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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3일 토요일

도보여행의 개척자, 베르나르 올리비에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입력 : 2012.11.03 03:05

길을 떠나 홀로 걸어보라… 길이 보이리니
" 길,나만 구원한게 아냐…85%인 청소년 재범률, 걷고 나면 15%로 떨어져"

은퇴 후폭풍… 걷기로 버텼다
아내의 죽음 겹쳐 우울증 앓아 자살까지 시도했다
예순에 처음 무작정 길 떠나 
흘러가는 구름… 미모사 향기…
평소 못 봤던 세상, 걸으며 만나고… 몸과 마음엔 진정한 자유 찾아와 

청소년 치유그룹 '쇠이유'
범죄 청소년들 걷기로 교화…3개월간 2000㎞ 걸으며
성취감 느끼고 칭찬받으면 아이들 눈에 자신감이 생겨…

아프간 전쟁 중에도 걸었다
군인에 쫓기고 이질 걸리고, 위험천만한 순간 많았지만
내 안전을 걱정한 이들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 우정… 너무도 큰 행복

나는 또 걷는다
이번엔 혼자 아닌 동료와 파리~이스탄불 걸어볼 것 
누구냐고?
아내 잃은지 20년 만에 새로운 사랑을 찾았거든

살기 위해 걸었다. 나이 60. 침몰하는 배처럼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 극도의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 걷기가 그를 구원했다. 전쟁과 질병, 맹수가 도사리는 실크로드 1만2000㎞를 단지 두 발로 걷고 또 걸으며 그는 소생했다. 길이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

"두 달 뒤면 75세가 된다"며 웃는 이 남자의 이름은 베르나르 올리비에(Ollivier). 전직 기자였던 그는 은퇴 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에 이르는 1099일의 여행기록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3부작을 펴내 모국인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한국의 걷기 여행자들에게 '구루(guru, 스승)'가 된 사람이다. 2000년에 설립한 협회 '쇠이유(Seuil·문턱)'는 실크로드가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길을 통해 자신이 치유받은 것처럼, 범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청소년 수감자들을 '걷기'를 통해 12년째 교화하고 있다. "한 아이가 말했다. 길을 떠나기 전 나는 건달이었으나 돌아온 뒤 나는 영웅이 되었다고." 올리비에가 책의 인세를 모두 쇠이유 협회에 쏟아붓는 이유다.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초청돼 제주에 온 그를 지난달 30일 서귀포에서 만났다. 이튿날 제주올레 10코스를 함께 걸었다. '혼자 걷기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물었다. 올리비에가 답했다. "나는 혼자였던 적이 별로 없다. 길 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다. 4년간 걸으며 사귄 사람들이 1만명? 아니 1만5000명은 될 것이다."
 지난달 31일 도보여행자들과 함께 제주올레 10코스를 걷던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아름다운 해안 풍경에 감탄했다.“ 파도에 깎인 검은 바위들이 마치 조각품 같다. 경매에 부쳐도 좋을 만큼(웃음).”그는 내년에 자신의 첫 소설을 발표한다고 했다. / 이종현 기자
행복을 파는 상점

―9개 국어로 번역된 '나는 걷는다'는 프랑스에서만 40만부가 팔렸다. 인세 수익이 꽤 많았겠다.

"인세의 절반은 쇠이유에 주었고, 절반은 세금으로 냈다.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모를까. 행복을 파는 상점은 어디에도 없다."

―'문턱'이라는 뜻의 '쇠이유'를 협회 이름으로 정한 이유는 뭘까.

"문턱은 어디에나 있다. 집에 들어갈 때, 사원에 들어갈 때에도 문턱을 넘는다. 범죄의 늪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이 문턱을 넘어서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기를 소망했다."

―걷는 행위가 어떻게 아이들을 변화시키나.

"아이들은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 3개월 동안 2000㎞를 걷는다. 하루에 보통 25㎞ 정도 걷는다. 두 달 정도는 몹시 추운 날씨이거나 눈 속에서 걷는다. 첫 달 몇 주는 등이 아프거나 발이 아프다며 저항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걷기에 즐거움을 느낀다. 끝까지 걷고 나면 아이들은 늘 숙이고 다니던 고개를 똑바로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 해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기 존엄성을 회복한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도 그들이 문턱을 넘는 데 힘을 실어준다."

―프랑스 정부와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나.

"수감 청소년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비행 청소년의 85%가 재범한다고 한다. 그러나 '쇠이유'의 걷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의 재범률은 15%에 불과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하지 않는 아이들을 정부는 쇠이유로 보낸다."

―은퇴 후 무엇이 그렇게도 당신을 힘들게 했던 걸까. 자살을 생각할 만큼.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자리와 이름과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금생활자가 되면서 방향 잡을 키도, 목적지도 없는 구제민이 되어버렸다. 무기력감,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내가 사랑한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식들은 독립해 떠나갔다. 내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걸은 길이 파리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었다.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친 뒤 일단 파리를 떠나자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곱이 순례한 길로 유명하지만 나는 종교적 이유로 걷지 않았다. 유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을 걸으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보고 싶었다. 석 달 동안 2300㎞를 걸으면서 걷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매일 20㎞씩 걸으니 내 몸이 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주 전만 해도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3주 후 걷기의 즐거움에 빠져버린 거다. 인간이란 걷기 위해서 태어난 동물이란 생각을 그때 했다. 신체의 균형이 잡히면 정신의 균형도 잡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걷기'는 육체의 운동이 아니라 정신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걸으면서 사람들은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러운 바람, 울퉁불퉁한 길, 미모사의 향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작은 풍경을 관찰하게 된다.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을 탐구하게 되고,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세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위안을 받는다.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물속 깊은 곳에서 숨이 차 수면으로 올라오려 발버둥치는 수영 선수와도 같았다. 공기가 간절히 필요했다. 걸으면서 투지가 생겨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세상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길을 수천킬로미터씩 걷는다는 건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의 몸이 훈련된 육상 선수처럼 적응할 테니까.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한 지 13일째 되던 날 내 몸의 근육들은 걷기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분당 맥박 수도 쉴 때는 60까지 내려갔고 걸을 때에도 85까지만 올라갔다. 예순한 살이었지만, 피로는 즉시 해소됐고, 짐도 덜 무겁게 느껴졌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취기 같은 게 느껴졌다. 당신도 나처럼 보행자의 열반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웃음)."

실크로드의 기적

―산티아고에서 그치지 않고 실크로드로 간 이유는 뭔가.

"산티아고 도착점을 50㎞ 앞에 두고 그곳에 닿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서 그보다 더 역사가 깊고 거대한 길 실크로드를 떠올렸다. 미친 모험이란 걸 나도 안다. 내 나이에는 장미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 데 말이다. 더구나 내가 실크로드로 떠났을 땐 터키와 쿠르드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9·11테러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졌고 그로 인해 테러리스트로 숱하게 오인받았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시기에 실크로드를 걷지 않는다. 유서 깊고 아름답고 안전한 길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내가 실크로드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진정한 세계화는 실크로드에서 시작됐다. 실크로드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길이 있을까. 실크와 값비싼 보물, 향신료 같은 물품이 교역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찬란한 아이디어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실크로드였다. 세계 정복에 도움을 준 나침반, 화약, 종이, 그리고 과학과 사상이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유럽인 4명 중 1명을 사망하게 한 페스트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참으로 역사적이고 진기하고 놀라운 장소다. 이 길을 완주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와 일부 대사들이겠지만 말이나 자동차가 아닌, 걸어서 완주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책을 읽어보니 고생만 엄청 했지,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지는 대목은 별로 없더라.

"그렇지 않다. 걸을 때보다 걷기를 멈추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을 만큼,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에게 우정과 사랑을 베풀었다. 나무꾼 철학자 셀림과 아직도 내게 펜으로 쓴 편지를 보내는 정겨운 할아버지 베흐체트, 내가 굶어 죽을까 봐 내 식량 주머니를 꽉꽉 채워주던 여인들, 일주일만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으며 포옹해주던 남자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 정말 힘들었다."

―가장 큰 고비는 터키와 이란의 국경에서 이질로 쓰러져 파리로 이송됐을 때일까.

"위험은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 있었다.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를 잡으러 온 40여명의 군인,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뛰어다니던 광인, 살기를 띠고 달려들던 맹견 캉갈, 하다못해 발가락의 화농성 염증까지.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유서를 써놓고 온 것이 다행스러웠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게 닥칠 위험에 무방비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실크로드에 관해 전문가 이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다. 수십장의 지도를 모으고, 터키어와 이란어도 배웠다. 관공서에 미리 도움도 청해놨고. 생명의 안전을 기적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아파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타게 되면 회복된 뒤 자동차를 탔던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와 걷더라. 일종의 결벽증 아닐까.

"보는 관점에 따라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고 미친 사람, 편집증 환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좀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하나 꼼꼼하게 세운 계획에 흠을 내거나 첫 단계부터 얼렁뚱땅 넘기고 싶지 않았다. 걷기는 다른 누구와도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실크로드 최초의 도보 여행자다. 당신은 '나는 영웅이 아니다, 자랑할 일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책을 펴냈다는 건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나처럼 특별한 재능도 없고 소심한 사람도 실크로드를 걸었으니 누구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고비사막을 걷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베르나르 올리비에.‘ 윌리스’라는 애칭의 짐수레는 그가 자전거를 사서 개조한 것으로 여행을 마친 뒤 프랑스의 한 박물관에 기증했다. / 효형출판
가난이 준 선물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으로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웨이터 일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해 대학에 들어간 게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졸업 후 기자가 된 그는 '파리 마치''르마탱''르피가로' 등 프랑스의 유수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걸 배울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새로운 걸 습득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지. 특종? 물론 많이 써봤다. 특종이 아니라도 기자는 자기가 쓰는 모든 기사를 특종처럼 여기고 써야 한다."

―실크로드를 걸을 때 엉터리 지도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푸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갈림길'이 나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 인생의 갈림길도 그렇게 많았을까.

"물론이다. 내 인생의 첫 갈림길은 학교였다. 집이 너무 가난하니 7남매를 도저히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선생님이 부모님을 찾아와 베르나르만은 꼭 고등학교에 보내라고 부탁하셨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내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은 퇴직 후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그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때였다."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1929년 대공황이 왔을 때 쫄딱 망한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두 분 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우리 집엔 늘 사랑이 넘쳤다. 내가 이런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모험가 기질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올 안식처가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모험을 떠날 수 없다."

―가난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작은 것에 만족하는 능력."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밑바닥 생업을 전전했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나는 굶어 죽지 않겠다는 확신을 그 시기에 얻었다. 뛰어난 적응력은 내가 기자로 일할 때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돌체비타'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보고 기자가 돼야겠다, 결심한 뒤 대입 자격시험을 봤다. 영화와 현실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기자란 직업이 그냥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공부했다. 접시를 닦을 때에도 공사판에서 일할 때에도 나는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역사책은 나를 매료시켰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 굳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가.

"정치부 기자였던 내가 주로 만난 사람들은 정치인, 장관들이었다. 내가 쓴 기사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敵)이 된 경우가 훨씬 많았다(웃음). 비즈니스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과 우정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실크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환대하면서도 그들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준) 나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2002년 중국 시안에서 걷기를 끝낸 뒤 다시 그 나라들에 가본 적이 있는지.

"2005년 다시 실크로드에 갔다. '나는 걷는다'를 읽은 독자들이 왜 책에 이미지가 없느냐고 해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9주 동안 자동차로 실크로드를 완주했다.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 핫산이란 이름의 목동과 재회했다. 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한 이 사람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껴안았다. 핫산이 나를 얼마나 세게 껴안았는지 목에 걸었던 내 안경이 박살 나고 말았다. 단지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그는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이 걷기의 기적이다. 불꽃이 튀는 강렬한 만남이 걷는 동안 이루어진다."

―사진은 왜 싣지 않았나.

"감동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이다. 내가 독자들에게서 받은 가장 큰 칭찬은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저자의 옆에서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런 감동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왜 가져갔나.

"기록하기 위해서. 사막을 건널 때 빼고 하루 10여명의 사람을 만났다. 매일 저녁 하루를 정리할 때 나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사나운 날씨에 발이 곪아 터지고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하루하루의 여정을 치밀하게 기록한 올리비에의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지난달 30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올리비에의 강연에 몰려든 도보여행자들 또한 올리비에의 기록 노하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길에서 만난 꼬마의 이름까지 책에 적을 수 있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기자생활을 할 때부터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를 즐겨 입었다. 주머니 하나에는 여권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수첩과 펜, 또 다른 주머니에는 카메라를 넣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부터 묻고 메모했다. 엄청난 양의 메모를 하고, 엄청난 양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책은 3권이지만, 메모한 것의 5%도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도 매 순간 메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실크로드로 떠날 때 자식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고 묻더라. 고심 끝에 약속했다. 저녁마다 편지를 한 장씩 쓰겠다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 내가 있었던 장소와 날짜를 적은 편지를 써서 부치겠다고. 만일 내가 실종되면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에 등장하는 장소부터 나를 찾아 나서라고 했다. 여행이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메모를 읽고 사진을 보면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혼자 걸어야 하는 이유

31일 아침, 올리비에는 제주올레 10코스를 걷기 위해 모인 수백 명의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렸다. '혼자 걸어야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진 그에게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1년에 한 번쯤 이런 걷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웃던 그는 "걷기 열풍은 한국 사회가 성찰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제주올레길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걷기 열풍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고 말하자 올리비에가 반문했다. "1년 동안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자동차를 타는 것이 걷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왜 혼자 걸어야 하는가.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상상력이 부족해졌다고 느낄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는다."

―실크로드 이후 걸은 길이 또 있을까.

"15일 동안 피레네산맥을 걸었고, 노르망디의 성지 순례길 3000㎞를 걸었다."

―다시 걸을 계획은?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6개월간 걸어볼 생각이다. 처음 실크로드를 완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집이 있던 노르망디에서 중국까지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건상 이스탄불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번에 그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싶다."

―역시 혼자서 걷겠지?

"아니다. 이번엔 고독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걷게 될 것 같다. 걷기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동료와 함께 걷는다."

―혼자 걸어야 걷기의 완벽한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

"동료가 실은 내 여자친구다. 아내와 사별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람이다(웃음). 그런데 우리는 걸을 땐 각각 혼자 걷는다. 걸을 때는 침묵하고 멈추었을 때 대화한다. 서로 침묵을 존중한다."

―당신은 은퇴자들에게 도보여행을 권유하지만, 은퇴자들은 인생 2막에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에도 바쁘다.

"2000년 이란 국경을 넘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4개월간 내가 쓴 돈은 겨우 300달러였다. 집에 있었다면 더 많은 돈을 썼겠지(웃음). 걷다 보면 인생 후반부, 무한하게 주어진 시간과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영감과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74세에 이처럼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역시 걷기일까?

"매일 아침 30분 이상 걸은 뒤 찬물로 샤워하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당신도 하루 6~7㎞씩 걸으려고 노력해보라. 실크로드도 거뜬히 걷게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도보여행자가 될 것인가.

"나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 환생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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