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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9일 토요일
인구 2600만 상하이 봉쇄…수십만 아사한 1948년 창춘의 기억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6회>
봉쇄와 박멸...1948년 창춘 봉쇄, 1958년 20억마리 참새 대학살 떠올라
지난 4월 5일 국제 금융 허브 상하이 지역의 전면 봉쇄가 무기한 연장되면서 세계의 촉각이 다시금 중국에 쏠리고 있다.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위드(with) 코비드” 정책으로 돌아섰는데, 중국은 “제로(zero) 코비드”를 외치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다수 국가에선 의학적 상식에 따라 결국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공존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중국은 강력한 봉쇄 작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지역에서 2600만에 달하는 거주민들이 모두 집안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보이지 않는 인민의 적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세계 최대의 대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중국공산당의 전격 방역 작전은 중국 현대사의 두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국공내전(1946-1949)이 절정이던 1948년 5월부터 5개월간 지린성 창춘(長春)시를 완벽하게 봉쇄해서 10만의 국민당군을 굴복시키고 수십만 양민까지 아사시켰던 공산당군 사령관 린뱌오(林彪, 1906-1971)의 현대판 공성전(攻城戰)과 1958년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을 동원해서 20억 마리의 참새를 박멸했다는 “참새 대학살 촌극”이다. (송재윤,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참고)
중공 중앙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진정 전 중국을 무균지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인가? 설사 중국 전역이 일시적으로 무균지대가 된다 한들 과연 며칠, 아니 몇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대체 이 활달한 전(全) 지구화의 시대에 중국은 국제사회를 향한 “개혁개방”의 문호를 다시 걸어 잠글 수 있나? 이후 신종 바이러스가 엄습할 때마다 대규모 봉쇄령을 내릴 작정인가? 상식적으로 방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50년대 이래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시진핑 “코로나와 투쟁은 인민 전쟁 총체전”...관제 언론, 연일 방역 칭송
1949년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색출해 박멸하는 정치운동이나 대규모 국책 사업에 전(全) 인민을 불러내는 총동원령을 발동시켜왔다. 인민 총동원령의 최고조는 최대 45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대약진운동(1958-1962)과 “1억1천 3백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표출되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1950-60년대와 같은 인민 총동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에도, 중공 중앙은 틈만 나면 다양한 형식의 정치운동을 쉴 새 없이 벌여왔다.
2020년 이래 시진핑 총서기는 코비드-19와의 투쟁을 “인민 전쟁 총체전”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인민 전쟁”이란 전면적 위기의 타개책으로 전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총동원하는 전시의 비상 전략을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은 바이러스에 대항한 “인민 전쟁”의 대의(大義)를 내걸고 “동태청령(動態淸零)”의 전술을 취해왔다. “동태청령”이란 역동적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검사하고,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감염자를 격리하는 방법으로 깨끗이 박멸하고 청소해서 급기야 제로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지난 2년 동안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동태청령”의 정책이 놀라운 성과를 냈다며 중국식 방역 성공을 칭송해왔다. 중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코비드-19 확진자의 누적 집계는 30만 명도 못 미치며, 그중 사망자의 총수는 4638명에 그친다. 물론 중국 측의 수치는 객관적으로 국제적 공신력이 없을뿐더러 대규모 봉쇄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피해와 인권 침해는 전면 배제된 정치선전용 통계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로 2021년 중국의 사망률은 1천 명당 7.18명으로 200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20년에 비해 2021년 16만 명이 더 많이 사망했다.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봉쇄령 때문에 기저질환자의 병원 내방이 어려워지고, 응급 치료의 실패나 의료 방치의 사례도 늘어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인민 전쟁”이 설혹 바이러스의 확산세를 둔화시켰다 해도,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중앙정부서 지방 농촌까지 486만개 공산당 기층조직을 가진 나라
제로-코비드 방역은 오직 중국과 같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일당독재의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전면 통제(total control)의 극단적 방법이다. 현재 세계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제로-코비드 방역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단 한 마디의 행정명령으로 수천만의 시민들을 가택 연금 상태로 묶어놓은 후 군사작전 펼치듯 순식간에 감염자를 색출해내는 ‘빅브라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략 일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공산당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의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무려 486만여 개의 공산당 기층조직을 잘 갖춘 탄탄한 레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둘째, 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집단주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 대다수 중국 인민은 이미 70여 년 동안 당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넷째, 정보기술 혁명의 결과 중국공산당은 최첨단의 디지털 장치를 활용하여 대민 감시와 통제의 능력을 극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은 오늘도 강력한 법적제재를 통해 반대자를 억압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정부가 공적 매체를 독점한 결과 비판적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늘날 중국의 헌법 체계가 이상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선 1978년 민주장(民主牆) 운동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개혁개방” 초기 10년의 세월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실패가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중국의 기본 체제”...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
이미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18일 강화문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지도 체제) 개혁”에서 과감하게 권력 집중을 비판하면서 당정 분리의 당위를 설파했다. 덩샤오핑이 화두를 던지자 중공 중앙의 이론가들은 본격적으로 민주 담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앙당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1980년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전면에 나섰다. 1980년 10월 14일 연설에서 후야오방은 “민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우리나라의 기본 체제”라는 과감한 테제를 던졌다.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중앙서기처의 총서기에 부임한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초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후 그는 중공 중앙의 보수파들에 맞서서 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과 정치 개혁을 주도했고, 그 결과 1987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서거한 후, 4월 22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5만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요컨대 후야오방은 19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화두를 받아서 민주 담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그들 중 다수는 1950년대부터 중공중앙의 사상·문화·이념을 담당했던 이론가들이었다. 표면상 그들은 마르크시즘을 깊이 연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개혁개방의 정국에서 해빙의 시기가 왔을 땐 기다렸다는 듯 열성적으로 자유와 권리, 권력분립, 민주의 가치 등을 논하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말, 중공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부주임 류가이룽(廖盖隆, 1918-2001)은 공개적으로 언론의 자유, 개인의 기본권, 입법부의 독립, 정부 내 견제와 균형, 노동조합의 독립성까지 강조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공중앙 정치국의 시녀에 불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양원제의 입법기구로 재편하는 파격적인 개혁안도 제출했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다는 문혁의 극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민주의 가치를 역설했던 자생적 민주주의자였다.
<1980년 2월, 산시(山西)성 한 농촌 마을에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사진/Wang Yue>
이때쯤 중공 중앙의 학술지에 민주 관련 논문들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최고의 가치로 선양했던 레닌의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는 논문도 있었다. 가령 1980년 10월 <<철학연구>>에 실린 논문 “민주는 수단이며 목적이다”에서 후즈차오(卢之超, 1933- )는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를 권력 집중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파격적인 논변을 개진했다.
만주족 출신의 탁월한 헌법학자 위하오청(于浩成, 1925-2015)은 문혁 시절 친청 감옥에 수감되어 3년 넘게 독방에서 혹사당했던 반골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1978년에야 사면·복권되었고, 이후 군중출판사의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전제적 통치와 중국공산당의 반민주성에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20년 훨씬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적 장치에 관해 논할 수 있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독립 언론의 창간을 요구했다. 그는 주요 언론이 모두 당에 장악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점이 종식되지 않고선 자유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그는 1989년 톈안먼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당적을 박탈당했다.
이들 외에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서 투쟁을 이어갔던 난징대학 교수 출신의 궈뤄지(郭羅基, 1932- )와 언론인이자 철학자 왕뤄쉐이(王若水, 1926-2002) 역시 1980년 이래 맹활약을 펼쳐지는데, 이 두 사람의 빛나는 투쟁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다루기로 한다.
1980년 짧지만 강렬했던 사상의 해빙기에 민주, 언론 독립, 자유와 권리, 삼권분립, 입헌주의를 주장했던 중공중앙의 이론가들은 이후 10년의 세월을 거쳐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는 바로 그들의 육성을 억누르고 굴러가는 반민주적 일당독재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2022년 4월 6일 수요일
58년 記者’ 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송의달이 만난 사람]
‘제66회 신문의 날 ‘특별인터뷰...김대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 5월 하순 쓴 光州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 회한 남아”
김대중(金大中) 칼럼니스트는 한국 언론계의 ‘살아있는 전설(傳說·legend)’이다. 3주 단위로 그의 칼럼이 실릴 때마다, 그는 한국 최고령·최장수 칼럼니스트 기록을 경신(更新)하고 있다. 1965년 6월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55년간 조선일보 한 곳에서만 일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2022년 3월3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칼럼을 쓰기 위해 여러 부류 사람들과의 만남, 생활 주변,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듣고, 메모한다"며 "인터넷 댓글 등에서 표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2020년 3월31일 고문(顧問)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조선일보에 <김대중 칼럼>을 계속 쓰고 있다. 격주隔週)이던 간격이 한 주 늘었을 뿐이다. 1939년생으로 올해 83세의 ‘58년차 기자(記者)’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고령(高齡)의 현역 기자들이 많은 미국에서 조차 ‘김대중’의 경륜을 능가하는 이는 없다.
◇‘칼럼 쓰는 83세 기자’...세계 언론史 기록
일례로 ‘미국 신문계의 대부(代父)’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1889~1971)은 82세에, 뉴욕타임스(NYT) 편집인·부사장을 지낸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1909~1995)은 80세에 퇴장했다. 그러나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글은 지금도 당당한 직필(直筆)의 맛과 굵은 선(線), 독창적인 관점(觀點)으로 특유의 매력(魅力)을 발산하고 있다.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월터 리프먼과 그가 1920년에 쓴 . 이 책에서 그는 “신문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읽는 유일한 책이다. 변호사를 기르는 법학 전문대학원처럼, 언론인들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즘 스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Kyobo Bookstore
1960년 2월15일자