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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8일 토요일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북한 정여사


나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일련의 도발 위협 속에 한반도 긴장상황이 매우 높아진 4월 중순에 북중 국경 답사를 가게 되었다.

마침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날짜가 코앞인 시점이라 인천항에서 북중 국경도시인 단동으로 향하는 동방명주호는 그 분위기도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단동에 도착하여 바라본 신의주 시내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한국에서 떠나기전 각종 언론에 보도된 것과 같은 긴장감과 삼엄함의 모습은 없었다.


 
 신의주 강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북한 주민들의 모습, 강변 부두에 정박한 선박들을 분주히 정비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 등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된 상황의 모습들은 보이지 않았다.



압록강변에 있는 북한식당들도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압록강 철교를 따라 이어지는 북중 무역의 길목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하여 화물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겉모습과는 달리, 압록강변에서 망원 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고 북한쪽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 일본 기자들의 모습과 단동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불안감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특히 중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감정이 상당부분 악화되고 있는 모습들이 감지되었다.

만나본 중국사람들은 최근 들어 북한이 혈맹인 중국의 의사도 무시하고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 시도를 하는 등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우려하면서도 불쾌해 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사람들은 국경지대에서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는 것도 북한쪽에서 방해전파를 너무 강하게 보내기 때문에 중국쪽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 하는 등 일상적인 면에서까지 이제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단동의 한국식당서 종업원 겸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정00으로 평양에서 온 분이다.

이 북한 여성은 평양에서 평생을 공직에서 보내고 몇 년 전 퇴직하여 연로보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중국에 친척방문의 형식으로 이른바 아르바이트를 하러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 여사는 공식적으로는 6개월에 한 번씩 북한에 들어가 친척방문증을 갱신해야 하며, 주요 북한 출입 통로는 요동성 단동과 길림성 도문인데, 길림성 도문으로 함경북도로 넘어갈 때는 남양교두 다리의 검문소에서 하도 많은 뇌물을 요구해서 될 수 있으면 단동을 통해 신의주로 북한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정 여사는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정 여사는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연신 한국드라마가 나오는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저녁 8시부터가 매일매일 즐겁다고 한다. 한국드라마는 KBS, MBC, SBS에서 계속하여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주말드라마가 쉼 없이 방송되기 때문에 한 방송사를 정해서 일단 본방송을 시청하고, 그 이후에 인터넷을 통해 본방송을 놓친 다른 방송사의 드라마들을 모두 다운로드 받아 컴퓨터로 보고 있었다.

그러한 드라마 시청의 일상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하면서 “남조선은 드라마가 참 정감있고, 현실감 있다.”고 연신 흐뭇해 하셨다. 그러면서 “조선사람은 남조선 드라마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한국 드라마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 여사는 북한 평양에서도 시디알과 매체를 통해 한국의 드라마를 예전부터 봤다고 하면서, 한국 위성방송이 틀어지는 중국에서 그날그날 드라마를 밀리지 않고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정 여사와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한반도 긴장 상황으로 이어졌다.

“공화국은 가만히 있는데, 저희들끼리 난리를 피웁니다”라고 그는 대뜸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는 “우리 공화국은 아주 평화롭게 지금 살고 있는데, 막 외부에서 전쟁난다고 그러더란 말입니다”면서 현재의 한반도 긴장 상황에 대해 북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책임을 거론했다.

정 여사는 한국 드라마 시청과 함께 한국 뉴스도 많이 본다고 했다. 최근에는 한국 뉴스를 보면 마치 북한 뉴스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뉴스가 처음부터 북한과 관련된 뉴스로 시작해서 북한 뉴스로 끝나는 최근의 국제정세 상황 때문에 그는 한국 뉴스를 유심히 보고 있자면 북한의 소식을 오히려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 여사는 한국 방송국에서 북한을 너무 나쁘게만 묘사한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한국 뉴스를 보고 있자면 얼굴이 찌푸려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찌푸려진 그의 얼굴은 이내 한국 드라마 시간이 되면 환하게 펴지면서 드라마에 몰입하게 된다.

정 여사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전후재건기간, 천리마운동기간 등 북한의 국가형성 역사를 모두 평양에서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북한의 60-70년대 산업화 기간동안의 각종 노력동원사업과 도시 재건사업등을 기억하면서, 당시에는 진정한 혁명적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동하며 살았다고 했다. 

정 여사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학교를 다니는 날보다 평양 도시건설에 동원되었던 날들이 더 많았다면서 지금 현재의 평양의 각종 상징물들, 건물들을 지었던 자부심을 한껏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 80년대부터의 경제난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시 평양에도 경제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면서 90년대 이후에는 평양에서도 장사를 잘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려 움직였던 사람들이 살아남고, 당과 국가를 믿고 정직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굶어죽고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 했다.

그는 “90년대 고난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인민들은 더 강해졌단 말입니다”고 하면서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매우 강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장군님을 모시고 굳건하게 공화국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정 여사의 가족은 아들과 딸이 있고 모두 결혼하여 손자, 손녀들이 평양에서 잘 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양에 있는 자녀들과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의 사진들을 친절히 보여주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중국에서 돈을 벌면서도 평양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항상 그리워 이렇게 사진을 가지고 중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 사진 속에서의 가족들의 모습은 가슴에 달린 김일성, 김정일 배지만 빼고는 한국의 여느 가족사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나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또 다른 북한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단동에는 대형마트가 몇 군데 있는데, 그중 시내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대형마트가 TESCO이다.

단동은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최대의 국경도시답게 북한 사람들이 합법적인 일정으로 많이 체류하고 있는 도시이다. 단동의 거리에서는 심심치 않게 북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대형마트 TESCO에서 우연치 않게 북한 관료로 보이는 사람과 그 수행원 일행을 볼 수 있었다.

북한 관료로 보이는 젊잖게 생기고 가죽자켓을 고풍스럽게 입은 사람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 3명과 여자 1명에게 마트의 물품을 이것저것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하면서 쇼핑카트에 담게 했다. 수행원 중 한명은 그 관료가 설명하는 내용을 연신 수첩에 메모하고 있었다.


그 관료는 특히 사탕코너에 관심을 보이며 한참동안을 사탕코너에서 사탕의 종류별로 마트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수행원들에게 계속 설명하고 지시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북한의 사탕공장 지배인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북한 관료는 사탕코너를 열심히 시찰했다.

마침 며칠 후인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의 생일이며 명절이었다. 북한에서는 지도자의 탄생 명절에 학생들에게 사탕이 담긴 과자 선물세트를 이른바 “수령님의 은덕”으로 선물하는데, 경제난이 극심한 현재 북한 사정 때문에 중국의 식품 현황을 시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단동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이제 연변으로 향했다. 단동에서 연변으로 가는 기차편은 용정역이 종점이다. 압록강 하류에서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의 이동하는 만큼 기차 소요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낮 2시 반경에 떠나서 다음날 낮 12시경에 도착하는 21시간이 소요되는 기차길이다.

중국 기차를 타면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승무원들이 많이 탄다. 매 역에 기차가 정차할 때 마다 각자 맡은 기차칸의 문 앞에 서서 일일이 검표를 한다.

그리고 침대칸에 처음 타면, 승무원이 와서 신분증 검사를 한다. 침대칸이 장거리 여행객이기 때문이다. 좌석칸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좌석의 승객을 일일이 표 검사를 한다. 신분증 검사는 하지 않지만 그만큼 승무원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신분증 검사는 기차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도 어느새 승무원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한다. 외국인은 여권을 한번 보고 그냥 가지만, 중국 내국인들은 신분증을 어떤 단말기에 가져다 대야 한다. 중국의 신분증은 전자신분증으로 바뀌어 단말기에 대면 온라인으로 신분 검사가 된다고 한다.

이토록 중국의 기차역, 기차에서의 검열은 까다롭다. 이것이 바로 탈북자들이 중국 내륙을 거쳐 이동할 때 기차를 타지 않는 이유이다. 예전 같으면 위조된 신분증을 이용했지만, 이제는 신분증이 디지털, 온라인화 되어 있어 위조 신분증으로의 기차 이용은 불가능하다.

21시간의 여정 끝에 본 나는 용정역에 도착했다. 용정역은 허름하고 정돈되지 않은 구식 역사였다. 용정역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연길로 이동했다.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이다. 용정과는 달리 연길은 매우 큰 시내였고 유동인구도 많았다.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규정상 모든 간판과 안내문에 한글이 중국어와 병기되어 있어서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도시이다.


연길에서 숙소를 잡고 차를 타고 두만강 접경 지역을 가기로 했다. 연길은 도로교통이 상당히 잘 갖춰져 있어서 두만강 지역과 저 멀리 러시아 국경까지도 편리하게 갈 수 있다.

우선 연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남짓 달려 도문에 도착했다. 도문 시내에 진입하기 전, 높은 언덕 위에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요새와 같은 벽에 둘러싸여 있는 그 건물은 바로 도문 변방대이다.


이 도문변방대는 매우 악명이 높다. 도문변방대는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와서 연변 지역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북한으로 북송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구금시설이다.


연변 지역에서 체포된 탈북자들은 지역의 파출소로 인계되고, 그 다음에 도문변방대에 구금된다. 그리고 도문과 북한으로 이어진 남양교두를 통해 온성군의 온성보위부로 북송된다.

온성보위부에서 모진 고문과 취조를 받고 탈북자의 주거 지역에서 파견나온 보안원에게 인계되어 원래 살던 곳의 노동단련대 또는 집결소, 보안서 구류장에서 구금된 후 노동교화소에서 형을 산다.

따라서 이러한 모진 북송의 과정에 있어, 도문변방대는 그 자체로 북한으로 넘겨지게 되는 관문으로서 탈북자들에게는 공포스럽고 치욕적인 장소이다.

도문변방대를 거쳐 북송되었다가 다시 탈북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도문변방대의 시설과 처우는 북한의 구금시설보다는 열악하지 않았지만, 중국 변방대원들의 탈북자들에 대한 폭행과 곧 북한으로 송환된다는 심리적 공포감과 두려움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문변방대가 철문으로 되어 있는데 들어가니까 홀이 넓고 2층으로 되어 있었어요. 2층에 호실이 쫙 있어요. 나는 중간쯤이었는데 13호실이었어요. 2층에는 도강자들을 수감시켜놓고 1층은 자기네들이 써요. 문을 세 개 정도 통과해서 들어갔던거 같아요. 그리고 문은 리모콘으로 열어요.

변방대에서는 남자랑 여자랑 격리시켜놓았고 한방에 50명가량 다 여자로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많이 놀랬어요. 당시에 아기 울음소리도 나고 해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 일과는 시계가 없으니까 어두울 때 외국음악을 틀어주면 일어나서 양치하고 밥을 먹었어요. 그리고는 한줄로 쭉 앉혀놨어요.”(2011년 도문변방대를 경험한 김00 증언)

“도문변방대에서 사정없이 때려요. 도문변방대에서 중국공안이 안에서 북한사람이 노래 부르고 춤추면 곤봉으로 사정없이 얼굴을 철창으로 빼고 때려요. 그리고 앉으라고 한 다음에 손과 다리를 때려요.

먹는거는 자기들 공안이 먹던거 찌꺼기를 주고 빵도 국에다가 찌꺼기를 범벅으로 해서 줘요.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낫습니다. 북한에서는 개밥을 주는데요. 3일 만에 북송돼서 북한 갔습니다.”(2010년 도문변방대를 경험한 박00 증언)

내가 도착했을 당시에 도문변방대에는 북한 탈북자들이 구금되어 북송을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도문변방대 주변의 초소와 외벽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의 경계병이 있으면 변방대 내부에 구금중인 북한 탈북자들이 존재한다는 현지 안내원의 설명이 있었다.

도문변방대를 지나 도문 시내를 따라 이동하면 북한과의 무역을 하는 중국 세관이 나온다. 중국 세관을 바라보던 중 문득 옷차림이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의 국경경비대원들이었다. 북한 군인들이 중국 세관에 들어와서 중국관리들과 웃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된 국경지대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도문 중국 세관 옆에는 북한 온성군 남양노동자구로 연결되는 남양교두가 이어진다. 이곳은 마치 우리나라 한강의 고수부지와 같이 두만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마련되어 있었고, 넓은 주차장도 구비되어 있었다.


남양교두 주변의 상인들이 북한 돈과 기념품들을 팔고 북중국경이라는 표지석 만이 이곳이 긴장감이 흐르는 북중국경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남양교두가 북송되는 탈북자들의 주요 송환루트라는 점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차분하고 평화로운 두만강변의 분위기는 그러한 아픈 현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남양교두를 두만강변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두만강공원이 나온다. 매우 넓은 광장형의 공원으로 평일 낮임에도 많은 중국 주민들이 나와서 한가로이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앉아서 쉬고 있었다.

두만강은 그 강폭이 그리 크지 않고 특히 겨울철에는 유량이 더욱 적어지기 때문에 마치 조금 큰 개울만 건너면 될 정도로 북한 온성군은 지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 건너에는 여느 북한의 국경 모습과 마찬가지로 불법도강을 감시하는 경비초소가 있었다. 하지만 경비초소는 비어 있었으며 압록강변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문을 떠나 내륙 농촌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훈춘으로 나있는 고속도로를 지났다. 고속도로는 훈춘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이후부터는 국도이다.
 

북한의 함경북도와 두만강을 사이로 마주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내륙 농촌마을에는 북한에서 인신매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와 농촌에 있는 중국 남성들과 강제결혼을 통해 정착하여 숨어 살고 있다.

북한의 인신매매 실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며, 인신매매라는 것 자체가 탈북을 위한 수단이 되면서 많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돈을 벌기위해, 한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수단으로 인신매매의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인신매매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온 북한 여성들의 처지는 매우 열악하다. 중국어가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시에서 떨어져 인적이 드문 농촌에서 중국 남편과 그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숨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가정폭력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처음엔 참고 살다가도 그러한 남편의 폭행, 시부모의 폭행으로 인해 그 집에서 탈출하여 결국 중국을 떠돌거나 한국으로 탈출하는 동기가 되고 있다.

훈춘을 지나 국도로 접어들자,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먼지가 많은 도시의 모습에서 소와 말, 양들이 자유로이 지나다니는 논과 밭,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따라 늘어선 산맥의 모습이 끝없이 펼쳐졌다.

어느덧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인적이 드문 농촌마을에 들어섰다.

그 농촌마을에는 북한에서 인신매매되어 탈북하여 중국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갔다가 탈출한 어떤 여성을 임시로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집에서 사연이 안타까운 젊은 북한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저는 2010년에 탈북 했습니다. 북한에서 남자 두 명이 중국이 좋다고 해서 넘어가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그래서 도강해서 훈춘에서 중국 돈 3,000위안에 팔려갔습니다. 연길 00현 00촌에 팔려갔습니다.

팔려가서 살면서 제가 임신했는데 시댁에서 아이를 떨구라고 했습니다. 제가 신분증이 없으니깐 아이를 놓으면 벌금 8000원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아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00병원에서 배에다 주사를 맞춰서 7개월짜리를 떨구었습니다.

그 이후에 동네에서 저한테 와서 더 좋은데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얼려가서 갔는데 상대 남자가 불구자였습니다. 그 동네는 하남성 00시 00전에 팔려간 겁니다. 한심합니다. 완전 불구자한테 갔습니다. 절뚝거립니다. 놀랐습니다. 어찌 나를 그런 사람한테 소개해주나 했습니다. 중국돈 10,000위안에 팔려온 겁니다. 다시 동북에 보내달라고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결국 그 집에서 3년 만에 도망 나왔습니다. 아는 사람이 저를 노래방에 소개해 줬습니다. 그러다가 노래방에서 중국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중국남편이 저를 막 때렸습니다. 임신 8개월이었을 때도 다리와 온갖 얼굴이 피멍이 들도록 때렸습니다.

시아버지도 저를 멱살 잡고 막 때렸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채로 다시 도망가서 예전 불구자 남편 집에 가서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놓고 1달 됐는데 시어머니와 싸움해서 시어머니를 때렸다고 고발당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도망쳐서 버스를 타고 북경에 갔습니다. 북경역 앞에 조선족한테 도와달라고 했더니 교회를 가라고 해서 교회에 갔지만 한족교회여서 문전박대 당했습니다.

그래서 기차로 다시 동북에 왔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중국돈 10,000원에 팔렸던 그 집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네는 못 도와주겠다고 해서 다시 나와서 이곳에 임시로 묶고 있습니다.”

그 여성의 사연은 마치 인신매매 되어서 중국으로 나온 북한여성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신매매와 강제결혼, 이후의 폭행과 도망, 다시 팔리고 또 폭행과 도망 이라는 안타까운 삶의 순환은 아마 중국의 농촌지역에 숨어 지내고 있는 북한 여성들 모두의 아픔일 것이다.

북한체제의 구조적 모순은 결국 매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도 영향을 끼치고, 그러한 매 개인의 일상적인 삶은 공통되고 거대한 집단적 기억과 아픔이 되는 것이다.

이번 북중국경 답사에서 만난 정 여사, 마트에서 식료품을 시찰하던 북한 관료, 인신매매되어 중국으로 넘어온 여성들의 삶은 그러한 집단적 기억과 아픔들을 만들어 내면서 반복되고 있으며, 이는 훗날 북한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순환적인 긴 흐름을 몸소 느끼면서 이번 북중국경 답사를 마무리하고 북미정상회담과 개성공단 협상 등으로 한반도 긴장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무렵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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