나는 때예요.”

―여전히 누르면 튀어나오나요?
“‘강연하는데 말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적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요.”

86세 낭만 논객… 그가 나오면 시청률이 꿈틀댄다

◇매일 10분 강연, 원고지 3장 작성

―어떻게 단련하세요?
“(미국 LA의 한인 방송국인)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매일 아침 강연을 해요. 그런데 방송국 친구들이 자꾸 늦어요.
‘제가 차가 밀렸어요’ ‘깜빡 잊어버렸어요’ 하면서. 그래도 나는 늘 아침 6시에 앉아서 ‘안녕하십니까, 김동길입니다’ 하고
말할 준비를 하지요. 그게 19년째예요. 방송국에 문제가 생겨서 방송을 못 한 때도 있지만, 난 계속 했어요.”

―글도 매일 쓰시지요?
“인터넷 홈페이지에 ‘프리덤 워치’라는 글을 매일 써요. 200자 원고지 석 장 분량. 일어나면 처음 하는 일이죠. 여행을 떠나도 써요.
일주일 동안 크루즈를 타면, 일주일분을 써놓고 타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이 대통령에게 전하는 글을 매일 쓰면서 시작했는데.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고,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당신한테 안 쓴다, 그냥 쓴다’ 하고 시작한 것이 ‘프리덤 워치’예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은 써야지요.”

―컴퓨터로 쓰세요?
“요새 애들, 손이 아주 빠르잖아요. 중학교 3학년인 조그만 조카 아이가 (입력해서) 자기 컴퓨터에 올려줘요. 한 달에 30만원씩 주지요.
그 친구, 그걸로 십일조도 내요.”

―늘 낙천적이세요. 늘 웃으시고.
“제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가 사는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 옛날 고향 친구를 만나 들은 이야기도 전해주셨어요. ‘아들 장가갔느냐’고 해서 ‘안 갔다’고 했더니, ‘참 효자다’라고 했대요.
‘며느리한테 엄청 당한다’면서. ‘장가 못 갔다고 걱정할 거 없어’ 이런 말을 해주시던 어머니였어요. 삼복더위에 삯바느질을 하면서 어머니가 부르던 찬송가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해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한글만 겨우 깨친 어머니였어요. 시골(평안남도 맹산) 면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노다지를 찾겠다’며 나갔어요.
집 팔고, 논 팔고, 밭 팔고, 늘 밖을 돌면서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가족을 돌봤죠. 남의 집 빨래하고 삯바느질하고.
그러면서 누님(김옥길·金玉吉 선생)을 공장에 보내지 않고 여학교에 보냈어요.
‘못살면서 계집애 공부시킨다’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화를 안 내요.
‘뉘 집에선 돈을 쌓아놓고 공부시키나요?’ 이렇게 대꾸하셨지요.
그 딸이 이화여대를 나오고,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이런 꿈은 한 여성(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겁니다.”

―‘누님 같은 여자가 없어 결혼 안 한다’고 하셨지요?
“누님은 굉장한 리더십이 있었어요. 욕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김활란, 김마리아, 서은숙 선생을 그렇게 철저하게 모실 수가 없었어요.
누구라도 그런 제자를 갖고 있으면 좋을 거예요. 누님이 이화여대 총장이 됐을 때 혁명정부 시절(1961년)이었어요.
그때 문교부가 배정한 학생보다 더 많이 뽑아서 잠시 물러난 일이 있어요. 성적이 좀 모자라도 교직원 딸을 합격시켰기 때문이에요.
본인 모르게 해요. 그 사람들, 지금도 모를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자기 딸이 떨어진 학교의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하고 싶겠어’라고 말해요. 이런 일을 ‘쫄짜’들은 못해요.
학생 데모 맨 앞에 서서 학생들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정보부에 쫓기는 학생을 집에 숨겨주고. 집에서 냉면 파티를 하면 학교 수위까지 불러요.
퇴임 후 문경새재 고사리에 내가 땅을 사고 집까지 지어 드렸는데, 환갑이 되시자 이화여대에 몽땅 기부하셨어요.”

―형님은 태평양전쟁 때 돌아가셨지요.
“일본군에 끌려가 소만(蘇滿) 국경에서 숨졌어요. 아버지 목에 걸려 있던 유골함이 기억나요. 평생 상처를 안고 사셨지요.”

◇여성을 떠나본 적이 없다

―냉면 파티를 지금도 하시지요?
“누님 생일인 양력 4월 17일에 누님과 친했던 200분 정도 초대해서 냉면을 대접해요.”

―레시피는 예전과 같나요?
“메밀에 녹말을 넣는데, 절묘한 배합이 중요해요. 동치밋국에 면이 전부예요.
모윤숙 선생이 우리 집 냉면을 보고 ‘나체(裸體)냉면이구먼’ 하시더라고요.”

―역대 가장 많이 먹은 손님은?
“여덟 사리를 드신 국회의원 김의준씨.”

―결혼을 안 하셨다고 사랑까지 안 한 건 아니시죠?
“한 번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본 적은 없어요. 여성을 떠나본 적은 없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동경 속에 살잖아요.
동경도 있고, 젊었을 때는 뭔가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노력으로 살았어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훼방을 놓는 일은 안 한다’는. 그런데 일흔이 넘으니 문제가 되지 않아. 공자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사랑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이들이 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거지.”

―자녀가 없으신데….
“죽음에 대한 준비가 돼 있어요. 시체는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기로 서약했어요.
나는 고별 예배를 보고 장례식 하는 걸 용납 안 해요. 끝나면 그냥 가는 거예요.
재산은 아직 분명히 얘기할 수 없지만 두 학교(연세·이화여대) 중 한 곳에 기증할 건데, 아마 연세대에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 대학에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연세대 학생회장을 하시면서 좌익과 싸움도 하셨지요?
“좌익이 늘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어요. ‘등록금이 비싸다, 뭐가 틀렸다’ 하면서.
(좌익과 싸우는 쪽에선) 고대엔 이철승이 힘깨나 썼고, 연대엔 박갑득이 있었고. 박갑득은 싸움을 아주 잘했어요.
부하도 많았고. 박갑득은 북에서 부모님이 당한 일이 있어서 좌익을 절대 용서 못 했지요.”
김동길 박사는 최근 문제가 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니 하는 친구들은 도대체 민족에 대한 애정이 없어요. 물론 지독하게 (친일)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매일신문 평양 지국장 하던 이가 있어요. 조만식 선생에게 학도병 권고 글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대요. 그 어른한테 어떻게 그런 걸 써달라고 얘기했겠어요.
난감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자기가 써서 조만식 선생 이름으로 신문에 냈어요.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 지국장, 해방되고 자살했어요. 얼마나 불쌍해요. 민족을 그런 각도에서 봐야죠.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해야지요.”

―서로 용서해야겠지요.
“백년전쟁을 만든 기금이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게 나왔다잖아요. 그들이 받은 보상금으로. 원한이 사무쳐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걸 풀어줘야지요. 박 대통령이 대화합을 주장하는데요.
그러려면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 6·25때 당신 조상이 당한 일을 잊지 않는다, 가슴 아프다’ 이러면서 끝내야지요.
마음이 없으면요, 보상금을 암만 줘도 소용없어요.”

―세월이 지나도 응어리가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6·25 때) 이 근처 무허가 집에 살던 화가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인데, 미처 피란을 못 갔어요. 살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인민군을 도왔다고 해요. 그럼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끼리 피란 가서 미안하다’ 하고 껴안아줘야지.
부역을 했다고 쏴죽였어요.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건데. 대통령이 ‘서울 포기 안 하니까 안심하고 계십시오’ 해놓고. 그걸 믿고 피란 못 갔다가 고생했으면 돌아와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걸 부역자라고….

민족이 이래선 안 되지요. 링컨이 왜 위대해요.
남부 반란 때문에 지독히 고생하고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라고 말했잖아요. 이게 뭔가 있는 문명 아닌가요.”

―박정희 대통령을 인정하시지요?
“(유신 때) 많이 당했어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이 뭡니까. 쿠데타가 지금 일어나면 또 반대해야지요. 하지만 우리를 감옥에 넣었다고 해도, 조국의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은 인정해야지요.”

―스승이신 함석헌 선생이 살아계셨어도 인정하셨을까요?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큰 인물의 가슴 속엔 용서가 있어요. 작은 마음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누굴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본 때문에 많이 고생을 했어요. 징역도 살았지만, 일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 선생 기념사업회를 하는 사람들은 자꾸 저쪽으로 몰고 가지만.”

―그러면 반대로 종북(從北)도 용서해야지요?
“백성을 이끌고 섶을 지고 불로 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못써요.
다 죽으니까. 좌우의 문제가 아니에요. 대한민국 생존에 관한 문제예요.”
14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인 1992년 12월 1일, 김동길 박사가 유세 현장에서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얼싸안고 있다.

―‘정치를 안 하셨다면…’ 하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어리석었지요. ‘대통령에 나가라’는 정주영 회장의 말에 이끌렸으니까. 총선에서 승리하고 얼마 후 그 어른이 혼자 찾아와
‘결혼하고, 가정 가지고, 애 낳고 살면 내가 200억원을 드리고 싶어요’ 하시는 거예요.
전 ‘결혼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어요’ 했지요. 며칠 후 ‘이번 대선은 내가 나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그만두셨다면?
“‘난 떠납니다’ 하고 떠나면 내 명예는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저놈도 대통령 병에 걸렸구나, 그러니까 물러나는구나’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때 (정치에) 나오지 않았어도, 언젠가 (정치에) 끌려갔을 거예요.”

―후회하세요?
“절대 안 하지요. 정치판에 있었으니까 얘기하는 거예요. 정치판에서 시달리고 중상모략도 당하고 했으니까. 정치판에 없었으면 인생론밖에 얘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나를 요만큼 유지하고 왔기 때문에 국민에게 내 생각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난 평소 이렇게 말해요. ‘해방처럼 통일도 자고 일어나니 휴전선 밑으로 북한 동포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통일기금을 마련해서 통일할 생각을 하지 마라. 방이 큰 사람은 3명, 작은 사람은 2명씩 ‘동포들이여,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면서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랑을 가꿔줘라’라고.”

―박 대통령에게 부탁하시고 싶은 것은?
“DMZ 일대를 유엔에 기증하겠다, DMZ 한가운데로 유엔본부를 옮겨달라고 선포하자고요.
마침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국을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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