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1년 9월 9일 금요일

고려대장경 1000년

고려대장경 1000년[중앙일보]

대장경 다 읽는 데만 30년 … 우수한 한지가 있어 1000년 버텼다네요

대장경(大藏經)과 관련된 전시·축제가 전국 각 지역에서 마련되고 있다. 2011년은 ‘고려대장경 1000년’의 해라는 이유에서다. 1000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의 판각(板刻)이 시작된 1011년이다. 1000년의 세월을 견뎌 살아남은 인쇄문화의 꽃, 한국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려대장경을 문답 형식으로 알아본다.

이경희 기자


Q 대장경이란.

아비달마식신족론 권 12 초조대장경, 국보 267호, 12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세로 29.5㎝, 가로 46.5㎝ 크기 종이 26장을 붙여 만든 두루마리 경전의 권수(卷首) 부분. 표지가 남아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사진크게보기>


A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불교 경전의 총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트리피타카(Tripitaka)라 하며, 이를 한자로 옮기면 삼장(三藏)이 된다. 트리피타카는 ‘3개의 바구니’라는 뜻이다. 부처의 가르침인 불경은 크게 경(經·sutra)·률(律·vinaya)·론(論·abhidharma)으로 나뉜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고, 율은 윤리·도덕적 실천규범인 계율을 적은 것이다. 론은 법에 대한 의논, 즉 부처의 가르침을 풀이한 것이다. 석가의 제자들이 이들 경전을 패엽(貝葉·pattra)이라는 나뭇잎에 새겨 종류별로 세 개의 바구니에 따로 담아 보관한 데서 ‘트리피타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대장경에는 삼장 외에 사전류·목록류·전기류·역사류·여행기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개보판대장경(개보칙판이라고도 불림) 이후 대장경이란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다.

Q 대장경을 조성한 이유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 77 재조대장경, 고려 13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세로 30cm, 가로 48cm 크기 종이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 경전의 권말(卷末)부분. 고려 고종 31년(1244) 대장도감에서 판각했다는 간기가 적혀 있다.<사진크게보기>


A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해 중국·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됐다. 이 과정에서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 혹은 인도 남방 언어인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장경을 조성하는 일에는 어마어마한 공력이 들어갔다. 방대한 양의 경전을 인쇄하는 일에는 경제력과 기술력이 필요했다. 국가가 주도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 초의 판각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고, 불교문화도 융성했다. 대장경 간행은 국가의 종교인 불교의 힘을 모아 외침을 물리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한 국가의 문화적 저력과 경제력, 과학기술 등을 과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문화국으로서의 국위를 떨쳐 이민족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대장경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에서도 목판 대장경 간행을 시도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Q 초조대장경이란.

A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顯宗) 2년인 1011년에 판각을 시작해 1087년에 완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국내 최초의 목판 대장경이기도 하다. 송나라 개보칙판(開寶勅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한역 대장경이다.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판각 시기를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근거를 유력하게 본다. 그에 따르면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고려 현종 2년(1011) 판각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고려사 선종 4년(1087)조에 따르면 임금이 “3월에는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대장전(大藏殿)이 조성되었음을 경축하였으며” “4월에는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고 나온다.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1087년 초조대장경 판각이 마무리된 것으로 본다. 초조대장경은 77년간 약 6500여 권이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Q 초조대장경은 중국 대장경의 번각본인가.

A 번각이란 글씨가 적힌 종이를 나무에 뒤집어 대고 그대로 글씨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중국 대장경과 초조대장경을 비교해 보면 단순 번각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에는 중국 대장경에 있는 중국식 간기(刊記·연호)가 하나도 없는 등 제작 방식이 다르다. 초조대장경의 수록 범위는 당시 한역 대장경으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초조대장경 경판은 어디 있나.

A 초조대장경을 새긴 나무 경판은 개경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돼 있다가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로 옮겨 보관되던 중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그러나 초조대장경판으로 인출(印出)한 경전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남아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은 약 300여 권에 달한다. 인출본은 모두 경판이 소실되기 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초조대장경 인출본은 12~13세기 초 목판 인쇄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하나가 보물·국보급 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귀중하다. 초조대장경 인출본은 일본에 2400여 권이 있으나 국내에는 300여 권만 확인됐다.

Q 경판도 없는 초조대장경이 10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A 현재 우리가 초조대장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목판이 인쇄된 종이가 잘 보존됐기 때문이다.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紙千年絹五百)’는 옛말처럼 전통한지의 우수성은 그동안 잘 알려져 왔다. 특히 고려 종이는 중국에서도 최고의 종이로 평가 받았다. “고려의 닥종이는 빛깔이 희고 사랑스러워 백추지(百錘紙)라고 부른다”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빛깔은 능라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소중히 여겨진다. 이는 중국에도 없는 귀한 물건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고려 종이는 내구성이 뛰어나 1000년을 견딜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의 종이는 크게 변색되거나 훼손되지 않았다. 가령 최근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儀軌)는 수백 년이 지났어도 종이 상태나 화질 등 보존상태가 뛰어나 눈길을 끌었다. 외규장각 의궤 중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에 쓰인 종이가 ‘초주지(草注紙)’라는 고급 한지다. 고려 종이는 조선의 왕이 쓰던 초주지보다 더 뛰어난 종이라 보면 된다.

Q 재조대장경은 뭔가.

A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된 후 다시 조성한 대장경이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 및 제경판, 소위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바로 그것이다. 몽고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1236~1251년 판각했다. 추사(秋史) 김정희는 재조대장경의 서체나 판각술에 대해 ‘비육신지필 급선인지필(非肉身之筆 及仙人之筆·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선인의 글씨다)’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초조대장경은 소실됐지만 재조대장경은 대장경판이 아직 남아 있다. 당초 선원사에서 장경판을 보관했다가 해인사 장경판전으로 옮겨 현재까지 전한다. 팔만사천 번뇌를 없앤다는 뜻에서 만들었기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경판 수는 정확히 8만 장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중복되는 판도 있고, 여러 시대에 걸쳐 보충해 새겨 넣은 판도 있기 때문이다. 조사자에 따라서도 경판 수는 조금씩 달라진다.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결과는 8만258장으로 나왔다. 1975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의 조사에선 8만1348장, 중복판을 제외할 경우 8만1240장인 것으로 집계됐다.

Q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의 차이는.

A 초조대장경은 간기가 없고, 재조대장경은 있다. 재조대장경도 서체나 판각술이 뛰어나다고 평가 받지만 초조대장경을 나란히 놓고 보면 서체나 판각술이 더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재조대장경이 더 완벽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송나라본·거란본 등과 대조해 삭제·교체·추가하는 등 완성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초조대장경엔 판의 제목이 앞(板首題)에 있고, 재조대장경엔 주로 뒤(板尾題)에 있는 등 형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Q 팔만대장경판이 온전히 보존된 비결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장경판전. [중앙포토]
A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도 가장 높은 해발 700m 지점에 있다. 목판을 보존하려면 습도가 낮아야 한다. 그런데 해인사는 여름 평균 89%, 겨울 평균 76%에 달하는 고습한 기후를 보인다. 목판을 보관하기엔 열악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장경판이 보존된 비결은 과학적인 장경판전의 건축이다. 벽면의 아래 위와 건물 앞·뒷면 살창 크기를 달리해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 아래위로 돌아나가도록 한 것이다.

계곡의 바람을 받아들여 경판과 경판 사이 공간에서도 바람이 지나도록 설계한 독특한 ‘자연환기’ 덕분에 800년 세월을 견뎠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또한 나무 경판에 방수·방충·방부 효과가 있는 옻칠이 된 점도 보존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Q 대장경 1000년 관련 전시는 어디에서 열리나.

A 대장경 관련 행사는 대장경과 관련이 있는 지자체·박물관 등에서 제각기 열리고 있다. 호림박물관 서울 신림 본관에선 ‘천년의 기다림, 초조대장경’ 특별전을 30일까지 연다. 호림박물관은 국내에 있는 초조본 300여 권 중 1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은 ‘고려 천년의 귀향, 초조대장경’ 특별전을 18일까지 기획전시실1에서 연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역사박물관은 10월 2일까지 ‘대장경, 고려의 혼을 새기다’ 특별전을 열고, 서울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은 초조대장경 천년의 해 기념 특별전 ‘천년의 지혜, 천년의 그릇’을 2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연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남 합천군에선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www.tripitaka2011.com)을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해인사 등지에서 개최한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선 11월 ‘초조대장경 1000년 기념전’을 열 예정이다.


※ 도움말=박광헌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자료=‘초조대장경’(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 고려팔만대장경 조사보고서’(1992년)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04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이 가져온 혁명. 유네스코 등재 기록문화유산 영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