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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4일 토요일
‘문재인 5년’의 각종 내로남불
문재인 5년’의 각종 내로남불 ②
국민의 ‘내로남불’ 비판을 ‘부정적 프레임’으로 치부한 문재인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국민생명·안전” 강조한 문재인… 해수부 공무원 피살 땐 뭐했나?
⊙ 낚싯배 전복 사고에는 ‘묵념’… 다른 사고 때는 같은 모습 안 보여
⊙ 야당 때는 “靑의 ‘檢 인사’ 관여는 악습!”… 집권 후엔 “인사권자는 대통령!”
⊙ ‘4대강 예타 면제’ 공격… 집권 후 ‘예타 면제’ 금액 이명박의 2배
⊙ 국회의 ‘시행령 통제’ 거부한 박근혜에게 “독재” 공격… 집권 후 시행령으로 야당 견제 피해
⊙ ‘공군 女중사 성폭력 사건’에는 엄정 수사 지시… 안희정·오거돈·박원순 때는?
⊙ ‘적폐’ 취급하던 용처 안 밝히는 국정원 ‘비공식 예산’도 박근혜 정부 때보다 급증
⊙ 자신도 대선 때마다 공약했으면서 윤석열의 ‘집무실 이전’에 “여론수렴 없이 큰 비용 들여~”
문재인(文在寅) 정권 5년간 대한민국을 관통한 단어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을 줄여 부르는 ‘신조어’ ‘내로남불’이다. 이는 입장에 따라 말을 바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서도 상대방에게는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중잣대로 상황을 규정하는 위선적 행동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내로남불’은 지난 5년 동안의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문재인 정권 인사들의 행태를 정확하게 묘사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았다. 끝날 때까지 이 같은 지적은 끊이질 않았다. 그런 까닭에 2020년에는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내로남불’의 한자식 표현인 ‘아시타비(我是他非)’를 꼽았다. 2021년 4·7 재보궐선거 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특정 정당(기자 주-더불어민주당)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면서 투표 독려 현수막에 ‘내로남불’이란 문구를 쓰지 못하게 했다.
‘높은 윤리 의식’을 가졌다고 자화자찬한 문 전 대통령과 ‘정의의 화신’인 것마냥 틈만 나면 ‘적폐 청산’을 운운했던 그 수하들은 5년 동안 ‘내로남불’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사실상 ‘독점’했다. ‘진보 논객’으로 분류되는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마저도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행태에 대해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대체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행태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를 전부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로 자료 나열 형태의 ‘직접 인용’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31년 동안 쓴 책이 266권에 달하는 강준만 교수조차 중도 포기를 할 정도로 ‘내로남불’ 사례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문재인 정권이 5년 동안 자행한 ‘내로남불’ 중 극히 일부를 요약해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참고로, 후술할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행태에는 대체로 ▲겉과 속이 다름(表裏不同)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我田引水)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나무람(賊反荷杖) ▲같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모순됨(自家撞着) 등 여러 유형이 혼재돼 있다.
‘세월호 사고’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문재인 전 대통령과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은 ‘세월호 사고(2014년 4월 16일)’가 마치 당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정부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주장을 숱하게 했다. 또 사고 발생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진상을 은폐했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서는 ‘7시간의 진실’ 운운하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해댔다. 박근혜 정부 출범 1년 2개월 뒤에 발생한 ‘세월호 사고’는 사실상 정권이 몰락하는 단초로 작용했다.
2016년 10월, JTBC의 소위 ‘최순실 태블릿’ 의혹 보도 이후 촉발된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그 직을 상실했다. 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 이후 전남 진도군 소재 진도항(속칭 팽목항)을 찾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시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는 분향소의 방명록에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의 글을 남겼다. 당시 그는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광장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1000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2017. 4. 10. 문재인”이라고 적었다. 불의의 사고로 이른 나이에 사망한 고등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고맙다”는 ‘괴이’한 표현은 두고두고 ‘문재인 인성’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됐다.
사실상 ‘세월호 사고’를 기반으로 해 집권한 문 전 대통령은 말로는 ‘국민안전’을 강조했다. ‘세월호 사고’를 빌미로 전임 대통령을 몰아붙인 ‘업보’ 탓인지, 문재인 정권은 집권 초반에 과도한 모습을 연출했다.
낚싯배 사고에 묵념했던 文의 이후 행태
2017년 12월 3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그 부하들이 국가위기관리센터에 앉아서 인천 영흥도 낚싯배 전복사고 관련 보고를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7년 12월 3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인천 앞바다에서 낚싯배가 전복되자, 이른 아침부터 실시간으로 관련 보고를 받고 구조를 지시했다. 국민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선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낚싯배 사고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는 행태는 ‘비효율적’ ‘비상식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나섰지만, 해당 사고로 결국 15명이 사망했다.
다음 날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앞서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낚싯배 전복 사고 사망자를 추모하자’면서 묵념을 했다.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회의 시작하기 전에 대통령께서 말씀을 주셔서 어제 영흥도 낚싯배 침몰 사고로 희생되신 분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서 잠깐 묵념의 시간을 갖고 회의를 진행할까 한다”며 “침몰 사고로 희생되신 분들을 위로하는 묵념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청와대’ 참모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묵념하며 조의를 표했다.
그 자리에서 문 전 대통령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같은 사고를 막지 못한 것과 또 구조하지 못한 것은 결국은 국가의 책임”이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 책임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했지만, 2017년 12월 21일 ‘사망자 29명·부상자 37명’이 발생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가 일어났다. 2018년 1월 26일에는 ‘사망자 47명·부상자 112명’을 기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각종 사고는 끊이지 않았는데, ‘문재인 청와대’의 태도는 영흥도 낚싯배 사고 때와는 달랐다. 단체로 공식 회의석상에서 묵념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다. 문 전 대통령을 비롯해 그 정권 인사들이 8년 가까이 ‘세월호 사고’를 입에 달고 지낸 것과 달리 똑같은 사고이자 안타까운 ‘비극’인데도, 여타 사고들에 대해서는 같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北이 우리 국민 죽일 때 文은 뭐하고 있었나?
이미 발생한 사고를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문 전 대통령에게 묻는 행위는 비합리적이지만, 이른바 ‘북한의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살 및 시신 소각 만행’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연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이 표류한 우리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를 때 어떤 조처를 했을까. 낚싯배 사고에도 호들갑을 떨며 촌극을 벌인 ‘문재인 청와대’는 북한 해역에서 멀쩡히 살아 있던 우리 국민의 무사 귀환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가리켜 ‘7시간’을 운운했던 사람들은 어떤 행태를 보였을까.
2020년 9월 21일,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대준씨는 어업지도선을 타고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됐다. 우리 군은 다음 날인 9월 22일 오후 3시30분, 이씨가 북한 측 해역으로 표류된 상태며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부터 북한군이 이씨를 사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울 때까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던 문 전 대통령은 입을 닫았다. 국방부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은 그날 저녁 6시30분에 서면 보고를 받았지만,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그날 오후 10시30분쯤 이대준씨의 피살 정보를 입수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문 전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상대로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문재인 청와대’는 2시간30분이 지난 2020년 9월 23일 새벽 1시쯤 돼서야 ‘관계 장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당시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주재했다. ‘낚싯배 사고’ 때 직접 구조 관련 지시를 했다는 문 전 대통령은 회의에 불참했다.
공교롭게도 이 회의 시간과 문 전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얘기하는 국제연합 총회 기조연설 방영 시간이 겹쳤다. 해당 영상은 미리 녹화해 같은 달 15일에 방송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 책임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했던 문 전 대통령은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죽이고 시신을 불태운 만행을 다루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2012년부터 “사람이 먼저다”를 외쳐댔던 그가 ‘국민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국민은 ‘5인 이상 금지’… 文은 ‘예외’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1년 4월 19일, 방역수칙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같은 날 청와대에서 최재성 전 정무수석비서관 등 ‘문재인 청와대’를 떠나는 부하 4명과 저녁을 먹으면서 술도 마셨다. 당시는 그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불분명하지만, 방역 당국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명목으로 내세워 전 국민의 사생활에 간섭하며 ‘4인 초과 사적 모임 금지’를 강제하던 때다. 즉 사적으로 5명이 모이는 것 자체가 ‘방역수칙 위반’이던 시절이다. 온 국민이 예외 없이 사생활을 통제당하던 그 시기에, 문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5인 만찬’을 강행했다.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한 시민이 ‘문재인 외 4인’을 방역수칙 위반으로 신고했다.
당연하게도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는 “대통령의 각종 만남과 행사 참석 등은 대통령으로서 업무 수행의 일환이므로 공무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방역수칙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회의 전후로 이뤄지는 식사는 사적 모임이므로 5인 이상이면 금지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문 전 대통령이 이미 공직을 떠난 전 비서들과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은 ‘공무’이고, 여타 국민 5명 이상이 업무상 갖는 식사 또는 접대는 ‘사적 모임’에 해당하므로 ‘금지 대상’이란 주장이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칫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제11조 1항)하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한다(제11조 2항)”고 규정한 ‘헌법’을 위배했다는 오해를 자초할 가능성이 있는 ‘아전인수’ 격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檢 인사 관여’ 비판하다가 재임 때는 ‘돌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0년 1월 당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검찰 인사에 대해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의를 제기하자, “인사권은 장관과 대통령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뉴시스
2012년 12월 2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이른바 ‘검찰개혁 기자회견’을 열고 “MB(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 및 청와대가 검찰 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장담했다. 이어서 “그동안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검찰총장 임명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면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현직 검사 중에서 임명해왔던 검찰총장직을 외부에도 개방해 국민의 신망을 받는 검찰총장이 임명되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2019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검찰이 정권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직면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검찰 인사 관여’에 대한 입장을 바꾼 듯한 주장을 했다. 그는 2020년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손발 자르기’식 또는 문재인 정권 관련 의혹을 수사하던 검사들에 대한 보복성 인사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수사권은 검찰에 있다. 그러나 인사권은 장관과 대통령에게 있다. 검찰 수사권이 존중돼야 하듯이 장관과 대통령의 인사권도 존중돼야 하는 것이다. 검찰청법에도 검사의 보직에 관한 인사는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게 돼 있고 법무부 장관은 그 제청에 있어 검찰총장 의견을 듣는 것으로 그렇게 규정돼 있다.”
2012년 2월 12일,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비판하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게시했다. 당시 그는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진행하면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것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예비타당성 조사 안 해도 된다고 보고한 자들을 이제라도 문책하는 게 과오를 줄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예비타당성 조사란, 정부 재정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업의 정책적·경제적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평가하기 위한 제도다.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됐다. 총 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고 지원이 300억원 이상 되는 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야 한다.
2015년 6월 26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그는 또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기 위해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시켜버렸다”며 “결과는 환경재앙과 국민 혈세 22조 낭비였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4대강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문제 삼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막상 자신이 재임할 당시에는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남발했다. 특히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실시해 ‘선거용 퍼주기’란 비판을 자초했다. 이어서 그야말로 “삽질도 ‘내로남불’” 조롱을 들어야 했다.
文의 ‘예타 면제’는 그가 비판한 MB의 2배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던 문 전 대통령은 집권 후 이명박 정부의 2배, 박근혜 정부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이 투입되는 사업의 예타를 면제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사업들에 투입되는 나랏돈은 120조원에 달한다. 그가 ‘4대강’을 빌미로 그렇게 공격했던 이명박 정부의 2배에 해당한다. 25조원에 불과한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면 5배 가까이 된다. 문 전 대통령이 ‘국가 재정 건전성’을 놓고 그토록 비판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예타 면제 금액을 다 합해도 문재인 정부의 72%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든 셈이다.
또 다른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국가재정법’ 제38조 2항 10호 나목이 규정한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하여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된 사업”을 명목으로 내세워 예타를 면제한 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정권이 자신들 입맛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고,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각료들이 참여하는 국무회의에서 이를 확정하면 타당성 검토도 거치지 않고, 천문학적 규모의 나랏돈을 쓸 수 있는 제도적 문제를 문재인 정권이 악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 정책적 필요’란 명목으로 예타를 면제한 사업의 비중은 33.1%다. 박근혜 정부 때는 24.1%였다. 문재인 정부 때는 76.5%에 달한다. 문 전 대통령이 나라 살림을 이런 식으로 하는 동안 나랏빚은 폭증했다. 그가 집권하기 전 627조원이던 국가 채무는 그가 임기를 마칠 때 1064조원으로 늘었다.
‘시행령 통치’에 대한 文의 ‘자가당착’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5년 6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있으면서 ‘대국민호소문’을 냈다. 그날은 박근혜 대통령이 행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다음 날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호소문을 통해 “법률을 무시하고 시행령으로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은, 행정 독재적 발상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시행령은 상위 법률에 따라 대통령이 제정하는 명령을 말한다.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하고, 그에 대한 심의 과정을 거쳐 본회의 가결까지 거친 다음 정부로 이송되는 법률과 달리 시행령은 정부가 만들고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이 재가하면 바꿀 수 있다.
이처럼 시행령이 입법부의 통제 밖에 있는 구조에 대해 분명히 ‘행정 독재적 발상’이라고 했던 문 전 대통령은 2020년 총선 결과에 따라 더불어민주당과 그 우당(友黨)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 전까지 사실상 ‘시행령 통치’를 했다. 문 전 대통령의 임기 전반기 당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의석이 전체 300석 중 123석에 불과했기 때문에 국회 심의·의결을 거치지 않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 심지어는 대통령령인 시행령이 아니라 공공기관 내부 규정에 불과해 대외적 효력이 없는 ‘훈령’으로 국민 일상을 통제하려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집권 초반부터 공공연한 것이었다. ‘문재인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회의는 2017년 7월 19일,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시행령·시행규칙 등 하위법령 개정만으로 이행 가능한 국정과제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연내 개정 완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입법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시행령 등을 개정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다.
국정원 특활비도 ‘내로남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야당 시절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등의 특수활동비 지출 행태를 비판했다. 업무상 그 필요성을 인정해 현금으로 지급하고,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아도 돼 용처를 알 수 없는 ‘깜깜이 예산’이란 지적을 받아온 특수활동비의 문제점을 더불어민주당은 계속 지적했다.
문 전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취지로 재임 당시 ‘특수활동비 절감 방안’을 지시했다. 2017년 5월 25일, ‘문재인 청와대’는 당해 남아 있던 대통령 비서실 특수활동비와 특정업무경비 126억원 중 42%에 해당하는 53억원을 절감해 청년 일자리 창출과 소외계층 지원 예산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다음 해 청와대 특수활동비와 특정업무경비 예산을 당해 161억원에서 31% 줄여 111억원으로 편성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여타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역시 특수활동비를 줄였지만, ‘문재인 5년’ 동안 그 정권 인사들이 ‘적폐’ 취급하던 국가정보원의 ‘비공식 예산’은 더 늘었다.
2021년 12월 9일, 민간단체 나라살림연구소가 ‘2020년 회계연도 결산’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당시 용처를 공개하지 않은 국정원의 ‘비공식 예산(편성 기준)’은 ▲2018년 5882억 ▲2019년 6000억 ▲2020년 6000억원 등으로 3년간 1조7882억원, 연평균 5961억원이다. 박근혜 정부 때와 비교해 비공식 예산 규모가 감소하지도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국정원 비공식 예산을 증액했다. 문재인 정권 인사들이 ‘적폐’로 규정한 박근혜 정부 당시 4년 동안 편성한 국정원의 비공식 예산은 ▲2014년 4250억원 ▲2015년 4632억원 ▲2016년 5063억원 ▲2017년 5559억원 등이다. 총액은 1조9504억원, 연평균으로 따지면 4876억원인 셈이다.
실제 지출액도 ‘문재인 정부 3년’이 ‘박근혜 정부 4년’보다 많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2018년 5670억원 ▲2019년 5800억원 ▲2020년 5500억원을 집행했다. 총액은 1조6970억원, 연평균 지출은 5657억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2014년 4150억원 ▲2015년 4552억원 ▲2016년 4963억원 등 3년 동안 총 1조3665억원을 썼다. 연평균 금액은 4555억원이다.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국정원 비공식 예산을 24% 더 썼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국가 안보’ 등의 이유로 ‘공식 예산’인데도 그 사용 내역을 밝히지 않는 ‘안보비’도 문재인 정부 들어 증액됐다. 안보비는 과거의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특수활동비를 공식 예산으로 바꾸고, ‘안보비’라고 명명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정원의 안보비 예산은 5년 동안 총 3조2743억원, 연평균 6549억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4년 동안 총 1조9286억원, 연평균 4822억원이다. 연평균 예산을 기준으로 하면 전임 정부 때보다 36% 증액됐다고 할 수 있다.
야당 시절 더불어민주당이 ‘눈먼 돈’이라고 지적했던 국정원의 ‘비공식 예산’이 ‘문재인 5년’ 동안 증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안보비는 왜 또 그렇게 늘었을까. 문재인 정부 당시에는 전임 정부 때와 달리 북한과의 ‘이벤트’가 다수 있었다는 점 말고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그 무슨 특별한 사유가 급증해 용처를 밝히지 않는 예산을 증액하고, 더 썼을까.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재인의 ‘이중잣대’
‘공군 여중사 성폭력 사건’에는 분노하며 엄정 수사를 지시한 문 전 대통령은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등 자기 진영 인사들의 ‘권력형 성폭력’에는 침묵했다. 사진=뉴시스
2021년 5월 21일,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여성 부사관 이모 중사가 남성 상관 장모 중사로부터 수회 성추행을 당해 이 사실을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묵살되고, 2차 가해까지 당하자 혼인신고를 한 날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3일, “절망스러웠을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 그는 또 “피해 신고 이후 부대 내 처리, 상급자와 동료들의 2차 가해, 피해호소 묵살, 사망 이후 조치 미흡 등에 대해 엄정한 수사와 조치가 있어야 한다”며 “이 문제를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서만 보지 말고, 최고 상급자까지 보고와 조치 과정을 포함한 지휘체계 문제도 살펴보고 엄중하게 처리하라”고 주문했다. 이는 ‘군 통수권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조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전 발생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와 그 언행이 매우 달라서 이 역시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았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상대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연루된 성범죄 사건과 유사하다. 참고로, 안 전 지사는 징역 3년 6개월을 살았고, 오 전 시장은 징역 3년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박 전 시장은 2020년 7월 9일, ‘성폭력 가해자’로 피소된 다음 날 자살했다. 이들 세 사람의 경우 모두 그 지휘하에 있는 여직원이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지만,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박 전 시장의 경우에는 여당이 조직적으로 피해자를 향해 ‘피해 호소인’ 운운했다. 서울시는 시민 세금을 들여 ‘서울특별시장(葬)’으로 ‘박원순 장례식’을 치렀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 명의의 조화를 장례식장에 보내고, 노영민 비서실장이 조문했다. ‘문재인 청와대’에서 대변인을 했던 강민석씨에 따르면 당시 문 전 대통령은 ‘박원순 자살’과 관련해서 “(피해자에게) 목숨으로 책임진 건데 조문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비판해도 조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모진의 만류에 따라 조문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한 이의 장례식을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조문하는 장면을 피해자가 봤다면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대통령 조화가 들어가고 비서실장이 대신 조문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받았을 ‘심리적 압박’과 ‘충격’은 어땠을까.
尹의 ‘집무실 이전’ 비판한 文의 ‘과거’
문 전 대통령은 자신도 2회에 걸쳐 ‘집무실 이전’ 공약을 내놨으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 이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혔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민이 ‘정권 교체’를 선택해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시킨 뒤에도 그 특유의 ‘내로남불’적 행태를 이어나갔다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그 사례 역시 차고 넘치지만, 대표적으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의 행태를 꼽을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2년과 2017년 대선 당시 ‘광화문 대통령’을 표방했다.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했다. 특히 2017년 대선 때는 “불의와 불통의 대통령 시대를 끝내고 국민 속에서 국민들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퇴근길에 남대문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소주 한 잔 나눌 수 있는 대통령, 친구 같고 이웃 같은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호, 의전 문제 탓에 광화문 대통령 집무실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조언을 경시한 채 “청와대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돌려 드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대선 때 두 번이나 국민 앞에 얘기한 소위 ‘광화문 대통령’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과 이를 위한 협조 요청에 대해서는 퇴임을 앞두고 JTBC와의 인터뷰(4월 26일)에서 “집무실을 옮기는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인데 어디가 적절한지 등을 두고 여론수렴도 해보지 않았다”고 훈수를 뒀다. 자신은 ‘광화문 대통령’ 공약을 할 때, 해당 공약을 밀어붙일 때, 공약을 철회할 때 여론을 수렴한 것처럼 얘기했다. 또 그는 “우리 안보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정권교체기에 ‘3월 말까지 국방부 나가라, 방 빼라’ ‘우리는 5월 10일부터 업무 시작하겠다’ 이런 식의 일 추진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 달 29일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대통령 집무실 이전 반대 청원에 직접 답하겠다며 나와서 “개인적으로 청원 내용에 공감한다”며 “큰 비용을 들여 광화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꼭 이전해야 하는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재인 5년’을 겪지 않았거나, 국내 사정에 어두운 이들이 들었다면 문재인 정부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재정을 건전하게 운용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토론 없이 밀어붙이면서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무척 모순적이라고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문재인표 내로남불’의 원인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1년 6월 3일,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밥을 먹으면서 “성과 많은데 내로남불 프레임에 갇혀 안 보인다”며 “부정적 프레임이 성과를 덮어버리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는 문 전 대통령이 당시 야권 또는 문재인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들의 ‘내로남불’ 비판을 ‘합리적이고 타당한 지적’이 아니라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 전 대통령은 또 퇴임 직전 JTBC와의 인터뷰에서 “저쪽의 문제는 보다 가볍게 넘기고 이쪽은(여당은) 보다 적은 문제가 훨씬 더 부각되는 그런 이중잣대가 한편으론 문제라고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편파적인 평가 기준 탓에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내로남불’이란 소리를 듣는다는 식의 불만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문 전 대통령은 마치 다른 이들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이들을 훈계하는 듯한 언행을 자주 했다. 이는 단순한 인상 평가가 아니다. 문 전 대통령은 “가톨릭의 가치가 평생 내 삶의 바탕을 이루었고,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높은 윤리의식을 지킬 수 있었다(2021년 6월 15일)”고 주장했다. 이를 감안하면, 앞서 살핀 ‘문재인의 내로남불’적 행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2022년 4월 9일 토요일
인구 2600만 상하이 봉쇄…수십만 아사한 1948년 창춘의 기억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6회>
봉쇄와 박멸...1948년 창춘 봉쇄, 1958년 20억마리 참새 대학살 떠올라
지난 4월 5일 국제 금융 허브 상하이 지역의 전면 봉쇄가 무기한 연장되면서 세계의 촉각이 다시금 중국에 쏠리고 있다.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위드(with) 코비드” 정책으로 돌아섰는데, 중국은 “제로(zero) 코비드”를 외치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다수 국가에선 의학적 상식에 따라 결국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공존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중국은 강력한 봉쇄 작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지역에서 2600만에 달하는 거주민들이 모두 집안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보이지 않는 인민의 적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세계 최대의 대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중국공산당의 전격 방역 작전은 중국 현대사의 두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국공내전(1946-1949)이 절정이던 1948년 5월부터 5개월간 지린성 창춘(長春)시를 완벽하게 봉쇄해서 10만의 국민당군을 굴복시키고 수십만 양민까지 아사시켰던 공산당군 사령관 린뱌오(林彪, 1906-1971)의 현대판 공성전(攻城戰)과 1958년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을 동원해서 20억 마리의 참새를 박멸했다는 “참새 대학살 촌극”이다. (송재윤,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참고)
중공 중앙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진정 전 중국을 무균지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인가? 설사 중국 전역이 일시적으로 무균지대가 된다 한들 과연 며칠, 아니 몇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대체 이 활달한 전(全) 지구화의 시대에 중국은 국제사회를 향한 “개혁개방”의 문호를 다시 걸어 잠글 수 있나? 이후 신종 바이러스가 엄습할 때마다 대규모 봉쇄령을 내릴 작정인가? 상식적으로 방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50년대 이래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시진핑 “코로나와 투쟁은 인민 전쟁 총체전”...관제 언론, 연일 방역 칭송
1949년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색출해 박멸하는 정치운동이나 대규모 국책 사업에 전(全) 인민을 불러내는 총동원령을 발동시켜왔다. 인민 총동원령의 최고조는 최대 45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대약진운동(1958-1962)과 “1억1천 3백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표출되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1950-60년대와 같은 인민 총동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에도, 중공 중앙은 틈만 나면 다양한 형식의 정치운동을 쉴 새 없이 벌여왔다.
2020년 이래 시진핑 총서기는 코비드-19와의 투쟁을 “인민 전쟁 총체전”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인민 전쟁”이란 전면적 위기의 타개책으로 전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총동원하는 전시의 비상 전략을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은 바이러스에 대항한 “인민 전쟁”의 대의(大義)를 내걸고 “동태청령(動態淸零)”의 전술을 취해왔다. “동태청령”이란 역동적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검사하고,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감염자를 격리하는 방법으로 깨끗이 박멸하고 청소해서 급기야 제로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지난 2년 동안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동태청령”의 정책이 놀라운 성과를 냈다며 중국식 방역 성공을 칭송해왔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코비드-19 확진자의 누적 집계는 30만 명도 못 미치며, 그중 사망자의 총수는 4638명에 그친다. 물론 중국 측의 수치는 객관적으로 국제적 공신력이 없을뿐더러 대규모 봉쇄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피해와 인권 침해는 전면 배제된 정치선전용 통계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로 2021년 중국의 사망률은 1천 명당 7.18명으로 200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20년에 비해 2021년 16만 명이 더 많이 사망했다.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봉쇄령 때문에 기저질환자의 병원 내방이 어려워지고, 응급 치료의 실패나 의료 방치의 사례도 늘어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인민 전쟁”이 설혹 바이러스의 확산세를 둔화시켰다 해도,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중앙정부서 지방 농촌까지 486만개 공산당 기층조직을 가진 나라
제로-코비드 방역은 오직 중국과 같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일당독재의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전면 통제(total control)의 극단적 방법이다. 현재 세계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제로-코비드 방역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단 한 마디의 행정명령으로 수천만의 시민들을 가택 연금 상태로 묶어놓은 후 군사작전 펼치듯 순식간에 감염자를 색출해내는 ‘빅브라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략 일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공산당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의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무려 486만여 개의 공산당 기층조직을 잘 갖춘 탄탄한 레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둘째, 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집단주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 대다수 중국 인민은 이미 70여 년 동안 당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넷째, 정보기술 혁명의 결과 중국공산당은 최첨단의 디지털 장치를 활용하여 대민 감시와 통제의 능력을 극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은 오늘도 강력한 법적제재를 통해 반대자를 억압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정부가 공적 매체를 독점한 결과 비판적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늘날 중국의 헌법 체계가 이상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선 1978년 민주장(民主牆) 운동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개혁개방” 초기 10년의 세월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실패가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중국의 기본 체제”...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
이미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18일 강화문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지도 체제) 개혁”에서 과감하게 권력 집중을 비판하면서 당정 분리의 당위를 설파했다. 덩샤오핑이 화두를 던지자 중공 중앙의 이론가들은 본격적으로 민주 담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앙당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1980년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전면에 나섰다. 1980년 10월 14일 연설에서 후야오방은 “민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우리나라의 기본 체제”라는 과감한 테제를 던졌다.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초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후 그는 중공 중앙의 보수파들에 맞서서 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과 정치 개혁을 주도했고, 그 결과 1987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서거한 후, 4월 22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5만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요컨대 후야오방은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화두를 받아서 민주 담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그들 중 다수는 1950년대부터 중공중앙의 사상·문화·이념을 담당했던 이론가들이었다. 표면상 그들은 마르크시즘을 깊이 연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개혁개방의 정국에서 해빙의 시기가 왔을 땐 기다렸다는 듯 열성적으로 자유와 권리, 권력분립, 민주의 가치 등을 논하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말, 중공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부주임 류가이룽(廖盖隆, 1918-2001)은 공개적으로 언론의 자유, 개인의 기본권, 입법부의 독립, 정부 내 견제와 균형, 노동조합의 독립성까지 강조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공중앙 정치국의 시녀에 불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양원제의 입법기구로 재편하는 파격적인 개혁안도 제출했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다는 문혁의 극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민주의 가치를 역설했던 자생적 민주주의자였다.
<1980년 2월, 산시(山西)성 한 농촌 마을에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사진/Wang Yue>
이때쯤 중공 중앙의 학술지에 민주 관련 논문들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최고의 가치로 선양했던 레닌의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는 논문도 있었다. 가령 1980년 10월 <<철학연구>>에 실린 논문 “민주는 수단이며 목적이다”에서 후즈차오(卢之超, 1933- )는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를 권력 집중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파격적인 논변을 개진했다.
만주족 출신의 탁월한 헌법학자 위하오청(于浩成, 1925-2015)은 문혁 시절 친청 감옥에 수감되어 3년 넘게 독방에서 혹사당했던 반골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1978년에야 사면·복권되었고, 이후 군중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전제적 통치와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성에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20년 훨씬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적 장치에 관해 논할 수 있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독립 언론의 창간을 요구했다. 그는 주요 언론이 모두 당에 장악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점이 종식되지 않고선 자유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그는 1989년 톈안먼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당적을 박탈당했다.
이들 외에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서 투쟁을 이어갔던 난징대학 교수 출신의 궈뤄지(郭羅基, 1932- )와 언론인이자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 역시 1980년 이래 맹활약을 펼쳐지는데, 이 두 사람의 빛나는 투쟁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다루기로 한다.
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에 민주, 언론 독립, 자유와 권리, 삼권분립, 입헌주의를 주장했던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은 이후 10년의 세월을 거쳐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는 바로 그들의 육성을 억누르고 굴러가는 반민주적 일당독재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2022년 4월 6일 수요일
58년 記者’ 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송의달이 만난 사람]
‘제66회 신문의 날 ‘특별인터뷰...김대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 5월 하순 쓴 光州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 회한 남아”
김대중(金大中) 칼럼니스트는 한국 언론계의 ‘살아있는 전설(傳說·legend)’이다. 3주 단위로 그의 칼럼이 실릴 때마다, 그는 한국 최고령·최장수 칼럼니스트 기록을 경신(更新)하고 있다. 1965년 6월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55년간 조선일보 한 곳에서만 일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2020년 3월31일 고문(顧問)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조선일보에 <김대중 칼럼>을 계속 쓰고 있다. 격주隔週)이던 간격이 한 주 늘었을 뿐이다. 1939년생으로 올해 83세의 ‘58년차 기자(記者)’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고령(高齡)의 현역 기자들이 많은 미국에서 조차 ‘김대중’의 경륜을 능가하는 이는 없다.
◇‘칼럼 쓰는 83세 기자’...세계 언론史 기록
일례로 ‘미국 신문계의 대부(代父)’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1889~1971)은 82세에, 뉴욕타임스(NYT) 편집인·부사장을 지낸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1909~1995)은 80세에 퇴장했다. 그러나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글은 지금도 당당한 직필(直筆)의 맛과 굵은 선(線), 독창적인 관점(觀點)으로 특유의 매력(魅力)을 발산하고 있다.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1960년 2월15일자
2022년 3월 23일 수요일
우크라 전쟁, 유라시아 제국…푸틴의 망상 부추긴 ‘푸틴의 브레인’
‘올해 60세 알렉산드르 두긴의 유라시아 구상: 중국은 해체돼야 …러시아의 극동 파트너는 일본
이철민 선임기자
러시아의 무리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달이 되면서, 애초 201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반도 침공과 동부 돈바스 지역의 사실상 병합을 부추겼던 러시아의 정치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60)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두긴은 1997년 600쪽에 달하는 ‘”지정학의 기초: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라는 책을 냈다. 더블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제국의 건설을 꿈꾸는 두긴의 생각은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정치엘리트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 책과 평소 지론을 통해, 영국을 유럽연합(EU)에서 떼어내야 하며,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는 극도로 위험하고, 독일의 러시아 자원 의존도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또 미국의 인종∙종교적 분열을 부추기고 고립주의 성향을 촉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실제로 지난 20년간 푸틴의 국제정치 ‘각본’이 됐다.
그래서 과장됐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두긴은 이후 ‘푸틴의 브레인’으로 불렸다. 일각에선 반대로 푸틴의 ‘라스푸틴(제정 러시아 말기의 황당한 궁정 예언가)’라고 비꼬기도 한다.
푸틴의 철학가, 브레인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두긴(왼쪽). 그러나 일각에선 그를 제정 러시아 말기에 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폭정을 일삼은 황당한 예언가 그레고리 라스푸틴(오른쪽)에 빗대기도 한다./위키피디아
두긴의 ‘유라시아 구상’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할이다. 러시아∙중국의 외견상 ‘밀월(蜜月)’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긴은 중국은 러시아의 유라시아 제국을 위해 결국 ‘해체’돼야 하며, 극동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주니어 파트너는 일본이라고 봤다.
◇소련 해체 후 새로운 이념 찾아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새로운 이념에 목말랐다. 1996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20세기 러시아를 보면, 왕조주의∙전체주의∙페레스트로이카∙민주화를 밟았고 각 단계마다 이념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때 러시아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한 일군(一群)의 학자들은 ‘러시아의 이름으로 합의’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러시아의 과거 ‘영광’을 되찾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라는 러시아 전통에서 답을 찾았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1999년 12월31일 대통령 직무대행이 된 푸틴은 이 ‘러시아의 이름으로 합의’에 속한 학자들과 연을 맺었다. 그에겐 러시아 경제와 정치체제의 안정화라는 급선무가 있었다. 때마침 고(高)유가의 도움으로 경제는 살아났고, 2000년대말 푸틴은 옐친이 애초 찾았던 ‘러스키야 이데야(러시아의 사상)’의 문제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푸틴은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라는 기존의 틀이 아니라, 러시아 고유의 법칙과 도덕성을 통해 부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회와 결탁했고, 동성애를 범죄화하고 서방의 자유주의 성향을 배격했다.
러시아의 이러한 보수주의는 서방의 보수주의와는 정반대였다. 국가 권력을 옹호하고 개인은 국가에 복종∙봉사해야 한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이었다. 애초 1920년대 러시아의 망명 지식인들이 불을 피웠고, 두긴이 되살린 신(新)유라시아주의와 맞아 떨어졌다.
◇볼셰비키 혁명의 망명자들이 ‘유라시아주의’ 펼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유럽 문명의 지진아’로 보는 서구화주의자들이나, 러시아 전체를 계급투쟁을 통해 개조하려는 볼셰비키주의자 모두 배격했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를 비롯한 이들 지식인은 “러시아는 고유의 발전 경로와 역사적 사명을 지닌 나라로서, 유럽∙아시아 양쪽의 기질을 갖춘 새로운 문명과 권력의 핵(核)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는 궁극적으로 몰락하며, 러시아가 세계의 대표 국가가 되는 때가 온다고 믿었다.
1921년 이들은 ‘동방으로의 탈출(Exodus to the East)’이라는 이념집을 냈다. 이 책에 따르면, 러시아 지배자는 영토 확보의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변경의 위험한 인구∙민족은 동화시켜야 하며, 지도자는 반드시 제국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나 개방 경제, 지방 정부, 세속적 자유는 매우 위험하고 수용할 수 없었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의 모델은 징키스칸
따라서 이들 망명 지식인에게, 18세기 러시아 제국을 세우고도 서구화하려고 했던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역적’이었다. 오히려 칭키스칸 제국이 러시아에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이며, 피라미드식 복종과 통제 체제라는 교훈을 제공했다.
이 유라시아 주의는 1990년대말 러시아의 새로운 이념을 찾는 캠페인에서 다시 부각됐다. 푸틴과 같은 ‘애국주의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두긴의 등장: 세계는 로마(러시아)와 카르타고(영국∙미국)과의 싸움
알렉산드르 두긴은 1991년 ‘대륙들간 전쟁‘이란 팜플렛을 내 유명세를 얻었다. 두긴에게 세계는 두 글로벌 파워의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한 편은 국가주의∙공동체∙이상주의∙바다 문명∙공동선(善)을 우선하는 ‘영원한 로마’이고, 다른 편은 개인주의∙무역∙물질주의에 기초한 ‘영원한 카르타고’였다.
‘영원한 로마’ 러시아와 ‘영원한 카르타고’ 미국∙영국 사이에 공존(共存)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선, 개인의 욕구와 필요를 다수와 국가 주도 경제, 준(準)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회 가치에 복종시키는 보수적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야 한다.
푸틴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두긴이 1997년에 낸 책 '지정학적 기초'의 표지. 두긴은 이 책에서 "중국은 가능한 한 최대로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말 그는 러시아 전체 극우 진영의 지적 지도자가 된다. 1997년 그가 낸 책 ‘지정학의 기초: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는 러시아 군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두긴, 1920년대 유라시아주의를 흡수 발전시켜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자들처럼 두긴도 기본적으로 서구∙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전체주의∙이상주의∙사회적 전통을 주창한다.
그러나 두긴의 신(新)유라시아주의는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보다 범위가 훨씬 크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는 동쪽의 만리장성에서 서쪽의 카르파티아 산맥(루마니아-폴란드)에 그쳤다. 두긴이 꿈꾸는 유라시아 제국은 구(舊)소련 국가들을 품고, 지금의 EU(유럽연합) 국가들은 이 제국의 보호령이 된다. 동쪽으로는 만주∙신장∙티베트∙몽골까지, 남서쪽으로는 인도양에 닿는다.
두긴의 이 세계관에서 미국은 “서로 다른 형질이 하나의 생물체에 사는 괴물(chimera) 같은 존재로, 이식(移植)된 문화를 가진 주제에 타(他)대륙에 반(反)인종적∙반(反)전통적 바벨론과 같은 모델을 강요하는” 최대 적(敵)이다.
◇푸틴의 사상적 자산으로 떠올라
점차 독재자로 변모해 간 푸틴에게 두긴의 사상은 적절한 역사∙지정학적 배경을 제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정책 목표를 위해 두긴의 생각을 차용했다. 두긴은 크렘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TV에 단골로 출연하며 푸틴의 맹방이 됐다.
두긴은 러시아가 ‘대국’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선 개인의 자유 제한, ‘전통적’ 가족 중시, 동성애 반대, 러시아 정교회의 중요성을 필수적으로 본 푸틴의 생각을 대중화했다.
◇우크라이나 침략의 이론 제공
두긴은 2014년 푸틴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동부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환영하고 기대하며 ‘제발 와달라’고 요청한다”고 썼다. 당시엔 러시아인의 65%가 푸틴의 침공을 지지했다.
두긴은 또 ‘지정학의 기초’에서 “영토적 야망을 가진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전체에 막대한 위험이 된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대륙 정치를 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썼다. 이에 앞서, 1920년대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를 주장한 트루베츠코이도 1927년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은 러시아인과 러시아정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했다.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푸틴이 행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와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연설은 바로 이 ‘지정학의 기초’에서 온 것이었다.
◇지난 20년간 두긴의 ‘각본’대로 움직인 푸틴
러시아는 지난 20년간 그의 각본대로 움직였다.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트럼프 시대에 더욱 두드러진 미국의 인종∙종교적 갈등과 국제적 고립주의, 나토 분열, 영국 내부의 독립주의 성향 고조, 석유∙가스∙곡물을 통한 서부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등 국제정치는 의도했든 안했든, 두긴이 주장한 대로 흘러갔다. 최소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는 그랬다.
◇우크라이나 이후 푸틴의 수순은?
두긴의 큰 꿈은 대(大)유라시아 제국의 건설이다. 두긴은 유럽이 결국 독일과 러시아 영향력 관할(zone)로 나뉘고, 러시아 자원에 의존하는 독일보다는 러시아가 더 큰 주도권을 쥘 것으로 봤다. 영국이 해체되면서, 러시아의 유라시아 제국은 더블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다.
물론 ‘정상적인’ 사고로 볼 때, 이는 과대망상이다. 그러나 시진핑도 주목할 대목이 있다. 두긴에 따르면,중국은 궁극적으로 해체돼야 한다. 러시아의 아시아 야망은 “중국의 영토적 분해, 조각내기, 정치 행정적 분할”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후 러시아의 극동 파트너는 일본이 된다.
워싱턴포스트는 22일 두긴의 제국주의 세계관을 재조명하면서 “망상(delusion)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망상도 (푸틴 같은) 폭군들이 수용하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했다.
조선일보 2022.3.24.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프랑스 최고 지성 파스칼 브뤼크네르 “삶은 터무니없는 은총, 늙을수록 더 사랑하라”
파스칼 브뤼크네르 소설가 겸 철학자 프랑스 소르본대 철학과, 현 그라세 출판사 편집인, 현 ‘르 몽드’ 칼럼니스트, 전 파리 정치대 교수, 전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초청교수, ‘순진함의 유혹’ 저자 사진 ⓒJF PAGA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인터뷰 책을 썼던 터라,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 약진하는 이 프랑스 지성의 작품이 몹시 궁금했다. 동서양의 지혜는 이토록 다르게 생동했다. 이어령 선생이 정오의 분수처럼 죽음을 생의 한가운데로 초대해 감각하고 사유했다면, 브뤼크네르는 사랑과 일을 노년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여 임종 전까지 ‘욕망할 것’을 권고한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엄숙한 생명의 질서만큼이나 ‘젊은이도 늙은이도 욕망 앞에 평등하다’는 브뤼크네르의 선언은 정신이 얼얼할 만큼 센세이셔널(sensational) 했다.
에로스와 디오니소스의 충동으로 가득 찬 당대의 철학자는 말한다. ‘살아있으려면 사랑하라’고. ‘노년에 욕망이 감퇴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고령에도 통찰력과 푸릇푸릇한 정신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분별력의 대가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어쩌면 우리는 고령화에 대한 담론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74세의 파스칼 브뤼크네르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그는 르노도상과 메디치상, 몽테뉴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고 파리정치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나이듦’이라는 주제를 전하기 위해 따로 준비가 필요했나.
“‘노년’이라는 주제 자체가 대단한 힘과 매력을 갖고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문구를 첫 번째로 쓸 것인가였다. ‘포기를 포기하라!’ 이 첫 문구를 골라서 쓰는 그 순간, 글 전체의 톤이 정해진다. 좋은 아이디어란 식탁보의 실과 같다. 실 하나를 당기면 식탁보 전체의 올이 풀린다.”
프랑스는 ‘노년’에 관한 철학적 유서가 깊은 듯하다. 몽테뉴, 파스칼, 시몬느 드 보부아르에서 이어진 ‘노화에 관한 사유’가 칼칼하더라.
“고통, 노화 그리고 죽음이라는 문제를 성찰하는 프랑스 사상가들의 문학적 전통이 있다.”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라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세 시대의 중간 지점인 50대만의 생물학적 화학적 신비가 있을까.
“오십 세라는 좌표는 하나의 이정표다. 은총과 붕괴 사이에서 파도를 타는 나이다. 더 높은 것을 꿈꾸고, 더 멀리 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건강한 상태지만, 노화의 첫 징후도 나타난다. 특이한 건 오십 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 짧아지기 시작한다. 오십이 넘었다면 당신은 이미 사랑, 가족, 직업 등에서 많은 의무를 치렀고 시니어로 불릴 것이다. 그때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여전히 또 다른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다행히 오십 이후에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30여 년이 더 있다. 남은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할까. 그것은 각자에게 위대한 과제고, 그래서 우리는 단지 늙어가는 것만으로 자기 인생의 철학자가 된다. 적어도 오십 년은 지나야 ‘되어야 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생이 자기 앞에 펼쳐진다.”
이미 절반이 지났는데, 도전은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 아닌가.
“에너지를 쓰는 게 곧 삶이다. 여러분은 10년을 주기로 자신을 거침없이 재구축해야 한다. 50, 60, 70, 80⋯ 숫자가 바뀔 때마다 안주하지 말고, 위험을 무릅써도 된다. 자기로 사는 편안함과 자기일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인지해야, ‘나’로 살 수 있다. 만약 도전할 에너지가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반짝거림을 잃어가는 중이다. 죽기도 전에 사라질 이유가 있나?”
최근에 나는 한국의 지성을 인터뷰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라스트 인터뷰다. 그는 컵을 육체, 그 안에 담긴 물을 욕망과 마인드, 컵 안의 빈 곳을 영혼으로 설명했다. ‘욕망의 역동성’에 큰 가치를 두는 당신에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다가가나.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답을 하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당신이 지나갈 때 문이 저절로 닫히는 어두운 복도를 걷는 것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두 개의 문을 최대한 늦게까지 열어 두는 것이다. 바로 그 문이 욕망의 변화구다.”
시간이 주인공인 이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는 없나.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성 안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 사람의 평생은 새벽과 아침, 정오와 황혼이라는 하루의 여정과 유사하다. 인생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한 해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매일 아침 우리는 태양을 선물로 받는다. 여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거나 빠르게 걸을 때,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내가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 맞서 싸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살아있으려면 사랑을 나누라. 미끄러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행복한 순간은 항상 ‘앙코르’를 원한다. 반복이 시간의 기약이고, 우리가 좋은 환상에 몰두할 수 있는 동안은 소망이 있다. 100세 노인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내일을 말한다. 그러니 죽음보다 지금의 삶에 더 집중하라. 우리는 내일 깨어날 테고, 내년에도 새해 인사를 나눌 거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메멘토 모리만큼 인생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제껏 철학은 죽음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간단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왜 우리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죽음이라는 암울한 시각으로 망쳐야 하는 걸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플라톤이나 몽테뉴가 말했듯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대해 배우는 거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교과 과목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결국 100% 죽게 돼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뛰어난 성적으로 통과하게 될 유일한 시험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는 것이다.”
‘죽음을 알면 삶을 알게 된다’라는 명제가 삶의 생기를 억누른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앞서 말했듯, 메멘토 모리의 폐해는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해로운 독으로 파괴한다는 거다.”
‘죽음을 가정할 때 일상은 더 농밀해진다’는 동양 현자의 말도 ‘죽음의 환기는 생이라는 축제를 망칠 뿐’이라는 서양 현자의 말도 다 일리가 있다. 그 차이는 ‘생명을 어떻게 감각하느냐’에 있는 듯했다. 생명을 생육과 번성으로 보느냐, 사랑과 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간은 영원이 되기도 하고 순간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나이 들수록 반복하는 날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사계절을 맞는다. 줄거리를 알면서도 같은 기대, 같은 전율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 반복 속에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제 각자의 미세한 파동을 만들어간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시시한 일상 ‘루틴’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한다. 반복은 불모성과 생산성의 양가적 힘이 있다고. 반복의 영성을 지닌 성실한 사람들, ‘바른 생활 루틴이’라는 별명을 지닌 요즘 세대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통찰이다.
프랑스 소설가 겸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 사진 ⓒJF PAGA프랑스 소설가 겸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 사진 ⓒJF PAGA
반복을 ‘정체된 전진’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자리로 계속 파고들어 가야만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다고. 특별히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반복’이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
“반복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끔찍한 루틴 또 하나는 정반대로 인생을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다. 물론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때문에 우리 삶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첫 번째 반복이 지속했었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반복은 숨은 재능을 찾게 해준다. 자신을 흉내 내는 과정에서 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프루스트도 고유한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자기를 베끼고 또 베끼면서 천재성을 갈고 닦았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발견했다.”
자기 쇄신의 시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당신만의 하루 루틴이 있나.
“가장 중요한 루틴은 피아노를 치고 운동을 하는 거다. 그 루틴으로 나를 충전하고, 다른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든다.”
‘일, 참여, 공부’ 이 세 가지가 우리를 맥없는 시간에서 구원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나이 들수록 우리는 일을 통해 공동체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소속감도 매우 중요하다. 공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닫게 하는 ‘자기 구제’의 핵심이다. 일, 참여, 공부⋯ 이 세 가지를 통해 삶은 단시간 내에 충만해질 수 있다.”
모든 것에서 찬란함을 재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면, 선생은 노인과 어린아이 중 어떤 시기를 택해 살고 싶은가.
“노인의 지혜를 가진 어린아이로 살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유년은 실제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기질이다. 다시 젊어지진 못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하면 굳어버린 삶에 맞서서 경탄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늙은이에게 꼭 필요한 것은 또 무엇인가.
“사랑, 건강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욕망.”
책과 친구와 여행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나.
“우선적으로 책을 선택하겠다. 그다음이 친구와 여행 가는 것이다.”
물려받은 재능 중 어떤 것이 감사한가.
“성실함, 책과 예술에 대한 호기심, 겸손함과 존경심을 물려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했고,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당연히 받았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이 엔딩 문장에 감동받았다. 이 소박하고 강렬한 결론은 어떻게 나왔나.
“완벽한 구조는 절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반복과 노력, 유사한 문장들이 있었다.”
선생의 바람대로, 우리 세대는 ‘평화롭고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행복한 노화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대신 놀라움과 발견의 연장선상에서 역동적이고 요란스럽고 또 풍족해야 한다. 평화란 RIP(Rest In Peace)란 유명한 어구처럼 제일 마지막에 찾아올 거니까.”
마지막으로 언젠가 당신의 묘비에 새길 문장을 말해달라.
“나는 인생을 사랑했고, 인생은 나에게 백배로 갚아줬다(I loved life, it rewarded me a hundredfold).”
2022년 2월 27일 일요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 내가 받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
"죽음 알기 위해 거꾸로… 유언같은 '탄생' 써내려가"
"촛불 꺼지기 전 한번 환하게 타올라, 그것은 신의 은총"
"나중 된 자 먼저 돼,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딸 좇아"
"괴테처럼… 인간과 학문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로"
이어령 전 장관(87세). 생의 마지막 시간을 치열하게 쓰고 있다.
"이번 만남이 아마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
이어령 선생이 비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주에 보기로 했던 약속이 컨디션이 안 좋아 일주일 연기된 터. 안색이 좋아 보이신다고 하자 "피에로는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운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품위 있게 빗어넘긴 백발, 여전히 호기심의 우물이 찰랑대는 검은 눈동자, 터틀넥과 모직 슈트가 잘 어울리는 기개 넘치는 한 어른을 보며 나는 벅참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달리는 자가 이어령이었다.
그가 쏟아낸 말은 과거를 달릴 때나 미래를 달릴 때나 주저가 없었다. 스킵(skip)과 시프트(shift), 축지법과 공중부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선생과 앉아 인터뷰하던 서재는 늘 ‘매트릭스’나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의 세트처럼 느껴지곤 했다.
오늘 마주 앉은 방엔 책 한 권, 서가 한 칸 없이 고적했다.
기품이 넘치는 이태리산 적갈색 책상과 의자 한 벌. 한 면을 가득 채운 녹색 벽엔 선생과 교류했으나 먼저 세상을 뜬 세계의 지성들이 보내온 편지와 사진,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루이제 린저, 이오네스코, 누보리얼리즘의 창시자 알랭 로브그리예, 노벨문학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 등등. 선생은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그들과의 인연을 즐겁게 회상했다.
한국의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어령. 22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유명 인사가 이후, 65년간 때로는 번뜩이는 광야의 언어로 때로는 천둥 같은 인식의 스파크로 시야의 조망을 터주었던 언어의 거인. 벼랑 끝에서도 늘 우물 찾는 기쁨을 목격하게 해준 우리 시대의 어른.
십수 년 전 이미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라는 아름다운 미래문명을 선창한 분임에도, 당신이 제일 잘한 일은 문화부 장관 시절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했다.
오늘 선생 앞에 앉아 있으니, 갑자기 아득하여 88올림픽 개막식에서 그가 연출했던 잠실벌의 굴렁쇠 소년이 생각났다. 햇빛 내리쬐는 광장에 쓰였던 한 줄 정적의 시. 가을비가 대지를 적시는 오늘, 나는 그에게서, ‘죽음'이라는 한 편의 시를 듣게 될 터였다.
그는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책을 쓰고, 강연하고, 죽음까지 기록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머지 않아 ‘탄생'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 인터뷰로 가까운 이들에게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사진 촬영을 할 땐 "씽킹맨(Thinking Man)은 웃지 않는다"고 겁을 주더니, 인터뷰 내내 "쫄지 마!"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의 말 속에서 과거의 탄생과 미래의 죽음이 만났고, 그렇게 그의 주례로 ‘아름다워진’ 현재가 탄생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 보여요." "건강해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겐 관심이 없어요. 허허. 왜 머리 깎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허허."
남겨진 생의 시간이 유한하여, 나는 선생께서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듣고 싶었다. 토씨 하나, 한숨 한 자락이라도 놓치기 싫어 "예전처럼 자유롭게 대화하자"고 부탁드렸다.
-혼자 기다리며 녹색 벽에서 선생께서 젊은 시절에 신문에 쓰신 ‘모리악의 기침 소리'를 보았습니다.
"(미소지으며)내가 프랑스에서 모리악 선생을 만나고 쓴 거지. 여기엔 없지만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추억도 있어요. 그때 그분이 여든이 좀 넘었을 때야. 생각해보면 지금 나보다 젊었는데 아파트 계단을 못 올라가셨어요. 내가 등에 업히라고 했더니 화를 내요. 나는 시체가 아니라고(웃음). 서양 문화는 부축은 받아도, 업히는 건 수치로 여겨요. 한국은 다르지. 상호성이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봐도 처음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업고 업혀서 냇물을 건너잖아. 사위가 장모를 업고 사장이 사원을 업어줘요. 다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이 있거든."
-업어준다는 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준다는 건데… 서양인에겐 익숙지 않은 경험이군요.
"그들은 아이를 요람에서 키우니까.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분리하지요. 땅에 놓으면 쥐들이 공격해서 아이를 천장에 매달아 두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포대기로 싸서 둘러업잖아. 어미 등에 붙어 커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성이 착해요(웃음). 서양은 분리가 트라우마가 돼서 독립적인 만큼 공격적이거든. 한국의 전통 육아는 얼마나 슬기로워요. 오줌똥도 쉬쉬~, 끙아끙아~ 하면서 어린애 말로 다 유도를 했거든."
-요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뵐 때 ‘마지막 파는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가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한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온 얘기죠. 살아 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가령 이런 거예요.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 거라.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1982년, 이어령은 일본인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명명하며, 섬나라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경종을 울렸다. 그 책은 일본에서 출간 5개월 만에 12만 부가 판매되었다.
-어디서 힌트를 찾으셨나요?
"죽을 때 뭐라고 해요?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인 건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2~3억 마리의 정자의 레이스를 통해서 내가 왔어요. 수능 시험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거지(웃음). 그런데 그 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 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요.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들어요."
-죽음을 느끼면서 태어남 이전을 복기한다? 엄청난 속도의 플래시백인데요. 뇌에서 빅뱅이 일어났겠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모험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있어요. 진화론자의 의견에 비추어보면 내 존재는 36억 년 원시의 바닷가에서 시작됐어요. 어찌 보면 과학은 환상적인 시야. 내가 과거 물고기였을까, 양수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아 형성 과정을 보면 아가미도 물갈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거든. 그렇게 계산하면 내 나이는 사실 36억 플러스 여든일곱 살이야. 엄청난 시간을 산 거죠.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과거로 가서 미래를 본다는 설명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이어령이다. 평생 창조적 역발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물처럼 안겨준 사람.
-선생은 오래전에 이미 ‘디지로그가 온다'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예언하셨어요. 미지의 죽음을 탄생의 신비로 푸니, 이번엔 또 뭐가 보이던가요?
"난 옛날부터 참 궁금했어요. 왜 외갓집에만 가면 가슴이 뛸까? 왜 외갓집 감나무는 열린 감조차 더 달고 시원할까(웃음)? 그게 미토콘드리아는 외가의 혈통으로만 이어져서 그래요. 거슬러 가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깨 벌어진 외할머니한테서 내가 왔는지도 몰라. 허허. 이렇게 한발 한발 가면서 느껴지는 게 신의 존재예요. 최초의 빅뱅은 천지창조였구나…"
과학을 잘 모르면 무신론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알면 신의 질서를 만난다고 했다. 죽음이 아닌 탄생을 연구하면서 선생은 점점 더 자신만만해졌다. 말하는 중간에 '쫄지 마'라는 악센트를 농담처럼 박아넣었다.
"탄생을 연구하면 무섭지가 않아. 지적으로도 그래요. 아리스토텔레스 나와보라, 그래. 너는 생명을 알고 썼냐? 나는 이제 안다, 이거지(웃음)."
웅장한 지성.
-그런데 요즘엔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안 태어나는 게 행복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이렇게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건 무의미해.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
나야말로 젊을 때 저항의 문학이다, 우상의 파괴다, 해서 부수고 무너뜨리는 데 힘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그 놀라움의 힘으로 또 무엇을 보셨나요?
"생명은 입이에요. 태내에서도 생명은 모든 신경이 입으로 쏠려 있어요. 태어난 후엔 그 입으로 있는 힘껏 젖을 빨지요. 그 입술을 비벼 첫 소리를 내요. "므, 브…" 가벼운 입술 소리 ㅁ으로 ‘엄마, 물’을, 무거운 입술소리 ㅂ으로 ‘아빠, 불’을 뱉어요. 물은 맑고 불은 밝잖아. 그런데 그 ㅁ과 ㅂ이 기가 막힌 대응을 이루는 게 바로 우리 한글이에요. water와 fire로는 상상도 못할 과학이야. 놀랍죠."
어떤 주제든 언어로 시작해서 언어로 끝난다는 게 더 놀라웠다.
-프로이트도 구강기를 정신분석의 첫 단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프로이트는 뱃속 세계를 몰랐어요. 태어난 후부터 트라우마를 적용했는데, 기실 태아 때 더 많은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걸 그는 몰랐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의 후손 중 많은 사람이 폐소 공포증을 앓았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전은 내 조상의 정확한 이력서예요.
동양의 탄생학과 서양의 유전학은 동시에 말하고 있어요.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스승이 10년 가르친 게 뱃속에서 가르친 10개월만 못하다잖아. 그래서 지혜로운 한국인은 태중의 아이를 이미 한 살로 보는 거예요."
그 사실을 프로이트가, 칸트가, 헤겔이 알았겠느냐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가슴뼈가 커지는 화통한 웃음에 공기 틈이 시원하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쫄지 마!' 허허. 알고 보면 프로이트는 돌팔이였어요. ‘우상의 추락’이라는 책에도 있잖아. 다만 인간의 에고를 구조적으로 봤다는 데 의의를 두는 거죠. 인격은 다층적이라 의학뿐 아니라 인문학자의 상상력으로도 봐야 해요."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했지요. 선생은 인격의 핵심을 뭐라고 보십니까?
"하하. 핵심은 인격과 신격은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흉내 내기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고 했던 괴테가 그 인간다움으로 구제를 받았어요. 나는 유다가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봐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다는 교회가 아니라 피의 밭을 남겼어요.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유다에 가까워서 더욱 신격을 욕망해요. 그래서 고통스럽죠.
내 마음의 빅뱅을 그 누가 알겠어요? 한 소녀가 "이 남자와 헤어질까요?"라고 물으면 아인슈타인이 뭐라고 할까? 그는 물리적 상대성 이론의 대가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몰라요. 각자의 마음은, 두뇌는 지구에서 하나예요. 기술로 찍어낸 벽돌이 아니거든. 내 몸의 지문도 마음의 지문도 세상에 하나뿐이지. 하나님의 유일한 도장이야. 내 마음의 지문에는 신의 지문이 남아있어요."
-요즘 들어 신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할 지식도 자격도 없는 자들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나 유다나 똑같아. 베드로도 유다처럼 닭이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부정했잖아. 오래 관찰하면 알아요.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요.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또 하나. 살아있는 것은 공평하게 다 죽잖아."
-왠지 선생의 유니크함은 탄생부터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내 유니크함의 80%는 어머니가 주셨어요. 내가 돌상에서 돌잡이로 책을 잡은 걸,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뻐하셨어. 그때는 쌀이나 돈을 잡아야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달랐죠. "우리 애는 돌상에서 책을 잡고 붓을 잡았다"고 내내 자랑을 하셨어요. 내가 앓아누워도 어머니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셨어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나는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우는 인간이 됐어요."
-언어적 상상력은 어린 시절에 길러진 것인지요?
"그랬어요. 형님이 놓고 간 책, 대학생이 보던 한자투성이 세계문학 전집을 읽었어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상상으로 단어를 익혔어. 사전도 없었죠. 내 언어 조직의 세포가 그때 활성화된 거라. ‘눈이 내릴 때 루바시카를 입었다’는 문장을 만나면 전후 문맥으로 그 겉옷을 상상해 보는 거야. 동화만 읽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죠. 라틴어 고전도 그렇게 읽었어요.
나는 지금도 외국 여행을 가면 대실망이야. 어릴 때 소설을 읽으며 파리, 런던, 러시아를 다 상상으로 여행했어요. 내가 실제 만난 에펠탑은 내가 언어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했지. 어릴 때 어려운 책을 읽으면 상상의 언어 능력이 발화돼요. 지금도 나는 모든 문제를 어원으로 접근해요."
“처음부터 내 목숨은 빌린 거였어요. 바깥에서 저 멀리서 36억년의 시간이 쌓여 온 거죠.”
어원은 화석과 같아서 그 자신, 고고학자처럼 언어라는 화석 조각을 찾아 거대한 공룡을 그린다고 했다. 모든 게 어린 시절 독서의 힘이었다고.
-글도 그렇지만 평생 말을 하면서 살아오셨어요. 지성에 막힘이 없고, 재미까지 있는 이야기꾼으로 사랑받으셨습니다. 선생의 뇌 구조가 궁금합니다. 질문이 어떤 방식으로 입력되고 흘러나오는지요?
"하하. 나는 좌뇌 우뇌를 다 써요. 나의 최전선은 말이고 생의 의미야. 말이 나오면 언어의 전선이 형성되거든.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하다 보면 수억 개의 정보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고를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시인 이상은 좀 달랐어요. 이 사람은 수학적 언어를 썼어. 수학적 머리와 문학적 머리가 다 트였던 사람이야. 그래도 쫄지 마(웃음). 이상은 일찍 죽었잖아."
-신기합니다. 어떤 천재는 단명하고 어떤 천재는 장수하는 걸까요?
"오래 살면 생각이 계속 달라져요. 내가 존경하는 이들은 다 일찍 죽었지. 이상도, 랭보도, 예수도. 단명한 이들의 공통점은 번뜩인다는 것. 둔한 게 없어요. 면도날로 소를 잡았지. 소를 잡으려면 도끼를 써야 하는데, 이상은 날카로운 면도날로 단번에 그었어요. 반면 괴테는 80살까지 살았어요. 도끼날 같았지. 도끼로 우주를 찍어 내린 사람이었어요. 형태학, 광산학까지 했잖아.
천재는 악마적 요소가 있어요. ‘파우스트'를 봐요. 파우스트는 신학을 했던 성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사색적인 그가 한계에 부딪혀 자살하려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만, 결국 신은 그를 구원해요. 나는 서른이 지나고 모델이 없었는데, 그때 잡은 게 괴테였어. 괴테는 바이마르의 재상을 지냈죠. 그런데 나도 문화부 장관을 했잖아. 바이마르 인구보다 한국 인구가 더 많으니, 나는 괴테한테 쫄지 않아요(웃음)."
-선생이 한 말, 쓴 글, 해오신 일은 그 영역이 너무 방대해서 입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괴테도 유니버설맨이었어요(웃음). 동과 서를 알았고 성과 속을 알았고, 인공지능인 호몬클루스까지 써서 미래의 정황을 보여줬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랬죠. 코끼리의 전체를 보려면 그들처럼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해요. 코만 만지고 코끼리를 봤다고 하면 엉터리야. 그렇게 인간과 학문의 전체를 보려고 했던 르네상스맨이 다빈치와 괴테였어요. 그런데 제너럴리스트들은 종종 욕을 먹어. ‘전공이 뭐냐’는 거죠. 허허."
-전공의 구분이 없으셨지요. 언어기호학자이면서 언론인, 비평가이면서 소설가, 시인, 행정가, 크리에이터로 살아오셨어요. 최종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우물 파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는 않았어요. 미지에 대한 목마름, 도전이었어요. 여기를 파면 물이 나올까? 안 나올까? 호기심이 강했지.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어요. ‘두레박'의 갈증이지요. 한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제 그 마지막 우물인 죽음에 도달한 것이고."
-죽음의 상태에 관한 공부도 하셨습니까?
"했지요. 인간에게도 퇴화한 날개가 있어(웃음)."
-무슨 말이지요?
"새는 날짐승이잖아. 그런데 무거운 새는 못 날아요. 그때는 날개가 덮개가 되죠(웃음). 인간도 몸이 불으면 못 날아. 늙고 병들면 머리가 빠지고 이빨이 빠지고 어깨에 힘이 빠져요. 비극이지. 그런데 마이너스 셈법으로 몸이 가벼워지면 날아요. 고통을 통과해서 맑고 가벼워진 영혼은 위로 떠요. 덩컨 맥두걸이라는 학자가 실험했어요. 죽은 후 위로 떠오르는 영혼의 무게를 쟀더니 21g이었죠. 그러니 죽어갈수록 더 보태지 말고 불순물은 빼야 해요. 21g의 무게로 훨훨 날아야지요."
-평생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동양에선 덧없는 것을 꿈(夢)이라 하고 서양은 판타지를 꿈(dream)이라 하죠. 나는 평생 빨리 깨고 싶은 악몽을 꿨어요.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빠져 외길을 걷는 꿈, 어릴 때 복도에서 신발을 잃고 울던 꿈, 맨발로 갈 수 없던 공포, 뛰려면 발은 안 떨어지고, 도망가보면 아무도 없는 험한 산길이었지요. 자기 삶의 어두운 면이 비치는 게 꿈이에요. 깨면 식은땀을 흘리고 다행이다 했어요.
현실에서 눈뜨고 꾸는 내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문학적 상상력, 미지를 향한 호기심…"
-요즘엔 어떤 꿈을 꾸십니까?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꿔요.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혹은 터널 끝에 보이는 점 같은 빛. 그러나 역시 8할은 악몽이에요. 죽음이 내 곁에 누워있다 간 느낌... 시계를 보면 4시 44분 44초일 때도 있어요(웃음). 동트기 전에,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 시간이죠. 그 시간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에요. 섬뜩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라는 거였어요. 누구도 그 길에 동행하지 못하니까요. 다행히 그때 또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젊은 날 인식이 팽팽할 땐 몰랐던 것."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87년간 행복한 선물을 참 많이 받으셨지요?
"그랬죠. 산소도, 바다도, 별도, 꽃도… 공짜로 받아 큰 부를 누렸지요. 요즘엔 생일케이크가 왜 그리 그리 예뻐 보이는지 몰라. 그걸 사 가는 사람은 다 아름답게 보여(웃음). "초 열 개 주세요." "좋은 거로 주세요." 그 순간이 얼마나 고귀해. 내가 말하는 생명 자본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자기가 먹을 빵을 생일 케이크로 바꿔주는 거죠. 생일 케이크가 그렇잖아. 내가 사주면 또 남이 사주거든. 그게 기프트지. 그러려면 공감이 중요해요. 공의가 아니라, 공감이 먼저예요."
-공의보다 공감이라는 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상품 경제 시대에서 멀리 왔어요. AI시대엔 생산량이 이미 오버야. 물질이 자본이던 시대는 물 건너갔어요. 공감이 가장 큰 자본이지요. BTS를 보러 왜 서양인들이 텐트 치고 노숙을 하겠어요? 아름다운 소리를 좇아온 거죠. 그게 물건 장사한 건가? 마음 장사한 거예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즐거움, 공감이 사람을 불러모은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지금의 한국 사회는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는 시기라고.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고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썰물 후에 갯벌이 생긴다는 말이 파도처럼 가슴을 적셨다.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이어령 선생은 7년 전 2남 1녀 중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먼저 보냈다. 미국에서 검사 생활을 했던 딸은 목사 안수를 받았고, 위암 발병 이후, 수술하지 않고 시한부를 택해 열정적으로 쓰고 강연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요즘 따님 생각을 더 많이 하시겠습니다. 암 선고받은 후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는 까닭도 따님과 관련이 있는지요?
"(미소지으며)우습지만 성경에는 나중 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있어요. 내 딸이 그랬어요. 그 애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지 않았어요. "지금 나가면 3개월, 치료받으면 6개월" 선고를 듣고도 태연하니까, 도리어 의사가 놀라서 김이 빠졌어요.
민아가 4살 때였어요. 아내가 임신해서 내가 아이를 데리고 대천해수욕장 앞 해변 바라크 건물에 묵은 적이 있어요. 아이를 재우고 다른 천막에 가서 문학청년들과 신나게 떠들었지. 그때 민아가 자다 깨서 컴컴한 바다에 나가 울면서 아빠를 찾은 거야. 어린 애가 겁에 질려서...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우리 애는 기억도 안 난다지만(웃음). 그랬던 아이가 혼자 미국에 가서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그 어렵다는 법대를 조기 졸업하고 외롭게 애 키울 때, 그날 그 바닷가에서처럼 "아버지!"하고 목이 쉬도록 울 때, 그때 나의 대역을 누군가 해줬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야. 내가 못 해준 걸 신이 해줬으니 내가 갚아야겠다. 이혼하고도 편지 한 장 안 쓰던 쿨한 애가,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면 내가 믿어볼 만 하겠다, 그렇게 시작했어요.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눈도 함께 밝아진 거지. 딸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딸의 뒤를 좇고 있어요(웃음)."
따님인 고(故)이민아 목사의 대학 졸업식 사진.
-언제 신의 은총을 느낍니까?
"아프다가도 아주 건강하게 느껴지는 아침이 있어요. 내 딸도 그랬죠. "아빠, 나 다 나았어요"라고. 우리 애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어요. 1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죠. 암에 걸리고 큰 선물을 받았어요.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썼어요. 망막 수술도 성공해서 밝은 세상도 봤지요.
내가 보내준 밸런타인데이 꽃다발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호텔 방에서 "아빠, 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라며 전화가 왔어요. 육체가 소멸하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고, 기도 드리고 쓰러져서 5~6시간 있다가 운명했어요.
어떤 환자라도 그런 순간이 와요. 촛불이 꺼질 때 한번 환하게 타오르듯이. 신은 전능하지만, 병을 완치해주거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게 해주진 않아요. 다만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어요.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잖아. 그리고 이따금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요.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해요."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옛날엔 나는 약하니 욥 같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지금은…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해요. 역사적으로도 부활의 기적은 오로지 예수 한 분뿐이니까. 나의 기도는 이것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갈피를 넘기던 책, 내가 쓰던 차가운 컴퓨터… 그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어요."
그 전까지는 죽음의 의미, 생명의 기프트를 마지막까지 알고자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사형수도 형장으로 가면서 물웅덩이를 폴짝 피해 가요. 생명이 그래요. 흉악범도 죽을 때는 착하게 죽어요. 역설적으로 죽음이 구원이에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최악은 없다고. 노력하면 양파 껍질 벗겨지듯 삶에서 받은 축복이 새살을 드러낸다고. 빅뱅이 있을 때 내가 태어났고, 그 최초의 빛의 찌꺼기가 나라는 사실은 ‘수사'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여러분도 손놓고 죽지 말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고 맞으라고. "종교가 있든 없든,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기프트를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천지 차이예요."
한마디 한마디, 목구멍에서 빛을 길어 올려 토해내는 것 같았다. 녹색 칠판 앞에 앉아 선생이 마지막으로 판 우물물을 거저 받아 마시자니, 감사가 샘처럼 벅차올라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는 나이 들면 과거를 반복해서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성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지혜의 전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소지으며)창을 열면 차가워진 산소가 내 폐 속 깊숙이 들어와요. 이 한 호흡 속에 얼마나 큰 은총이 있는지 나는 느낍니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죽음의 형상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로 올지, 온갖 튜브를 휘감은 침상의 환자로 올지 나는 몰라요.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마지막에 ‘END’ 마크 대신 꽃봉오리를 하나 꽂아놓을 거라고 했다. 피어있는 꽃은 시들지만, 꽃봉오리라면 영화의 시작처럼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을테니.
"끝이란 없어요. 이어서 또 다른 영화를 트는 극장이 있을 뿐이지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